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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도둑이 아이템 다 훔침-137화 (137/152)
  • 공허의 기억(5)

    검을 마주칠 때마다 주변을 산산히 조각내는 폭풍이 몰아쳤다.

    콰과과!

    절벽이 깎여 나가고, 근처의 나무가 이쑤시개처럼 부러져 나갔다. 도망치던 천족들이 그 충격파에 휘말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나와 검을 맞댈 수 있다니, 역시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구나. 】

    초월자급의 전투란 그런 것이었다. 한 번의 휘두름이 태풍을 불러오고, 한 번의 찌르기가 대지를 울리는 압도적인 전투.

    “초월자들이 생각하는 평범의 기준을 모르겠군.”

    끊임 없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진영에게 숨이 찬 기색은 전혀 없었다. 천족들에게서 훔쳐낸 능력치가 전투의 바탕이 된 상태. 아스리엘과 맞부딫히는 검날도 가볍기 그지 없었다.

    【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벌레 같은 존재들, 멸망의 탑의 시련을 자신들이 살아남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아둔한 생물들. 그게 평범한 플레이어 아닌가? 】

    아스리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콰앙!

    거대한 마력의 폭발이 진영을 밀어냈다. 이내 아스리엘의 마력이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백사자의 모습을 한 마력이 진영을 덮치듯이 입을 벌렸다.

    진영은 그 입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며 말했다.

    “모든 초월자들이 그렇게 말하더군. 아스리엘 네 녀석도 다른 놈들과 다를 게 없단 뜻 아니겠어?”

    푸른 마력이 강한 불꽃과 함께 진영의 검 끝으로 모여들었다.

    기이잉!

    마력에 퍼렇게 의해 달아오른 진영의 단검 ‘룰 브레이커’가 울음을 토해냈다. 창세급 아이템, 그 중에서도 룰 브레이커가 가진 효과는 강력했다.

    아스리엘에게 둘러진 가호와 각종 긍정적인 효과를 무력화 시키는 압도적인 능력. 그는 아직까지도 진영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아공간에서 자신의 무구를 꺼내오지 않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그 빈틈을 철저하게 파고든다.’

    룰 브레이커가 휘둘러지기 직전, 진영의 왼손이 아스리엘을 향해 뻗어졌다.

    확률은 진영의 편이었다.

    푸른빛이 연거푸 발생하며 아스리엘의 능력치가 진영에게로 흘러 들어왔다.

    [ 대상 초월신 아스리엘의 능력치를 훔치셨습니다. ]

    [ 특성 : 탐욕의 효과로 훔친 능력치가 굉장히 좋아집니다. ]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종합 능력치가 종말(終末)에 도달하셨습니다. ]

    진영의 마력이 가득 실린 단검과 아스리엘의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콰아아아아아!

    형상화 되었던 아스리엘의 백사자가 유리처럼 깨부서졌다.

    【 ?! 】

    파창!

    아스리엘의 검이 수 십 조각으로 부서지며, 진영의 단검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아스리엘은 약해졌고, 진영은 더욱 강해졌다. 그 갑작스런 격차를 초월신이라한들 막아낼 리가 없었다.

    푸슉!

    단검이 아스리엘의 심장 부근을 파고 들었다.

    종말급 능력치를 가진 진영.

    그 어떠한 버프조차 삭제해 버리는 룰 브레이커가 만들어낸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 크헉! 】

    아스리엘의 하얀 제복 위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몇 천족들이 눈이 커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아, 아스리엘님이 당하다니.”

    “우리가 참견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잠깐만 조심···.”

    마지막 천족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대천사장의 철퇴가 그의 머리를 깨부쉈기 때문이다.

    “고작 인간 하나에게 공포심을 느끼고 도망칠 줄이야. 죽음 정도면 응당한 처벌이 되겠지. 다음은 네 놈인가?”

    “큭, 대천사장님! 오해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끼어들만한 전투가 아닌 것 또한 맞았다. 어줍잖은 참견은 아스리엘에게 방해가 될 뿐이었다. 이미 신전을 제외한 근방은 황무지나 다름 없게 변해 있었다.

    【 크윽, 네 녀석은 정말로 이 세계의 일부가 아닌 것 같군. 】

    날개를 움직여 순식간에 뒤로 이동한 아스리엘이 입가에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진영은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상태로 대답했다. 조그마한 틈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말했을텐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영이 바닥을 박차고 다시 한 번 아스리엘에게로 달려 들었다.

    * * *

    “정말 태고의 조각이잖아···.”

    진영과 연결된 주머니를 통해서 태고의 조각을 받아든 유리엘의 눈이 흔들렸다.

    스스로가 부탁했으면서도, 이렇게 빨리 성공할 줄은 몰랐다.

    ‘아스리엘의 신전에서 이렇게 간단히 아이템을 가져올 줄이야. 여태껏 고생하고 있었던 우리가 바보 같아질 정도야.’

    유리엘은 부리나케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 놓여진 거대한 석판 위로 가져온 태고의 조각을 끼워넣자, 녹색 빛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풀렸어. 풀어낼 수 없을 것 같던 공허 이론의 부족한 마지막 부분이 메워졌어.’

    기존에 공허 마법이 가지고 있던 불완전함조차 이걸로 완벽히 해결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벨카론에게 이 마법의 술식을 전하는 것 뿐이었다.

    유례 없이 강대한 마력을 소모하기에 그가 아니라면 사용하기조차 힘들었다.

    ‘잠깐만, 그 전에···.’

    유리엘의 손 위로 푸른 테두리의 사각형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살아 있는건가?’

    아이템은 확실히 전해 받았다. 그러나 이진영이라는 미래에서 왔다던 플레이어는 어떻게 되었는가? 유리엘은 순식간에 공간을 비틀어 아스리엘의 신전 근처를 엿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위잉!

    공허 마법이라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덕인지, 어렵지 않게 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어?’

    볼 수는 있지만, 연결은 되어 있지 않은 특수 공간을 통해 진영의 모습을 보던 유리엘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이진영이 아스리엘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의 신전 방문과 진영의 잠입이 동시에 이뤄진 것이었다. 아이템은 어떻게든 보내준 모양이지만, 저래선 가망이 없었다.

    ‘아니, 아직 몰라.’

    주먹을 꽉 쥔 유리엘은 벨카론의 집무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완성된 공허 마법이라면 충분히 이진영을 꺼내 올 수 있었다.

    “벨카론!”

    폭룡왕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성내에 울려 퍼졌다. 그 때 누군가가 유리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리엘, 무슨 일인데 그러는거지?”

    벨카론이었다.

    “공허 마법이 완성 됐어.”

    “······!”

    전황을 뒤집을 만큼 좋은 소식이었지만, 유리엘은 무언가 석연치 않아 보였다.

    “이진영이라는 플레이어. 그가 공허 마법의 핵심적인 열쇠를 아스리엘의 신전에서 훔쳐줬어. 문제는 그가 아직 신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거야.”

    유리엘이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마력이 산개하며 각각 특수한 도형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허 마법의 최종 술식이었다.

    “이걸 사용해서 그를 여기로 불러와줘.”

    이 공허 마법이라면 아스리엘의 격을 뚫고, 충분히 동작할 것이었다.

    그러나 벨카론의 표정이 묘했다.

    “지금 급하다니까?”

    “······. 유리엘, 지금 네 옆에 있는 그 영상은 뭐지?”

    “여기 보이는 사람이 이진영인데, 아스리엘하고 마주쳤어. 그가 죽기 전에 빨리···.”

    그런데 무심코 영상을 본 유리엘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진영이 아스리엘의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었으니까.

    무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아스리엘이 붉은 피 쏟아내는 광경은 생소할 뿐 아니라 경이롭기까지했다.

    “······. 전력을 총동원해야겠군.”

    유리엘의 술식을 모두 흡수한 벨카론이 중얼거렸다.

    “유리엘,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아스리엘을 죽일 기회가 찾아 온 것 같으니.”

    * * *

    아스리엘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전투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진영은 강했다. 아니, 강하다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탑의 시스템 너머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검을 마주할수록 아스리엘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 ······. 이런 플레이어가 대체 어디에 있다 이제서야···. 】

    이 세계는 멸망까지 단 한 발자국 남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든 존재가 폭룡왕에게 기대고 있는 지금. 이 플레이어는 왜 지금 나타나 자신을 막아서는가.

    그런 의문을 품은 아스리엘을 향해 진영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카앙!

    두 번째로 꺼내든 초월급 검이 허무하게 부서져 내렸다. 급하게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들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진영의 살기가 깃든 마력이 뱀처럼 아스리엘의 오른팔을 베었다.

    촤르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새하얀 종잇장이 수 백 갈래로 날아들어 순식간에 아스리엘의 팔과 심장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 알 것도 같다. 그러나 네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멸망의 탑의 것이 분명히 맞는데···. 】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보아 왔다. 아스리엘은 끝까지 살아남았고 정점에 올랐다. 그가 보유한 초월력 또한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눈 앞의 플레이어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 수치스럽도다. 】

    벨카론과의 전투를 위해 아껴두고 있던 초월력이었다.

    고작 플레이어 따위에게 낭비하려고 준비해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쓸 수 밖에 없었다. 쓰지 않으면 도저히 눈 앞의 이진영이라는 플레이어를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카아앙!

    【 크으윽! 】

    아스리엘이 쥔 검이 또다시 부러졌다. 그의 주변으로 수 만 개의 종잇장들이 날아들었다. 형상화된 초월력들은 하얀 비둘기처럼 보였다.

    부러진 검이 단단하게 붙고, 전에 없는 마력이 다시금 아스리엘의 주변을 채웠다.

    콰앙!

    거대한 두 힘이 격돌하자, 다시금 대지가 진동하고 구름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리 아스리엘의 얼굴은 평온하지 못했다.

    【 설마······. 】

    그의 생각이 하나의 가능성에 도달했다.

    이진영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그럼에도 친숙한 기운 앞에서 아스리엘은 알아챈 것만 같았다.

    【 이 세계가 통째로 거짓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

    스스로를 초월신으로 부를만큼의 자신감과 힘을 가졌기에, 역설적으로 그는 알아채고 말았다. 호수 위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 정도의 증거로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세계는 가짜였다.

    모든 것은 지나간 과거에 불과하며.

    자신 또한 공허가 만들어낸 일부에 불과하단 사실을.

    【 하, 재밌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

    그때였다.

    - 크오오!

    - 콰아아아!

    어디선가 나타난 드래곤들이 하늘 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 ······? 】

    수 천을 넘어 수 만에 달하는 압도적인 숫자의 드래곤들. 그들이 아스리엘의 신전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만한 병력이 이동해 왔다면 아스리엘이 몰랐을 리가 없다. 답은 하나였다.

    【 공허 마법을 기어코 완성했나보군. 】

    아스리엘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채 진영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폭룡왕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 큰 의미는 없도다. 이 세계는 미래와 이어져 있지 않으니 중요한 것을 가리는 일이 더욱 중요할 뿐이지. 내가 할 일은 하나 밖에 없게 되겠어. 】

    구구구구!

    그의 주변으로 막대한 양의 초월력이 방출되기 시작했다. 아스리엘은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 뒤는 무의미했으므로.

    【 널 소멸 시키는 것말고는 내가 할 일은 없다. 진짜 내게 있어 장애물이 될만한 널 제거하는 것말고 중요한 게 뭐가 있겠는가. 】

    쩌저적.

    강대한 초월력의 영향으로 아스리엘의 붉은 왕관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스리엘 주변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공간은 분열하고 있었다.

    아스리엘은 모든 초월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 한 번을 버텨내야한다.’

    버틴다면 이기는 것이고 버티지 못한다면 끝이다. 여기서 아스리엘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공허를 빠져나가서도 가망이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증명해야했다.

    이윽고 두 개의 검이 날을 마주했다.

    그곳에는 소리도 없었으며 빛도 없었다. 아득히 정제된 두 마력과 힘이 순수하게 힘을 겨루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집중을 푸는 순간 균형이 깨지며 근처의 공간이 한 순간에 날아갈만큼 강력한 에너지였다.

    ‘크윽.’

    진영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스리엘이라고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온 몸이 바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진영은 검을 밀어붙였다.

    아스리엘 또한 초월체에 가해지는 충격을 모두 견디며 검을 밀어냈다.

    그때였다.

    파아앗!

    창조의 걸쇠가 느닷없이 거센 빛을 뿜기 시작했다.

    ‘왜 이 타이밍에?’

    줄곧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던 창조의 걸쇠였다. 강해진 빛줄기는 허공에 검은 공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어떻게 공허의 힘을? 】

    짧은 순간이지만 아스리엘의 집중력을 깨기에는 충분했다.

    “으아아!”

    진영은 모든 힘을 다해 상대의 검을 밀어냈다. 모든 마력이 아스리엘의 초월체를 향해 쏟아졌다.

    【 어림 없다! 내가 죽더라도 네 놈만은 기필코 죽이겠다! 】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가 가짜일지라도 이진영은 진짜라는 걸. 이진영은 여기서 막아야했다.

    그는 다른 한가지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모든 초월자들이 이제는 무감해진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멸망의 탑은 공략 될 수 있다. 실제로 공략 될 뻔하기도 했다.

    이 남자가 멸망의 탑을 공략하기 시작하면, 정말로 공략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아스리엘에게 모든 힘을 쏟아 붓도록 만들었다.

    고오오오!

    숨막히는 힘의 대결이 펼쳐지는 바로 그때.

    쉬익!

    검은 구멍 속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아스리엘은 보지 못했지만 진영은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승리를 확신했다.

    “!”

    투쾅!

    붉은 눈빛을 뿜어내는 사내의 주먹이 아스리엘의 얼굴을 강타했다.

    “파트너, 혼자서 재밌는 일을 벌이고 있었군.”

    주오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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