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기억(4)
거대한 절벽 앞에 선 진영이 두 손을 마주쳤다.
“시작 해볼까.”
차원 마법사 아리엘 요구대로 ‘태고의 조각’을 찾기 위해 아스리엘의 신전 앞으로 왔다.
‘찾기만하면 나도 공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건가.’
진영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 창조자의 걸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어느새 신전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퀘스트처럼 계속해서 가리키는 방향이 달라진다.
‘아스리엘의 신전이라···.’
절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찾아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멸망의 탑의 붕괴가 절정에 이르면 탑과 세계의 일체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아스리엘의 신전도 지상으로 내려온 상태였다.
‘아리엘 덕분에 위치는 쉽게 찾았지만, 무턱대고 쳐들어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야.’
근처 허공을 배회하는 천족의 수가 상당했다.
여섯개의 새하얀 날개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들은 천계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다.
‘녀석들은 하나 하나가 초월자에 필적한다. 되도록이면 전면전은 피하는 게 좋겠지.’
진영이 절대 은신으로 몸을 숨긴채 절벽을 오르는 이유였다.
터억.
높이 솟은 절벽의 정상에 다다른 진영이 주변을 살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신전의 위용은 여지껏 봐온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대천사 무룸과 아솜이 입구에 서서 미동도 않고 신전을 지키고 있었다.
‘가장 안좋은 시나리오는 아스리엘에게 발각 되는 건데....’
아스리엘은 멸망의 탑에서 가장 강하다고 여겨지는 초월자였다. 모든 초월자들의 정점이자, 멸망의 탑의 진정한 주인으로 불리는 존재. 그에게 들키게 되면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었다.
‘절대 은신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
은신은 미래 예지나, 절대 육감 계열의 스킬에 연약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진영의 존재를 알아차린 상태에서만 의미가 있다.
【 ······. 】
진영이 당당하게 신전 입구로 들어가는데도 아솜과 무룸은 정면에서 시선을 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들의 근무태도는 성실했지만, 진영의 절대 은신을 잡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처음 오는 곳이라 그런지 기대가 되네.’
신전 내부도 외부와 다를 바 없이 화려했다. 붉은 색 바탕에 금빛으로 수놓아진 융단과 근처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미술품들. 그 주위를 천족들이 엄숙하게 걸어다니고 있었다.
진영은 유유자적하게 천족들을 지나쳐 굳게 닫힌 검은색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유리엘이 알려준 정보는 정확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어떻게 하냐는 건데.’
진영은 관리자의 열쇠를 꺼내들었다. 이 열쇠를 사용하면 열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만큼 사기적인 아이템이었기에, 서로를 견제하던 초월자들이 궁여지책으로 관리자의 무덤에 있던 묘지기에게 숨겨 두었던 것이고.
‘하지만 문을 열면 걸린다.’
다행인 점은 문을 감시하고 있는 천족이 없다는 점.
‘들키더라도 빠르게 처리하는 게 최선인가.’
진영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유리엘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이건 공간이 연결 된 주머니에요. 여기에 태고의 조각을 넣으면 제가 받을 수 있을 거에요.
- 그럼 나는 어떻게 나오지?
- ······. 그러게요. 이 주머니는 물건 전용이라 능력껏 빠져 나오셔야 해요.
짧은 회상을 끝낸 진영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안은 창고인만큼 챙길만한 물건도 많을 거다.
‘염태준이 여기에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가 있었다면 지금부터 들어갈 창고에 있는 아이템 중 골라 가져 왔을 수 있으리라.
아니면 김지훈도 괜찮다. 아예 창고를 통째로 옮길 수도 있으니까.
김영훈이 있었다면 버프에 힘 입어 어렵지 않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주오령이 있었다면···. 무조건 부수고 들어갔겠지.’
막상 있다가 다들 없으니 왠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졌다.
‘다들 살아 있으면 좋겠네.’
보물을 소지하고 있으니, 최소한 죽지는 않았으리라.
허탈한 미소와 함께 진영이 관리자의 열쇠를 사용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편에서 천족들이 일제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 초월신 아스리엘님께서 신전에 방문하셨습니다! 】
【 초월신 아스리엘님께서 신전에 방문하셨습니다! 】
* * *
붉은 왕관.
아스리엘이 멸망의 탑의 주인이라는 징표이자, 초월자들의 정점이라는 증거였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천족들에게 말했다.
【 창고의 문을 열도록 하여라. 】
아득한 격이 파도처럼 밀려 나온다. 그가 내뱉는 위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천족이 없었다. 그를 가장 근처에서 보좌하던 대천사장만이 허공에서 푸른 마력으로 이뤄진 열쇠를 만들어냈다.
‘······. 이 시점에 아스리엘이 직접 올 줄이야.’
진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스리엘과 직접 만나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그러나, 창고의 문이 자연스럽게 열린 지금은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지이잉.
대천사장이 꽃아 넣은 마력의 열쇠가 부서지며 창고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아스리엘이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 ······. 흐음, 최근에 격의 상승을 이룬 자가 있느냐? 】
그 말에 천족들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소인이 최근 초월의 좌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스리엘의 얼굴은 탐탁치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겨우 초월의 좌에 오른 자와 비교할만한 격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강한 상위의 존재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력과 달리 격은 읽어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아스리엘은 상념을 떨쳐내고서 천족들에게 물었다.
【 그보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그대들도 알고 있는가? 】
그의 말에 수 십의 천족들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손을 든 자는 하나였다.
“폭룡왕 벨카론과의 전쟁 대비를 위한 것이 아닌지요.”
【 비슷하긴 하다만, 애초에 나는 폭룡왕을 내 적수로 두지 않고 있다. 진실로 위협이 되는 것은 폭룡왕의 옆에 붙은 유리엘이라는 마족이다. 】
“소인의 짧은 지식으로 감히 묻건데, 탑의 시스템에 갇힌 플레이어에 불과한 자가 어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까?”
【 좋은 질문이다. 그 계집이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는 공허는 일찍히 탑에도 천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힘이다. 위협이 되고 말고. 】
그 말과 함께 아스리엘은 창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보좌하는 수십의 천족들이 따라 붙었다.
‘말이 많아서 좋네. 덕분에 간단하게 들어왔어.’
진영은 진작에 창고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스리엘이 ‘격’으로 무언가 달라진 것을 확인했을 때는 잠시 긴장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스리엘도 공허의 힘을 두려워해서 창고에 왔단건데···.’
창고 안은 끝이 보이지 않는 선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귀해 보이는 각종 히든피스와 아이템들이 즐비했다. 아스리엘의 면전만 아니었다면 보이는대로 아이템 주머니에 넣고 봤을 것이다.
‘······. 역시 찾기 힘들다.’
안으로 들어 오는 것보다 이 수 많은 아이템들 속에서 태고의 조각을 찾아내는 게 어려웠다.
‘잠깐, 아니지. 어쩌면 내가 찾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는데.’
진영이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아스리엘이 허공 위로 손을 뻗었다.
파아아-.
일대에 녹색 빛이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이윽고 건너편에서 무언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 물론 공허의 힘을 직접 대적할 필요는 없지. 그 원흉이 되는 것만 제거하면 충분하니까. 】
태고의 조각.
공허 마법이 완성되는 데 필요한 힘의 원천이자, 궁극의 재료.
유리엘이 공허 마법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이 전쟁이 벨카론의 패배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스리엘은 공허 마법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이것만 없다면 공허 마법이 완성되는 일은 없겠지. 】
초록빛의 태고의 조각이 아스리엘의 손에 쥐어졌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이끼가 낀 도자기 파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창조의 힘은 단편적이나마 이치를 부수는데 사용할 수 있다.
【 하나의 기적에 기대는 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는 법이니. 】
꽈악.
태고의 조각을 부수기 위해 아스리엘은 손아귀에 마력과 강한 힘을 주었다.
【 ? 】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없었다.
천천히 손을 펴보는 아스리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손바닥에 마땅히 있어야할 파편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 태고의 파편을 전송했습니다. ]
아스리엘에게서 태고의 파편을 훔침과 동시에 진영은 유리엘에게로 아이템을 전송했다.
‘이제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이곳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닌, 공허 속의 기억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아스리엘이 가진 격은 가짜가 아니었다.
‘아이템 파밍도 성공적이고.’
주변에 있던 아이템도 닥치는대로 아이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최소한 신화급은 넘는 아이템들로 구성되어 있을 거다. 물론 아이템이 공허를 빠져나가서도 그대로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이게 여기에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파밍한 아이템 중 하나는 회귀전 아스리엘이 사용하던 무기였다. 현 시점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듯 하지만.
[ 초월급 : 절멸의 검 ]
‘가지고 갈수만 있다면···.’
멸망의 탑 공략의 판도 자체를 뒤집을 수도 있었다.
스틸을 사용한 순간부터 진영은 최선을 다해 신전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높은 격 앞에서 절대 은신을 사용해서 그런지, 마력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근데 창조자의 걸쇠는 어딜 가리키는거야?’
나침반처럼 새하얀 빛을 쏘아내던 창조자의 걸쇠가 엄한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라는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빛의 방향에 의아해 할 때 즈음.
콰아앙!
새하얀 빛이 사방을 메웠다.
그 충격에 진영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크윽!’
몸 안 쪽을 강타하는 충격이었다. 적을 특정하지 않고 뿜어낸 힘이었을텐데도, 이 정도였다.
쿠웅!
진영이 가까스로 절벽 아래에 착지했다.
쿠웅!
그와 동시에 진영이 앞에도 붉은 왕관을 쓴 아스리엘이 떨어져 내렸다.
【 아, 아스리엘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
갑작스런 아스리엘의 행동에 놀란 대천사장과 천족들이 떼거지로 날아왔다. 어쩌다보니 진영을 포위하듯 둘러싼 형태가 되었다.
‘······.’
의미가 없어진 절대 은신은 진작에 해제했다. 모든 천족들의 시선이 진영에게로 모인 상황.
진영은 조용히 인벤토리에서 검 하나를 꺼내들었다. 창고에서 훔쳐 온 초월급 '절멸의 검'이었다. 에고를 가진 검이 무언가 중얼거리는 듯도 했으나, 크게 의미를 두진 않았다.
【 흐음···. 】
아스리엘 또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아스리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넌 이 세계의 플레이어가 아니군. 그 눈빛과 격 그리고 기이한 능력까지 도저히 이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야. 】
과연 녀석의 통찰력은 대단했다. 그저 마주한 것만으로 진영에게서 읽어내는 정보의 가짓 수가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고해서 불리한 건 아니지.'
반대로 진영에게는 회귀를 통해 얻은 지식이 있었다.
【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 나온건지 모르겠군. 내가 멸망의 탑을 알기도 이전의 일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겠으나, 그렇다기엔 눈빛에 힘이 가득하구나. 】
“그 이상은 궁금해 하지 않는 게 나을텐데.”
【 하, 상당히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
아스리엘의 소매 안쪽에서 붉은 칼날의 검 하나가 튀어나왔다. 살기가 넘실 거리는 그의 검날이 진영을 향했다.
【 미래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
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스리엘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을 도출해 낼 것이다. 그 답을 기다리면 충분했다.
그와 별개로 자신이 할 일은 명확했다.
“스틸.”
[ 대상의 능력치를 흡수합니다. ]
[ 흡수한 능력치가 상당히 좋아집니다. ]
순식간에 주변 천족들이 가진 능력치가 진영에게로 흘러 들어 왔다.
[ 초월의 좌를 뛰어넘습니다. ]
[ 대상은 지정 불가 상태입니다. ]
초월신 아스리엘은 멸망의 탑의 가호를 받고 있다. 이것을 깨내기란 꽤 복잡하다.
‘진짜 아스리엘을 만나기 전에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다.’
물론 한 번 뿐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동시에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네 창고에 있던 무기는 잘 쓰도록하마.”
본래대로라면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었지만.
창고에서 훔쳐 온 아이템인 절멸의 검을 얻고 나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져 있었다.
훔쳤기 때문에, 검의 효과 또한 강력해져 있었다.
슷!
진영은 신화급 단검 ‘던 브레이커’에서 이름 없는 신의 에고를 뽑아냈다. 불멸의 정수로 강화된 에고는 어떠한 등급의 아이템도 한 단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드디어 나도 얻어 보게 되었군.'
검은 빛이 절멸의 검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 초월급 아이템 ‘절멸의 검’의 등급이 1단계 상승합니다. ]
[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무기의 종류가 변화합니다. ]
[ 창세급 아이템 ‘룰 브레이커’를 획득하셨습니다. ]
[ 무기의 효과로 상대의 가호를 제거합니다. ]
창세급.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에너지를 담은 아이템.
그 중에서도 초월신 아스리엘 본인이 애용하던 초월급 아이템을 훔쳐 만들어낸 진영만의 무기였다.
“······!”
“······?”
무기를 드는 것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진영을 구경하던 천족들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탑의 정상에서는 최강자였다.
그렇기에 그 동안 쌓아왔던 경험이 그들에게 끊임 없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눈 앞의 플레이어는 상대해선 안된다고.
마주쳐서는 안된다고.
지금 당장 도망쳐야한다고.
“도, 도망가!”
“흐, 흩어져야 해!”
“비, 비켜!”
패닉에 빠진 천족들은 일제히 날개를 움직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스리엘 앞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뿌득.
자신의 부하들이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자니, 아스리엘의 이가 갈렸다. 표정 너머로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 재밌구나. 참으로 재밌어. 】
그에 반해 진영의 표정은 그 어느때보다도 차분했다.
“덤벼라 아스리엘.”
분노를 표출하기 너무 일렀다.
진영은 아스리엘의 능력치를 훔치기도 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