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기억(2)
쿠웅!
뛰어 오를 때보다는 사뿐한 착지였다.
“아! 오든님! 오셨습니까!”
“오든님! 어서 오십쇼!”
“옆에 있는 그 분은 누굽니까?”
그런 플레이어들에게 오든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쟁터 한가운데서 주운 보물이라고 할 수 있지.”
임시로 건설 된 막사 수 십 채가 보였다. 이곳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의 수는 많지 않아 보였다. 진영의 반응을 확인한 오든이 어깨를 으쓱였다.
“플레이어들 최후의 전초 기지 치고는 형편 없지? 그럴만도 해. 폭룡왕이 아니었으면 인류는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오든은 막사 중 한 곳으로 진영을 이끌었다. 그 곳에는 몇 가지 다과와 지도가 놓여 있었다. 오든은 의자에 걸터 앉으며, 진영에게 손짓했다.
“자네도 거기 어디 앉으면 된다네. 아마, 어딘가 숨겨진 공간에서 상당한 시련을 겪고 나온 모양인데 인류가 이 모양 이꼴이라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보다, 폭룡왕이 인류를 돕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영은 과거 폭룡왕이 벌였던 전쟁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편에 섰었다니.
“훗, 놀랄 일이지? 초월자가 플레이어의 편에서 전쟁을 주도하다니. 멸망의 탑이란 게 어찌보면 대단해. 평생을 서로 싸우기만하던 마족과 인간 거기에 더해 드래곤들을 하나로 묶은 거니까.”
즉, 이 세계는 본래 마족과 인간이 살고 있던 세계였단 의미였다.
“폭룡왕이 왜 우리를 돕는거죠?”
“전적으로 그의 연인 아리엘 때문이지. 만약 도중에 그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폭룡왕은 미련 없이 플레이어들을 버리겠지.”
오든은 무언가 설명이 부족했다는 걸 느끼고, 덧붙여 설명했다.
“아, 아리엘은 마족이야. 플레이어이자 벨카론의 연인이자 차원마법의 대가(大家)지.”
여기까지만 들으면 상황은 순조로웠다. 적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진영은 이 전쟁이,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가 정말로 과거이냐는건데.’
시간축에 관한 문제는 복잡하다. 공허를 통해 과거로 온 것인가, 아니면 이곳은 그저 과거를 비춘 거울의 상일 뿐인가.
“그보다, 나는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말이야.”
오든은 눈을 반짝이며 진영을 보았다. 그의 등에 매여 있는 타이탄의 창은 탑이 품은 다섯개의 보물 중 하나였다.
‘오든이 과거 세계의 영웅이란건 틀림 없다.’
이곳이 실제 과거이든 기억의 파편에 불과하든 진영은 이곳을 빠져나가야했다. 창조자의 걸쇄에서 실처럼 이어진 희미한 빛은 오든이 가지고 있는 타이탄의 창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놀라지 말고 들으시죠.”
물론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미래에서 폭룡왕을 쓰러뜨리고, 공허의 틈새를 이용해 떨어진 곳이 이곳이었다는 정도. 오든의 눈이 커졌다.
“자네, 소설가의 자질이 엿보이는군. 아무리 현실이 부정하고 싶다고 한들 회피해서는 안되네. 직접 마주해야지.”
“······.”
“농담일세 농담.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 있을 수 있지. 있을 수 있고 말고.”
자신의 까슬한 수염을 매만지며 오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바로 멸망의 탑이었다.
“그런거였군. 자네의 의아한 표정도 이해가 가. 만약 자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나보다는 아리엘을 직접 찾아가는 게 낫지 않겠나?”
아리엘.
폭룡왕이 사랑했던 마족이자,
차원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마법사.
“공허 마법을 만들어 낸 사람에게 가보라는 거군요.”
“그래, 헌데 문제가 하나 있네. 자네는 공허에 의해 끌려 들어왔다고 했지만, 사실 공허 마법은 아직 완성된 마법이 아니라네. 그녀가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말해 기약 없는 기다림이지. 흐음···.”
오든의 눈빛이 깊어졌다. 진영의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속으로는 생각이 많아졌을 것이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의도적으로 숨기려한 것 같았지만 역시 이 세계의 싸움은 실패로 돌아가는 거군. 아, 자네 때문이 아닐세. 난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진영은 폭룡왕과의 전투를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오든은 숨겨진 정보를 읽어내는 데에 능했다.
“폭룡왕과 플레이어의 연결 고리는 겨우 그녀 하나야. 그녀가 죽거나 폭룡왕이 변심한다면 그걸로 세계는 끝이지. 예상하고 있던 바였어. 아니, 확신했었지.”
잠시 고민하는 듯 침음을 흘리던 오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하지.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면 나도 아리엘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겠네. 폭룡왕을 쓰러뜨렸다는 자네의 말이 허풍인지 아닌지도 볼 겸 말이야.”
오든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까악! 까악!
오든을 따라 도착한 곳은 전초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이었다. 진영과 오든이 도착하자 몇 마리의 까마귀가 날아 올랐다.
“저 까마귀들이 보초병이지. 놈들도 우리가 왔다는 걸 알았을거야.”
“숨어서 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숨어서 간다고 해결 될 문제였으면, 자네를 데려올 일도 없었겠지.”
그는 느긋하게 갑옷을 정비하고, 장갑을 꼈다. 등에 맸던 타이탄의 창도 손에 들었다.
“······. 정확히 어떤 일을 도와주면 되는 겁니까?”
관리자인 유자벨을 가볍게 제압할만큼 오든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그러나 끄트머리만을 남기고 탑의 대부분이 무너진 지금. 그의 실력만큼이나 강한 마수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구출 작전이지. 그것도 한참이나 지난.”
멸망의 탑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나머지 플레이어들을 앞으로 보내는 일 따위. 진영 또한 회귀 전 자신들을 희생했던 플레이어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건 죽음의 사도일세. 우리가 할 일은 숲의 중심부에 있는 집 한 채에 생존자가 남아 있나 확인하는 것 뿐. 그게 다네. 그러고나면 아리엘의 위치를 알려주지.”
“알겠습니다.”
진영도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죽음의 사도.
멸망의 탑 87층에서 마주쳤던 녀석은 끔찍했다. 마력과 정신을 불태우는 검은불이나, 죽은 자들을 끊임 없이 살려내는 사술은 보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정도.
녀석은 일부러 초월의 좌에 오르지 않은채, 플레이어들을 괴롭히기 위해 탑에 남아 있다고 스스로 말했다. 87층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속박해 평생을 고통 주기 위해서.
“너무 긴장하지 말게. 죽음의 사도를 쓰러뜨려야한다고는 한마디도 안했으니까. 그 놈의 끄나풀이나 몇 마리 죽이면서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걸세.”
“긴장 안했습니다만.”
“아, 미안하네. 스스로한테 하는 소리였는데 너무 크게 말했군. ”
“······.”
한번 실패했던 지역이라 그런가, 주변을 확인하는 오든의 눈빛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끄아아아아!”
그때였다. 수 십 명의 사람을 섞어 놓은 듯한 기괴한 생명체가 숲에서 뛰어나왔다.
“이 정도는 내가 맡지.”
오든이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타이탄의 창을 녀석의 정중앙으로 찔러 넣었다.
콰아아!
그의 마력이 내부에서 드릴처럼 회전하며 마수의 안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뒤에서 나오는 놈을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서걱-!
[ 스킬 절대 일격이 발동 됩니다. ]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눈 앞의 마수가 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군더더기 없는 가벼운 동작이었다.
“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이곳에 오고나서 처음으로 오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마수들은 끊임 없이 쏟아졌다.
87층급의 잔몹이었지만 진영의 적수는 아니었다. 오든도 순조롭게 마수들을 찔러 죽였다.
‘진짜는 죽음의 사도.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텐데.’
오든과 진영은 계속해서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백 마리 정도 되는 마수를 쓰러뜨렸을 때가 되서야 무너져가는 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 우우우···!
집 근처에는 마수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플레이어들이 최후까지 집을 거점으로 삼았거니와, 집에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직 아닙니다.”
집을 향해 뛰쳐 나가려는 오든을, 이진영이 붙잡았다. 그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안개가 집 주변으로 몰려 들고 있었다. 죽음의 사도는 진영과 오든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이곳이라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 숨어 있지 말고 나오시는 게 어떠신지요. 】
섬뜩한 미성이 숲 안을 울렸다. 창백한 얼굴의 남성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 저를 상대하러 오는데 겨우 두 명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자신감이 너무 넘치시는군요. 】
화르륵!
죽음의 사도의 손아귀에서 검은 불이 타올랐다.
꿀꺽.
죽음의 사도를 바라보는 오든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지금 편히 하셔도 됩니다.”
“!”
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진영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 스킬 안쪽에 있는 한 죽음의 사도는 저희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합니다.”
【 대체 어디로 감쪽 같이 숨으신겁니까? 이곳을 떠나는 기척은 전혀 없었는데···. 】
진영의 목소리에도 죽음의 사도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제서야 오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솔직히 지금까지 오면서 자네가 보여줬던 능력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해. 나도 나름대로 이 세계에서는 최강이라고 자부하는데 말이야. 자네는 나보다 강해. 그러니 여기서 도망치게.”
“네? 그게 무슨······.”
“어차피 나는 여기까지 오면 됐다네. 자네가 없었으면 여기까지도 간신히 왔을거야. 이걸 받게.”
오든은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진영에게 건네었다. 아리엘의 위치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그는 타이탄의 창을 단단히 거머 쥐고서 은폐 구역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런···.’
【 오, 드디어 나타나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든, 당신의 영혼을 빼앗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
죽음의 사도가 환영의 의미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에 반해 오든의 손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든은 처음부터 사도에게 복수를 할 생각으로 이곳에 찾아왔던 것이다. 자신의 동료를 죽인 사도를 처치하기 위해.
“잔말 말고 덤벼라···. 오늘에야말로 네 놈의 영혼을 오늘 지옥으로 떨어뜨려줄테니.”
그의 손에 강력한 마력이 응축되고 있었다. 그가 쌓아 올렸던 모든 것들이 창날 위에 실렸다. 그럼에도 죽음의 사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었다.
【 큭, 큭···. 오든, 그런데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지?”
【 살아 있었단 말입니다. 당신이 도망친 뒤에도 줄곧 저 집 안에 강력한 결계를 걸어 놓고서 말이죠. 】
진영의 눈에도 집 주위에 쳐진 결계가 똑똑히 보였다. 대가를 지불해야 만들어낼 수 있는 형태의 결계였다.
【 시간조차 느리게 흐르는 저곳에서 말이죠. 】
오든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그의 손에 들려진 창이 마력을 받아 벌겋게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 그런데 말이죠. 그녀는 방금전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겠군요. 그 여자를 죽인 건 당신입니다. 】
“죽어라!!!”
오든은 그의 말이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창을 내질렀다. 죽음의 사도의 검은 불꽃이 중간에서 부딫히며 마력의 빛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근처의 나무가 우수수 꺾이기 시작했다.
【 이게 인간들의 비극이라는 거겠지요. 질리지가 않아요! 】
“네 놈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
오든의 창이 계속해서 죽음의 사도를 향해 내질러졌다. 죽음의 의지 앞에서 휘둘러지는 강대한 공격이 죽음의 사도의 몸 곳곳을 찢어냈다.
【 크흑, 좋아요! 분노가 제대로 느껴집니다! 이래야 상대하는 재미가 있는 거죠! 】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휘두르는 오든의 공격에는 죽음의 사도조차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그러나 오든은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어.’
저택 내부에는 여전히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오든은 진영의 실력을 완전히 잘못 가늠하고 있었다.
- 저벅.
진영이 은폐 구역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진영을 발견한 오든이 소리쳤다.
“자, 자네! 아직까지 안가고 뭐했나!”
잘못 가늠한 수준이 아니라, 진영이 가진 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당신의 능력치가 초월의 좌를 아득히 뛰어 넘습니다. ]
- 스틸
[ 대상 ‘죽음의 사도’의 능력치를 훔쳤습니다. ]
[ 훔친 능력치가 굉장히 좋아집니다. ]
진영의 발걸음을 내딛자, 그 파장이 숲 전체로 퍼져나갔다. 아득한 격의 차이 앞에서 마수들이 쓰러져나갔다.
오든은 모르고 있었다.
【 어···? 이, 이게 대체···. 다, 당신은 누, 누구십니까? 】
도망쳐야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죽음의 사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