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기억(1)
[ ——— ]
- 치지직.
아득한 어둠이 시야를 감싼다. 일순 공중으로 떠오르는 부유감이 들더니, 다시금 중력이 진영을 끌어당겼다.
떨어져 내린다.
새까만 어둠 속을 계속해서 낙하한다.
“크윽···!”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일단은 살았나.’
벨카론이 남긴 공허의 구멍이 일행을 전부 삼켰다. 마지막 순간에 다섯 개의 보물의 힘을 모아, 공허에 저항했지만 결국 먹히고 말았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기적이라고 봐야겠지.’
차원 계열의 마법 중에서도 가장 큰 파괴력을 가진 공허. 들어 본 적만 있었지, 당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본래 공허는 생물을 있는 그대로 빨아들이지 않는다.
‘철저하게 압축하고 비틀어서 삼킨다고 했던가.’
디멘션 마법을 구사하던 보스의 꿈이 공허의 완성이었단다. 그 덕에 남아 있는 짤막한 지식이었다.
“모두들!”
진영이 목청껏 소리쳐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새까만 어둠과 끝을 알 수 없는 추락이 계속 될 뿐이었다.
‘내가 멀쩡하단 건 다른 일행들도 괜찮단 이야기겠지.’
우선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하는 게 먼저였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느낌은 들지만, 바닥에 추락한다고 피해를 입을만한 신체가 아니었다. 초월 단계에 가까운 능력치였으므로.
‘공허에 빨려 들어 오기 전에 떠올랐던 알림창부터 확인해볼까.’
팅!
알림창을 켜자 무수히 많은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치지직.
[ —— ]
[ ——! ]
[ —— ]
노이즈 때문에 정보창을 확인하는게 불가능했다.
‘아직 왼손의 각성 효과가 남아 있으려나.’
진영은 왼손을 들어 정보창의 노이즈를 훔쳐냈다. 거짓말 같이 정보창이 깨끗해졌다. 이제 읽을 수 있다.
‘훔쳐낸 노이즈는 내가 가지게 되는 건가···? 아니면 왼손이 흡수하는 건가?’
일전, 왼손은 진영을 잡아먹으려는 듯 행동하기도 했다. 이계의 존재들이 가진 힘은 진영과 왼손을 이어주는데서 그쳤을 뿐 이 힘이 어디서 온 건지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
‘절대 회귀도 그렇고···.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꽤 있어.’
물론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사소한 의문에 불과했다.
탑을 공략하고, 세계를 구해낼 수 있다면 어떠한 힘이든 상관없었다.
‘우선 읽어보자.’
알림창 중에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니.
[ 공허가 일행을 집어 삼킵니다. ]
[ 두 개의 상반된 힘이 충돌합니다. ]
여기까지는 확인했던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 초월적인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
[ 멸망의 탑이 당신이 가진 초월자의 권한을 확인합니다. ]
[ 멸망의 탑이 당신에게 초월의 좌를 제공하려합니다. ]
[ 수락하시겠습니까? ]
멸망의 탑이 가진 시스템이 진영을 초월자로서 인정하려 하고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초월자.
그것은 탑의 정점이자 어쩌면 개인이 이룩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일지도 몰랐다.
‘멸망의 탑이 한 번도 공략된 적 없다면.’
그리고 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정해진 순리라면, 초월자가 되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계의 존재들처럼 탑에 숨어 살아야만했다.
‘그게 최선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실제로도 좋은 건 맞아.’
초월자의 초월력은 말 그대로 신의 능력에 가깝다. 이상을 현실로 구현하고, 자신만의 공간이자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
하지만 초월자가 되어선 탑을 공략할 수 없다. 탑의 규율에게 억압 받고, 제재 받으니까.
‘신화준도 초월자가 되진 않았지.’
녀석은 자신이 탑을 공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초월자가 된다는 것이 세계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는 의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300만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
가지고 있던 코인은 모두의 능력치를 올리는 데 사용했다. 코인은 나쁘지 않다. 언제든지 통용되는 화폐니까.
[ ‘칭호 : 폭룡왕’을 획득하셨습니다. ]
[ 앞으로 멸망의 탑을 지배하는 용들이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
폭룡왕을 쓰러뜨린 일이 불러 온 파장은 굉장했다.
[ 대다수의 초월자들이 당신에게 큰 관심을 가집니다. ]
[ 초월자 아스리엘이 이진영을 기억합니다. ]
알림창들을 쭉쭉 내리던 진영은 드디어 발견했다.
[ ‘보물 : 창조자의 걸쇄’를 통해 공허의 틈새를 탈출할 수 있습니다. ]
품 안을 뒤적여 걸쇄를 꺼내자 주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보인다.’
새하얀 빛이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어둠을 밝히기 시작했다.
* * *
아찔한 감각과 함께 진영의 시야에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흘러가고, 태양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 끝에 멸망의 탑이 있었다.
‘바깥인건가?’
그러나 뭔가가 달랐다. 멸망의 탑이 최상층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95층까지는 이미 사라져 공중에 떠 있는 것은 고작 5층 정도.
'······.'
거기에 더해 진영은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늘로 그 공간이 바뀌었다는 걸 제외하면, 낙하감은 여전했다.
‘저건···.’
떨어져 내리며 진영은 보았다.
땅을 가득히 덮은 각양각색의 마수들이 울부짖으며 진격하고 있었다.
고블린, 오크, 웨어울프, 리자드맨, 발록, 미노타우로스···.
그들이 탑에서 쏟아져 나온 마수라는 것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광경은 진영이 멸망의 탑 상층부에서 지상을 내려다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공허에 먹힌 사이에 시간이 흘러 있기라도 했단걸까?
‘아니, 뭔가가 달라.’
마수의 이빨과 플레이어들의 검이 부딫혀 피가 강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을 이루는 참혹한 종말의 광경.
아포칼립스의 도래.
그러나 무언가가 달랐다.
타오르는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생김새도, 부서진 건물의 형태도 진영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드래곤들이 어째서?’
드래곤들과 마족 그리고 인간이 힘을 합쳐 마수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죽여버려! 마수 놈들을 살려두지마!”
“끝까지 쫓아가서 도륙내!”
“드래곤분들 지금입니다!”
인간들과 마족이 최전선에서 후퇴하자, 드래곤들이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수 없이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을 용언으로 되받아치며 드래곤들의 브레스가 뿜어졌다.
- 크어어!
- 쿠오오오!
공기조차 태워버리는 강력한 불길에 장작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수들의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마수 진영에서도 고함과 괴성이 터져나왔다.
“당황하지말고 길을 비켜라!”
“게이트를 열어서 마수들을 더 불러와!”
“초월자의 명을 기다려라!”
진영은 그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
확실한 것은 이곳이 진영의 살던 세계는 아니란 것이었다. 창조자의 걸쇄에서 나온 새하얀 빛줄기는 희미하게나마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가 완전히 이상한 곳은 아니란건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점점 땅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슬슬 착지를 생각해야했다.
“하, 가소롭구나. 초월자 칼몬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히 그 종복인 내게 덤빌 줄이야!”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군. 그건 네 놈이나 나나 피차일반 아닌가? 너도 칼몬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 않나!”
“큭, 무슨 같잖은 소리를!”
한 쪽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전쟁터 속에서도 진영의 감각은 살아 있었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털과 정장을 갖춰 입은 토끼 마인이 보였다.
‘유자벨이잖아. 저 놈이 왜 저기에.’
그 유자벨과 대적하고 있는 것은 익숙한 창을 들고 있는 남성이었다.
‘저 창은···.’
까칠한 수염이 그의 호쾌한 인상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었다. 창조자의 걸쇄에서 나온 새하얀 빛은 희미하게 그 남자와 연결되어 있었다.
당연했다. 남자가 들고 있는 창은 다름아닌 주오령이 들고 있던 타이탄의 창이었으니까.
“자, 덤벼라. 유자벨! 염원하던 초월의 좌를 오르려면 나 정도는 가뿐히 쓰러뜨려야할테니!”
“고작 인간 주제에 못하는 말이 없군.”
유자벨이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남자도 창을 든 채 한달음에 유자벨의 앞으로 향했다.
남자와 유자벨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결착이 났다.
- 촤아악!
유자벨의 눈가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다.
“크아악! 네 놈!”
“유자벨, 이미 너와 나의 차이는···.”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진영이 땅에 떨어져내렸기 때문이다.
* * *
“뭐, 뭐야!”
“유자벨님 근처로 뭔가가 떨어졌다! 플레이어들의 비밀병기인가?”
“마수들이 뭔가를 불러냈다!”
스스스!
마수들과 플레이어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는 혈투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로 진영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져내린 것이다.
파장이 없을 리 없었다.
근처에서 전투를 지속하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진영에게로 모였다.
그러나 가장 놀란 것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유자벨과 남자였다.
“크으윽, 뭐야? 네 놈은 또······.”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한 쪽 눈을 붙잡은 유자벨이 중얼거렸다. 반대편의 남자 또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잠깐···. 너 플레이어지? 처음보는 얼굴인데 분명히 플레이어야.”
타이탄의 창을 쥔 남자가 진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경계하려는 찰나.
콰앙!
진영을 향해 날아오는 유자벨의 마력 탄환을 남자가 되받아쳤다.
“크윽, 오든···. 네 놈 비겁한 짓을 하다니.”
“아니, 오해야. 나도 처음보는 플레이어라고. 괜찮아? 이거 뭔가 큰일이 난 것 같은데···.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오든이라고 불린 남자는 진영의 근처로 다가와 진영을 들처맸다.
“?!”
그의 동작은 빠르고 정확했다. 저항하려면 할 수도 있었으나, 진영은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다.
‘이 남자는 타이탄의 창을 가지고 있어.’
탑이 품은 다섯 개의 보물 중 하나.
주오령이 가지고 있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오령에게서 빼앗은 게 아니란 건 확실했다.
‘이 남자는···.’
그의 창은 훨씬 더 말끔했고, 빛이 번쩍일 정도로 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골동품처럼 변해 버린 주오령의 것과는 달랐다.
‘보물의 본래 주인인 다른 세계의 영웅이다.’
“도망치게 놔둘 것 같으냐!”
유자벨이 눈을 붙잡지 않은 다른 손에 들린 검에 마력을 가득 담았다. 그것이 휘둘러지려는 찰나, 진영이 유자벨을 노려보았다.
우뚝.
유자벨의 움직임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뭐, 뭐지? 별 것 아닌 인간 놈일텐데.’
어째선지 도저히 휘두를 수가 없었다. 그가 가진 모든 감각이 그의 행동을 저지하고 있었다. 휘둘렀다간,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망설임이 유자벨을 굳게 만들었다.
유자벨이 멈춘 사이, 오든이 소리쳤다.
“출발한다, 꽉 잡아라!”
그는 외침과 동시에 하늘 위로 뛰어 올랐다. 단순한 점프였지만, 그 파괴력은 강력한 폭탄에 비견될 정도였다.
콰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오든과 이진영이 하늘 위로 솟아 올랐다. 미처 후폭풍에 대비하지 못한 마수들이 거칠게 바닥을 구르거나 허공으로 떠올랐다.
땅 위의 모든 것이 점처럼 보이게 되었을 때, 이진영이 정신을 잃지 않은 걸 확인한 오든이 소리쳤다.
“오, 잘버티는군. 이대로 플레이어 전초기지로 향한다! 꽉 붙잡아라, 도중에 떨어지면 구할수도 없으니까!”
그런 그를 바라보던 진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런거군···.’
이곳은 멸망의 탑 내부도, 외부도 아니었다. 그 어느곳에도 속하지 못한 공허의 일부.
“갑자기 어디있다가 나온건진 몰라도, 네 녀석은 뭔가 강하다는 게 느껴진다.”
전성기 시절의 유자벨과 타이탄의 창을 든 오든이라는 남성.
마수와 싸우는 드래곤과 플레이어들.
“응? 무슨 표정이지? 걱정마라. 폭룡왕 벨카론이 플레이어 편에 섰으니까. 이제 모든 게 달라질거야.”
초월자 아스리엘과 폭룡왕 벨카론이 벌였던 전쟁.
이곳은 탑에 의해 멸망했던 세계.
진영의 세계로부터는 까마득한 과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