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룡왕 벨카론(1)
“잡아!”
“브레스를 쏘아라!”
그들의 능력치는 모두 진영이 훔쳐갔다. 약화된 드래곤들의 비행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럼에도 녀석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 뒤를 쫓았다.
폭룡왕 벨카론.
탑이 집어 삼킨 세계의 드래곤들을 평정하고 로드의 자리를 쟁취한 그는 드래곤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 그의 명령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실패할 것 알지라도,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 50층 : 데드 리치의 영지 - 영지 탈환 ]
주변이 온통 불바다였다. 드래곤들이 지나치며 한 번 뒤집어 엎은 탓이었다.
“저, 저기로 가면 될 거에요!”
루시의 안내에 따라 일행은 계속해서 달렸다.
- 크어어.
- 으어!
진영 일행이 달려가자 숨어 있던 상급 언데들이 땅을 뚫고 솟아 나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기괴한 소리를 내던 녀석들은 진영과 마주하는 순간 몸을 떨었다.
가뜩이나 불완전한 육체가 삐거덕 거리기 시작했다.
- 크어?
격의 차이가 극명했다. 50층부터는 다시 한 번 관리자가 달라진다. 진영에게 관리자 권한이 없음에도 언데드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괴, 굉장한데? 지들이 알아서 고개를 숙이잖아?”
“염태준, 조심해라!”
콰앙!
앞 쪽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날아와 일행을 가로막았다. 드래곤의 공격은 김지훈이 확실히 막고 있었으므로, 다른 존재의 방해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영! 폭룡왕이 네 놈을 찾고 있다지! 덕분에 내 관리 지역이 엉망이다!”
그 정체는 화려한 가면을 쓴 마족이었다.
50층의 관리자 발터.
드래곤들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쉽게도 녀석의 장단에 맞춰줄 시간은 없었다.
“발터, 목숨이 아까우면 비켜라!”
유자벨이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발터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목을 붙잡힌 발터가 켁켁 대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 놈은 제가 처리할테니, 먼저 가십시오!”
“자, 잠깐 나도 도울게! 여러분은 폭룡왕을 물리쳐 주세요!”
기회를 엿보던 루시도 발터에게 달려 들었다.
‘미쳤다고 폭룡왕하고 싸워?’
유자벨은 충성심에서 한 일이었을지 모르나, 루시는 살고 싶었기에 한 선택이었다. 진영 일행은 몰라도 자신은 폭룡왕을 상대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 부탁하마.”
“진짜? 냅둬도 되는 거야?”
열심히 달리던 염태준이 의외라는 듯 돌아보았다. 그러고보니 유자벨과 루시는 작전에서 제외 되어 있었다.
“저 둘은 폭룡왕의 격에 버티지 못해.”
유자벨과 루시가 가진 힘이 상당한 것은 틀림 없었다. 그러나 격의 차이를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코인과 아이템에 의한 능력치 상승이 가능한 플레이어와 엄연히 다른 존재이므로. 어쩌면 플레이어가 선택 받았다고도 볼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건, 탑이 세계를 삼키기 이전까지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플레이어는 특별한 존재다. 탑이 완전히 세계를 삼켜버리면 그 곳에 살던 자들은 NPC가 되거나 탑의 마수가 되어야한다. 결코 플레이어로 돌아갈 순 없다.
[ 이계의 존재들이 일행을 응원합니다. ]
이계의 존재들도 과거 플레이어였던 자들. 그들의 성장은 멈췄다. 탑의 숨겨진 곳에 숨어, 규율을 비틀어내야만 했던 것도 모두 그들이 직접 탑을 공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탑의 모든 존재가 우러러 보는 초월자를 상대하려는 행위 자체가 성립하는 이유.
그것은 진영 일행이 플레이어이기 때문이었다.
“저기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이야!”
“관리자의 열쇠를 사용할게.”
여전히 그들을 뒤쫓는 드래곤을 피해 진영 일행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들의 앞을 막아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52층 혹한의 대지를 지나서
53층 기계 장치의 숲을 뚫고
54층 죽음의 사막을 건너
55층에 도달했다.
* * *
폭룡왕 벨카론.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강한 힘을 타고났다. 그것은 세계를 멸망 시킬 정도의 강력한 힘이었다.
배우지 않아도 초고위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노력하지 않아도 그의 검술은 그 어떤 소드 마스터보다 강했다. 드래곤의 모습으로도 그를 대적할 자는 없었다.
검은 비늘은 세상의 어떤 물질보다 단단했으며, 그의 발톱은 무엇보다 날카로웠으니까.
그는 처음부터 강했다.
탑이 거쳐온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드래곤의 로드가 되었을 때도, 초월의 좌에 올랐을 때도 모든 것이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벨카론!”
때문에 진영 일행이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들에게 공격 당할 것이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푸욱!
공간을 도약해서 넘어 온 진영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벨카론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헉!”
붉은 동공이 커지고,
눈에 맺힌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뿌드득.
온 몸이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것 같은 격통.
벨카론이 붉은 피를 토해냈다.
【 그런가···. 네 놈이 이진영인가. 】
떨리는 그의 손아귀가 진영의 드래곤 슬레이어를 붙잡았다. 검을 더 깊숙히 찔러 넣으려는 진영과 벨카론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부들부들.
힘이 잔뜩 들어간 진영의 팔도 떨리기 시작했다. 양손의 힘을 모두 사용하는 진영과 다르게 벨카론에게는 한 손이 남아 있었다.
‘단번에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역시 초월자다.’
이미 모든 버프와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스킬까지 사용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밀려나고 있었다.
파앗!
드래곤 슬레이어가 그의 심장에서 뽑혀나오며 피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벨카론의 입가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표정은 여유로웠다.
【 드래곤 슬레이어라···. 존재해서는 안되는 검이지. 】
“심장을 찔렸는데도 멀쩡하다니···.”
염태준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힌 것은 맞았다.
콰앙! 콰앙!
진영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벨카론도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을 꺼내 응수했다.
‘부하 드래곤들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데미지를 더 누적시켜놔야한다.’
짧은 시간 동안 수 백 번도 넘게 검이 맞부딪혔다.
그러나 초월자와 맞먹는 능력치를 가지고도, 드래곤 슬레이어를 가지고도 벨카론의 검을 넘어 설 순 없었다.
【 타고난 감각은 뛰어나지만 검에 조예가 깊지는 않은 것 같군. 】
진영의 수가 점차 읽히고 있었다. 벨카론의 검이 날카롭게 진영의 검을 치고 들어왔다.
채앵!
‘크윽.’
순간적인 일격에 진영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그 순간 벨카론이 앞으로 한 걸음 걸었다.
저벅.
별 것 아닌 것 같은 한 걸음이었지만, 그 걸음으로 인해 벨카론의 검이 진영의 배를 꿰뚫었다.
“크헉!”
진영의 입에서 울컥하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상대.
【 강하구나. 왜 초월의 좌에 오르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
가벼운 의문을 표한 벨카론이 검을 밀어 넣었다.
“크악!”
검은 완전히 진영의 배를 관통했다.
고통 속에서도 진영은 끝까지 벨카론을 마주보았다.
“으윽······. 당연한 걸 묻고 있어. 초월자는 탑을 공략할 수 없잖아.”
【 탑을 공략한다는 말만큼 어리석은 말도 없지. 이제 그만 죽어라. 】
벨카론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심장을 뚫린 벨카론이 살아 있듯이 초월자에 가까워진 진영 또한 관통상만으로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때였다.
꽈악.
진영의 두 손이 검을 쥔 벨카론의 손을 붙잡았다.
【 ! 】
벨카론의 움직임이 멎었다.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감지한 탓이었다.
[ 대상의 모든 능력치를 훔칩니다. ]
[ 훔친 대상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
[ 당신의 능력치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합니다! ]
[ 모든 이계의 존재들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
벨카론이 가지고 있던 막대한 양의 능력치가 진영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부탁한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염태준이 뛰어 들었다.
초월급 검 ‘엑스칼리버’가 벨카론의 왼팔을 베어냈다.
* * *
【 큭! 】
벨카론이 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심장에 이어 팔 하나를 잃어버린 것은 확실한 치명상이었다.
【 ······. 】
위기감을 느낀 그의 붉은 눈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 그런가, 훔쳐가는 것인가. 아이템, 특성, 스킬 그리고 능력까지. 】
벨카론이 모아두었던 초월력이 다시 그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본체를 직접 복구하는 것은 크나큰 초월력이 소모된다. 이미 초월자 아스리엘과의 전쟁에서 벨카론은 많은 초월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인정하지. 네 놈들은 확실히 탑의 끝까지 오를만한 실력이 있다. 그런데 뭐가 이리 급했는지 모르겠군. 실력은 있다 그러나 네 놈들은 너무 강하다. 강해도 너무 강해. 초월자들이 너희를 가만 둘 리가 없다. 】
“걱정해줘서 고맙군.”
콰앙!
잠시 폭룡왕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이진영이 드래곤 슬레이어와 함께 허공에서 나타났다.
‘역시 은신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벨카론을 지나 바로 축으로 다가가려고 했건만, 바로 실패했다.
진영은 절대 은신에 필요한 마력을 공격으로 돌렸다. 그럼에도 벨카론의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 파아!
초월자를 쓰러 뜨리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모아둔 초월력을 끝까지 바닥내지 않으면 승산은 없다.
‘다시 한 번···.’
능력치를 훔쳐 오기 위해 왼손을 뻗었다.
[ 대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
“······!”
짧은 순간이었지만 벨카론은 눈 앞의 공간을 분리 시켰다. 이계의 존재들이 경고 했던 차원 마법 ‘디멘션’. 벨카론의 천부적인 전투 능력이 빚어낸 활용법이었다.
【 탑을 공략하려하면서 탑의 시스템에 의존하다니 웃기는군.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할 수 있다면 말이지. 】
그럼에도 이미 진영 또한 벨카론의 능력치를 흡수한 상태였다.
콰앙!
공간을 도약한 진영과 벨카론의 검이 맞 부딪히며 거센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콰앙!
한 합, 한 합이 만들어내는 위력이 대단했다.
“칫, 이런···.”
초월급 검을 든 염태준조차 쉽사리 끼어들지 못할 정도였다.
“형! 드래곤들이 도착했어요!”
“다들 준비해!”
벨카론은 체력을 회복했지만 작전은 유효했다. 그런 진영 일행의 기색을 확인한 벨카론이 땅을 박차며 물러났다.
“로드시여!”
“저희가 돌아왔습니다!”
“당장 돕겠습니다!”
삼 백 마리의 드래곤들이 앞다투어 축이 있는 장소로 들어 오기 시작했다. 한데로 뭉친 드래곤 무리가 화려하게 치장된 거대한 기둥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벨카론의 눈이 흉포하게 빛났다.
【 쓸모 없는 놈들. 】
스윽.
벨카론은 드래곤 무리를 향해 검의 끝을 들어 올렸다. 붉은 마력이 검의 끝을 향해 모여들었다.
“요, 용서를!”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폭룡왕은 그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놈들을 보는 순간 진영이 그들에게서 능력치를 훔쳐왔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더더욱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쿠구구구···.
극한으로 응축된 초월자의 마력이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그것이 발사 되기 직전.
“······.”
주오령이 드래곤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의 행동은 명백히 상황을 읽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자살이나 다름 없는 상황에 마력을 방출하는 벨카론의 눈썹도 올라갔다.
【 ?! 】
콰아아앙!
대기가 저릿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쏘아져 나갔다.
붉은 마력이 일대의 드래곤들을 집어 삼킴과 동시에 천장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 능력치를 훔친 대상이 처치 되었습니다. 훔친 능력치를 잃습니다. ]
[ 영구적으로 민첩이 0.02 단계 상승합니다. ]
···
..
.
가공할 일격에 그 자리에 있던 드래곤들이 모두 사라졌다.
스릉.
검을 바닥으로 내린 벨카론이 입을 열었다.
【 스스로 죽으러 뛰어드는 놈이라니, 멍청하지만 꽤나 재밌군. 】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게 말하는 벨카론을 바라보며 진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주오령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슈우우!
벨카론의 마력이 뚫어낸 천장의 구멍에서 주오령이 떨어져 내렸다.
쿵!
바닥에 착지한 주오령의 눈에서 붉은 빛이 넘실 대고 있었다.
베르세르크 클래스의 광폭화.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등에는 타이탄의 창이 매여 있었고,
양 눈과 양 팔에는 새하얀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 각성 : 광폭화 ]
[ 체력이 낮아지면 모든 능력치가 4단계 상승합니다. ]
[ 초월의 좌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능력치를 아득히 넘어섰습니다. ]
[ 멸망의 탑이 주오령을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합니다. ]
[ 종합 능력치 : 13단계 - 종말(終末) ]
【 무슨···? 】
벨카론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종말(終末).
초월자 벨카론조차 본 적 없는 상위의 힘이 도래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