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4)
“흑, 죄송합니다.”
루시는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루시가 든 드래곤 슬레이어는 3초만에 빼앗겼다.
달려든 주오령의 주먹은 무자비했다.
마력을 뚫고 쏟아지는 공격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유자벨···. 날 배신했겠다···.”
루시는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유자벨을 노려보았다.
“애초에 팀이었던 적도 없는데 무슨. 변명은 그만하고 관리자의 권한을 진영님께 넘겨라.”
“플레이어가 무슨 관리자의 권한이야?”
짜증과 함께 고개를 들던 루시의 눈이 주오령과 마주쳤다.
“하지만 필요하시다면 드려야겠죠···. 흑···.”
오랜 삶을 관리자로서 살았다. 탑의 관리자로서 마수들의 정점에서 호의호식하던 나날을 루시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도망치기만하면, 마수들을 모아서 다시 기회를 노릴 수도 있을거야.’
1대1은 완벽히 졌다. 그렇지만, 자신이 관리하는 모든 마수를 불러 모은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이었다. 개인적인 전투와 다수의 물량이 밀어 붙이는 전쟁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이 녀석 거짓말 하고 있는데? 반성의 기미가 없잖아.”
물론 그 생각은 오래갈 수 없었다. 염태준의 거짓 간파가 루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제, 제가 무슨 거짓말을 한다고 그러세요···.”
“후환이 없게 처리 하는 게 좋겠는데.”
“진영님,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일행이 루시의 처우를 논의하자, 루시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놈들, 내가 못 도망갈거라 생각하나본데···.’
루시는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전원이 남자라는 점. 마법 저항력이 높은 녀석이 있기는 하지만,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을 터.
- 어센틱 차밍
스킬의 발동과 동시에 붉은 안개가 확산됐다. 안개가 닿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매혹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들 중 하나라도 걸려든다면 도망갈 틈을 벌기엔 충분했다.
안개가 제대로 퍼져나간 걸 확인한 루시가 날개를 펼치며 외쳤다.
“나를 위해 싸워라!”
최상급 디버프에 해당하는 매혹이 일행을 향해 퍼져나갔다.
사랑은 강대한 영웅의 현명한 눈조차 멀게하며, 정연한 이성조차 흐리게 만든다.
‘갑작스런 기습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루시가 매혹의 성공을 확신했을 때, 붉은 안개 속에서 유자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 까불지 말고 엎드려라.”
새하얀 빛이 두텁게 진영 일행을 감싸고 있었다.
[ 빛의 가호가 일행을 디버프로부터 면역시킵니다. ]
김영훈이 가진 능력이 루시의 붉은 안개를 걷어냈다.
‘말도 안돼···.’
자신의 모든 수단이 전부 막혔다. 남은 건 대놓고 도망치는 것 뿐. 루시가 중얼거렸다.
- 블링크
이거라면 도망칠 수 있다.
“루시 엎드리라고 했을텐데?”
“어라? 블링크! 블링크!”
몇 번을 외쳐도 루시의 자리는 그대로였다. 공간 이동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영이 진작에 루시가 가진 스킬을 훔쳐냈었으니까.
[ 대상으로부터 블링크(S)를 훔치셨습니다. ]
[ 특성 : 훔쳐낸 스킬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
[ 블링크(S)가 공간도약(SS)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
[ 훔친 스킬은 계속해서 유지됩니다. ]
덜덜···.
루시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초월자를 상대로도 이토록 무력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관리자의 권한도 드릴게요.”
“···이건 진심이네.”
루시를 빤히 쳐다보던 염태준이 말했다.
* * *
거대한 검은 기둥의 가운데 박혀 있는 붉은 보석.
언제보아도 영롱한 빛을 자랑하는 탑의 축 아래, 붉은 눈의 남자가 검은 왕좌에 앉아 있었다.
‘탑이 흔들리기 시작하는구나.’
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폭룡왕 벨카론.
그가 걸친 모든 것은 다른 드래곤들의 비늘과 심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탑이 집어 삼킨 세계, 그 중에서도 모든 드래곤의 정점에 선 초월자라는 증거였다.
그에게도 이번 일은 생소했다.
‘너무 이르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축을 무너뜨렸어.’
자신이 멸망의 탑에 속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벨카론 그가 초월자들을 통해 전해지는 이진영이라는 플레이어의 소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
훗.
그가 가볍게 웃었다. 그 모습에 가지런히 도열한 수백의 드래곤들이 몸을 떨었다. 그의 웃음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하나의 축을 무너뜨렸으니, 그 다음 표적은 이곳이 될 게 뻔하군.’
가소롭기 그지 없다. 그런 의미가 담긴 웃음이었다.
‘대놓고 탑을 공략하려고 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멸망의 탑은 절대로 공략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만큼 그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벨카론에게 확신이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축.
탑은 공략되지 않더라도 무너질 수 있으며, 그가 지키고 있는 축 또한 언젠가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벨카론은 축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아리엘···.’
자리에서 일어선 벨카론이 축을 어루만졌다. 탑이 저절로 무너지는 순간까지 이 축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가운데 박힌 붉은 보석은 그가 사랑했던 이의 심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 로드의 이름으로 명하겠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드래곤들은 일어나라. 축을 무너뜨리고자하는 이진영과 그 일행을 찾아 소멸 시켜라. 그들이 이곳에 접근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 】
강력한 마력이 담긴 진언에 드래곤들은 고개를 숙였다.
“로드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로드의 뜻대로.”
“전능하신 로드를 따르겠습니다.”
어림잡아 삼백. 축이 존재하는 공간을 가득 메운 드래곤들이 각자의 날개를 펴치며 날아 올랐다.
“이진영을 찾아라!”
“녀석의 흔적을 남김 없이 소멸 시켜라!”
“주군의 뜻을 행하라!”
그들 또한 한 때는 세계를 주름 잡던 명망 높은 드래곤이었다. 비록 폭룡왕의 수하로 있으나 그들에게 불만은 없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세계의 패자였다면, 폭룡왕은 전 우주의 패자였다.
그의 뜻이 우주의 뜻이었으며, 모든 드래곤의 의지였다.
55층에 숨겨져 있던 비밀 장소에서 빠져 나온 드래곤들이 새까맣게 하늘을 물들였다.
- 크오오!
- 크아아!
수 많은 드래곤들이 일제히 발산하는 피어가 55층의 마수들의 심장을 옥죄었다. 언젠가 55층에 올라 올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많은 마수들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붉은 노을 위로 삼 백의 드래곤 군단이 거침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로지 이진영을 죽이기 위해서 그들은 움직였다.
* * *
“흑, 이제 가진 것도 없어요···. 이 도둑놈들아···.”
눈물을 머금고 몰래 숨겨 뒀던 아이템을 꺼내 온 루시가 중얼거렸다.
초월의 좌에 오르는 게 목표였던 유자벨과 달리 루시는 관리자로 오래 머무는데 관심이 있었다.
때문에 혹시 나타날지 모를 새로운 관리자의 출현을 대비해 아이템을 모아둔 것이다. 신화급 아이템부터는 관리자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레전더리 아이템이 한 가득···.”
“겨우 이 정도로 뭘요···.”
레전더리급 템들은 신화급을 수집하는 와중에 모인 부산물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이템을 확인하는 염태준의 입에는 침이 마를 새가 없었다.
루시에게서 나온 신화급 아이템은 총 세 개였다.
[ 아이템 : 차원 이동자의 배낭(신화급) ]
[ 아이템 : 마왕의 반지(신화급) ]
[ 아이템 : 심연의 갑옷(신화급) ]
“시, 신화급···.”
일행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진영은 고민 없이 아이템을 일행에게 하나씩 나누어줬다.
‘배낭은 김지훈에게.’
“형···. 이거 받아도 될까요?”
“따지고보면 주오령이 만들어 준거나 다름 없는데 뭘.”
주오령은 여전히 아이템에는 관심도 없었다.
‘마왕의 반지는 정신 오염이 특성이 달려 있어. 이걸 제약 없이 사용하려면 김영훈이 딱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폭룡왕 벨카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진영 뿐만 아니라 일행들도 스펙업이 필요했다.
‘나는 이미 칠흑의 갑옷이 있으니 마지막 갑옷은 염태준에게 주고.’
“······. 나 울어도 되냐?”
염태준 같은 경우는 각성 능력 덕에 아이템의 능력도 증폭 될 것이다. 가장 효율이 좋을 법했다.
‘그리고 유자벨은···. 아직 지켜본다.’
규율에 걸고 노예 계약을 맺기는 했지만, 녀석은 기본적으로 마수였다. 녀석에겐 칭찬의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고생했다. 유자벨.”
“정말로, 정말로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때론 눈에 보이는 물건보다 진정한 말 한마디가 중요할 때가 있으니까. 실제로 유자벨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럼···.’
진영은 손에 쥐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스릉-.
푸른 기운이 검날을 타고 예리하게 퍼져나갔다.
‘진짜 소득은 바로 이거야.’
[ 아이템 설명 ]
이름 : 진(眞)용살자 - 드래곤 슬레이어.
등급 : 준초월급
설명 : 모든 생물의 정점에 선 드래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검이리라.
효과 : 검을 쥔 대상은 드래곤에게 5배의 추가 방어 무시 데미지를 입힌다.
수 백, 수 천 어쩌면 수 만.
셀 수 없이 많은 드래곤의 목숨을 취한 드래곤 슬레이어가 진영의 손에 들려 있었다.
들고 있는 것만으로 원한에 사무친 드래곤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 했다.
‘회귀 전에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검인데···. 진짜 있었을 줄이야.’
폭룡왕에 의해 분쇄되었다고 들었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기에 반신반의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손에 넣게 될 줄이야.
‘이걸로 폭룡왕에 대한 대비는 어느 정도 끝났다.’
일행의 아이템 보충도 충분했다. 심지어 이계 중심부에 들어가기 전에 얻은 히든피스도 각자 하나씩 있을 거다.
‘하지만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
두번째 탑의 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곳을 거처로 삼은 폭룡왕을 꼭 처리해야했다. 문제는 그가 초월자라는 것.
‘격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
통칭 초월의 좌라는 아득한 경지를 넘어선 그들이 쌓아 올린 힘은 격으로 표현된다. 그들의 진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평범한 생물들은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내며 죽는다.
그것은 이 세계의 규칙이나 물리 법칙과도 같다. 거역할 수 없는 순리이자 이치. 힘의 차이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
그러나 유일하게 멸망의 탑에 속한 플레이어들만은 이 격의 차이를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코인을 이용한 능력치 강화를 통해 초월의 좌에 다다를 수 있다.’
현재 진영의 수중에 있는 코인의 수는 130만개. 터무니 없이 많아 보이지만, 모든 스탯을 10단계 초월(超越)까지 올리기엔 모자랐다.
1억.
코인으로 하나의 스탯을 초월까지 올리는데 필요한 코인의 양이었다. 신화준조차 코인으로 모든 능력치를 초월까지 올리진 못했다.
‘아이템, 특성, 스킬 그리고 히든피스로 커버쳤지.’
진영이 고심하던 그 때 김지훈이 소리쳤다.
“허억! 서,성공했어요!”
“뭘 성공했는데?”
“레전더리템이 하도 많아서 합성 해봤는데···. 시, 신화급이 하나 더 나왔어요.”
그 말에 진영이 고개를 돌렸다.
“합성? 그런 스킬이 짐꾼 클래스한테 있었어?”
“이것도 보물 덕에 각성하고 나서 새로 생긴 스킬인데, 효과가 엄청 좋아요.”
합성 스킬이라.
김지훈을 바라보는 진영의 눈빛이 바뀌었다.
“가, 갑자기 왜요?”
진영의 특성 ‘탐욕’은 훔친 대상을 매우 좋게 만든다. 진영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내가 합성 스킬을 훔쳐 온다면···.’
신화급 그 이상도 가능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