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3)
- 야, 탑 무너졌는데? 아니 부서졌다고 해야 돼?
- 입구가 사라졌어. 이제 탑 입장 못하는 거야?
- ㄴㄴ 들어가는 건 가능하다던데? 근데 들어가면 10층부터 시작이래.
멸망의 탑에 나타난 본격적인 이변.
탑 바깥의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탑 내부에서 있었던 일들이 탑에서 나온 플레이어들의 폭로로 인해 밝혀지기 시작했다.
- 님들 탑 들어가지 마세요! 거기서 완전 사람 목숨 가지고 노는 곳이나 나름 없어요.
- 탑에 들어간 사람들 대부분 죽었을 겁니다.
- 국가에서 헌터들하고 짜고 치는 거임.
- ㄷㄷㄷㄷ 미친 거 아님?
모두가 그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ㅋㅋㅋ 탑 들어가면 헌터되서 인생 피는 건데 무슨.
- 응, 어차피 멸망의 탑 안들어가면 죽어서 들어가는 게 이득이야.
다만 신뢰성 있는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며,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 미친 거 아니야?
-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쳐?
세계의 혼란을 막기 위해 통용 되었던 거짓말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시위를 하며 일어섰고, 멸망의 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진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탑은 모든 일의 전조나 다름 없었다.
탑이 무너지기 시작한 내부에서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레드 리버가 만들어 낸 탑 내부의 특수 커뮤니티에서도 관련 내용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 탑 무너지는데 여기 있다가는 나중에 나가지도 못하고 갇힌데.
- 누가 그런 소리를 함? 헛소문 퍼뜨리지마라.
ㄴ 대예언가 클래스 리암.
ㄴ ㅇㅇ
ㄴ 그러면 넌 걍 있어, 난 나간다 ㅂㅂ
각자의 의견과 미래에 대한 예측이 엇갈리는 가운데.
“그랑블루는 끝까지 남는다.”
그랑블루의 부마스터 진철이 결정을 내렸다. 회의실에 앉은 최고위 간부들의 눈빛엔 실망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간부들의 표정을 읽은 진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로 멸망의 탑이 무너지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야. 예언가 리암의 말을 모두 믿는 것도 멍청한 짓이고. 그가 말하는 대의나 정의? 정말로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거냐?”
진철의 동생 진청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랑블루를 그 손으로 직접 세우고 당당히 바깥으로 나간 플레이어. 비록 그는 핵심 멤버를 데리고 떠났지만, 그를 위해 그랑블루의 마스터 자리가 비워져 있을 정도였다.
“적어도 레드 리버가 탑 바깥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우리는 기다린다. 이제 고작 1층이 무너지기 시작했어. 지금 움직이는 건 시기 상조다.”
단호한 진철의 말에 간부 몇 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민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진철은 탐탁치 않은 눈빛으로 민아영을 보았다. 네 까짓게 뭔데, 이 회의에서 자신에 말에 반대하냐는 무언의 압박.
민아영은 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바깥으로 나가서 게이트와 마수를 정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이 혼란으로 가득차기 전에 저희의 이름을 알려야합니다.”
그랑블루를 멸망의 탑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나 바깥에서는?
까마귀 길드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한 인지도였다.
“······. 최근 성과를 많이 냈다고 기고만장한가본데, 지금 나가봤자 우리는 까마귀 길드의 뒤꽁무니를 쫓는 게 전부지. 예언가 놈이 그렇게 외치고 다니는 아포칼립스? 그 놈이 탑을 독식하기 위해 만든 거짓이 아니란 걸 어떻게 알아?”
회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최근 입지전적인 업적을 세운 신참 간부와 그랑블루의 부마스터. 두 사람 간의 기싸움이 팽팽하게 이어지는 그 순간.
“크, 큰일 났습니다!”
회의장 안으로 클랜원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1층부터 3층까지가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답니다! 동시에 바깥에서도 대규모 게이트 브레이크가···!”
부마스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반면 민아영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어렸다.
그녀는 보란 듯이 입을 열었다.
“멸망의 탑 공략은 이진영 플레이어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 * *
쿠웅!
압도적인 폭력이 40층의 관리자를 향해 쏟아졌다. 서큐버스 루시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허공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
콰앙!
폭탄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땅에 꽂힌 루시가 그대로 수십 미터를 밀려났다.
“죽이겠다.”
붉은 안광이 순식간에 루시를 따라잡았다.
쿠웅!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주오령의 발차기가 루시를 허공으로 차올렸다.
‘주, 죽겠어!’
그 순간 루시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도망쳐야 해.’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자신이 우연히 깔아 뭉갠 플레이어가 자신을 미친 듯이 패고 있었다. 공격 한 방 한 방이 마력으로 만들어낸 보호막을 종잇장처럼 가볍게 뚫고 있었다.
쿠웅!
“커헉!”
루시가 검은 피를 토해냈다.
거대한 해머가 자신을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영웅의 검도, 마신의 마탄도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꼬, 꼼짝도 못하겠어.’
꽈악!
주오령은 공중에서 팔과 다리를 사용해 루시의 날개와 몸을 꽉 붙잡았다.
쉬이익!
그 상태로 수 백 미터 상공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루시의 머리가 아래를 향해 있었다. 이런 걸 그대로 당했다간 죽는다.
‘주, 죽기 싫어!’
온 힘을 다해 속박을 풀어보려고 시도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 이 녀석이 바로 그 이진영이었구나.’
급기야 오해가 시작 됐다. 그제서야 루시는 부하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레이어 주제에, 인간 주제에 더럽게 셌다.
“이 놈이!”
샤아아!
최후의 발악으로 쏟아내는 마기와 각종 매혹 마법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으윽, 내가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어.’
정말로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초월자와 대적할만큼의 힘을 손에 넣은 플레이어가 벌써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젠장! 젠장!’
지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국 루시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콰아아앙!
지면에 거대한 크리에이터가 생기며 자욱한 흙먼지가 솟아났다.
“······.”
주오령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식하게 몸을 던진 낙하였다. 낙하의 충격을 흡수했어야 할 대상이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꺄하하! 멍청하긴! 서큐버스를 상대로 쿨럭, 그런 무모한 공격이 쿨럭···. 크윽, 통할거라고 생각한거야?”
블링크(blink) 스킬로 주오령의 속박에서 빠져나간 루시가 소리쳤다. 큰 소리치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입가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몸 곳곳이 부러져 있었다.
“일단은 돌아가지만, 다시 돌아 왔을 때는 죽을 각오···. 저, 저리가!!”
루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상대는 아무런 낙법도 없이 땅에 충돌했다. 녀석의 뼈는 산산조각 났어야했다.
‘근데 왜 아무렇지 않게 나를 쫓아오냐고!’
루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은 날개가 최선을 다해 펄럭였다. 비틀거리면서도 루시는 자신의 저택을 향해 도망쳤다.
‘일단 도망가기만 하면 돼! 저택에 도착하기만하면 살 수 있어!’
루시는 혼심을 힘을 다해 도망갔고, 주오령은 그녀를 쫒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염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저거 어쩌냐.”
“아마 괜찮을 거에요. 진영이 형이 나오면 같이 찾으러 가죠.”
“아니, 내가 그 괴물 걱정을 왜 하냐. 그거 말고.”
염태준은 손가락으로 형체도 없이 흩어진 유리 조각을 가리켰다. 김지훈이 준비 해뒀던 능력치 향상의 비약이 루시의 출현과 함께 박살나 있었다.
“아···. 다시 재료가 모이면 만들어 드릴게요.”
그때 김영훈이 김지훈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 왠지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형도 조합 스킬이 생겼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김영훈이 손을 앞으로 뻗자, 근처에 흩어져 있던 유리 조각들과 물약이 한 군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스스스···.
그렇게 모인 조각과 액체를 하얀 빛이 한 번 감쌌다.
처억!
그러자 완전히 처음과 같은 상태의 물약이 나타났다. 염태준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김영훈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미쳤어, 이제는 무생물도 치료하는 거야? 빛의 사제 장난 아니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어? 진영씨 나왔나본데요.”
우우웅!
검은 게이트의 표면이 떨리더니 진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오령은? 아니다, 대강 알겠어.”
일대가 완전히 초토화 되어 있었다. 일행의 것이 아닌 강력한 마력도 흩어져 있었다.
“관리자가 왔다가 도망갔어요.”
모든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한 설명이었다. 진영의 시선이 저 멀리 흙먼지가 휘날리는 곳을 향했다.
“마침 잘됐어. 따라가자.”
* * *
콰앙!
루시가 문을 부수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 놓기는 했지만 급박한 건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인간이 나를 여기까지 몰아 붙일 수 있는 거야? 이제 막 40층에 들어 온 인간이!”
“쯧···. 저런.”
혀를 차는 소리에 루시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저택에 있는 마족들 중에 대놓고 저런 말을 할 자는 없었다.
“깜짝이야. 뭐야, 유자벨이었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해!”
루시는 허겁지겁 자신이 아이템을 비축해 둔 창고로 갔다. 깊숙히 숨겨둔 엘릭서를 찾아 쭈욱 들이켰다.
꿀꺽, 꿀꺽.
한 병을 다 마시고나서야 몸이 어느 정도 회복 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지독한 놈이 계속 쫒아오고 있을 걸 생각하니, 쉬고 있을 순 없었다.
“너 대체 저런 플레이어들을 왜 살려둔거야? 아니지, 너도 간신히 도망친거구나?”
말을 하면서도 루시는 창고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에 손을 올려 마력을 불어넣었다. 25층부터 30층까지를 담당하는 유자벨이 막지 못할 정도라니.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저 녀석들은 선을 넘었어. 관리자인 나를 공격했다고!”
“흐음···. 누구랑 싸운 거지?”
“당연히 이진영이지!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차있을 것 같은 바로 그 놈.”
관리자의 상식을 뛰어 넘은 힘. 루시는 당연히 주오령이 이진영일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가 당한 게 말이 되지 않으니까.
“······뭐, 맘대로 해라.”
유자벨은 루시가 생각보다 일찍 저택을 나가는 바람에 길이 엇갈렸다.
‘이진영한테 점수를 따놔야지.’
초월자들의 가호가 사라진 지금, 유자벨이 살아남기 위한 일은 진영에 대한 충성 뿐이었다.
때문에 유자벨은 일부러 그 오류를 정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루시를 부추겼다.
“근데 혹시 숨겨둔 아이템이나 비장의 수 같은 건 없어?”
“물론 있고 말고.”
루시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문양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쿠구구구···!
숨겨져 있던 비밀의 장소가 드러났다.
[ 아이템을 억누르던 마력이 해제 됩니다. ]
비밀 장소의 한 가운데.
푸른 빛을 띈 날카로운 검 하나가 번뜩이고 있었다.
[ 진(眞)용살자 :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 ]
드래곤을 베어 목숨을 취한 무기는 모두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러나 이 무기만큼은 특별했다.
탑이 삼켜 온 모든 세계에서 통틀어 가장 많은 드래곤을 죽였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무기였다. 무기의 등급은 준 초월급.
무기를 쳐다보던 유자벨이 혀를 내둘렀다.
“너···. 이런 걸 숨기고 있었던거야? 간도 크네. 들키면 초월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특히 그 폭룡왕이···.”
“지금 이 자리에서 죽게 생겼는데 그게 문제야? 이진영 그 놈은 진짜 미친 놈이라고!”
검을 쥐어든 루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관리자조차 쉽사리 다루기 어려운 검이었다.
“너는 내가 마력을 모아서 이걸 쓸 때까지만 버텨주면 돼. 오래도 아니야. 1분···. 아니다. 3분? 그거면 충분해.”
“······알았다.”
유자벨은 루시와 함께 저택의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후우, 그러면 부탁 좀 할게.”
루시의 몸에서 흉악한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기는 꿈틀거리며 드래곤 슬레이어의 손잡이를 타고 올랐다.
‘40층과 통째로 단칼에 베어낸다. 그 놈의 일행까지.’
콰아앙!
별안간 저택의 입구가 아닌 벽면이 부서지며 파편이 튀어 올라왔다. 그 곳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주오령 뿐만이 아니었다. 이진영을 포함한 일행이 루시를 바라봤다.
그 순간 유자벨이 루시의 양 팔을 붙잡았다.
“응? 뭐야? 내가 아니라 저 녀석들을···.”
어안이 벙벙해진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자벨은 최선을 다해 소리쳤다.
“이 녀석 드래곤 슬레이어를 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