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2)
진영 일행이 40층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오랜 잠에 들어 있던 관리자 하나가 눈을 떴다.
“으윽···. 뭐야. 왜 깨운거야? 죽고 싶어?”
자신의 부하를 향해 한껏 얼굴을 찡그린 그녀가 소리쳤다.
그러다가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매혹적인 외모 달콤한 목소리를 가진 서큐버스 루시.
그녀는 여전히 잠기운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게 아니라. 플레이어 이진영 일당이 지금 막 40층에 도착했습니다.”
부하들은 쩔쩔 매면서도 그녀에게 지금 일어난 일을 전달했다. 이진영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탑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이해를 못하겠네. 그 따위 이유로 날 깨운거야?”
그 말에 루시는 큰 눈을 깜빡였다. 플레이어들이 40층에 올라 온 것도 아니고, 고작 플레이어 ‘일당’이 지름길을 통해 40층에 올라온 것으로 자신을 깨울 줄이야.
그녀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당장이라도 눈 앞의 부하를 죽일 기세였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바닥에 엎드린 채로 분노를 삭였다.
“지, 지금 가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보통 플레이어들이 아닙니다. 벌써 초월자 둘을 쓰러뜨린 플레이어입니다.”
상황을 설명하는 부하 마족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들은 관리자들도 차례대로 처치해 왔다. 이대로라면 진영 일당이 40층을 쓸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풋, 초월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40층에도 못 올라 온 놈들이 무슨 초월자를 쓰러뜨렸다고 그래. 네가 알고 있는 그 정보 확실해?”
“아, 아마 그럴 겁니다···. 정보 간섭이 가능한 몇몇 마수들을 통해 퍼진 소문이니까요.”
“너 지금 소문이라고 했지.”
“네? 아, 네.”
그 순간 루시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털썩.
부하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손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루시가 중얼거렸다.
“고작 마수들 사이의 소문 때문에 날 깨워?”
그녀의 분노는 어찌보면 정당한 것이었다.
적어도 오랜 잠에 들어 있었던 루시에게는 정당한 일이었다.
‘잘 자고 있었는데, 이런 일로 수면을 방해 당할 줄이야.’
짜증과 함께 잠기운이 완전히 가셔버렸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자신의 수면을 방해할 정도의 일이란 의미였다.
‘초월자를 쓰러뜨렸다는 이야기까지는 과장이었더라도···.’
적어도 40층에 발을 들인 일당의 능력이 평범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 기지게를 핀 루시가 자신의 검은 날개를 펼쳤다.
“이미 일어난 거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그 놈들이라도 구경해 볼까.”
그녀는 초월의 좌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리자로서의 삶도 그녀에게는 충분했다. 탑의 공략된다 한들 관리자가 목숨을 잃는 일은 없다.
관리자는 어디까지나 탑의 미션을 중재하고 관리하는 존재였으니까.
“데리고 놀기 좋은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관리자로서 플레이어들에게 함부로 손 댈 순 없었지만, 오랜 시간 40층에 거주해 온 루시는 규율의 헛점을 잘 알고 있었다.
40층의 미션은 붕괴된 게이트의 내부 정리다. 문제는 붕괴된 게이트에서 계속해서 마수가 쏟아진다는 것.
‘쏟아지는 마수의 수가 장난 아닐테니 아직 내부까지 진입도 못했겠지.’
아직 내부로 진입하지 않았다면 관리자로서의 제재가 가능했다. 미션을 클리어하지 않고 쏟아지는 마수들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일을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규율상 죽이진 못해도 심심풀이로는 딱이겠어. 이번 세계에서 쓸만한 내 전용 노예라도 하나 만들어야지.’
촤악!
그녀의 유려한 검은 날개가 펼쳐졌다.
“재밌겠네.”
* * *
[ 40층 : 마족의 땅 - 던전 브레이크 ]
쏟아져 나온 마수들이 정리되자 드러난 검은 빛의 게이트.
진영은 일행을 쉬게 하고 혼자서 그 속으로 뛰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쉬는 시간은 필요하다.’
초월자의 분신을 상대한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더욱이 멸망의 탑 공략이 가속화 될 것을 생각하면 휴식은 취해둘 수 있을 때 하는 게 맞았다.
‘다만 나는 아니다.’
진영은 단검을 역수로 쥔 채 빠르게 게이트 내부를 달려 나갔다.
길게 이어진 동굴 속을 달려나가는 진영의 발걸음은 눈으로 쫒기 힘들 정도.
[ 모든 이계의 존재들이 당신의 활약을 주시합니다. ]
‘계속해서 강해져야 한다.’
크오오!
동굴 속에 숨어 있던 검은 그림자들이 진영을 향해 발톱과 이빨을 드러냈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
짧은 사이 진영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며 그림자들의 사이를 지나쳤다.
[ 마수 다크 웨어 울프의 힘을 훔쳤습니다. 힘이 0.1 단계 상승합니다. ]
[ 마수 다크 메이지의 마력을 훔쳤습니다. 마력이 0.1 단계 상승합니다. ]
[ 마수 다크 워리어의 체력을 훔쳤습니다. 체력이 0.1 단계 상승합니다. ]
···
..
.
동굴 속에서 나타나는 수 백의 마수들을 진영은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그들의 능력치를 계속해서 훔쳐갈 뿐이었다.
[ 힘이 0.05 단계 상승합니다. ]
..
.
훔치고.
[ 마력이 0.02 단계 상승합니다. ]
..
.
훔친다.
녀석들이 가진 능력치를 계속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 초월의 좌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
능력치를 빼앗으면 빼앗을 수록 진영의 힘과 속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진영이 죽이지 않고 지나쳐 온 마수들이 해일처럼 진영의 뒤를 쫒아오고 있었다.
쿠구구구!
그러나 녀석들은 결코 달려나가는 진영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강해져야한다.’
왼손을 움직이는 진영의 눈에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멸망의 탑을 무너뜨리고 초월자들의 힘을 약화 시키기 위해서는 총
이미 탑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첫번째 축이 붕괴하며 초월자들의 힘도 조금은 약화 되었다.
29층에 있는 축은 부서졌으니, 이제 55층의 두번째 축을 부술 차례.
‘문제는 두번째 축을 부수기 위해선 초월자의 본체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
폭룡왕 벨카론.
그는 55층의 축을 자신의 거처로 삼은 초월자다. 초월자들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데 제약이 있었던 50층 이하와 달리 50층부터는 마음만 먹는다면 온전한 힘을 보여줄 수 있다.
‘녀석을 이기려면 뭔가가 더 필요하다.’
그는 칼몬과 그란델과 쉽사리 방심하는 성격이 아니다. 축을 부순 순간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본래 다른 초월자들은 무너지는 탑에 대해 무심하다.
‘탑은 원래 그런 식으로 세계를 집어 삼키니까.’
무너지는 것이 아닌 탑과 세계가 하나 되는 과정. 오랜 기간 탑을 지켜봐 온 초월자들은 그리여겼다. 다만 폭룡왕만큼은 다르다.
‘놈은 두번째 축에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니까.’
인위적으로 축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니,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정해진 일이었다. 회귀 전 폭룡왕은 축의 붕괴와 함께 스스로 땅 위로 떨어져 내린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모른다.
땅에 떨어진 또 하나의 재앙이 어떤 지옥을 만들어냈을지.
‘그러고보니 아직 사용하지 않은 아이템이 있었지.’
문득 진영의 머릿 속을 스치는 아이템 하나가 있었다. 절대자의 비밀창고에 숨어 들었던 당시 진영이 문지기에게서 훔쳐온 물약이었다.
무지개 빛 액체를 담은 물약.
[ 관련 스킬이 없어 해당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
여전히 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 이계의 절대자가 당신이 든 물건에 크게 동요합니다. ]
[ 이계의 절대자가 급히 이계의 근원과 본질을 찾아 사라집니다. ]
‘······.’
본래 아이템의 주인이던 이계의 절대자가 사라졌다. 진영에게 비밀 창고를 허락해 준 것은 근원과 본질이었다.
‘조금 미안한데.’
하지만 언제까지 아이템을 가지고 있기만 할 순 없었다. 녀석들이 답을 준다면 사용하기 편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벌컥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만약 모른다고 해도 염태준이 있다.’
염태준에게 물어보면 그 성능을 확실히 알 수 있을 터.
그 외에도 폭룡왕을 상대하기 위한 비책을 생각하던 진영이 고개를 들었을 때 즈음 악마의 형상이 새겨진 보스의 방이 나타났다.
끼이익.
뒤쪽에서는 하나 하나가 S급 헌터를 가볍게 도륙낼 수 있는 마수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열린 문의 안쪽에서는 무시무시한 마기를 흘리는 마법사가 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이런···. 누가 들어 왔는가 했더니 마수를 피해 도망쳐 온 얼간이었던가···.”
마법사의 도발에도 진영은 조용히 검을 들어 올렸다.
“하하! 네 놈은 특별히 관리자께 바치도록 해야겠군.”
“스틸.”
“······?”
[ 마수 마법사 왕의 마력을 비롯한 능력치를 훔쳤습니다. ]
“갑자기 힘이 빠지다니?”
웃고 있는 보스의 능력치가 순식간에 깎여나갔다. 깎인 능력은 모두 진영의 것이었다.
‘물론 영구적인 능력치는 아니지.’
훔친 능력치는 마수를 죽이기 전까지는 유효하다. 마수를 죽인 뒤에도 영구적으로 능력치가 남지만 그것은 극소량뿐이다.
‘그러니 마수를 살려둔 채로 게이트를 공략한다.’
거대한 힘이 진영의 몸 안에 가득 차올랐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에 한 걸음 다가선 바로 그 힘이 지금 진영의 손아귀에 있었다.
- 소드 오러.
창백했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린 마법사는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게이트의 모든 것이 일순에 사라지는 광경을.
[ 대부분의 이계의 존재들이 당신의 능력에 경이를 표합니다. ]
* * *
“진영이 형이 안에서 고생하는데 이렇게 편히 쉬고 있어도 될까요?”
“음. 그러게.”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진영은 밖에 있는 동안 쉬라고 했지만 어쩌면 이건 너무 과한걸지도 몰랐다.
근처에는 각종 침구류와 캠핑 용품들이 즐비했다. 그 뿐 아니라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음식이 한상 가득히 차려져 있었다.
“최고급 고기로 만든 스튜에, 스테이크는 기본이고 각종 샐러드까지···. 저걸 다 인벤토리에 넣고 있었단 말이야? 지난 번엔 없었잖아.”
모두 짐꾼 김지훈의 작품이었다.
“최근에 조합 스킬이 새로 생겼거든요. 음식은 물론이고 필요한 아이템도 만들 수 있어요.”
“굉장하다.”
덕분에 일행들은 호화로운 캠핑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우걱우걱.
싸움에만 집착하던 주오령이 입 안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 넣고 있었다.
“먹다 죽은 귀신이 들렸나, 뭘 그리 급하게 먹어. 야, 그건 내 거야!”
“괜찮아요. 더 만들면 되니까요. 진영이 형이 오면 새로 만들면 되니까 다들 걱정말고 드세요.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죠.”
김지훈은 짐꾼 역할 그 이상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었다.
“근데 이거 진짜 맛있네. 근데 잠깐.”
홀린 듯 음식을 먹던 염태준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음식을 조합 스킬로 만들었다고? 설마 이거 마수···.”
자신의 능력으로 음식의 정보를 확인한 염태준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김지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맛만 좋구만요.”
그건 사실이었다. 괜히 머쓱해진 염태준이 말을 돌렸다.
“······. 그래 맛은 좋으니까. 그보다 유자벨 그 놈은 어디로 간거야? 설마 또 배신하는 건 아니겠지.”
“아뇨, 그건 아니에요. 진영이 형이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유자벨하고 노예 계약까지 했으니까요. 40층의 관리자를 보러 간다고 했어요. 아마 그 관리자를 회유하거나, 처리하거나 하지 않을까요?”
진영이 나오기 전까지는 돌아 올 것이다.
“어, 근데 그건 뭐야? 능력치 향상 물약? 그런 것도 조합이 되냐? 짐꾼 사기네.”
염태준이 김지훈이 뒷 테이블에 숨겨 놓은 물병을 발견하고선 말했다.
“이거요? 진영이 형 오면 주려고요. 형도 하나 드릴게요. 다들 하나씩···.”
그러나 김지훈은 병을 건네 줄 수 없었다.
병을 들기 위해 뒤를 도는 그 순간, 거대한 충격이 일행을 덮쳤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쏟아져 나온 충격파가 일대를 뒤덮었다. 캠핑 용품들과 음식이 일제히 휩쓸려나갔다.
“으윽···. 대체 뭐야.”
“콜록, 콜록···. 잠깐만요···.”
“······!”
흙먼지가 걷히고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와보길 잘했어. 정말 재밌는 놈들이네! 감히 내가 관리하는 40층에서 여유를 부려?”
관리자 루시. 그녀의 사악한 마기가 근처에 자욱이 깔렸다. 일행들이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는 것을 확인한 루시는 더욱 의기양양한 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바닥에 엎드려 싹싹 빌면 내가 아끼는 장난감으로 삼아주지.”
그러나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내가 그렇게 무섭나? 그럴리가 없는데.’
그러나 자신의 외모는 아름다운 쪽이었다. 보는 이를 순식간에 홀릴만큼. 그 미모에 죽어간 이들 또한 수 백에 달하리라.
‘아, 마기 때문에 쫄았나?’
서서히 마기를 줄여갔다. 그러나 일행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계속해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루시는 일행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발 밑을 보고 있었다.
“······.”
미처 먹지 못한 음식의 잔해와 함께 붉은 눈을 빛내는 주오령이 그녀의 발 밑에 깔려 있었다.
“···이진영 언제 나오냐. 우린 감당 안되는데.”
염태준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