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자의 분신(2)
초월.
생물 본연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경지에 닿았을 때야 비로소 그것을 초월이라고 부른다.
수 천 년, 수 만 년의 세월.
혹은 막대한 양의 초월력이 있어야 오를 수 있는 경지는 그 누구도 쉬이 넘보지 못한다.
관리자들은 초월의 영역에 닿기 위해 목숨을 불사하고, 마수들은 강대한 힘을 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켜보기에 그친다.
“칼몬.”
칼몬을 부르는 진영의 말투에는 한순간이나마 초월자의 것에 비등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찌릿찌릿.
피부로 와닿는 마력을 직접 느끼는 칼몬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웃기지도 않는군···. 웃기지도 않아······.”
자신이 분신에게 끌어 모았던 마력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몸 안으로 마력을 순환 시키려고 해도 마력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헛돌 뿐이었다.
“고생했다. 지훈아.”
“헤헤, 이 정도는 별 거 아닌데요.”
입과 코 주변이 피범벅이 된 김지훈이 스윽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말과는 달리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쉬고 있어. 여기는 내가 정리 할게.”
김지훈이 터덜 터덜 구덩이 위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뿌득.
자신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행동하는 진영을 본 칼몬이 이를 갈았다.
“건방지구나.”
그러나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파악한 진영의 능력은 스킬과 특성을 훔치는 게 전부였는데, 이제는 아이템과 능력치까지 빼앗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마. 이진영. 네 놈은 상상 이상의 플레이어다. 그런데 네 놈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착각?”
진영의 물음에 칼몬이 코웃음과 함께 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상대하고 있는 이 몸은 분신에 불과하다. 아무리 이 몸이 찢기고 부서진다해도 내 본체는 멀쩡히 있단 말이다.”
그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차 진해졌다. 그가 뻗은 손 위의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초월력.
초월자들이 가진 상위의 힘. 멸망의 탑을 변화시키고 이변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권능과도 같았다. 그가 불러들이는 구름과 벼락은 스킬 같은 게 아니었다.
“설령 내 분신이 이 싸움에서 진다하더라도···. 나는 네 놈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로 본체로 돌아간다.”
칼몬은 29층에서 활동하기 위해 자신의 분신을 사용했다. 즉, 이 전투의 패배가 죽음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뜻.
“그러니 이 몸의 넓은 아량으로 제안을 하나 하지.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내게 충성을 맹세하라. 그러면 죽이지는 않겠다.”
칼몬의 검은 피부에 새겨진 푸른 문신이 점차 빛나고 있었다. 그의 초월력이 불러 모은 검은 구름에서는 당장이라도 벼락이 떨어질 듯 스파크가 튀어 나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진영이 움직였다. 천천히 칼몬의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네 놈은 몸뚱아리 하나를 가진 플레이어에 불과하지만, 나는 다르니까. 네 놈이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존재하는 초월자이니.”
그러나 칼몬을 바라보는 진영의 눈에 복종의 빛은 없었다. 오히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칼몬을 주시할 뿐.
드디어 진영이 입을 열었다.
“말이 많군. 초조한가?”
“······뭐?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의 말과 달리 진영이 계속해서 걸어나가자 칼몬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진영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칼몬은 한걸음씩 뒷걸음쳤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보군.”
“무, 물러서라!”
또 다시 한 걸음.
그렇게 계속 기싸움을 하던 도중 칼몬이 멈춰섰다.
턱.
더 이상 물러날 자리는 없었다. 궁지에 몰린 칼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격의 차이가 칼몬을 몰아붙였다.
압도적인 마력의 차이가 진영과 칼몬 사이에 격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칼몬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플레이어 주제에 나를 몰아 붙여!”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칼몬의 가장 큰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충전은 완료 되었다. 남은 것은 모든 걸 쓸어 버리는 것 뿐.
“여기에 있는 이계의 존재들과 함께 전부 쓰러뜨려주마!”
콰아아앙!
하늘을 새까맣게 메운 구름에서 수 백 발의 섬광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푸른 빛이 점멸했다.
진영과 칼몬이 위치한 구덩이 속으로도 수 십 발의 벼락이 떨어졌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빛.
그 속에서 진영은 칼몬의 목을 붙잡았다.
콰악!
“그게 마지막 초월력이었겠군.”
“······!”
쏟아지는 벼락은 진영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초월의 단계에 오른 마력이 벼락의 힘을 상쇄시켰다.
적어도 마력에 있어서 칼몬과 진영은 대등했다.
“내가 널 초월의 좌에서 떨어뜨린다면, 그 때도 본체나 분신이 의미가 있을 것 같나?”
99층. 그 아득히 높은 탑의 꼭대기에 오르며 진영은 보고, 듣고, 경험했다.
초월자의 분신과 본체를 쓰러뜨리는 방법조차 알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진영의 오른손 위로 강대한 마력이 모여들었다.
“허, 허억!”
칼몬은 그제서야 떠올렸다.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오며 잊고 있던 공포라는 감정을.
* * *
콰아아앙!
“미, 미친. 진짜로 떨어지네.”
염태준이 지친 김지훈을 업고 신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수백 다발의 벼락이 내리쳤다. 진영이 말했던대로였다.
“지훈아, 좀만 참아. 금방 힐 걸어 줄게.”
“고마워 형···.”
김영훈의 치유를 받자 김지훈의 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넌 여기서 쉬고 있어, 나머지는 우리들이 알아서 할게.”
“아냐, 나도 같이 갈거야.”
지훈의 몸을 비틀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치유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정신적인 부분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지훈이 일어나는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스스스!
떨어진 푸른 벼락들은 수 백 마리의 커다란 뱀이 되어 이계 중심부를 덮치고 있었다.
쿠구구궁!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뱀들은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신전을 향해 수 십 마리의 뱀이 일제히 다가오고 있었다.
“오히려 좋은 상황이에요. 진영이 형이 말한대로 초월자가 힘을 다 쓴 순간이니까요.”
그 말에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계의 존재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우리도 싸울 준비하자!”
“이진영이 칼몬하고 싸우는 동안, 우리는 저 망할 뱀 놈들을 처리하자!”
“······.”
그런데 주오령이 팔짱을 끼고 멍하니 검은 먹구름으로 가득찬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 놈은 아까부터 왜 저러냐.”
“글쎄요. 절대자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쭉 저랬어요.”
“일단 놔두고 우리끼리라도 움직이자.”
염태준과 눈빛을 교환한 김지훈, 김영훈이 앞장서서 신전 밖으로 빠져나갔다.
파지직!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 스파크가 튀어 오르는 뱀을 향해 염태준이 달려나갔다.
콰앙!
흙먼지와 함께 뱀 하나를 거침 없이 베어 냈다. 그러나 뱀들은 계속해서 달려 들었다.
콰득!
뒤에서 달려든 뱀이 염태준의 팔을 물었다. 온 몸이 마비되는 짜릿한 감각에 염태준의 움직임이 멎었다.
“홀리 디스펠, 세이크리드 힐!”
서걱-!
“나이스, 김영훈!”
김영훈이 치유가 들어오며 굳었던 염태준이 다시 움직이며 뱀을 잘라냈다. 뒤에서 달려 온 이계의 존재들도 전투에 가세 했다.
다양한 빛의 마법이 쏟아지고 각종 병장기가 푸른 뱀들을 덮쳤다. 백이 넘는 이계의 존재들이 일제히 달려 들며 뱀을 상대로한 작은 전쟁이 펼쳐졌다.
“다 쓸어버리자!”
“흙으로 전기 공격을 막아내!”
“마력으로 직접 부딫히는 것도 효과가 좋아!”
이계의 존재들이 가진 무력 또한 상당히 강력했다. 그들도 과거에는 탑의 영웅으로 불리며 추앙 받던 존재. 이계의 존재가 되며 상당히 힘을 잃었다지만, 마수를 상대로 오히려 밀어내는 모습을 보였다.
촤아악!
오래 전 희망을 잃고 쓰러졌던 영웅의 검날이.
쿠우욱!
절망 속에서 다시금 구원을 찾는 전설의 창이.
콰아앙!
다시금 탑의 공략을 바라는 마법사의 마력이 뱀 떼를 덮쳤다.
“다들 뒤로 물러나세요! 위험할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에 쐐기를 박는 것은 김지훈이었다. 다 찢어진 가방을 들어 올리는 김지훈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너 설마?”
김지훈을 바라보는 염태준의 눈이 커졌다. 이계의 존재들이 물러서자, 가장 앞으로 나선 김지훈이 가방을 열어 젖혔다.
“그 설마가 맞아요!”
[ 각성 : 수납했던 대상을 방출합니다. ]
김지훈의 눈에 새겨진 하얀 표식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인벤토리에 저장해 두었던 거대한 마력.
근처의 대기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갑니다!”
초월자의 분신이 쏟아 부었던 강대한 마력이 김지훈의 가방을 통해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아아아!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막대한 빛이 눈 앞의 풍경을 집어 삼켰다.
* * *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은 필연적으로 초월자들을 만나게 된다.
- 초월자? 비겁한 놈들이지. 자신의 본체는 꽁꽁 숨긴 채 온갖 패악질은 다 부리는 놈들이니까.
비겁한 놈.
신화준은 초월자를 그렇게 정의 했다.
- 실제로 강력하기도 하지. 근데 그 놈들도 결국 우리랑 다를 바가 없어. 아니, 플레이어보다 나을 게 없지. 내가 맘만 먹으면 초월자가 될 수 있는데도 초월자가 되지 않은 이유가 그거거든. ······. 이게 농담으로 들려?
탑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관조하는 신과 다름 없는 위치. 그러나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플레이어와 달리 탑의 규율에 얽매여 있다는 점.
- 놈들에 비하면 플레이어는 자유롭지. 탑의 규율이 우리를 억제하지는 않잖아? 기껏해야 관리자 놈들이 난리치는 정도지.
그들이 멸망의 탑에서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초월력을 사용해야 한다.
전지전능한 힘.
자신만의 공간을 창조하고, 그곳에서 신과 다름 없는 공간을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인 힘.
문제는 그것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하위층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더욱 막대한 양의 힘을 소모한다.
- 그러니까, 하위층일 수록 초월자를 상대하기는 쉽지. 그 놈들은 너무 오래 살아서 제대로 된 사리분별도 못해.
그리고 진영도 탑을 오르며 초월자의 최후를 여럿 지켜보았다. 거만하고 오만하여 패배를 잊고 자신 힘에 취한 자들의 종말.
“넌 여기서 끝이다.”
마력의 폭풍이 칼몬의 분신을 휘감았다. 초월의 단계에 달한 진영의 마력에 칼몬이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커허헉!”
푸른 빛을 쏟아내며 칼몬의 분신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하던 그의 눈빛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의 눈은 아득한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 초월자 칼몬의 분신을 소멸 시켰습니다. ]
[ 초월자 칼몬의 본체에 심각한 초월력의 손상이 발생합니다. ]
“안돼! 안돼! 설마!”
칼몬은 그렌달의 최후를 보며 비웃었다. 상대를 가늠하지 못하고 내기에서 패배해 초월의 좌에서 끌어내려진 그의 최후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최후가 칼몬에게도 다가오고 있었다.
“크아아악! 이진영 이 놈! 올라와라, 탑 위로! 죽여주마! 끝까지 살아남아서 기다리고 있으마!”
[ 초월자 칼몬이 가진 격이 초월의 좌에 걸맞지 않습니다. ]
[ 칼몬이 초월의 좌에서 떨어져 내립니다. ]
초월자의 격을 떨어뜨린 그를 다른 초월자들이 가만히 놔두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운이 좋다면 살아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진영은 덤덤했다.
“아니, 그 때가 되면 칼몬 네가 나를 피해다녀야 할거다.”
더 많은 것을 훔치고, 훔칠 수 없는 것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탑을 공략할 것이다.
탑의 정점에 군림하는 초월자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져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