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의 절대자(6)
“그런거였군···.”
진영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스킬에 깃든 부가효과 ‘탐욕의 왼손’.
진영이 얻은 스킬 ‘절대 은신’.
모두 말도 안되는 능력 뿐이었다. 탑의 규율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한 힘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이계에서 온 힘이기 때문이었다.
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절대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알겠어. 그래도 아직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 말이야···.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직접 탑을 공략하지 않는 거지?”
이계와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다면, 멸망의 탑을 공략하긴 더욱 쉬워진다. 지금 진영이 가지고 있는 스킬들만해도 탑 공략을 압도적으로 수월하게 해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말에 절대자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저희가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이죠.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멸망의 탑이 안착한 그 세계의 일원들 뿐. 현재 멸망의 탑은 당신들의 세계 ‘지구’에 정착해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탑은 계속해서 각기 다른 세계를 먹어치우며 살아간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아직 잡아 먹히지 않은 세계의 주민만이 될 수 있다.
“플레이어만이 이 탑을 공략할 수 있습니다. 저희의 힘은 정체되어 있지만 플레이어의 성장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저희 이계의 존재들은 적합한 플레이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겁니다.”
“그 기다렸다는 건 설마······.”
“그 설마가 맞습니다.”
단순히 기다리기만한다면 언제, 어느 세월에 유망한 플레이어가 나타날지 모른다.
때문에 이계의 존재들은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절대자가 손을 들어 허공에 금빛 선을 하나 긋자, 선이 수 십 갈래로 나뉘며 각자의 영역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영역 하나 하나에는 어딘가의 모습이 영상처럼 드러나고 있었다.
“멸망의 탑에는 많은 회귀자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시간축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죠. 무수한 시간 속에서 유망한 플레이어를 찾아내는 것이 저희의 목적인 셈인거죠.”
영역 속에서는 드문드문 진영이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중에는 이미 죽은 플레이어 또한 있었다.
“독자적인 시간축의 관측. 우리는 이 모든 시간축을 뭉뚱그려 이계 시간축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수한 플레이어를 찾아 탑 공략을 기원하는 거죠. 이것이 우리가 가진 초월자를 뛰어 넘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수 많은 시간을 읽고, 찾아내어 가장 유망한 플레이어의 뒤를 봐준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플레이어의 뒤를 봐줄 수는 없다는 거죠. 저희의 힘은 한정된 자원이니까요. 맨 처음 당신을 발견했던 이계의 근원, 그 아이도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 탑의 주인들에게 우리가 위험한 존재라고 인식되서는 안되니까요.”
그 말에 진영이 눈빛이 깊어졌다.
진영의 탑을 공략하는 동안 이계의 존재들은 계속해서 진영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렌달과의 내기에서도, 유자벨과의 내기에서도. 초월자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힘을 보탰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네, 맞아요. 저희는 당신에게 모든 걸 걸고 있습니다. 당신이 단 한 번의 회귀로 보여준 모든 것에 말이죠.”
이계의 존재들이 진영에게 사활을 걸고 있다는 것.
“······.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지. 이 팔찌와 이계 규율은 대체 뭐지?”
진영이 팔찌를 들어 올렸다. ‘이계 규율 - 절대 회귀’. 신화준의 손에서 진영의 손으로 넘어 온 사기적인 아이템.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 * *
콰르릉!
진영 일행이 바닷속으로 들어 간 뒤 잠잠했던 바다 위로 푸른색의 번개가 내리쳤다.
“히익!”
갑판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토가 몸을 움츠렸다. 그 꼴에 유자벨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하, 관리자란 놈이 겨우 번개에 놀라다니. 웃기는군.”
“네 놈···.”
가토가 으르렁거리며 유자벨을 노려보았다. 관리자씩이나 되었던 그가 겨우 번개 따위에 놀랄 리가 없었다.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를 세 살 먹은 어린 애로 보는 것 같은데, 네 놈도 놀랄 수 밖에 없을 거다. 저 번개는···.”
“번개가 뭐? 네 자식이 겁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주마.”
유자벨의 이죽거림에도 가토는 대꾸가 없었다. 그저 바보 같이 입을 벌린 채 손가락으로 유자벨의 뒤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뭔데?”
스윽-.
가토의 손가락을 따라 뒤를 돌아 본 유자벨이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그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렸다.
“느긋해 보이는군. 가토, 유자벨.”
파지직.
온 몸이 새카맣게 타 든 청년이 가토와 유자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 새긴 푸른 문신이 새까맣게 탄 살 표면에서 빛나고 있었다.
“카, 칼몬님!”
“허억···.”
가토는 너무 놀라 여전히 말도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아무래도 네 놈이 실패한 것 같아서 이 몸이 직접 내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군. 왜 실패하고도 살아 있는 거지? 아예 찾아가지 않은건가?”
“아, 아닙니다! 싸웠습니다! 그런데 져서 관리자의 권한을 빼앗긴 탓에···.”
콰아앙!
귀가 터질 듯한 굉음과 눈이 멀듯한 섬광에 유자벨이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유자벨 눈을 떠라.”
“예, 옙···. 허억···.”
스으···.
눈을 뜬 유자벨이 신음을 삼켰다. 가토가 서 있던 자리에 새까만 재만 남아 있었다.
‘섬멸의 벼락···. 단단히 화가 나셨구만···.’
29층에서 이런 초월적 능력을 사용할 정도면, 칼몬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대체 왜 일개 플레이어한테 이렇게까지···.’
물론 이진영이 일개 플레이어 수준이 아니긴 했다. 그러나, 그가 초월자들을 위협하고 탑을 공략할 정도의 위인이란 말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유자벨이 결론을 내렸다.
‘그 놈은 그럴만한 놈이다.’
칼몬이 유자벨의 앞으로 다가왔다.
꿀꺽.
유자벨의 침 넘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 칼몬이 노기를 띈 채 물었다.
“이진영은 어디에 있지?”
초월자가 기를 쓰고 없애려고 하는 존재. 그는 이미 초월자 가레논을 물리치고, 유자벨 자신과의 내기에서는 승리했으며 가토를 짓눌렀다.
그렇다면 어디에 붙어야하는가?
거기에 더해 내기에서 지자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린 칼몬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 유자벨이 결정을 내렸다.
“······. 여기까지 배를 몰고 오라는 말만 들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번개가 내리칠 것만 같은 두려움. 그 앞에서 유자벨은 온 몸에 신경을 집중했다.
“끝까지 쓸모 없는 놈이군.”
콰아앙!
거대한 푸른 번개가 내리쳤다.
잔잔하던 바다에 강력한 충격이 일며, 방대한 양이 물이 솟아 올랐다. 유자벨을 노린 공격이 아니었다.
“거기서 망이나 보고 있어라. 그럴리는 없겠지만, 다른 초월자들이 올 수도 있으니.”
칼몬은 열린 바다의 바닥으로 뛰어 들었다.
그제서야 유자벨이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허억, 허억···. 어딨는지 알면서 물어봐? 저 개자식.”
* * *
팔찌를 확인한 절대자가 입을 열었다.
“그 팔찌는 신화준이라는 플레이어에게 제가 건네준 아이템이군요···. 모든 시간축에서 재능을 보여준 상당히 유망한 플레이어였죠. 회귀에 의존하다가 결국 파멸을 맞이 했지만요.”
절대자의 표정은 씁쓸해 보였다.
“그 팔찌 또한 이계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에게 의도하고 준 것은 아닙니다.”
“의도한 게 아니다?”
“이계의 힘을 부여하는 것은 이계의 존재들이지만, 그 힘의 발현은 플레이어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당신이 얻은 ‘탐욕의 왼손’도 마찬가지죠.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특성인 셈이죠.”
진영은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런거였나.’
애초에 이계의 존재들도 건네주는 물건을 선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탑의 규율을 뒤집을 만큼 강한 아이템에는 ‘이계 규율’ 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특성에도 이계규율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겁니다.”
[ 특성 : 이계 규율 - 탐욕(EX) ]
정보창을 확인한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이계 규율이란···.”
“이계의 힘을 사용하는 자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죠. 탑의 규율을 비틀었기에 생겨나는 또다른 제한. 거대한 힘을 사용하는 대신 짊어져야 할 규칙.”
“이건 정해져 있는 규칙 같은 게 아니라고 했었지.”
“맞습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개인만의 규율이죠.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탑을 공략해야합니다. 언제 이계의 규율이 당신을 덮칠지 모르니까요.”
필요한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일행도 차츰 격의 차이를 극복해 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염태준이 고개를 간신히 치켜 들고 말했다.
“잠깐만···. 어이. 네 말대로라면 지금 엄청난 게 하나 있는데.”
염태준이 힘겹게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회색 빛의 금속 고리. 해방된 보물이었다.
“모두 이거 아이템 정보 확인해 봐.”
“그런거였나···.”
그의 말에 따라 정보를 확인하는 진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아이템 : 이계 규율 - 영원 불멸의 고리(EX) ]
그 모습을 본 절대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5개의 보물도 전부 모으셨군요. 사실은 여러분들을 위해 안배 되었던 보물들은 아닙니다. 부끄럽지만 저희는 신화준이라는 사내의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로컬 에리어에 보물과 전설들이 배치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죠.”
“즉 당신네들이 보물을 숨기고 수수께끼를 조작했단 말이야?”
“맞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시간축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이 사용했던 아이템들입니다. 이계의 존재들이 모두 모였을 때, 탑 공략의 전조가 확연할 때. 그 힘이 빛을 발하도록 준비해 둔, 최후의 장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즉 다섯 개의 보물과 전설은 이계의 존재들이 숨겨 놓은 아이템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염태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다섯개 전부를 모으면 초월자가 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야?”
“보물이 가진 힘을 사용하면 가능합니다.”
“크으···. 그래! 역시 진짜였어!”
하지만 절대자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물론 모든 보물에 ‘이계 규율’이 새겨질만큼의 각성을 이뤄야 가능한 일이지만요. 아직은 그 시기가 많이 남았다고 볼 수 있겠죠. 이걸로 궁금한 것은 모두 해결 되셨나요? 그러면 이제···.”
그때였다.
콰과과광!
땅이 뒤흔들리며 강렬한 천둥소리가 대기를 찢어놓았다. 바깥에서 큰 소란이 일어난 듯 이계의 존재들이 달려 오고 있었다.
“절대자님! 큰일 났습니다!”
“초월자 칼몬이 쳐들오려고 하고 있어요!”
“문이 부숴지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그들의 외침에도 절대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긋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괜찮습니다. 이계의 근원과 감시자를 보내도록 하세요.”
“괜찮은겁니까?”
상대는 초월자의 분신이다. 관리자를 뛰어 넘는 무력을 가진 괴물.
“괜찮습니다. 이곳에 모인 존재들 또한 과거 멸망의 탑의 상층부에 올랐던 영웅들이니까요. 그보다 중요한 게 있죠. 당신의 활약에 걸맞는 보상. 그것부터입니다.”
스르르.
“25층을 공략하고, 관리자와의 내기에서 승리한 당신에게 말이죠.”
[ 이계의 절대자가 활약에 걸맞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아이템 : 이계 규율 - 가능성의 돌(EX) ]
금빛으로 빛나는 영롱한 돌멩이가 절대자의 손 위에 나타났다.
이계 규율 수식어가 붙은 가능성의 돌. 필시 멸망의 탑에 있는 가능성의 돌의 업그레이드 버전일 것이다. 그것은 아이템도, 스킬도 나올 수 있는 강력한 돌이다.
그러나 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템 받지 않겠어.”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엥?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요, 준다는데 왜 안받는거에요?”
이계의 절대자 또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진영의 마음은 확고했다. 탑을 공략하려면, 결코 받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힘을 건네준 이계의 존재들조차 예상하지 못할만큼의 성장을 거듭해야한다.
- 스틸
진영이 왼손을 뻗었다. 푸른 빛이 손을 타고 뿜어져나왔다.
[ 대상과의 압도적인 격차로 인해 아이템을 훔칠 확률이 매우 희박합니다. ]
푸른 빛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 탐욕의 왼손의 효과로 아이템을 훔쳐냅니다. ]
[ 특성 ‘이계 규율 - 탐욕’의 효과로 훔친 아이템의 성능이 상당히 좋아집니다. ]
진영의 손에 새로운 아이템이 잡혔다.
[ 아이템 : 이계 규율 - 확신의 보석(EX) ]
돌멩이가 아닌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찬란한 보석이 진영의 손에 쥐어졌다.
치직.
그 주변이 노이즈가 생긴듯 일렁거렸다.
“그럼, 초월자의 분신을 한 번 막으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