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의 절대자(3)
맹수의 감이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럴리가···.’
진영 일행을 바라보는 가토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성적으로는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는 위험을 느끼고 있는 상황.
‘그럴리가 없지.’
본능. 그것은 어떤 때에는 운 이상으로 승부의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하지만,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본능이나 감정 같은 부분을 뛰어 넘는 것은 결국 이성.
가토는 이성의 끊을 붙잡았다.
쉴 새 없이 울리는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고, 양 발톱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내가 질 리가 없지.’
유자벨의 패배는 어리석은 내기의 결과였을 뿐이다. 힘과 힘으로 맞붙게 된다면 관리자인 자신이 질 리가 없다. 이 시점의 플레이어는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26층이 그들이 오른 최고층이었으므로.
반면에 관리자인 가토는 수 백 년의 시간을 멸망의 탑에서 보내왔다.
쌓아온 시간과 경험의 레벨이 다른 것이다.
‘어차피 물러 설 곳도 없다.’
초월자의 명을 받았으니, 이 탑 어디에도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인 가토의 갈기가 마력에 넘실 거리기 시작했다.
찌릿한 마력이 근처의 대기로 퍼져나갔다.
‘볼만 하겠어.’
유자벨은 한 발 물러서서 이 싸움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른 층의 관리자이지만 일반 마수인 유자벨은 가토를 건드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격의 차이.
때문에 플레이어란 자들은 얼핏보면 편한 것이었다.
그러한 격의 차이를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곤 하니.
‘가토···. 네 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녀석을 응원하는 수 밖에.’
이진영이 가토의 손에 죽으면, 관리자의 권한은 살아남은 자 중에 가장 강한 유자벨에게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즉 가토의 승리는 유자벨의 승리이기도 했다.
‘이겨라, 가토.’
물론 이 승부에서 유자벨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 밖에 없었다.
반면 진영 일행은 가토를 마주함과 동시에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홀리 인챈트, 세이크리드 블레싱!”
빛의 사제인 김영훈의 버프 스킬이 중첩되어 일행을 감쌌다.
김지훈과 염태준은 각자의 무기를 든 채로 자세를 잡았다.
타앗!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이진영과 주오령이었다.
그 둘의 움직임이 완벽한 동시에 이루어졌다.
화르륵!
그에 맞춰 가토가 뿜어내는 마력이 불길의 형태로 변화했다.
“둘이서 덤벼든다고 뭔가가 바뀔 것 같느냐!”
콰앙!
주오령의 발차기와 가토의 발톱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 충격파에 다가오던 일행들이 모두 비틀거렸다.
공격을 교환한 주오령이 공중 제비를 돌며 땅으로 떨어졌다.
“호오···.”
보통 플레이어였다면 마력의 불길에 온 몸이 집어 삼켰어야 정상이었다. 맨발로 공격을 막아내고도 멀쩡하다니, 확실히 보통놈이 아니긴했다.
감탄하는 가토를 향해 주오령이 중얼거렸다.
“강하군.”
“!”
그 말에 가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토의 입장에서는 열받는 이야기였다. 고작 플레이어 따위에게 평가 받았다는 것이 가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강해? 네 놈이 감히 측정할만한 경지가 아닐텐데? 사지가 찢어져서도 그 말이 나오는지 봐주마!”
포효와 함께 그가 주오령을 향해 발걸음을 떼자 유자벨이 소리쳤다.
“가토! 이진영이 은신 스킬을 사용했다!”
“그런 건 보면 안다. 패배자인 네 놈이 어디서 훈수를 두는 거냐?”
유자벨의 조언을 일축한 가토가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오령과 함께 달려들었던 이진영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냄새도, 기척도 안 느껴지는군.’
하지만 특성 ‘맹수 왕의 본능’이라면 완벽한 은신 상태의 적 쯤은 별 것 아니었다.
콰득!
가토의 오른 발톱이 허공을 향해 휘둘러졌고, 그 본능은 적중했다.
발톱이 무언가에 걸린 듯 멈추었다.
적이 위치를 파악했다면, 거기서부터는 힘 싸움이었다.
드드득!
트럭이 내리 꽂히는 듯한 힘이 허공에 가해졌다.
“고작 생각한 게 은신이라, 가소롭군.”
남은 가토의 왼발톱이 공격이 진영이 있을 곳을 향해 휘둘러졌다.
* * *
오랫 동안 함께 해 온 무언가는 분명한 흔적을 남긴다.
가령 하나의 무기를 오랫동안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면, 그 무기의 무게와 형태는 고스란히 사용자의 감각에 남는다. 심지어는 사용자가 무기를 빼놓고 있을 때조차.
“맹수 왕의 본능 앞에서 은신 같은 잡재주가 통할 리가 없지!”
그게 이유였다.
맹수왕 가토가 자신의 특성을 빼앗긴 순간에도, 자신의 본능을 믿고 손톱을 휘두른 것은.
카가가각!
불꽃 형태로 넘실대는 마력이 실린 발톱이 통로의 벽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벽을 뒤덮을 정도로 깊고 커다란 세 개의 발톱 자국.
‘잡았다!’
일련의 동작들이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그러나 진영은 가볍게 피해냈다.
[ 관리자 가토의 특성 ‘맹수왕의 본능’을 훔치셨습니다. ]
[ 특성 ‘탐욕’의 효과로 훔친 특성이 상당히 좋아집니다. ]
[ ‘맹수왕의 본능’이 ‘절대 육감’으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
[ 훔친 특성은 24시간 동안 유지 됩니다. ]
진영이 가진 여섯번째 감각이 안전한 장소로 진영을 미리 유도했다.
“쓰러뜨렸군.”
아직 본능이 건재하다고 믿는 가토가 이른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주오령이 곧바로 달려 들었지만 가토의 발톱을 뚫을 순 없었다.
콰과과과!
발톱에 튕겨난 주오령이 바닥을 부수며 밀려났다.
“치유를!”
“아뇨! 치유하면 안돼요!”
김지훈이 김영훈에게 소리쳤다. 주오령의 특성인 ‘광폭화’가 발동되려면 체력이 일정 수준 이하가 되어야했다. 섣부른 치료는 오히려 방해였다.
주오령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리를 확신한 가토는 흉측한 미소를 지었다.
“별 것도 아니군! 모두 죽여주마. 유자벨, 안타깝게 됐어. 내가 초월의 좌에 먼저 오르게 될 줄이야.”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유자벨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뒤! 뒤를 봐, 이 멍청아!”
그 외침과 동시에 진영의 단검 ‘던 브레이커’가 가토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허헉!”
입에서 피를 쏟아낸 가토가 급하게 진영의 칼날에서 빠져나왔다.
‘어, 어떻게 살아 있던 거지?’
심장을 꿰뚫렸으나 가토 특유의 재생력 덕분에 당장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정신을 차린 가토가 다시 한 번 진영을 찾아 본능을 끌어 올렸다.
‘모, 모르겠다. 이게 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믿고 있던 본능에 따르면 진영은 이미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상대는 살아 있었다.
그 순간부터 가토가 믿고 있던 본능이란 감은 박살나고 말았다. 애초에 허상이었던 것이다. 훨씬 전부터 그에게 ‘맹수왕의 본능’ 특성은 없었으니까.
“정신차려라! 이진영은 스킬과 특성을 베낄 수 있어!”
“아니, 그게 무슨···.”
유자벨의 착각은 가토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거랑 내 본능이 사라진 거랑 무슨 상관인데?’
촤아악!
진영의 검격은 무자비하게,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쏟아졌다.
불꽃 형태의 마력을 둘러 경감 되어야 할 데미지가 온전히 들어오고 있었다.
“크아악! 이 자식!”
진영의 검을 둘러 싼 것은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최상급 검기인 오러. 한 번 한 번이 가토의 마력을 뚫고 들어 오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커허헉!”
특성과 달리 훔친 스킬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드마스터에게서 훔쳐 온 ‘소드 오러’와 먼치킨에게서 훔쳐온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진영을 보조 하고 있었다.
현재 진영의 능력치는 7단계인 전설 이상.
관리자에게 맞서 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능력치였다.
푸욱! 푸욱!
그 뒤로 펼쳐진 것은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의 보이지 않는 공격.
반격하기 위해 발톱을 휘둘러봐도 무의미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훔친 특성으로 육감을 개방한 진영에게는 어림도 없는 공격이었다.
털썩.
수 차례의 검격을 몸으로 받아낸 가토의 거구가 힘 없이 꺾였다.
* * *
“일어나라.”
진영의 목소리에 가토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온 몸의 상처가 욱신 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가토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를 왜 살렸지···?”
가토가 쓰러지자, 진영은 김영훈에게 가토를 회복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대답해 줄 것 같나?”
가토의 시야에 유자벨의 모습이 들어왔다. 방금 전 자신의 편을 든 탓인지 매우 두들겨 맞은 모습이었다.
절레절레.
유자벨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관리자의 꼴이 이렇게 처참하다니. 가토는 고개를 저었다.
‘유자벨이 멍청해서 진 게 아니었어. 이 남자가 가진 힘은 이미 우리 관리자의 손을 떠나 있다.’
이윽고 가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영이 물었다.
“어떤 초월자가 보낸 거지? 아니, 누군진 알고 있다. 푸른 달의 악마의 진명을 밝혀라. 그러면 살려주겠어.”
“······.”
수 백, 수 천 년을 살아 왔을 수록 삶에 대한 집착은 강할 수 밖에 없다. 특히 관리자들은 그 중에서도 특출난 존재들. 모든 마수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자들이다.
“그의 진명은 초월자 칼몬이다.”
가토는 살아남기를 택했다. 조금이라도 삶을 연장하는데에 걸었다. 그 대가로 당분간 초월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야하겠지만.
“칼몬이라···.”
그 이름을 듣는 이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너를 죽이라며 나를 내동댕이 치더군. 아마 30층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다. 목숨이 아깝다면 올라가지 않는 게 좋을거야.”
“그렇군···.”
“······?”
초월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데도, 진영의 태도에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는 듯한 모습에 가토가 헛웃음을 지었다.
“네 놈 두렵지 않나? 아니면 초월자가 멸망의 탑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 모르나?”
“가토···. 이진영님은 회귀자시다. 네 놈이 어줍잖게 그릇을 잴 분이 아니시니, 입 닥쳐라.”
실컷 두들겨 맞고 정신 개조를 당한 유자벨이 가토를 나무랐다. 진영조차 태세 전환에 혀를 내두를 정도.
어쨌든 가토의 말대로 초월자는 보통 존재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대비책이 있어야 했다.
‘30층이라면 본체가 강림할 순 없을테고···. 아마 분신이겠군.’
자연스레 진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초월자의 분신은 결코 약하지 않다. 20층에서 마주했던 그렌달의 분신은 그저 모습을 드러내는데서 그쳤다면, 칼몬의 분신은 전투를 상정한 상태일 것이다.
‘나혼자 이길 확률은······.’
99층까지 오르며 초월자의 본체조차 직접 마주해 본 적 있는 진영이었기에 알 수 밖에 없었다.
‘희박하다.’
성좌 푸른달의 악마. 그가 칼몬이라는 초월자였다. 즉 이미 진영이 사용하는 능력까지 어느 정도 꿰뚫고 있다는 말.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에 맞는 대비를 해뒀겠지.’
그 적절한 대비에 대해서 진영은 어느 정도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뭉친다면···.’
동료들의 면면을 훑은 뒤, 진영은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녀석들을 향한 시선이었다.
‘이길 수 있다.’
[ 모든 이계의 존재가 당신의 압도적인 활약에 만족합니다. ]
[ 모든 이계의 존재가 당신에게 보상을 제공하고 싶어합니다. ]
[ 이계의 절대자가 히든 플레이스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
그들의 우두머리인 이계의 절대자에게 이진영이 확답을 받는 순간이었다.
29층.
그곳의 히든 플레이스는 이계 존재들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물론 이길 수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7층의 히든 플레이스가 이계 외곽이었다면,
29층의 히든 플레이스의 이름은 이계 중심부.
‘탑이 공략되기를 원한다면, 녀석들도 그만한 보상을 준비해 놨겠지.’
진영으로 하여금 탑이 공략되기를 바라는 이계의 존재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훔쳐서라도 가져와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