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의 절대자(2)
26층 공략 이후, 27층으로 바로 올라가려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26층의 공략은 온전히 진영 일행의 것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다음층으로 올라가 보았자, 자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진영 일행만이 남았을 때 유자벨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절 따라와주시면 됩니다.”
기죽은 목소리의 유자벨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27층으로 향하는 포탈 옆에 숨겨져 있던 문 하나가 빙글 돌며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가 지름길이구만.”
“그러면 몇 층으로 이어져 있는거죠?”
“29층입니다.”
김지훈의 물음에 유자벨이 대답했다. 너무 공손한 대답이었기에 오히려 소름이 끼칠 정도.
“설마 이 녀석 갑자기 달려들거나 하지 않겠지?”
염태준이 기겁을 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유자벨이 눈을 번뜩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물론이죠, 전 어디까지나 이진영님의 하수인이니까요.”
관리자직을 빼앗겼다고 하나, 유자벨이 가진 힘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힘으로 따디면 70층 이상에서나 볼 법한 마수였다.
“유자벨, 앞으로 나와 일행을 포함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해를 끼치지 마. 내 관리 구역을 벗어나지도 말고.”
“크윽···. 알겠습니다.”
반항적인 기세가 진영의 말 한 방에 누그러졌다.
관리자를 처치했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이건 거의 관리자를 길들인 수준 아닌가.
“그래도 이런 게 진짜 가능할 줄이야.”
염태준이 혀를 내둘렀다.
피식 웃음을 지은 진영이 주오령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주오령 너는 어쩔거지?”
주오령의 목적은 진영과 같다. 멸망의 탑을 공략하는 것.
그러나 그 공략이 모든 층의 보스를 잡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실제로 녀석은 20층을 건너뛰어 25층을 올라 온 뒤, 공략을 거치지 않은 채 26층에 미리 올라와 있었으니까.
‘확실히 이 녀석은 무언가가 다르다.’
주오령이 지나간 흔적으로 그의 위치를 파악하기는 했으나, 공략하지 않은 층을 넘어가는 것은 본래대로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99층 앞에 서 있던 최후의 6인이 열쇠를 찾아 헤멜 이유도 없었다.
“파트너를 따라가도록 하지.”
주오령의 선택은 이진영과의 동행이었다. 진영을 바라보는 주오령의 눈에는 어쩐지 생기가 돌아온 듯도 했다.
“좋아, 그러면 출발하자.”
일행은 유자벨의 안내를 따라, 숨겨진 지름길로 이동했다.
어두컴컴했던 그곳으로 진영이 발을 들이자마자 순식간에 푸른 불꽃들이 길을 밝혔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복도.
이어지는 유자벨의 설명에 일행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다양한 함정이 있습니다. 당연히 마수도 굉장히 많구요. 관리 구역 내에서도 관리가 잘 안되는 놈들을 여기에 모아놨습니다. 흐흐.”
유자벨은 앞으로 여길 헤쳐지나갈 진영 일행을 생각하며 기분 나쁜 미소를 흘렸다.
지나갈 수는 있어도 상당히 귀찮은 작업이 되리라.
“확실히···. 숨어 있는 놈들이 장난아니네. 드럽게 많은 건 둘째치고 드럽게 사나워 보이네.”
“관리자의 명령도 지성이 있는 놈들일수록 잘 먹히는 법인데, 이 놈들은 제대로 된 지성도 없어서요. 꾸역꾸역 숨겨두다보니 이리 됐습니다.”
26층부터 29층을 단번에 잇는 지름길.
회귀 전 이곳은 비탄의 길이라는 이름이 지어질 정도로 악명 높았다.
겁 없이 들어간 클랜 몇 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뒤로 드문드문 도전하는 플레이어들조차 집어 삼킨 길.
“확실히···.”
유자벨의 말대로 뚫고 가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성가신 난이도였다. 체력 소모는 물론 일행의 부상까지 감수해야했다.
그때였다.
타앗!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주오령이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저 놈은 진짜 여전하네···. 나오는 마수랑 함정을 생각하면 까마득한데. 그걸 그냥 달려가버리네.”
함정과 마수들의 위치가 파악되는 염태준이 기겁을 하며 손을 저었다.
무엇이 있든 앞 뒤를 가리지 않고 부수고, 돌파한다. 그게 주오령의 스타일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영이 유자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자벨 뭘 구경하고 있는거지?”
“예?”
진영은 손가락으로 주오령을 가리켰다.
“주오령보다 늦으면 죽는다.”
“!”
일행의 고생을 지켜볼 생각에 웃음기가 서려있던 유자벨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오령은 그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사라져 있었다.
그 뒤를 유자벨이 허겁지겁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 지금 멸망의 탑 1층 하늘이 무너질 것 같다던데, 누구 아는 사람?
- 그게 뭔 소리야? 하늘 왜 무너져.
- 진짜임. 1층 에리어 전체 하늘 지금 거미줄처럼 검은 선으로 갈라져있슴.
멸망의 탑 내부의 커뮤니티에서도 불길한 징조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 멸망의 탑 붕괴 전조? ]
[ 독점 취재 : 무너질 것 같은 1층의 하늘 ]
[ 멸망의 탑에 일어난 이변의 이유는? ]
탑 내부에서 발행되는 기사들을 시작으로, 바깥의 일반 사람들에게도 그 전조는 널리 알려졌다.
문제는 그러한 내용보다 충격적인 기사들이 이미 바깥에서 돌고 있었다는 것.
가장 빠른 소식은 인터넷에서부터였다.
- 대박. 멸망의 탑 벽에 지금 금갔음ㅋㅋㅋㅋㅋ
- 뭐임? 진짜네. 우리 동네에 있는 탑도 장난 아니네ㄷㄷ
- 탑이 무너지는 거야?
세계 곳곳에 위치한 멸망의 탑 외벽에 거미줄과 같은 금이 가득하다는 이야기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 멸망의 탑 무너지면 그대로 마수들 다 쏟아지는 거 아니야?
- 그 안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됨?
- 세계 멸망할 것 같아서 전재산 정리하고, 벙커들어왔다. 질문 받는다.
ㄴ 망하긴 뭘 망함ㅋㅋㅋ
ㄴ 헌터도 있고, 플레이어들도 있는데 탑 무너진다고 별 일 남?
그러나 그저 화제의 선상에서 그칠 뿐,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지는 못했다.
징조는 징조에 불과했다.
실수로 가스 밸브를 잠그지 않았다거나, 건물의 한 쪽에 금이 갔다거나 해서 그것이 바로 재난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화재가 나고,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당장 문제가 생기는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바깥은 평화로웠다.
헌터들에 의해서 게이트가 관리되는 상황이 너무나 익숙해졌기에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변함 없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현 시간부로 까마귀 길드는 자체 비상 사태를 선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1위 길드의 마스터 임재천 그는 달랐다.
“최근 들어 늘어나기 시작한 게이트의 양과 이번 멸망의 탑의 붕괴 징조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회귀자 이진영으로부터 들었던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날 거다.”
길드원들을 모두 불러 모은 임재천의 눈빛은 어느때보다 진지했다.
누군가에게는 엄살처럼 보일 수도 있는 소집이었지만, 까마귀 길드원들은 임재천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탑이 무너지고, 마수가 쏟아져나오며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우리 까마귀 길드는 준비하고 대비할 거다.”
이진영이 알려준 사실이 맞다면 이후 일어날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곳은 자신들 뿐이었다.
“만약 일어날 최악의 상황에 당황하지 않도록, 우리가 모든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이진영, 그에게서 들었던 미래는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 임재천은 두려워하기보다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음 속에서는 이미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나 있었다.
임재천의 눈은 그 어느때보다 강한 각오로 빛나고 있었다.
* * *
콰아앙!
거대한 폭발이 통로를 휩쓸었다.
구멍 사이에 숨 죽이고 숨어 있던 마수들이 일제히 쓸려나갔다.
“허억, 허억···.”
유자벨이 숨을 몰아 쉴 정도로 많은 마력이 소모 된 공격이었다.
그러나 통로 안에 숨은 마수의 수의 일부를 제거 했을 뿐.
관리자였던 유자벨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지름길이었기에 더 잘 알고 있었다.
‘방금 공격으로 백 마리를 잡았으니, 남은 수가 4천 4백인가···.’
겉보기에는 단조로운 직선 통로 사이에 숨어진 틈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한 마력을 쏟아부어도 한 번에 정리되지 않았다.
콰앙! 콰앙!
거기에 더해 유자벨의 뒤를 바짝 따라오는 플레이어 하나.
주오령.
그는 수 많은 함정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부숴내고, 달려드는 마수조차 한 번에 박살내며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저 새끼는 나보다 더한 괴물이다.’
지금에 이르러 유자벨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진영 그는 플레이어의 수준을 뛰어넘은 존재라고. 그러나 그의 동료인 주오령. 저 플레이어의 무력은 대체 뭐란 말인가?
‘뒤쳐졌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관리자 권한을 손에 넣은 이진영은 유자벨에게 어떤 일이든 행사할 수 있었다.
주오령보다 뒤쳐져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받은 이상 유자벨은 최선을 다해야 했다.
“허억, 천천히 좀 와라!”
유자벨의 소리를 들은 건지, 주오령이 잠시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후우···. 그래, 인간이면 인간답게 휴식도 취하고, 요깃거리도 하고 와야할 거 아니야.”
잠시 쉴 틈이 생기자 유자벨도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물이라도 마셔야할 타이밍이었다.
이제야 좀 쉬는구나 싶은 그 때.
파바바박!
쉬고 있던 주오령이 미친듯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유자벨은 허공에서 꺼냈던 물병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서는 다시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유자벨?”
마력을 허공으로 응집 시켜 쏘아내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유자벨이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가토···. 네 놈이 왜 여기에?”
30층의 관리자, 사자 수인 가토가 유자벨의 앞에서 있었다.
애초에 이곳은 유자벨의 관리 구역이다. 탑의 규율에 따라 다른 관리 구역의 관리자가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멀쩡히 여기에 왔다는 것은···.
“초월자께서 극성이시더군. 네 놈 덕분에 나까지 죽는 줄 알았다. 그보다, 너···. 꼴이 말이 아니구만 그래. 그 유자벨이 플레이어의 개가 되었을 줄이야. 멀리서보니 무슨 경주라도 하나본데.”
유자벨을 쓱 훑어보던 가토가 비웃음을 지었다.
힘적인면에서 훨씬 부족한 가토였지만, 유자벨이 관리자의 권한을 잃은 지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피하는 게 좋을거다.”
그의 조롱에 유자벨은 딱 한마디를 했다.
“왜? 치기라도 할 건가? 네 놈 때문에 내가 억지로 내려온 걸 생각하면 이 정도 조롱으로는 부족하지.”
가토가 이죽이며 유자벨에게 머리를 들이대는 그 순간이었다.
퍼억!
뒤쪽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던 주오령이 내지른 발차기가 가토의 얼굴에 꽂혔다.
콰과과!
발차기에 실린 힘은 가토가 바닥을 수 십차례 구른 뒤에야 멈출 수 있게 했다.
대자로 뻗은 가토는 눈만 껌뻑였다.
“?”
플레이어의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힘에 놀란 탓이었다.
벌떡.
가토가 단숨에 자리에 일어났다. 대충 상황이 파악 되는 것 같았다.
“네 놈이 이진영이구나. 잘 만났다.”
이진영에게 당한 유자벨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상당한 힘이었다. 26층 언저리에 있는 플레이어가 가질 수 있는 힘의 범주가 아니었다.
‘유자벨은 바보 같은 내기라도 했나보군. 힘을 상정하지 못했다면 졌을 법도 해.’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의 플레이어. 확실히 강하기는 하지만 관리자와 맞붙었을 때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봤자, 플레이어. 힘으로 찍어누르면 거기서 끝이지.’
가토의 양 손에 보랏빛 마력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가토의 관리 구역이 아니다. 때문에 플레이어게 힘을 사용하는 것은 규율을 어기는 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관리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이진영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대등한 싸움이라면 플레이어가 관리자를 이길 순 없다.’
쌓아 온 힘의 차이가, 시간의 벽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가토의 주먹에 마력으로 불꽃의 형상이 빚어졌다.
그때였다.
“어, 자, 잠깐. 저건···.”
“사자 모습이네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뒤이어 나타난 진영 일행이 나타난 것은.
‘저 놈은···.’
진영은 가토를 확인하자마자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30층에 있어야 할 놈이 여기에 있다는 건 뻔하군.’
초월자의 명령을 받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왔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진영은 곧바로 신화급 단검 ‘던 브레이커’를 꺼내들었다.
그제서야 가토도 무언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이, 이상한데?’
일행을 훑어보던 가토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그가 가진 특성 ‘맹수 왕의 본능’이 미친 듯이 발동되고 있었다.
‘도, 도망쳐야할 것 같다. 왜지?’
가지고 있는 능력치, 특성, 스킬까지.
모든 게 압도적인 우위에 있을텐데도.
도망가라.
가토의 특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