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4)
[ 다수의 성좌들이 현재의 난이도가 너무 어렵다고 불평합니다. ]
메시지가 떠올랐을 때, 유자벨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착각할 정도.
유자벨은 위조 성좌들에게 현재의 난이도가 너무 쉽다며 불평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야 난이도를 올려도 유자벨이 지는 리스크가 사라지므로.
탑은 관리자들이 적절한 난이도를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멋대로 난이도를 올리거나, 플레이어들을 죽였다가 그 책임은 온전히 관리자가 지게 된다.
그런 리스크를 회피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성좌들이었다.
‘뭐지?’
성좌들이 원한다면 관리자가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는 사라진다.
그렇기에 유자벨은 붉은 팔찌를 통해 성좌들의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난이도를 마음껏 상승 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 성좌 이계의 근원이 불합리한 난이도 개입에 분노합니다. ]
그것과 명백히 반대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나도 아니고, 수 십 아니 백에 달하는 성좌들이 메시지를 보내오기 시작한 것이다.
[ 성좌 이계의 감시자가 어려운 난이도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
그 대다수는 이계의 존재들이었다.
평소에는 죽은 듯 눈에 띄지도 않게 살아가던 그들.
유자벨의 인식에 그들은 탑의 찌꺼기에 불과했다.
그랬던 놈들이 자신이 26층의 난이도를 올리려하자마자 들고 일어났다.
“네, 네 놈···.”
위조 성좌들의 수와 비등, 아니 그 이상의 수가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정신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의 수에는 유자벨조차 혼란스웠다.
[ 다수의 성좌들이 불만을 표시합니다. ]
[ 탑의 규율이 난이도 변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
“허, 웃기지마라!”
다시 한 번 유자벨의 붉은 팔찌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 다수의 성좌들이 난이도 상승에 찬성합니다. ]
[ 성좌 푸른 달의 악마가 가세합니다. ]
그러나 유자벨이 의도한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 다수의 성좌들이 난이도 상승에 반대합니다. ]
[ 성좌 이계의 감시자가 동의합니다. ]
반대편의 메시지가 끝 없이 올라온다.
유자벨은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젠장, 이러면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조금도 없는데.’
이진영의 무력을 과대평가하고도 유자벨이 당당하게 내기를 받아들인 이유.
그것은 자신이 판을 쥐락 펴락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위조 성좌들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고, 진영을 궁지로 몰아 넣을 수 있다는 관리자로서의 긍지.
그런 긍지가 이계 존재들 앞에서 산산히 부숴지고 있었다.
[ 성좌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 멸망의 탑은 관리자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과반수가 넘지 않는 경우에는 현상유지.
성좌들의 편애나 독단을 막기 위한 시스템이 유자벨의 발목을 붙잡았다.
‘젠장···. 이렇게 되면 다소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직접 개입한다.’
[ 멸망의 탑이 관리자 유자벨에게 제재를 가합니다. ]
콰지직!
붉은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유자벨의 남은 한 쪽 팔을 거세게 태우기 시작했다.
스파크는 계속해서 유자벨을 뒤덮었다.
“크으윽···!”
[ 소드 마스터 ‘그란’의 능력치가 비정상적으로 향상 됩니다. ]
카앙! 카앙!
줄곧 밀리고 있던 그란이 진영을 상대로 분발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발이 한자국씩이지만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놈을 못 막으면 어차피 끝이다.’
26층에서 가장 강한 것은 지금 진영이 상대하고 있는 소드마스터 그란이다.
여길 넘어가면 이진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사라진다.
고오오···.
유자벨이 손 안으로 둥글게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소 직접적이더라도, 여기서 끝을 봐야했으므로.
‘내가 얻을 것들을 생각하면, 당장 초월의 좌에는 오르지 못하더라도 이게 이득이다.’
그때였다.
유자벨과 진영의 앞으로 두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중간보스 보우마스터 릴리가 처치 되었습니다. ]
[ 중간보스 엘레멘탈 마스터 메이자가 처치 되었습니다. ]
이진영에게 신경 쓰느라 잊고 있었던 다른 중간 보스들.
그들 모두가 죽음을 맞이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진영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지.”
푸욱!
진영의 붉은 단검이 소드 마스터의 심장을 관통했다.
* * *
26층의 중간 보스 셋을 쓰러뜨리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진영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관리자의 존재였다.
‘만약 유자벨이 나에게서 시선을 떼어낸다면, 상황은 급격히 악화 될 수 있다.’
플레이어, 진영 일행 그리고 진영.
이렇게 세 개로 나뉘어져 각각의 중간보스를 사냥할 수 있을 때가 최적의 상황.
유자벨이 다른 곳에서 중간 보스의 공략을 저지하고, 그들을 한 곳으로 규합하는 게 진영이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진영은 얼마든지 유자벨의 농간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다른 곳은 달랐으니까.
그러나 유자벨은 진영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장소를 신경쓰지 못했다.
이계 존재들의 갑작스런 난입도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에 적절했다.
그 결과 세 명의 중간보스는 모두 처치되었다.
“남은 건 보스 뿐이군.”
스윽-.
진영이 중간보스의 손에 끼어진 공허의 반지를 빼내었다.
[ 아이템 설명 ]
이름 : 공허의 반지
등급 : 신화
효과 : 착용자의 모든 스킬에 대한 효과 1.5배
‘이건···.’
담백한 효과였지만, 어떠한 스킬에도 1.5배의 효과를 부여하는 사기적인 반지였다.
회귀 전에도 본 적 없는 신화급 아이템.
‘유자벨 나름대로는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인데.’
소드마스터는 스킬을 모두 진영에게 빼앗겼다.
스킬 관련된 아이템을 받았다고 한들, 부질 없는 짓이었다.
현재 EX급의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 진영이 가질 수 있는 스킬의 갯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 공허의 반지를 장착합니다. ]
진영은 그제서야 유자벨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소모전이 되겠군.”
그 한마디에 유자벨의 손이 떨렸다.
유자벨로서는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그가 초월자가 되기 위해 쌓아 올렸던 힘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진영을 상대할 수조차 없었다.
내기의 보상인 관리자의 권한을 내놓는 것 또한 그가 멸망의 탑에서 가지는 힘을 던지는 것.
“네 놈···.”
유자벨의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여지껏 플레이어들을 구경하며, 아무런 리스크 없이 힘을 축적해 온 유자벨이 자신의 손으로 리스크를 짊어져야했다.
그 부담감이 보통일 리가 없었다.
‘이 내기에서 지면 탑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절대 질 수 없어.’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탑의 상층부에는 위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플레이어들을 상대해야하는 보스가 되거나, 그 끄나풀이 될 확률이 컸다.
관리자에서 한 순간에 평범한 마수가 된다니,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마지막 보스···.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붓도록 하지.”
남은 것은 2일.
자신의 마력과 보스가 소환하는 소환수들을 잘 이용한다면 시간을 끄는 것은 가능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자벨이 등을 돌리려는 찰나, 이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보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
유자벨이 다시 뒤돌아 보았을 때 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자벨의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공간 분절.”
20층을 공략할 때 썼던 분절의 목걸이가 유자벨을 아공간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관리자와 플레이어.
이 둘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당연하다.
게임으로 치자면 플레이어는 말 그대로 게이머.
관리자는 멸망의 탑이라는 게임의 운영자나 다름 없다.
- 탑 내에 편법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어려운 길을 사서 가는 이유?
플로어에 존재하는 미션에서 플레이어들이 엇나가지 않도록, 게임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관리자다.
- 관리자 때문이지. 뭐겠어. 그 놈들만 없어도 멸망의 탑 공략이 배는 쉬워질 걸.
이런 관리자들의 힘은 플레이어들을 압도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멸망의 탑에서 시행되는 다양한 미션을 공정하게 굴릴 수 없을테니까.
- 그나마 관리자들도 정해진 규칙을 지킨다는 것 정도가 위안으로 삼아야할 부분이려나.
관리자라고 해서 마음대로 플레이어들에게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부분이 진영이 노린 부분이었다.
‘관리자들은 플레이어를 이유 없이 공격하지 못한다.’
그것은 명백한 탑의 규율이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반면 플레이어가 관리자를 공격하는 것은 자유롭다.’
물론 공격 받은 관리자가 가만히 있을리가 만무.
공격 받은 관리자는 플레이어들을 처벌할 권리가 생긴다.
그러나 맨 처음 공격만큼은 플레이어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 무슨 짓이지? 지금 나랑 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20층 레드 게이트 내부에서 사용했던 분절의 목걸이. 그 목걸이의 전용 스킬을 사용해서 유자벨을 아공간에 가두었다.
즉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진영과 유자벨 둘 뿐이라는 의미.
“그렇다면 어쩔거지?”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유자벨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녀석의 붉은 눈이 분노의 감정으로 이글거렸다.
“플레이어 주제에 관리자에게 대들어?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군. 당장 풀지 못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짙은 마력이 깔렸다. 초월의 좌에 오르기 직전인만큼 녀석의 목소리도 진언에 가까워져 있었다.
“풀 생각은 없다. 날 죽이고 싶다면 죽여도 좋다.”
“감히 이 새끼가!”
살기가 가득한 마력을 내뿜고는 있지만 유자벨은 진영을 공격하지 못했다.
“왜 그러지? 날 죽이면 내기에서도 자연스레 승리할텐데?”
유자벨은 머리 끝까지 차오른 분노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차마 공격은 할 수 없었다.
잃어야하는 힘의 차원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손을 슬쩍 들어 올리기만해도 거센 저항감이 들자.
이내 유자벨이 고개를 숙였다.
“······. 네 놈에게 이런 수가 있었을 줄은 몰랐군.”
자신과 관리자를 아공간에 가둔다는 절묘한 방법.
규율은 절묘하게 유자벨이 처벌할 수 있는 범위를 비껴가고 있었다.
유자벨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이제 어쩔 거지? 나를 죽이기라도 할 건가?”
진영이 일격에 유자벨을 죽이지 못한다면, 관리자로서 진영을 처벌할 권리가 생긴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흠칫.
그 말에 유자벨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앞서 유자벨이 했던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거기에 만약 진영이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라면···.
충분히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때문에 유자벨은 가만히 있기를 택했다.
‘가만히 있기만해도 시간은 흐른다.’
이진영은 자신의 일행이 26층을 클리어하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해 클리어할 수는 있다. 그들의 일행도 나름대로의 힘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남은 2일 안에 클리어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적어도 1주일.
보스 공략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를 가둬놓고, 변수를 차단하려는 모양이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자벨의 표정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이때까지도 유자벨은 자신이 놀아나고 있다고는 생각 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관리자고, 녀석은 플레이어이기에.
팅!
그 때였다.
그 편협한 생각을 뚫고 메시지 하나가 떠오른 것은.
[ 26층의 보스가 공략 되었습니다. ]
[ 플레이어 이진영과의 내기에서 패배하셨습니다. ]
[ 내기의 승자 : 이진영 ]
“······!”
경악, 경악을 넘어선 공포. 유자벨은 눈을 깜빡이며 진영을 바라보았다.
아공간에 들어 온지 고작 몇 분.
그 동안 이진영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유자벨의 절규가 아공간 내부를 울렸다.
[ 탑의 규율이 내기의 결과를 집행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