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 성좌들의 밤(4)
초월자들은 셀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왔다. 그 동안 새롭게 초월의 좌에 오르는 자도 있으며, 격을 유지하지 못한 채 떨어지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다양한 성격의 초월자들이 존재하는 건 당연했다.
대부분은 성좌 놀음은 진작에 졸업하고, 각자의 목적을 추구하기 바빴지만 개중에는 그 성좌 놀음을 좋아하는 초월자도 존재했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시몬에게 걸린 미션을 확인하는 유자벨이 미소를 지었다.
욱신거리던 눈가의 상처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초월자가 직접 이진영을 잡으라는 미션을 걸 줄이야. 이거 손 안대고 코 푸는 게 가능해 지겠어.’
초월자들은 이미 유자벨이 위조 성좌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성좌들을 이용해 이진영을 죽이려 했다면, 그야말로 부자연스런 상황.
그러나 지금은 초월자가 직접 미션을 건 상황이었다.
‘이진영 그 놈이 시몬을 자극한 게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유자벨에게 책임이 전가 될 일은 이제 없었다.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 괜찮아졌다.
‘이제 시몬 그 놈이 이진영을 죽일 수 있게 상황을 만들기만 하면 되겠어.’
문제는 자신의 주인을 제외한 두 명의 초월자.
그 둘이 어떻게 나오느냐였다.
‘설마 이진영을 감싸고 도는 초월자는 없겠지.’
이진영은 그렌달을 초월의 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런 플레이어의 편을 드는 놈이 있다면 그야말로 별종이었다.
‘하긴 여기까지 내려와서 성좌질을 하는 것 자체가 별종들이긴하지. 그것까지 고려해서 시몬놈을 도와야겠어.’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의 주인도 특이한 초월자긴 했다. 고작 플레이어 하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판은 깔아졌다. 이제는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기만 하면 됐다.
초월자의 경지가 머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며 두 손을 비빈 유자벨이 플레이어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마수들이 쏟아집니다! 어디 한 번 살아남아 보시죠!”
중앙의 여신상 근처에 생겨난 포탈을 타고 마수 무리가 물 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합 7천마리나 되는 마수의 파도가 스테이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유자벨은 시몬이 있는 방향을 주시했다.
초월자들의 눈에 티가 나지 않도록 강력한 마수들을 그 쪽으로 배치했다.
동시에 이진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성좌들의 여론을 조작해야했다.
[ 성좌 붉은 달의 공주가 플레이어들을 응원합니다. ]
[ 성좌 숲을 가로막는 성벽이 몇몇 강자를 눈여겨 봅니다. ]
관리자 유자벨의 붉은 팔찌가 빛나자, 위조 성좌들이 조작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 성좌 영원히 타오르는 꽃이 이진영 플레이어의 강력함에 주목합니다. ]
초월자는 작정하고 이진영을 죽일 모양이었다.
스테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플레이어를 향한 메시지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이진영? 이진영이 어딨어?”
“성좌가 인정할 정도면 그 사람하고 있으면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나 플레이어들이 주위를 아무리 두리번 거려도, 이진영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허공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는 유자벨조차 진영을 찾을 수 없었다.
‘뭐야? 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야?’
* * *
“제기랄 어디에 있는거야?”
콰직!
다크 울프의 머리통을 부수며 시몬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도무지 안보입니다.”
“그 놈하고 같이 있던 놈들도 전부 사라졌습니다.”
클랜 멤버들도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진영 일행은 증발한 듯 사라져있었다.
“이 허허벌판에서 숨을 데가 어디에 있다고···.”
그의 말대로 이곳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넓게 펼쳐진 공터. 보이는 것은 바닥과 밤하늘 그리고 마수 뿐이었다. 쏟아지는 마수들에게 이미 산채로 잡아 먹힌 게 아니라면, 진영 일행의 모습이 보여야 했다.
서걱-!
“설마 내가 받은 미션을 알아채기라도 한건가?”
스무 마리째 마수를 베어낸 시몬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니,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몬이 받은 미션을 다른 성좌가 확인하고 진영에게 알려줬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래, 아예 작정을 하고 숨어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모습이 안 보일 리가 없다.
특수한 스킬이나 아이템을 사용했다면 자신의 눈으로 찾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좋아, 숨어 있단 말이지.”
마수 사이에서 생존하는 미션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에스프리 클랜도 첫번째 시련을 지나는 동안 많은 후원을 받았고, 이제는 능력치가 상당히 상승했다.
죽어라 마수를 사냥하는 것도 익숙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에스프리 클랜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렇지 못했다.
마수들에게 쓰러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간신히 방벽을 펼친 채 버텨내는 곳도 대다수였다.
‘사냥하려면 지금이다.’
녀석이 숨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 뒤는 간단했다.
“나는 몰라도 내 성좌는 쉽게 찾을 수 있지 않겠어?”
밤하늘 위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는 존재라면, 사라진 이진영과 그 일행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미션을 직접 내려줬으니, 자신에게 협조하는 건 당연한 일일 터.
“타오르는 꽃, 이진영은 어디에 있지? 찾기만 하면 바로 죽여주겠어.”
시몬의 자신만만한 말에 곧바로 홀로그램창이 떠올랐다.
[ 성좌 영원히 타오르는 꽃이 사라진 이진영을 향해 분노합니다. ]
그 말을 해석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마수들을 베어 넘기는 시몬의 미간이 좁혀졌다.
‘성좌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었단 말이야?’
이해할 수 없었다.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일 성좌가 찾을 수 없다니?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시몬을 지켜보던 진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절대 은폐.
“이런 게 있었다니···. 너 능력이 몇 개냐?”
“사기적인 스킬이에요.”
크르르!
마수들은 진영 일행을 코 앞에 두고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숙련도의 향상으로 조금 더 커진 그곳에서 진영의 일행은 편안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이계의 존재들 덕분에 미션의 존재는 파악했다.’
시몬이 단독 미션을 받은 순간, 이계의 존재들이 다가와 반짝이기 시작했다.
닫아두었던 정보창을 열자 그 이유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죽이려는 단독 미션. 예상대로군.’
깨닫자마자, 진영은 절대 은폐 구역을 지정해 일행과 함께 몸을 숨겼다. 모든 존재에게서 모습을 감추는 은폐 구역은 초월자라고 할지라도 확인할 수 없는 장소였다.
이미 이계의 존재들로부터 확인은 끝났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나가는 건 나 혼자야.”
“나간다고요?”
상황을 전해 들었기에, 일행은 진영을 말리려고 했다.
혼자 나가는 순간 에스프리 클랜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될 것이었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진영은 말릴 틈도 없이 은폐 구역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가는 진영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염태준이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설마 바깥에서도 이 사기적인 은신이 유지된다는거야?”
* * *
시몬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거 점점 강해지는 것 같은데···.”
관리자 유자벨이 진영 쪽으로 보냈던 강한 마수들이 진영을 찾지 못하자, 근처를 맴돌기 시작하며 생긴 일이었다.
결국에 시몬은 고유 능력 ‘개화’를 두 번이나 사용했다.
힘이 빠질래야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
‘이진영 이 놈은 대체 어디에 숨은 거지?’
동시에 진영의 위치도 찾으려 하니 시선 또한 분산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오기만하면, 흔적도 없이 죽여주지.’
어차피 두 번째 시련도 얼마남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은 각자의 스킬을 사용해 어찌저찌 마수들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하던 자들도 계속 싸우다보니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몬이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
없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주변을 휙휙 둘러보는 시몬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니, 없는 게 아니라 모두 치명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게 무슨···.”
자신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 습격이었다.
콰득!
문제는 계속해서 쏟아지는 마수 앞에 부하들을 살피기가 힘들다는 것.
“야! 이 새끼들아, 일어나! 무슨 장난이야?”
그런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섬뜩한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진영···. 설마 그 놈?’
최후의 10인까지 살아남을 실력자답게 시몬의 머리 회전을 빨랐다. 초월자조차 못 찾는 은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접근 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이 새끼가!”
콰앙!
기적적인 육감이었다. 시몬의 칼날이 진영의 단검을 튕겨냈다.
카앙! 카앙!
그의 클래스 먼치킨답게, 시몬은 보이지 않는 진영을 상대로 몇 번이나 공격을 막아냈다.
“나와!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와라!”
그렇게 소리친다 한들 모습을 보여줄 진영이 아니었다.
분노한 시몬의 칼 끝에선 푸른 마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오지 않겠다면, 이 근처를 통째로 잘라주지.”
은신 플레이어를 향한 대처법도 시몬은 잘 알고 있었다.
소음과 기척을 완벽하게 숨긴 고등급의 은신 스킬이어도, 그것이 무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력이 현현하며 푸른 꽃 봉오리를 만들어냈다.
첫번째 시련에서 다크 오크를 쓰러 뜨릴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거기에 이 반지가 더해진다면.’
시몬은 성좌에게서 받은 반지의 스킬을 발동시켰다. 곧이어 그의 마력에 검은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공격력은 일시적으로 1.5배의 위력을 지닌다.
“죽어라! 이진영!”
그의 시야에는 쓰러진 동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조차, 이진영을 잡아내면 충분한 보상이 된다는 것이 그의 계산결과였다.
푸른 마력이 주변의 대기를 진동시키며,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아쳤다.
그 상황을 관리자 유자벨이 놓칠 리 없었다.
그 또한 이진영의 최후를 기대하며 숨 죽인 채로 시몬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폭발 직전, 폭탄의 근처까지 도달한 불 붙은 도화선이 허무하게 꺼진 듯한 느낌.
“이게···. 왜 이러지?”
검을 아무리 흔들어도, 마력을 끌어모아도 이전과 같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스킬이 도중에 사라진 것 같았다.
[ 성좌 영원히 타오르는 꽃이 당혹감을 느낍니다. ]
갈피를 못잡는 것은 초월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고유 능력이 사용되며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그게 도중에 가로채진 것만 같았다.
관리자 유자벨도 벙찐 표정으로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
[ 일정 수 이상의 마수가 처치 되어 25층의 보스 ‘미노타우로스’가 출현합니다. ]
정 가운데에 설치 되어 있던 석상이 무너져내리며 그 안에서 5m 크기의 소 인간이 나타났다.
거대한 창을 들고 있는 녀석이 울부짖자, 근처의 플레이어들이 귀를 막고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스킬을 잃어버린 시몬은 당황하며 뒷걸음질쳤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한 두번째 시련이 아직 남아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형태로 나타난 보스였다.
이제는 정말로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잠깐, 저거!”
그런 시몬의 눈에 그토록 찾고자 했던 존재가 보였다.
플레이어 이진영.
그가 모습을 드러낸 채 시몬과는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
심지어 보스를 향해 거대한 언월도를 드러낸 채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친! 미친! 이런 미친 새끼가!”
그러나 시몬이 기겁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초월자에게서 받았던 고유 능력 ‘개화’.
그 시작을 알리는 푸른 꽃봉오리가 진영의 몸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