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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도둑이 아이템 다 훔침-100화 (100/152)
  • 다크 스컬(5)

    【 끌끌···. 다 적었으면 종이를 저울에 올려라. 】

    그렌달은 손가락을 내밀어 검은 저울을 가리켰다.

    인고의 저울.

    탑의 규율 아래 치르는 모든 내기와 승부를 조율하는 절대적인 물건이다.

    종이에 얻고자 하는 것을 적어 올리면 저울이 서로의 판돈을 저울질한다.

    끼릭.

    진영이 종이를 올리자, 기울어져 있던 저울이 평평하게 맞추어진다.

    [ 인고의 저울이 양측의 거래를 확인했습니다. ]

    일반적으로 판돈은 자신이 가진 것을 건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는 얻고자 하는 것을 건다.

    그렌달은 진영의 영혼과 육체를 선택했다.

    【 자네는 뭘 적었지? 상상할 수 있는 최대를 걸었길 바라네. 결국은 자네의 영혼과 육체에 합당한 보상으로 균형이 맞춰질테니. 】

    “굳이 말해줘야하나?”

    【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자네의 목숨 값이 그리 비쌀 거라 생각되진 않거든. 】

    그렌달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모여 카드뭉치 하나를 만들어냈다.

    【 카드는 이걸 쓰도록 하지. 】

    그렌달은 능숙한 솜씨로 카드를 섞었다.

    적당히 카드가 섞이자 그렌달은 진영에게로 카드 뭉치를 보냈다.

    허공을 날아온 카드 뭉치를 진영이 다시 한 번 섞었다.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진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렌달은 정정당당하게 승부에 임할 생각이 없었다.

    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뭔가 잊지 않았나?”

    탑의 규율에 걸고 내기할 때 빠져서는 안되는 의식 중의 하나를 그렌달은 생략했다.

    그게 없다면, 승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 아, 아···. 잊을 뻔했군. 지적해줘서 고맙네. 초월자 그렌달, 탑의 규율에 걸고 승부에 임하겠다. 】

    그렌달이 말을 마치자 오색찬란한 빛이 그의 손을 감싸고 돌았다.

    녀석은 진영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뻔뻔한 태도였다.

    이 선언이 없다면 초월자와의 승부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초월자에게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지.’

    탑을 오르며 플레이어들은 필연적으로 초월자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들과 직접 내기에 나서는 경우는 생각보다 잦다.

    그러나 초월자들이라고 해서 성인군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정정당당하게 승부에 나서는 법은 거의 없다.

    셀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그들은 인간보다 탐욕스럽고 더럽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판을 엎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들의 농간에 당한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초월자의 힘 앞에서 내기는 애들 장난에 불과하니까.

    ‘물론 선언이 있다면, 마음대로 승부를 내팽개치는 일은 불가능하다.’

    초월자들 또한 탑의 주인으로서 탑의 규율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걸로 그렌달이 졌다고, 결과에 불복하며 판을 뒤엎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진영 또한 손을 들어 말했다.

    “플레이어 이진영, 탑의 규율에 걸고 승부에 임한다.”

    샤아아-.

    그렌달의 것과 같은 오색찬란한 빛이 진영의 손목을 감싸고 돌았다.

    대리인인 화이트 보이스 또한 어색하게 진영의 말을 따라 했다.

    이것으로 게임의 준비는 끝났다.

    쿠웅!

    그 때 다시 한 번 대지가 진동했다. 저 멀리 달빛 아래로 솟아오르는 흙먼지가 보였다.

    대형 악마가 이동하는 중간에 있는 건물들을 부수며 진격하고 있었다.

    【 시간이 별로 없군. 화이트 보이스, 네 녀석부터다. 뽑아라. 】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화이트 보이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카드 뭉치에서 카드를 하나 빼 들었다.

    “크,클로버 2···.”

    화이트 보이스의 눈에 공포심이 맺혔다. 운이 없었다.

    이 게임에서는 A가 가장 강하다. 2는 가장 약한 카드였다.

    스스슷!

    화이트 보이스가 든 카드가 그의 손을 빠져나가더니 슬라임 한 마리로 변했다.

    카드 뭉치는 곧장 진영을 향해 날아갔다.

    카드를 뽑아든 진영이 말했다.

    “하트 Q.”

    숫자로만쳐도 진영이 10단계 이상 높았다.

    카드는 곧장 마수로 변했다.

    크르르···.

    온 몸이 비늘로 덮여 있어, 그 모습이 드래곤을 연상케 하는 마수.

    녀석은 흉포한 이를 드러내며 눈 앞의 슬라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 이런···.”

    화이트 보이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진영의 앞에 나타난 마수는 드레이크였다.

    * * *

    “저게 약화 된 거라고?!”

    대형 악마를 향해 공격 마법을 쏟아붓던 마법사 플레이어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도 밤하늘 위로 수백 개의 마법이 대형 악마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저지당할 기미가 안보였다.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받으며 꿋꿋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데미지가 들어가기는 하는 거야?”

    20층의 보스, 대형 악마는 새벽에 갑자기 활동을 시작했다.

    레드 게이트가 공략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시간.

    악마가 거주지역으로 움직인다는 소식은 재빠르게 퍼졌고, 플레이어들은 급하게 보스를 막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다가오는 위협 앞에서는 클랜도 국적도 상관없었다.

    콰과광!

    강력한 마법이 연달아 악마의 머리에 꽂혔다.

    그제서야 악마가 고개를 움직였다.

    “조심해!”

    “녀석이 우리를 의식한다!”

    “피해! 여기 있으면 다 죽어!”

    거대한 크기의 놈이 주는 위압감은 굉장했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녀석의 손이 땅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쿠과과!

    녀석의 발톱에는 커다란 마력장이 둘러져 있었다.

    근처의 건물들이 스티로폼처럼 부숴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이미 늦었어···!”

    모여 있던 수 십 명의 플레이어들이 공포에 절어 움직이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들 모두가 죽음을 직감한 그 때였다.

    콰앙!

    “다들 멀뚱히 뭘 서 있는거야! 움직여!”

    마력과 마력이 부딪히며 거센 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

    대형 악마의 공격을 막아낸 사람은 맥 실버였다.

    “매, 맥 실버! 역시 맥 실버야!”

    “이 틈에 도망가자!”

    막아내는 게 끝이 아니었다.

    “으합!”

    투웅!

    근처의 건물 옥상에서 공격을 막아낸 맥 실버가 기합을 주자 잠깐이지만 악마의 손이 튕겨 나갔다.

    “실버 건!”

    “우오오!”

    “갑니다!”

    맥 실버의 외침에 그의 클랜원들이 일제히 손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잠시 힘겨루기를 하듯 이어진 폭발 속에서 악마의 손이 점차 밀려났다.

    “이제 뒤쪽으로 물러난다!”

    “예썰!”

    맥 실버의 명령에 클랜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 번에 대형 악마를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플레이어들을 구했으니 일단 목적은 달성한 셈.

    “그랑블루도 도착했습니다!”

    “레드 리버도 있습니다!”

    “카르고 클랜도 돕겠습니다!”

    후퇴하자, 그곳에는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대열을 갖추고 서 있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보스 레이드에서 이권 싸움은 뒷전이었다.

    모두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보스를 막는다.’

    쿠구구구!

    대형 악마는 분에 찬 듯 근처의 건물을 발로 차 넘어뜨리며 전진했다.

    녀석은 거주지역 내부로 점차 들어오고 있었다.

    더 많은 피해가 생기기 전에 막아내야 했다.

    “지금입니다!”

    그랑블루 클랜의 지휘를 맡고 있는 민아영이 소리쳤다.

    붉은빛, 푸른 빛, 노란빛의 마법들이 세차게 하늘 위로 쏘아 올려졌다.

    콰과광!

    보스에게 적중한 마법들이 터져 나갔다. 대형 악마가 일순 몸을 휘청거렸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근접 공격이 가능한 플레이어들이 악마의 몸을 타고 올랐다.

    “죽어라!”

    “죽어!”

    플레이어들을 떼어내기 위해 대형 악마가 이리저리 손을 움직였다.

    그 탓에 대형 악마의 진격은 저지된 상황.

    하지만 부족했다.

    ‘한 방이 부족해.’

    민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녀석의 크기와 방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런 속도로라면 보스를 막더라도, 거주 지역의 상당 부분이 피해를 입게 된다.

    “저, 저기 좀 보세요!”

    한 플레이어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밤하늘 위로 향했다.

    고오오···!

    설상가상으로 악마의 입에 붉은 화염이 고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보스는 거센 불길을 토해냈다.

    쏟아진 화염의 일부는 악마의 몸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달라 붙었던 플레이어들이 다급히 떨어져 내렸다.

    “뛰어 내려!”

    “으아아!”

    “막아!”

    땅에서는 방어 마법이 가능한 플레이어들이 기를 쓰며 브레스를 막아내고 있었다.

    녀석을 쓰러뜨릴 만한 강한 한 방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었다.

    “주오령, 이진영···. 이 둘은 지금 어딨는거야···?”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양 손에 검을 움켜쥔 민아영이 중얼거렸다.

    * * *

    크르르···.

    형체도 없이 터져나간 슬라임의 액체가 바닥을 적셨다.

    뻔한 싸움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진영의 마수 드레이크였다.

    “이, 이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화이트 보이스가 그렌달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렌달은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 좀 더 기뻐하지 그러나? 】

    진영이 뽑은 카드가 훨씬 강했고, 화이트 보이스가 뽑은 카드는 약했다.

    살아남은 마수는 진영의 것.

    겉보기에는 진영의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영은 무감하게 그렌달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렌달이 혀를 찼다.

    【 쯧, 자네. 내 생각보다 높은 층에서 온 모양이군. 】

    쉽게 기뻐하지 않는 진영을 보고 그렌달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다. 이 게임은 그렇게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그렌달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화이트 보이스를 재촉했다.

    【 뭘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거냐. 】

    “제, 제가 진 거 아닙니까?”

    【 아니지, 아니야. 내가 말했잖나, 이 결국에는 마수가 살아남은 쪽이 승자가 된다고. 네 놈이 저 드레이크를 죽이면, 살아남은 마수는 없는 게 되니 이번 승부는 무승부가 되지 않겠나? 】

    무승부가 되면, 다시 한 번 카드를 뽑고 승부한다.

    이 카드 게임의 진정한 존재 의의였다.

    마수가 패했다면, 플레이어가 직접 싸워 마수를 죽이면 된다. 플레이어가 참전하지 말라는 약속은 어디에도 없었다.

    “으, 으아아!’

    화이트 보이스가 단검을 주워 드레이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드레이크는 중반이 넘어서 나오는 강력한 마수.

    그 격차는 화이트 보이스 스스로가 알고 있겠지만, 초월자에 대한 공포심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콰득! 콰득!

    가뜩이나 마력을 전부 흡수당한 상태여서 화이트 보이스는 제 기량을 내지 못했다.

    모래로 변해 도망치는 일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드레이크에게 씹히면서도 화이트 보이스는 끝까지 녀석의 몸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단검은 가죽을 뚫지 못하고 빗나가기만했다.

    안쓰러울 정도의 전투가 펼쳐졌다.

    “그렌달, 내 승리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 간에 위해를 가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는 정해진 듯 보였다.

    【 아니지! 】

    그러나 진영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렌달이 후욱하고 검은 마력을 뱉어냈다.

    마력은 화이트 보이스의 몸 안으로 파고 들었다.

    콰직!

    비정상적으로 굵어진 화이트 보이스의 팔이 드레이크를 내리찍었다.

    드레이크의 머리뼈가 단숨에 쪼개졌다.

    화이트 보이스의 눈에서는 검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과한 마력을 받아들인 대가였다.

    “허억, 허억···. 이, 이겼다.”

    [ 양 측의 마수가 쓰러졌습니다. 무승부, 다시 한 번 승부가 시작됩니다. ]

    진영이 나서기도 전에 드레이크가 목숨을 잃었다.

    자연스레 진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화이트 보이스한테는 얼마든지 간섭할 수 있다 이건가.’

    의기양양해 진 그렌달이 씩 미소를 지었다.

    【 표정이 볼만하군! 】

    이어서 두번째 대결이었다.

    카드 뭉치는 화이트 보이스에게로 넘어갔다.

    “제발, 제발···.”

    이기기는 했지만, 그 중간까지의 과정이 끔찍했던지라 화이트 보이스는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뽑은 카드는.

    “으하하! 으하하! 좋아, 좋아! 제가 해냈습니다! 스페이드 A!”

    녀석의 얼굴이 기괴한 미소로 가득 차올랐다.

    가히 최강의 카드라고 부를 수 있는 카드였다.

    지켜보고 있던 진영이 눈이 깊어졌다.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겠어.’

    콰아아앙!

    하늘에서 거대한 화염과 섬광이 솟아올랐다.

    플레이어들이 막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대형 악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격하고 있었다.

    내기를 오래 끌면, 보스와 그렌달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여기서 끝낸다.’

    진영이 카드 뭉치에 왼손을 올렸다.

    그의 손 아래로 푸른 빛이 감돌았다.

    탑의 규율에 걸고 한 선언.

    그것은 정직이나, 정의를 맹세하는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탑의 규율을 지킨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영의 클래스 도둑은, 탑의 규율 아래 생겨난 정당한 클래스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렌달이 일부러 말하지 않은 카드가 한 장 있다.’

    진영은 이 카드 게임을 한 차례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상대는 물론 그렌달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게임을 즐기다가 최후에 꺼내드는 카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샤아아!

    [ 탐욕의 왼손의 효과로 원하는 아이템을 획득합니다. ]

    수 차례의 시도 끝에 진영의 왼손에는 카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카드를 확인하는 그렌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 ······! 】

    진영이 뽑은 카드는 새빨간 조커였다.

    멸망의 탑에 존재하는 모든 마수를 부를 수 있는 사기적인 카드.

    진영이 조커 카드를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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