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스컬(4)
멸망의 탑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극 소수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는 이제 막 20층에 오른 게 전부였다.
빌딩 크기의 대형 악마를 보고 두려워하는 정도가 그들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진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초월자···.’
탑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호령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초월자라는 것을.
99층까지 올라 보았기에 그들의 끝을 모를 힘과 전능에 가까운 능력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겨우 20층에서 볼 수 있는 상대는 더더욱 아니다.’
플레이어들이 초월자의 발치에 닿아, 그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50층.
직접 대면 하게 되는 것이 70층이다.
‘처음부터 플레이어들에게 손을 뻗어 놓은 초월자가 있었을 줄이야.’
아무리 진영이라 해도 긴장 될 수 밖에 없었다.
초월자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 종목은 카드 게임으로 정해졌으니···. 판을 깔도록 하지. 】
그나마 다행인 점은 눈 앞에 강림한 초월자는 분신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플레이어 앞에 직접 나타날 수도, 직접 영향을 행사할 수도 없다.’
관리자들이 쉽사리 플레이어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초월자들에게도 강한 제약이 걸려있다.
그 제약은 탑의 층수가 오를수록 느슨해지지만, 지금은 고작 20층.
초월자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녀석이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렌달은 이미 다크 스컬에 많은 투자를 해왔을 것이다.
초월자에게도 상당히 부담이 되는 대가를 많이 치렀을 것.
진언(眞言)을 통해서 진영을 압박하고는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거기까지가 녀석의 최선.
자신의 밑천을 들키지 않기 위한 허세였다.
즉, 내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셈.
‘다크 스컬이 초월자를 배후에 두고 있었다면, 나도 리스크를 짊어지는 수 밖에 없다.’
초월자를 완전히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내기’라는 강력한 수가 필요했다.
진영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고오오-!
어두컴컴한 새벽의 밤하늘 아래로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소동이 있을 법도하건만 주변은 고요했다. 초월자의 진언에 때문이었다.
근처에 있었다해도 전부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쿨럭!”
초월자에게 마력을 빨리고 있던 화이트 보이스가 마른 기침과 함께 쓰러졌다.
동시에 그에게 붙어 있던 검은 연기가 완벽히 분리 되었다.
【 엄살은 그만 피우고 일어나거라.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
화이트 보이스는 떨리는 몸을 힘들게 일으켜 세웠다.
“제, 제가 상대하면 되겠습니까?”
【 그래, 이 게임은 특별하거든. 이 몸이 직접 상대했다간 저자의 몸이 남아나지 않을테니. 】
그렌달은 화이트 보이스를 대리로 세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간섭이 심해질수록 초월자에게 가는 부담도 커지므로.
그렇다고 그렌달의 여유로운 표정이 거짓은 아니었다.
‘내기를 걸어오는 회귀자라. 가소롭기 그지 없군.’
이진영을 바라보는 그렌달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의 배후에 떠올라 있는 수십의 이계의 존재들.
그에게서 느껴지는 신화급 아이템의 향기까지.
단순히 두고 볼 수는 없는 놈이었다.
“어···?”
그렌달이 다시 한 번 진언을 내뱉으려는 그 때였다.
화이트 보이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고고고고···.
땅이 흔들리며, 거대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렌달이 행하는 일이 아니었다.
진영의 시선도 하늘 위로 향했다.
【 이거 상황이 재밌어지는군. 내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당연히 너는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
“······.”
그렌달이 즐겁다는 듯이 낄낄 댔다.
쿠웅!
움직일 기미가 없던 대형 악마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20층의 보스가 활동을 시작했다.
* * *
“민아영님! 맥 실버 인터뷰 보셨습니까?”
부하 클랜원이 호들갑을 떨며 민아영에게 다가왔다.
민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봤지.”
이진영과 손을 잡기로 한 이후, 그녀는 순식간에 능력을 인정 받아 그랑블루의 간부가 되었다.
스파이를 잡아내고, 이진영의 협력을 이끌어낸 공로.
그리고 그녀 스스로가 가진 압도적인 무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 레드 게이트 공략 또한 그녀의 공이 지대했다.
물론 그녀가 한 거라고는 진영을 그랑블루의 소속으로 입장 시킨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덕분에 그랑블루 공략대가 목숨을 건졌어.’
살아남은 공략대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진영 일행의 덕이었다.
그랑블루 내부의 여론은 민아영에게 우호적이었다.
진영 일행을 그랑블루 소속으로 빠르게 입장 시킨다는 판단.
그 하나 덕분에 결과적으로 그랑블루는 세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레드 게이트를 공략한 4대 클랜 중 하나.
이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상당했다. 그들의 영향력이 점차 퍼져나가고 있었다.
“민아영님 판단이 정확하셨습니다.”
아직은 간부 중에서도 말단에 불과하지만, 이번 일로 민아영이 그랑블루 내에서 가지는 발언권도 한층 커졌다.
‘정말 부마스터가 될 수 있을지도···.’
3층에서 맨 처음 진영과 만났을 때 했던 계약의 내용이었다.
진영에게 필요한 지원을 해주는 대신, 자신을 그랑블루의 부마스터 자리에 올려주겠다는 거래.
그 거래는 아직 유효했다.
“진영씨는 지금 어디 계시대?”
그 질문에 부하 직원은 머리를 긁었다.
“그게 말해 줄 수 없답니다.”
“왜?”
“이유도 딱히 말 안해줘서 알 수가 없었습니다.”
레드 게이트 공략 후, 상황이 정리되자 민아영은 염태준의 의뢰소로 사람을 보냈다.
이진영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담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이진영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 알 수가 있어야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신기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회귀자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하고 목적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처럼 명예를 탐하는 것도 아니다.
왜인지는 몰라도 탑 공략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는 듯 했다.
“그랑블루 차원에서 사례할 것도 있으니까, 직접 가서 얘기 좀 해봐야겠어.”
“직접 가시게요?”
“그래, 당분간 스케줄도 없잖아.”
의뢰소에는 같이 탑을 올랐던 김지훈도 있고, 탐탁치는 않지만 염태준도 있었다.
직접 가면 이진영이 어디로 갔는지 말해 줄 수도 있었다.
“근데 시간이···.”
“시간이 왜?”
새벽 3시. 찾아갈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게이트 공략 이후 각종 업무에 치여 있다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민아영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작스레 건물이 흔들리며 큰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드드드드···.
20층에 새로 입주한 그랑블루의 건물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플레이어들이 거주하도록 설계 된 이곳에 지진이 일어날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민아영은 곧바로 창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봤다.
빌딩 크기의 몸집을 자랑하는 대형 악마가 발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쿠웅!
녀석이 발을 내려 찍자 강한 진동이 그 일대를 휩쓸었다.
녀석을 향해 쏘아지던 불빛들이 일제히 꺼졌다.
레드 게이트 토벌 이후, 크기도 줄고 약화된 모습이 저 정도였다.
“거주 지역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부하 클랜원이 재빠르게 망원경을 꺼내 대형 악마의 모습을 쫓았다.
“그런 건 보면 알잖아! 당장 클랜 소속 플레이어들 소집해!”
“네, 넵!”
“아니다, 이진영! 의뢰소도 사람 하나 보내! 언제 움직일거냐고!”
그 사람이라면 아마 알아서 나타날 거다. 이번 공략은 이진영에게 협력하는 게 핵심이었다.
그리고···.
‘주오령. 그 사람도 분명 나타나겠지.’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랑블루의 이권도 챙겨야했다.
대형 악마의 움직임을 살피는 민아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 * *
“허억, 허억···. 크큭···.”
숨을 몰아 쉬던 화이트 보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초월자 강림의 격통이 어느 정도 가신 모양.
녀석은 진영을 바라보며 이죽였다.
“승부는 난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말했지, 나는 탑의 주인에게 선택 받은 사람이라고.”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다, 닥쳐! 상황을 보라고. 넌 겁도 없이 초월자한테 내기를 건 거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윽.
녀석이 손가락이 대형 악마를 향했다.
“저 놈은 여기로 다가 오고 있다. 나는 그게 느껴지거든. 피의 향기가.”
“그런가···.”
진영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화이트 보이스의 클래스는 ‘사이코패스’.
악이나 혼돈 성향 마수의 움직임을 읽고, 참극이 일어날 장소를 예지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뭘 모르는 척 하고 있어! 얼마 안 있으면 네 놈은 저 놈한테 죽는다는 이야기다!”
약화 되었다고 하나 대형 악마는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다수의 레이드를 예상하고 배치된 마수다.
녀석이 공원 지대를 지나간다면 진영은 그대로 휩쓸리고 말 것이다.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겠어.’
칠흑의 갑옷 덕에 죽지는 않더라도, 내기와 마수의 진격이 겹쳐지면 좋을 게 없었다.
이 내기는 보통의 카드 게임이 아니었으므로.
【 쓸데 없는 이야기는 거기까지. 우선은 게임이 먼저다. 룰은 단 한 번만 설명할테니 잘 들어라. 어려울 것도 없으니. 】
그렇게 말하는 그렌달 또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동시에 카드를 뽑는다. 카드는 네 놈들이 잘 아는 트럼프 카드다. A에서부터 J,Q,K까지. 카드의 수가 더 높은 쪽이 승리한다. 보통은 말이지. 】
“보통은 말입니까···?”
【 카드의 수에 따라 더 강한 마수가 소환된다. 결국에는 마수가 살아 남은 쪽이 승자가 된다. 마수의 상성에 따라 승리하는 쪽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으니, 높은 수를 뽑았다고 무조건 승리하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
따지고보면 간단한 룰이었다. 카드를 뽑고, 카드의 숫자에 따라 마수를 소환. 자신의 마수가 끝까지 살아 남은 자가 승리.
문제는 시간이었다.
쿠웅! 쿠웅!
대형 악마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굳어 있던 몸이 풀리고 있단 증거였다.
그렌달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자, 그러면 내기에 걸 판돈은 뭘로 하면 좋겠나? 】
“앞서 말한대로. 내가 이기면 다크 스컬 조직을 포기해라. 내가 지면 거꾸로 내가 다크 스컬을 포기하지.”
진영의 말에 그렌달은 고개를 저었다.
【 끌끌,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모양이군. 이런 판은 쉽사리 열리는 게 아니야. 자네가 상대하고 있는 게 누군지 잘 생각해 봐라. 이 몸은 초월자다. 겨우 그걸로 만족하는가? 】
촤아악!
진영과 그렌달의 앞으로 검은 종이와 저울이 생겨났다.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적어서 올려라. 내기를 제안했다는 것은 자네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겠지. 탑의 규율 아래 적용되는 내기는 절대적이라는 것을. 】
스윽, 스윽.
그렌달은 깃펜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종이에 적어내려갔다.
【 내가 이긴다면, 약속과 더불어 자네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도록하지. 아마 자네가 지불 할 수 있는 최대한도 일테야. 자네는 무엇을 써도 좋아. 이 저울이 공평하게 보상을 조율할테니까. 】
드르륵!
그렌달이 검은 종이를 저울에 올리자, 저울이 한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다.
진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 크하하! 두려운가 보군? 】
그렌달. 녀석은 모르고 있었다.
진영이 회귀 해 온 99층.
이미 진영은 그렌달과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즉 승부의 전략도, 녀석이 숨기고 있는 카드도.
진영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렌달, 스스로 무덤을 파주니 고맙군.’
내기는 그저 다크 스컬을 포기하느냐 마느냐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제 손으로 판돈을 올린 것은 그렌달 본인이었다.
스윽, 스윽-!
진영은 망설임 없이 검은 종이 위에 깃펜을 휘갈겼다.
한 손으로 가린 진영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