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의 무덤(4)
“상위 존재의 부름에 답하라.”
절대 은신 상태의 진영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지팡이는 확실하게 반응했다.
드드드드···.
일렬로 수 없이 늘어선 관리자들의 석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에 무덤 전체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내 지팡이, 지팡이는 어떻게 한 겁니까?”
호클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심현식을 노려보았다.
“글쎄, 맞춰봐.”
“이 건방진 인간이!”
심현식은 이진영의 지시에 따라, 최선을 다해 무언가 있는 척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등줄기는 이미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진영은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쿠구구구!
더욱 강한 진동이 일며, 순식간에 압도적인 양의 마력이 뭉텅이째 빠져나갔다.
‘이계의 감시자가 준 붉은 마력석 덕분이다.’
1시간이라는 제한이 있지만, 마력석이 제공해주는 마력은 지팡이가 소모하는 마력을 견디기에 충분했다.
“······!”
황금빛의 복도의 양 끝에서 밀려오는 새까만 물결.
그것은 물결이 아니었다.
죽음에서 다시 한번 깨어난 관리자들이었다.
호클의 얼굴이 굳어졌다.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라진 지팡이를 사용해 관리자들을 움직이기까지 하다니.
사용되는 마력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인간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마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관리자의 파도 앞에서 호클은 침착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인정하죠. 당신은 굉장한 인간입니다. 나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눈 앞의 인간 심현식을 보며 호클은 어깨를 떨었다.
앞 뒤는 다가오는 관리자들로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죠. 일단 들어 드리겠습니다.”
인간을 벌레 보듯이 하는 호클로서는 대단한 결심이었다.
쿠구구구···.
그러나 관리자들의 물결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
“들어준다니까요! 멈춰! 멈추라고!”
그 위압감에 심현식은 입을 열 수 없었고, 호클은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자신이라 한들 이곳에 모여있는 모든 관리자를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열쇠, 열쇠의 위치를 말해라.”
쿠구구···.
심현식이 말을 절어가며 간신히 입을 뗐다.
호클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아, 그건 제 권한이 아닙니다. 제발 다른, 다른 대안을!”
그렇다면 멈출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진영은 은신 속에 숨어 지팡이를 다시 한번 들어 올렸다.
파앗!
한때는 탑의 한 층을 도맡아 플레이어들을 관리하고, 그들을 구경하던 자들.
그들 또한 탑의 규율에 묶인 희생양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관리자들은 죽어서도 죽지 못한 채 영혼째 관리자의 무덤에 묶였으므로.
가고일, 오크, 트롤, 악마, 드레이크, 고블린, 인간, 뱀파이어···.
다양한 종류의 종족으로 이루어진 관리자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그들의 울분은 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파괴와 폭력뿐이었다.
“으아악!”
자신도 휘말린다고 생각했는지 심현식이 비명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관리자들의 목표는 호클이었다. 관리자들은 심현식을 스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호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개를 펼쳤다.
그러나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크오오오!
지팡이 끝에 붉은 빛이 맺힘과 동시에, 모든 관리자 무리가 포효를 토하며 호클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호클 녀석, 버러지 하나를 처리하는 데 이렇게 시간이 걸려서야 원.”
무덤의 묘지기 가레논이 그의 날카로운 이빨을 쩍 벌리며 말했다.
수 천 년을 살아 온 악어 인간 가레논.
그는 한 때 탑의 관리자였지만, 능력을 인정 받아 묘지기의 자리를 얻었다.
“쯧, 균열이 생긴 이유가 있었군.”
묘지기실에 떠오른 수 많은 화면 중 하나를 살피던 가레논이 혀를 찼다.
그에게 균열이란, 인간들에게는 게이트를 의미했다.
멸망의 탑에는 수 없이 많은 공간이 연결되어 있다.
그 중 100층 안에 속하지 못한 공간들은 모두 외부의 게이트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곳 관리자의 무덤은 그 중에서도 특별한 곳.
본래대로라면 균열이 일어나서는 안 됐겠지만, 균열이 생긴 이유가 있었다.
“탑의 주인들께서 무언가 꾸미고 있구만···.”
무슨 일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도 곧 초월의 좌에 오를테니.
가레논은 느긋하게 자신의 의자에 몸을 뉘였다.
그런 그의 시야에 호클과 대치한 인간이 보였다.
“음?”
순식간에 찢어 죽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둘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다음 순간에는 호클의 공격을 모두 막아낸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이 균열의 인간들이 이 정도로 강할 리가 없는데.”
며칠 전 들어 온 인간 5명 중 하나는 무덤 밖으로 도망쳤고, 셋은 죽었다.
남은 건 하나.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던 건가.”
그래봤자 고작 인간. 호클의 공격 한 번을 견뎠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니지, 그러고 보니 한 놈 더 들어 왔었는데···.’
가레논은 무덤 내부를 비추는 화면들을 살폈다.
침입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들어 온 건 확실한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라···.’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어디 구석에 박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리라.
“호클 놈, 돌아오면 벌을 줘야겠군.”
인간 버러지 하나 처리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끌리는 건지.
따분함을 느낀 가레논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몇 초 정도 지났을까.
고고고고···.
“흠?”
가레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덤 전체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호클 놈 대체 뭘하고 있는 거지?”
눈을 뜬 가레논이 분노한 표정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쿠구구······!
진동은 점점 거세 지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졌던 관리자들이 모두 깨어나 호클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인간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냐?”
호클이 이곳에 있는 모든 관리자들을 불러 낼 정도라니.
상대는 인간 세계의 대영웅쯤 되는 모양이었다.
가레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아니지, 언동에 주의해야지.”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이곳은 탑의 주인들이 주의 깊게 지켜보는 성스러운 관리자의 무덤.
몇 천 년 간의 따분함을 달래 줄 놀잇감이 나타났다고 한들, 묘지기의 직분에 걸맞게 처리해야 했다.
우드득···.
손가락을 푼 가레논이 자신의 자리에 놓여 있는 언월도를 들어 올렸다.
금으로 복잡하게 새겨진 묘지기의 문양이 빛났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한들, 허락도 없이 영면에 접어든 관리자를 모두 깨워? 호클부터 벌을 주도록 해야겠군.”
그러는 김에 인간 세계의 대영웅과 검도 한 번 나누어 볼 법도 했다.
가레논의 눈은 이미 화면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알지 못했다. 초월의 좌 근처에 오른 자라고 한들,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충직한 부하 호클이 관리자들에 의해 산산히 찢겨는 동안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묘지기실을 나섰다.
* * *
전율.
심현식은 압도적인 전율을 느꼈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관리자들이 호클을 향해 달려 들 때, 그는 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호클은 계속해서 반항했지만 관리자들은 끊임 없이 달려 들었다.
호클은 확실히 대단했다. 초반에는 기백이 넘는 관리자들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펼쳤다.
녀석의 날개짓 한 번에 관리자 몇의 머리가 잘리고, 발차기 한 번에 그들의 배가 꿰뚫렸다.
어림잡아 수 십 마리의 관리자가 단숨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물량 앞에 장사 없는 법이었다. 사자 마수가 그의 어깨 죽지를 물어 뜯고, 뱀 마수가 그의 날개를 옥죄자 호클의 움직임은 서서히 느려졌다.
관리자들은 계속해서 호클을 향해 달려들었고, 결국 녀석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심현식은 궁금해질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나한테 명령하는 이 목소리는 누구인걸까?’
이 모든 상황은 그가 만들어 낸 것이리라. 심현식은 마른 침을 삼키려 했지만 침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 때 그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시죠. 뒤쪽의 기사들은 모두 처리해 놨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대체....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절...”
"글쎄요. 어서 가시죠."
심현식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 목소리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허공을 향해 넙죽 인사한 심현식은 바로 몸을 틀어 게이트 바깥으로 향했다.
이제 심현식의 역할은 끝났다.
본래 계획은 심현식을 통해 정체를 숨긴 채 무덤 안쪽으로 숨어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팡이와 마력석의 조합이 상상외로 뛰어났다.
‘내가 보기에도, 경악스러울 정도였어.’
멸망의 탑에 존재 했던 관리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움직일 줄이야.
50층의 중간 보스 격인 호클이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목숨을 잃었다.
멸망의 탑에서 괴물이라 불린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대마법사, 심연의 절대자, 갓서머너···.
한때나마 신화준과 이름을 같이 한 자들이었다.
잠시나마 그들의 기분을 느껴본 것 같았다.
‘이 지팡이의 주인도 최후의 10인 중 한 명이었지.’
회귀 전, 지금 진영이 들고 있는 지팡이 ‘네크로’를 소지했던 자는 소환사였다.
80층에서 그가 소환한 마수들은 지금 진영이 부린 관리자들보다 훨씬 뛰어났었다.
‘이 지팡이는 내가 가지고 있다가 교섭에 써먹어야겠어.’
무덤 안에서만 발동되는 특수효과와 붉은 마력석의 시너지로 사기적인 성능을 보이고 있었지만, 바깥에 나가면 이 정도의 능력은 안 나온다.
하지만 소환사 클래스가 이 지팡이를 잡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단 여기서는 쓸만큼 쓰겠지만 말이야.”
스윽-.
쿠구구구···.
진영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무덤의 관리자들의 일제히 정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군대와도 같았다.
실제로 국가 하나를 점령하기에 충분한 무력이었다.
진영은 그 무력을 무덤의 안쪽으로 향했다.
거대한 진동 소리와 함께 관리자들이 무덤 안쪽으로 움직였다.
진영은 그 행렬의 가운데에서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은신은 풀지 않은 상태였다.
남은 시간은 20분 가량.
그 안에 관리자의 열쇠를 찾아내야 했다.
‘소문만 무성했던 열쇠긴 하지만, 여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하다.’
멸망의 탑 90층에서 만났던 초월자 가레논.
그가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었으니 틀림 없다.
다만 현시점에서 그는 아직 초월의 좌에 오르지 못했을 거다.
쿠구구구!
관리자들의 행군이 한층 더 빨라졌다.
이 행렬 속에서 진영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
은신 상태의 진영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무덤의 최심부 묘지기실로 향한다.’
아무리 이곳의 묘지인 가레논이라 할지라도.
그가 초월의 좌에 오르기 전의 경지에 올라있다 해도.
이 모든 관리자 전체를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호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 인간 놈은 어떻게 되었지?”
묘지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강렬한 마기가 담긴 목소리가 쩌렁쩌렁 무덤 내부를 울려댔다.
진영도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이곳의 묘지기 가레논이었다.
그는 자신의 창을 들어 올리며, 흥미로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숭고한 척 자세는 곧게 하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호클, 왜 대답이 없지?”
그가 찾는 부하는 더 이상 없었다.
관리자들은 계속해서 진격할 뿐이었다.
고고고고!
“설마···.”
까맣게 물든 관리자들의 군세가 그의 코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가레논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설마가 맞다.’
진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관리자들의 행렬을 헤치고 나갔다.
도둑이 조용한 밤에만 활동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들은 오히려 시끄러운 축제와 난리통을 즐긴다.
다른 사람들의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팔렸을 때, 원하는 물건을 훔쳐낸다.
지금 진영이 그러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