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 존재의 무장(3)
고오오오···.
보스의 등장에 길드원들이 얼어붙었다.
그들 사이로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
대한민국 최강이라고 불리는 까마귀 길드가 제대로 된 반격 하나 하지 못한 채 도망쳐야 했다.
패배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
검은 갑주가 길드원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리 모두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침묵 속에서 임재천이 입을 열었다.
“작전을 변경한다. 전 길드원 후퇴 후 상황을 지켜본다. 전투에 참여하는 건 회귀자 이진영과, 길드장인 나 뿐이다.”
“네?”
그 말에 길드원들이 술렁였다.
“너무 무모합니다.”
“길드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동료를 셋이나 잃고도 도망쳐야 할 정도로 강한 보스.
그 보스를 겨우 둘이서 상대하겠다니.
‘애초에 이진영이 1대1만 만들어주면 된다고 해서, 작전 자체도 그렇게 짜여있었는데 이제 와서 뭘···.’
보스의 방에 등장하는 잡몹들을 길드원들이 맞고, 이진영과 길드장이 그들이 올 때까지 보스와 대치하며 시간을 번다. 라는 작전은 말만 다르지 사실상 보스와의 맞대결 구도를 잡아주는 작전이었다.
임재천은 정색하며 뒤돌아봤다.
“너희들 중에 보스 장갑에 흠집이라도 낸 놈 있어?”
“그, 그건···.”
“난 흠집은 내봤다.”
임재천의 말에 길드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리를 긁으며 얼굴을 찡그릴 뿐.
어제 있던 전투에서 모든 길드원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보스의 검은 갑주는 그만큼이나 단단했다.
그러나 길드장의 혼신의 일격은 분명히 갑주에 흠을 내는데 성공했다.
‘고작 흠을 내는 데서 그쳤다고도 할 수 있지만···.’
길드원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임재천은 진영과 눈빛을 교환했다.
‘남은 건 이진영을 믿을 수 밖에···.’
믿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그와 함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각오를 다진 임재천이 자신의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저벅-.
임재천의 클래스 히어로(hero).
SS급 클래스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성능을 가진 그의 특성이 발동되고 있었다.
- 히어로의 다짐
영웅은 물러서지 않는다. 다가온 악이 아무리 거대하고, 압도적일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 영웅의 각오가 새겨졌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50% 상승합니다. ]
[ 체력이 낮아질수록 계속해서 능력치 상승폭이 높아집니다. ]
적에게서 도망치지 않는 이상, 포기하지 않는 한 특성의 효과는 유지된다.
꿀꺽.
길드원들의 침 삼키는 소리조차 귀에 들릴 만큼 향상된 감각.
검을 잡은 임재천의 손아귀에서 마력이 솟아났다.
“가시죠.”
그 말을 신호로 임재천이 먼저 땅을 박차고 쏘아져 나갔다.
콰아앙!
거리를 단숨에 좁힌 임재천과 보스의 검이 맞붙었다.
카앙! 카앙!
마력의 불꽃이 튀어 오르는 치열한 공방을 진영은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임재천의 전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호쾌하기까지 했다.
반면 검은 갑주의 공격은 투박했으며 지극히 단순했다.
‘검술은 임재천이 압도하고 있어.’
카앙!
임재천 특유의 주황빛 마력이 호선을 그리며 검은 갑주를 강타했다.
검은 갑주는 주춤한 듯했으나, 곧바로 자세를 취하며 카운터를 노려왔다.
임재천 나름의 회심의 일격이었으나 갑주에 미약한 흠집을 내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깊은 흠이 생겨났다.
‘길드장으로서의 책임이 없었다면 첫 번째 공략도 성공했을지도 모르겠어.’
히어로의 특성은 후퇴를 고려하지 않았을 때만 발동된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일념을 가졌을 때만 발동하는 제한적인 특성.
심지어 체력이 깎일수록 상승하는 능력치 폭은 커진다.
그러나 한 길드의 수장으로서 길드원들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법.
그게 공략 실패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거겠지.’
지금 임재천의 특성은 확실히 발동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움직일 타이밍이었다.
[ 특성 ‘절대 군주의 폭정’이 발동됩니다. ]
붉은빛과 함께 진영이 훔친 특성이 다시금 발현되었다.
[ 범위 내 플레이어의 능력치 일부를 흡수합니다. ]
* * *
“!”
임재천과 공방을 주고받던 검은 갑주가 황급히 뒤를 돌았다.
카아앙!
임재천의 공격이 그대로 검은 갑주에 적중했다.
물론 가해진 피해는 0에 가까웠다.
‘갑자기 무슨 왜 저러는 거지?’
검은 갑주는 자신의 갑주가 우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검과 검의 승부로 있을 수 있었다.
문제는 조금 전, 검은 갑주가 돌발 행동을 한 뒤부터였다.
녀석은 임재천의 공격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카앙! 카앙!
“이 자식이!”
임재천의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은 갑주는 임재천의 존재가 없기라도 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크윽···.”
적에게 무시 받는다는 굴욕적인 상황.
하지만 임재천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이건 분명 이진영이 만들어낸 상황이다.’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진영이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갑주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진영이 있는 자리였다.
“임재천씨, 계속해서 한 점에 공격을 퍼부어 주세요!”
“말 안 해도 그렇게 하려 그랬습니다!”
콰앙! 콰앙!
어째서인지 몰라도 검은 갑주의 시선은 진영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임재천의 역할은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갑주를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
나머지는 진영의 손에 맡기면 되었다.
카가각!
진영의 단검과 검은 갑주의 붉은 검날이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녀석은 내 움직임을 알아채고 있었어. 아니, 알아챌 리는 없다.’
절대 은신은 어떠한 존재에도 들키지 않는 스킬.
그럼에도 갑주는 진영이 있는 쪽을 정확히 바라보며 검을 들이대었다.
‘예지 계열? 어쩌면 감각 계열 스킬일 수도 있겠어.’
느끼지 못하더라도, 공격을 막아낼 수는 있다.
‘그게 만약 특성이라면 훔쳐낼 수도 있지만, 신중해야 해.’
실패한 게이트의 보스에 대한 정보는 진영에게 없다.
특성 같은 경우 잘못 훔쳤을 때는 오히려 진영에게 독이 될 수 있다.
베르세르크의 광폭화 같은 특성처럼 말이다.
‘우선은 갑주를 빼앗는다.’
쉬익!
진영의 오른손에 들린 단검이 푸른 빛을 어지러이 그리며 갑주를 향해 쇄도했다.
카앙!
검은 갑주는 그 공격을 막지 않았다. 녀석은 공격을 무시한 뒤 곧장 카운터를 내질렀다.
붉은 검날이 향한 곳은 진영의 왼손이었다.
‘역시, 녀석이 신경 쓰고 있는 건 내 공격이 아니야.’
호락호락 당해줄 진영이 아니었다. 왼손을 뒤로 숨긴 채, 진영이 스텝을 밟아 거리를 벌렸다.
‘이 놈은 내 능력을 알고 있다.’
무적에 가까운 방어력을 가지고 있는 놈에게 두려운 것은 없었다.
SS급 클래스 헌터의 공격도 아무렇지 않게 맞고 있으니까.
놈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나한테서 갑주를 빼앗기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어.’
* * *
까마귀 길드장 임재천과 회귀자 이진영의 보스전을 바라보는 길드원들의 손에 땀이 쥐어졌다.
“저렇게 공격을 퍼붓는데도 꿈쩍을 안하다니···.”
“저런 놈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지?”
보스는 길드장의 공격을 무시한 채 계속 진영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길드장과 이진영은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
“제가 보기에는 검은 갑주가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유수아만이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검은 갑주가 오히려 진영씨에게 끌려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요? 길드장님의 공격은 얕지만 계속해서 검은 갑주를 파고들고 있고요. 상황은 유리해요.”
“흐음, 그게 그렇게도 보이나?”
“네 말대로 그랬으면 좋겠다.”
길드원들은 유수아의 말을 흘리듯 넘겼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그럼에도 분위기를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괜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긍정적이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검은 갑주는 집요하게 진영의 왼손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고, 진영은 잽싸게 몸을 움직이며 공격을 회피했다.
보스는 게이트로부터 마력을 전달받고 있다. 지치는 일은 없을 터.
“붕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최대 30분입니다!”
길드원 중 하나가 소리치자, 임재천도 다급해졌다.
붕괴가 시작되면 손 쓸 도리가 없어진다.
붕괴된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마수들은 멸망의 탑의 마력을 직접 받으며 더욱 강해지므로.
카앙! 카앙!
임재천은 모든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럴수록 검에 실리는 위력은 더욱 강해졌다.
체력이 떨어질 수록 그의 능력치는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카앙!
눈에 보이지도 않던 흠집이 손톱만한 자국이 되고, 자국은 하나의 틈이 되어 점점 벌어진다.
파삭!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갑주가 부서지며 자그마한 파편이 튀어나왔다.
진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보스에게서 갑주를 훔쳐내려면 왼손을 가져다 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특 S급 게이트의 보스를 상대로 접촉은 불가능.
1일 1회 사용 가능한 원거리 스틸은 강성범의 특성을 가져오는 데에 썼다.
- 절대 은신
그리고 지금까지의 전투를 토대로 판단한 결과.
‘녀석은 내 은신을 알아채는 게 아니다.’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위협이 될 요소를 파악한 것뿐이었다.
아마 녀석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상위 등급의 직감 스킬.
철컥!
검은 갑주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은신을 쓰고 파고드는 진영의 움직임을 완벽히 따라잡으려다 실패한 것이다.
슥.
순식간에 뒤로 이동한 진영이 은신 상태에서 단검을 들어 올렸다.
절대 일격 스킬의 두 번째 효과.
자신보다 강한 상대의 약점 공격시 5배의 데미지.
콰직!
[ 약점 공격에 성공해 스킬 ‘절대 일격’이 발동됩니다. ]
[ 5배의 데미지가 적용 됩니다. ]
[ 기력이 사용됩니다. ]
막대한 기력이 빠져나가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진영의 단검은 정확히 갑주에 생긴 틈을 파고들었다.
콰지직!
임재천이 모든 힘을 쏟아 부었던 그 틈은 어느새인가 갑주의 약점이 되어 있었다.
흠집조차 내기 힘들던 갑주에 균열이 일었다.
쩌저적!
“크허어억!”
보스가 고통스런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갑주가 단단한만큼 그 안에 있던 본체는 한없이 연약해진 것이리라.
마무리 일격을 먹이기 위해 진영이 단검을 빼내는 순간.
고오오오!
검은 오오라가 녀석을 뒤덮기 시작했다.
“미, 미친!”
임재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갑주가 다시 복구 된다고?”
검은 오오라가 갑주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간신히 깨부쉈던 갑주가 복구되고 있었다.
게이트 붕괴까지 불과 20분 남짓.
이진영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다시 보스를 공략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임재천의 낯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소리쳤다.
“길드원 모두 후퇴한다. 게이트 공략은 실패다!”
설마하던 후퇴 명령.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길드원들이기에 그 결정에 더욱 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빠르게 빠져나가자! 이제 19분 남았어!”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
슬프지만, 슬프기에.
티를 내지 않으려고 길드원들은 소리쳤다.
이곳에서 죽은 동료들에게 복수하지 못한 마음은 접어두고 말이다.
“진영씨도 어서 오시죠!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진영은 복구를 시작한 검은 갑주에게 손을 댄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가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포기 하기 싫은 마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도 누구보다 아쉬웠다.
하지만 포기해야 할 때는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이 있는 법이다.
“이제 나가셔야합니다.”
임재천이 진영을 잡아끌려는 순간, 진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공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미련 남으신 건 알겠지만···.”
무릎을 꿇은 검은 갑주의 주위에서 휘몰아치는 검은 오오라 속에서.
진영은 보스에게 왼손을 올린 채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보스가 움직이지 않게 된 지금.
갑주는 진영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