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자의 비밀창고(3)
시련의 시작과 함께 진영의 시야가 일순 뒤섞였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황금빛 복도.
[ 해당 시련은 회귀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
떠오르는 메시지 창은 기회가 단 한 번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정보창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 시련은 자유롭게 포기하실 수 있습니다. ]
‘포기할 수 있다라···.’
진영 스스로 시련을 포기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런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문제는 포기의 의미가 진영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만.
‘이 시련은 분명 평범한 미션이나 퀘스트가 아니야.’
절대자의 비밀 창고에 있는 아이템들은 전부 바깥에 드러나 있었다. 반면 유독 이 스크롤만 금고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계의 존재들이 보인 반응 또한 이 스크롤이 의미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거 물어 볼 수도 없고···.’
시련이 시작되자 이계의 존재들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
물어본다고 한들 간접 메시지 밖에 못 받으니 큰 의미는 없겠지만.
진영은 고개를 들었다.
‘일단은 앞으로 나가보는 수밖에 없겠어.’
이 시련이 어떤 것인지 직접 경험해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진영이 있는 장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감에 젖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복도였다.
‘온통 금으로 도배되어 있네.’
진영에게는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지만 말이다.
복도를 따라 쭉 이동하자, 큰 방 하나가 나왔다.
쿠웅.
방 안으로 들어오자 돌 문이 내려오며 입구와 출구가 동시에 막혔다.
던전에서는 놀랄 것도 없는 흔한 일이었다.
진영은 방 한가운데에 떠올라 있는 정보창을 확인했다.
[ 첫 번째 시련 : 카르마(업보) ]
자세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시련을 클리어 가능한지, 어떤 내용인지조차도 유추하기 힘들었다.
‘첫 번째 시련이라는 건···.’
당연히 두 번째, 세 번째 시련도 있다는 것.
이곳에서 모든 힘을 소비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힘을 분배해야 했다.
이 뒤로 나올 시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니.
고오오···.
시련은 진영이 발을 들인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방 한 가운데로 검은 기운이 모여드는 모습이 보였다.
황금빛 방과 대조되는 불길한 기운.
진영이 곧장 단검을 꺼내 들었다.
꿈틀! 꿈틀!
검은 마력은 생명체처럼 꿈틀대며 형태를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진영은 마력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주시했다.
‘난이도 자체는 도전해볼 만하다···.’
시련의 입장 권장 층수는 25층이었다.
나오는 마수들의 전투력이 그 정도라면 해 볼 만했다.
현재 진영의 능력치는 평균 4.2단계.
그중에서도 마력이 5단계:초인(超人).
전투력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커버 가능한 단계였다.
- 절대 은폐
절대 은폐 스킬을 사용해 미리 우위를 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걸로 마수가 튀어나오더라도, 진영의 위치를 바로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안전한 상태에서 마력을 바라보는 진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설마 저건···.’
한 곳으로 모여든 검은 마력은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것도 상당히 익숙한 모습으로 말이다.
돌로 이루어진 녀석의 크기는 진영의 다섯 배가 넘었다.
흉포한 생김새, 위압적인 기세를 내뿜는 장승.
단단한 갑주를 몸에 두른 녀석의 이름은 가디언이었다.
드드드드···.
녀석이 몸을 일으켜 세우자 방 안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적을 확인한 진영은 씩 미소를 지었다.
‘시련의 이름이 카르마···. 내가 해치웠던 녀석들에 대한 업보라도 청산하라는 건가.’
쿠우웅!
마수의 주먹질에 바닥이 크게 울렸다.
0층 튜토리얼 당시 플레이어들을 학살했던, 그리고 진영의 손에 파괴되었던 석상.
검은 마력에 감싸인 녀석의 눈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진영은 마수의 모습을 확인하고 곧장 은폐 구역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석상은 곧바로 반응했다.
콰아앙!
거대한 크기와 어울리지 않는 빠른 스피드.
튜토리얼 당시 0층의 플레이어들이었다면 진작에 고깃덩이가 되었을 일격.
‘확실히 느리다.’
진영은 유유자적하게 석상의 주먹을 피해냈다.
0층에 있던 때와 진영의 스탯은 차원이 달랐다.
0단계 : 인간(人間)과 4단계 : 영웅(英雄).
그사이에는 아득한 간격이 존재했다.
인간, 달인, 철인, 인외, 영웅 그리고 초인.
압도적인 차이.
그 앞에서 가디언은 한낱 잔몹에 지나지 않았다.
콰아앙!
석상은 다시 한 번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리찍었다.
바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지만 그게 전부였다.
타악.
진영은 가볍게 주먹을 피한 뒤 그 위로 올라탔다.
그대로 가디언의 팔을 타고 달려 녀석의 머리 위에 올랐다.
휘익-!
가디언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진영을 잡으려고 했다.
진영은 역수로 쥔 단검으로 다가오는 손을 올려 찍었다.
카아악!
가디언의 손이 무수한 파편으로 나뉘며 하늘로 비산했다.
가디언이 주춤한 틈을 타 진영의 연격이 쏟아졌다.
카가가가각!
레전더리급 단검 ‘카른 웨난’의 공격력 앞에서 가디언의 갑주는 무의미했다.
가디언은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무너져내렸다.
바닥으로 내려 온 진영의 발치에 남은 것은 돌무더기 뿐이었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끝일 리는 없겠지.’
진영이 스텝을 밟아 거리를 벌리자마자, 돌무더기들이 검은 마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력은 다시 한 군데로 뭉쳐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염소 마수인가···.’
1층의 보스였던 염소 마수가 기이한 시선으로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기억하고 있나?”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검은 마기에 둘러싸인 염소 마수의 눈에는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마기로 이루어진 마수에 불과했다.
콰앙!
염소 마수가 준비 동작도 없이 땅을 박차고 돌진해왔다.
‘······!’
돌진을 피해내는 진영의 눈이 커졌다. 1층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와 힘이었다.
쿠우웅!
그대로 벽에 충돌한 염소 마수는 뿔을 털어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확실히 알겠어.’
이번 시련은 진영이 쓰러뜨렸던 마수들을 다시 한 번 처리하는 것이다.
그것도 마기에 의해 강화된 상태의 적을 말이다.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의 분배.’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력과 힘을 적절하게 분배하여 효율적으로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르르···.
자세를 잡은 염소 마수가 조금 전보다 더한 기세로 진영을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돌진을 받아내려는 듯 하던 진영의 모습이 일순 사라졌다.
“?!”
콰아앙!
사라진 진영의 모습에 당황한 염소 마수의 돌진 방향이 틀어졌다.
녀석이 벽에 부딪힌 순간을 진영은 놓치지 않았다.
은폐 구역에서 뛰쳐나와 마수의 목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서걱-.
강화가 되었다고 한들 1층의 보스는 진영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마수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으으으···.
전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쓰러뜨린 마수는 마력으로 변환되어 또 다른 마수의 형태를 갖춘다.
식물형 환상종 ‘기가 트리 플랜트’, 붉은 기계 인형에 이어 S급 게이트의 보스인 철갑 사자까지.
검은 마력에 의해 충실하게 구현된 녀석들은 진영을 이길 수 없었다.
- 스틸
은폐 구역 내에서 스틸을 사용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아이템을 훔쳐내는 도둑이 가지는 힘은 상상 이상.
과거의 반복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쿠웅.
허무하게 코어를 빼앗긴 보스가 바닥에 몸을 드러누웠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어.”
철갑 사자를 끝으로 진영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더 이상 마수의 시체는 마력으로 변환되지 않았다.
[ 첫 번째 시련 : 카르마(업보)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 당신의 활약이 평가에 반영됩니다. ]
고고고···.
닫혀 있던 돌 문이 열리며 다음 방으로 향할 수 있는 통로가 보였다.
진영은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 두 번째 시련 : 불구대천(不俱戴天) ]
이동한 방은 푸른 수정으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여전히 시련의 이름으로 내용을 유추하기는 어려웠다.
고오오···.
바닥에서 흘러들어 온 검은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이전 방과 같았지만, 그 이후 느껴지는 오싹한 기운에 진영이 한 걸음 물러났다.
진영은 곧장 은폐 구역을 설정했다.
쿠우우···.
검은 마력이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스레 진영의 눈이 커졌다.
“저건···.”
신화준이었다.
진영의 손으로 직접 처리했던 녀석.
진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물론 마력으로 이루어진 환영이겠지만, 그 전투력은 실제 신화준과 같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스윽.
신화준은 무기를 꺼내들었다.
진영이 야밤에 습격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술에 취해 있지도, 적의 존재를 모르지도 않았다.
시련을 치르는 자를 죽이기 위한 살의만을 내뿜고 있었다.
‘······.’
신화준은 진영의 위치를 모르고 있다.
녀석의 능력치는 최소 평균 5단계.
무신 클래스의 특성까지 생각하면 정면으로 싸웠을 때 이길 가능성은 없다.
‘여기서 마력을 조금 소모 할 수 밖에 없겠어.’
제 아무리 신화준이라고 한들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상대와 전투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타닥.
절대 은신으로 몸을 숨긴 진영이 빠르게 신화준을 향해 달려 들었다.
방어할 수도, 기척을 알아챌 수도 없는 공격이 신화준의 목을 베어냈다.
투욱. 스르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목이 떨어진 신화준이 검은 안개로 변해 사라졌다.
그러나 이 모든 시련이 간단했던 이유는 진영이 가지고 있는 스킬 덕이었다.
만약 진영에게 탐욕의 왼손이나, 절대 은신 스킬이 없었다면···.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은 없었다.
[ 두 번째 시련 : 불구대천(不俱戴天) 클리어하셨습니다. ]
[ 당신의 활약이 평가에 반영됩니다. ]
[ 마지막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생각보다 할 만한데?’
절대자의 비밀창고에서 가져온 아이템이라 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까지는 순조로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진영은 계속해서 다음 방을 향했다.
완벽한 어둠으로 가득 찬 방.
화르륵.
진영이 발을 들이는 순간, 벽면에 붙어 있던 횃불들이 순서대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 마지막 시련 : 존재 증명 ]
[ 업보를 씻어내고, 과거의 역사를 지워낸 당신은 이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
스스스···.
바닥에서 일렁이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것들 또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 당신이 당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증명하십시오. ]
언뜻 선문답 같아 보이는 정보창의 내용 아래로 수십 명의 또 다른 이진영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나와 싸우라는 건가···.’
수없이 많은 ‘자신’ 중에서 자신을 증명하라.
외양과 능력이 동일한 이들보다 네가 더 나은 것은 무엇이냐.
시련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샤아아-.
다음 순간, 모든 이진영이 일제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 또한 은폐 스킬로 자신의 모습을 숨긴 것이리라.
복사된 이진영들은 진영과 완벽히 똑같은 스킬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 증명해보라 이거지.’
시련을 확인한 진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