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밑이다(5)
이중훈은 세뇌 스킬이 진영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결국 체이서 클랜원들에게 세뇌를 걸어 무력화시켰다.
그 뒤로는 간단했다.
체이서 클랜은 레드 리버의 뒤처리와, 각종 더러운 일을 담당하는 범죄 조직.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차례 차례 클랜원들을 처리한 뒤, 이중훈의 차례가 왔다.
“사, 살려줘. 나는 시키는 대로 했잖아.”
물론 자비는 없었다. 후환을 남길 일은 하지 않는 게 진영의 방식이었다.
이중훈이 거꾸러지고, 남아 있는 교육생들의 시선이 진영에게로 모였다.
저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조종 당하고 있다는 걸 이제 막 인지한 상태다.
진영이 말했다.
“여러분은 체이서 클랜에서 암살자로 키워지고 있었던 플레이어들입니다.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탑 바깥으로 나가시길 추천 드리겠습니다. 체이서 클랜에서 다시 한 번 여러분을 붙잡고 협박이나 세뇌를 시도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교육생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체이서 클랜은 진영의 손에 의해 사라졌다.
사실상 교육생들을 추격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나 그 위에서 지시를 내리던 레드 리버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 조사에 레드 리버가 조사에 나서면 그들이 붙잡힐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레드 리버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탑 바깥이라면 이러한 문제가 해소된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진영은 적당히 설명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진영을 바라보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어서 내려가시죠. 언제 다른 플레이어들이 쫒아 올지 모릅니다.”
“그래요, 빨리 탑에서 나가자구요.”
“텐트에서 짐만 챙겨서 나갑시다.”
실제로 레드 리버가 체이서 클랜의 습격 사실에 대해 깨닫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여기 오래 있어 좋을 것도 없었다.
“지훈아!”
“혀엉···.”
그리고 드디어 김영훈과 김지훈이 만났다.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탑에서 들어오고도 살아남는 사람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회귀 전, 김지훈의 형에 대한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진영이 막지 않았더라면 김영훈은 완전한 정신개조를 당했을 것이다.
김지훈이 탑에 올라올 때 즈음 그들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살아남아 유명해진 것은 김지훈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었으니 다행이다.
진영이 두 형제를 향해 다가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김지훈이 진영을 소개했다.
“형. 여기는 진영이 형이야.”
“아,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짧게 자른 머리와 큰 키의 김영훈은 남자다운 인상이었다.
“아뇨,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지훈이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것 같은데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은데···.”
이번 일에는 김영훈 본인의 활약도 있었다.
빛의 사제 클래스 덕분에 세뇌를 더 쉽게 풀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잠시 간단한 대화를 나눈 뒤, 진영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일단은 둘 다 10층으로 내려가 있어. 사건 현장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쓰러진 체이서 길드원들을 확인한 김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이 형은 안 오시는 거에요?”
“나는 뒤처리 좀 하고 갈게.”
“네, 형. 10층에서 기다릴게요.”
“그래. 오랜만에 만났을 텐데 둘이서 이야기라도 하고 있어.”
김영훈과 김지훈이 먼저 10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이 계속 탑을 오를지는, 본인 의사에 달린 거겠지.’
빛의 사제 클래스는 후에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좋은 클래스다.
함께 탑을 공략하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몇 번 정도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 두 명의 가훈은 ‘의리를 지켜라’ 이니까.
* * *
[ 이계의 근원이 당신의 영웅적 행보에 감탄합니다. ]
[ 이계의 본질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 데.’
아이템을 뒤적이던 진영이 떠오른 간접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훈의 형을 찾아준 것은 그렇다쳐도, 교육생들을 구해준 건 겸사겸사였다.
탑 공략에 방해가 되는 레드 리버를 사전에 견제하는 게 교육생 구출보다 앞선 목표였으니.
레드 리버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던 팔 다리를 잘라내는 건 그만큼 중요했다.
‘좋게 봐줘서 나쁠 건 없지만.’
이계의 존재 둘의 성향은 선(善)에 가까운 모양.
성향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도 행동하기 곤란하다.
선(善)성향이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자신을 공격한 적을 처리하는 것까지 불편함을 느끼는 성좌도 있을 정도니까.
“이 정도면 됐다.”
2000코인과 유니크 아이템, 그 외 잡템 다수.
이중훈과 체이서 클랜 잔당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었다.
현재 진영의 재산은 무려 1만 5천 코인.
신화준이 소지하고 있던 코인과 이번에 얻은 코인을 합산한 결과였다.
당장 능력치를 강화하는 데 사용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게 좋았다.
코인은 탑에서 만능재화로 통용되는 만큼 사용처가 많았다.
“슬슬 가지고 있는 아이템도 처리할 때가 됐네.”
아이템 주머니도 가득 차기 일보직전이었다.
기계 상인에서 구매한 아이템과 신화준에게서 뜯어낸 아이템 그리고 이번에 체이서 클랜을 털며 얻은 아이템을 합치면 그 양이 상당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템을 대량에 처리하기에 적합한 인물을 진영은 알고 있었다.
“충분하군.”
이곳에서 볼 일은 다 보았다.
체이서 클랜은 완전히 붕괴 되었다..
진영에게 당하기는 했지만, 체이서 클랜은 체계가 잘 잡힌 집단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뇌 기술을 가진 이중훈을 필두로 강력한 클랜으로 성장하지만 그 싹을 진영이 잘라냈다.
‘레드 리버가 어떻게 움직일지 차분히 지켜보기만 하면 되겠군.’
그 이후의 대처는 그랑블루를 활용할 예정이었다.
체이서 클랜이 사라진 레드 리버는 미래의 영향력이 훨씬 약해질 수밖에 없다.
“아주 좋아.”
진영은 만족스럽게 손을 털어냈다.
[ 이계의 본질이 당신에 이계의 스킬 강화석을 제공합니다. ]
[ 이계의 근원이 당신에게 응원을 제공합니다. ]
아직 이계 보상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본질이 꾸준히 아이템을 보내주는 중이었다.
근원 녀석은 아이템을 보낼 수 있는 자본이 떨어졌는지 응원을 보내왔다.
“이거 점점 이계의 본질 쪽으로 보상 수령이 기울어지는 느낌인데.”
[ 이계의 근원이 눈물을 한 방울 흘립니다. ]
그만큼 ‘위계’라는 게 이계의 존재에게는 중요한 것 같았다.
진영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계속 후원해줄 수 있는 상대에게 투자하는 게 옳았다.
파삭.
보석을 깨뜨리자 익숙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 스틸의 부가효과 ‘탐욕의 왼손S’의 성공 확률이 1% 증가합니다. ]
[ 성공 확률 9% -> 10% ]
차근차근 성공 확률이 늘어나고 있었다.
초반 3%였던 성공률이 3배가 넘는 10%로 상승했다.
“그리고 아이템도 장착해 둬야겠어.”
세뇌술사 이중훈에게서 빼앗은 반지.
진영에게 정신 계열 스킬은 없지만, 마력을 증진 시켜준다는 점이 중요했다.
[ 아이템 설명 ]
이름 : 다크니스 사이코 링
등급 : 유니크
분류 : 반지
효과 : 정신계열 스킬 효과의 위력 40% 증가, 마력 스탯 25% 증가.
절대 은폐 스킬은 이제 은신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극심한 마력소모 탓에 현재는 5초 이내가 한계였지만, 마력 스탯을 늘려가다 보면 장시간 사용도 가능해질 터.
‘마력 포션하고 동시에 운용할 정도만 돼도 충분하다.’
아이템 정리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증거가 될만한 물건은 전부 없앤 뒤, 진영은 뒤돌아보지 않고 현장을 떠났다.
* * *
어둑어둑해진 밤하늘 아래로 염태준이 두 팔 벌려 진영을 환영했다.
“이제야 왔군!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고.”
이곳은 상업 지구 뒷골목에 존재하는 의뢰소였다.
염태준이 직접 운영하는 곳으로 암시장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장소다.
레드 리버의 의뢰를 배반하기는 했다지만, 의뢰 자체가 은밀한 성격이어서 표면상으로 큰 손해는 없는 모양.
“자자, 어서 들어오라고.”
염태준이 관심 있는 것은 보물뿐이었다.
이미 돈은 충분히 벌었겠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의뢰소 안쪽으로 발을 몇 걸음 들이는데, 갑자기 염태준이 획 진영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이랑 뭔가 분위기가 다른데? 스탯이 벌써 4단계인건가? 코인은 그랑블루에서 얻었겠지? 역시 그랑블루가 코인이 많기는 해.”
분위기만으로 알아내다니 염태준도 보통은 아니었다.
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해석한 글귀는 어떻게 됐어?”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의뢰소 안쪽의 방에서 염태준이 종이와 도자기 조각을 가지고 나왔다.
탑이 품은 5가지 보물 중 하나에 대한 단서가 여기 있을 터였다.
탑의 악질인 이유는 이것들에 대한 전설을 탑 곳곳에 사실처럼 흩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멸망의 탑이었다.
플레이어의 스킬, 아이템 그리고 마수.
현실을 뛰어넘는 이변이 가득한 이곳에서 플레이어들이 전설에 미치는 것은 당연했다.
“고대 문자로 쓰여져 있어서 해석할 수 있는 NPC를 찾는 데 조금 애를 먹기는 했지만 내용 자체는 간단해.”
염태준이 종이를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열 다섯 번째 세계에 숨겨진 발톱을 찾아라. 어때, 무슨 뜻인지 알겠어?”
탑의 수수께끼는 이런 식으로 난해하다.
정답을 알고 난 뒤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게 이 수수께끼였다.
진영도 이 수수께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지.’
한때 멸망의 탑에서 가장 큰 화제였던 다섯 가지 보물의 위치를 진영은 나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온갖 소문과 소식 그리고 탑에 대한 정보.
탑을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일이라면 진영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없었다.
‘만에 하나 내가 모르는 보물에 숨겨진 힘이 있다 하더라도···.’
염태준이 모은 보물을 훔쳐내면 되니, 손해 볼 건 없었다.
진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 전에···.”
그때였다.
쿵쿵!
보물의 위치를 알려주기 이전에, 아이템을 처분하려던 때, 누군가가 의뢰소의 문을 두드렸다.
“뭐야? 중요한 때에. 오늘은 문 닫았다고.”
염태준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문 앞으로 다가섰다.
“잠깐이면 되니까, 좀 비켜봐!”
거친 목소리의 주인이 강제로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염태준이 밀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의뢰좀 맡기러···. 응?”
안쪽으로 들어온 남자가 진영을 바라보았다.
진영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확인했다.
거대한 식칼을 등에 진, 멸망의 탑 랭킹 5위의 도살자 클래스.
신화준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던 남자.
이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