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절망(1)
"후, 드디어 잠잠해졌네요.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치열한 전투 끝에 15층 보스 레이드의 지옥견 케로베로스가 잠에 빠져들었다.
그건 플레이어가 승기를 잡았다거나, 어떠한 진척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폭주가 일어나 15층 전역을 휩쓸려고 하는 보스를 막아섰을 뿐.
그럼에도 사람들은 환호했다.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이 목숨을 건졌다.
그 동안 개척해 온 땅을 지켜냈다.
환호할 이유는 충분했다.
"폭주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다 그랑블루 클랜 덕분입니다. 특히 진철님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여러 클랜의 대표들이 모인 자리.
하위 클랜의 마스터가 그랑블루의 부마스터 진철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걸 신호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클랜의 대표들 또한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역시 그랑블루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진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형 클랜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담담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진철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거 웃음을 참기가 힘들군. 이번 회귀자는 대어가 틀림 없어. `
모든 클랜이 합세해도, 폭주한 보스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때 15층을 버리고 후퇴하자는 이야기가 주류를 차지할 정도로 부정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전황을 한 방에 뒤집은 게 바로 회귀자의 정보였다.
`이대로 가면 그랑블루의 이전 위상을 되찾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겠어.`
이번 활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는 그랑블루 클랜에 대한 소문이 싹 사라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평판은 탑 밖으로도 퍼져, 클랜과 거래하는 길드의 수를 늘리는 역할을 한다.
그만큼 회귀자와 교환한 정보는 대단했다.
폭주한 마수를 잠재우는 방법. 간단하지만 어처구니 없었다.
대체 연주계 플레이어들을 불러 악기 연주 스킬을 사용하게 할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회귀자에게서 얻어낸 정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는 진철의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야, 축하드립니다. 대체 그런 기발한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신 겁니까?"
레드 리버 클랜의 부마스터 유경규였다.
이번 그랑블루의 결정적인 활약은 회귀자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란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더욱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었다.
"다 평소부터 여러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던 덕분 아니겠습니까."
"역시 1위 클랜이라 그런지 혜안이 남다르십니다."
듣기 좋은 말을 나누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유경규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랄하고 있구만 아주. 회귀자 하나 먼저 주웠다고 입이 귀에 걸리겠네.`
스파이를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반면 그랑블루의 부마스터 진철 또한 레드 리버의 스파이가 내부에 있다는 걸 이미 전해 들은 상태.
입은 웃고 있지만 진철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알 거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기는.`
회귀자를 영입하지 못한 걸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정보를 얻고 나니 그 생각이 바뀌었다.
미래를 알고 그 미래를 미리 선점한다는 쾌감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었다.
`이진영. 그 자를 좀 더 우리 쪽으로 끌어당겨야 해. 출혈이 크더라도 투자라고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면 안 되겠어.`
특히 인류가 15층 공략에서 멈춰서 있는 지금 그의 출현은 절호의 기회였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 그를 이용해 이득을 보아야 했다.
주도권은 회귀자가 있는 곳에 있으니.
진철은 미소를 숨기지 않고 옆에 있는 유경규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레드리버도 앞으로 걱정 붙들어 매시지요. 전부 저희 클랜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역시 그랑블루! 믿음직합니다."
형식적인 웃음 사이에서 지독한 살기가 오고갔다.
진영의 선택을 받지 못한 레드 리버는 속으로 쓴 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말이야. 염태준 그 자식이 배신을 때릴 줄은...`
이미 다 늦은 일이었다.
그랑블루의 손에 들어간 이상, 함부로 그를 건드렸다간 무슨 후폭풍이 닥칠지 모른다.
이미 두 번의 실패를 한 마당에 더 이상 손을 대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하하."
유경규의 맥 없는 웃음만이 15층에서 울려 퍼졌다.
* * *
게이트를 빠져나와 10층으로 내려온 진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히든 플레이스에 다녀온 것만으로 하나 단서가 생겼기 때문이다.
`히든 피스를 가져갔다는 건, 녀석이 회귀를 적어도 몇 차례는 했다는 거야.`
회귀 아이템인 팔찌를 빼앗았기에, 신화준이 한 번도 회귀를 못 한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탑을 처음 오르는 플레이어가 단신으로 히든 플레이스에서 깽판을 쳤다는 건 말이 안 되므로.
`오히려 좋다.`
지금 신화준은 13층, 11층의 히든 피스를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영이 수고할 필요를 덜었다.
그리고 녀석을 잡으려면 지금이 적기라는 확신 또한 들었다.
`더 성장하기 전에, 내가 끝을 낸다.`
플레이어 거주 지역의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신화준이 있을 곳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녀석이 눈치를 챌지도 모르니까.
진영은 상업 지구에 있는 가게 하나를 찾아갔다.
`지금쯤이면 열었을 텐데.`
10층에는 다양한 능력을 지닌 NPC와 여러 종류의 클래스를 가진 플레이어들이 공존한다.
특히 플레이어의 클래스는 다양한 만큼 여러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탑이라고 해서, 모두가 사냥을 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클래스에 맞는 생활을 고수하는 자들도 많았다.
여기 있는 플레이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손님이시구나. 어서오세요."
가게 문이 열렸다.
주인은 일어난지 얼마 안 돼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진영을 맞이했다.
그녀는 멸망의 탑 내부에서 점집을 하는 플레이어였다.
"거기 앉으시면 돼요. 잠시만요."
가게는 넓지 않았다.
여러 잡동사니가 놓여 있는 좁은 방 한쪽에서 그녀가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구슬 하나를 꺼냈다.
"네, 준비 끝났습니다. 어떤 게 알아보고 싶으셔서 오셨나요."
그녀에게서 프로다운 점술사의 기질이나,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형식적일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이 사람은 변한 게 없군.`
그녀의 직업은 A급 포츈텔러.
잘만 사용하면 상당히 좋은 직업이지만 그녀의 가게는 현재 파리를 날리는 중이다.
예언가류의 클래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미래를 본다.
특히 클래스마다 알 수 있는 미래나 정확도가 천차만별이었다.
그중에서도 포츈 텔러는 상당한 정확도를 자랑하지만, 거기에는 적절한 해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여자는 그걸 더럽게 못 했다.
막상 미래를 보아도, 그 단어들을 해석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정체불명의 단어 나열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 해석법을 깨닫고 나서는 무서울 정도로 미래를 꿰뚫어보지만 말이야.`
그건 적어도 3년 후의 이야기다.
지금 받게 되는 예언에 관해서는 진영이 직접 해석해야 했다.
진영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친구를 하나 찾고 싶습니다."
"아, 그렇군요.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이름을 알아선 곤란하다.
이제부터 신화준 처리하러 갈 것이므로.
혹 살려둘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이 사람에게 쓸데없는 정보를 남기는 건 곤란했다.
진영은 대답하지 않고 앞에 놓인 수정 구슬 위로 손을 올렸다.
"됐으니까, 빨리 스킬이나 사용해주시죠."
"아, 넵."
포츈텔러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이 알기로 그녀의 스킬 발동에, 일반 점쟁이 같은 정보들은 필요하지 않다.
원하는 대상을 떠올리면 그걸로 충분하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까지 알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고오오...
수정 구슬 안쪽으로 기이한 마력이 모여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스킬 발동이 용이하도록 정보 차단 아이템을 해제했다.
파아앗!
이윽고 모여들었던 마력이 구슬 밖으로 발산되며 진영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아, 들립니다. 들려요. 그 친구분은..."
하얀 마력이 안개처럼 깔렸다.
포츈 텔러의 입에서 특정한 단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장미, 술, 불안, 달, 그리고 다섯 왕. 이 다섯 가지 단어를 조합한 곳에 있을 거예요."
예언을 끝마친 포츈 텔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해석을 말씀드릴게요. 장미는 아름다운 외모와 대비 되는 가시를 품고 있죠. 당신의 앞길에 혹할만한 일이..."
장사도 안되는 점쟁이의 해석은 들어도 의미가 없다.
진영은 여자의 해석을 한 귀로 흘리며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대강 알 것 같군.`
운이 좋게 예언의 결과 또한 정확하게 나왔다.
장미와 술 그리고 달. 이 세 가지가 의미하는 건 명확했다.
`오늘 밤, 로즈마리 주점으로 신화준이 온다.`
로즈마리랑 장미는 완전히 다른 식물이지만, 원래 그런 게 예언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조심해야 하는 게...."
"도움이 됐습니다. 여기 코인 있습니다."
"네? 아직 안 끝났는데..."
울상을 짓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진영은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는 정해졌다.
이제는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 * *
밤이 될 때까지 진영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후 주오령과, 김지훈에게 S급 지원 프로그램을 설명했다.
프로그램은 그 둘에게도 적용될 예정이었다.
김지훈이 탑을 계속해서 오를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만약 오르게 된다면 스펙업이 필수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김지훈이 형을 찾을 수 있도록 포츈 텔러를 소개해줘야겠어.`
그랑블루에서 진영을 보고 싶다는 요청도 있었지만, 다음으로 미뤘다.
남은 시간 동안은 신화준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아이템을 구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신화준을 잡는 일이었다.
어둑해진 거리로 밝은 연등이 켜지고, 사냥을 마치고 온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해졌다.
`로즈마리 주점.`
이곳은 상업 지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형 주점이었다.
진영이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캬, 마셔 마셔. 죽을 고생 뒤지게 했는데 오늘은 진창 마셔야지."
"그랑블루 아니었으면 우린 진짜 다 죽었을 거야."
"사장님 여기 육수 좀 더 주세요!"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로 북적였다.
진영은 천천히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15층 마수 폭주에 휘말렸던 플레이어들, 다른 곳에서 파밍을 마치고 온 사람들 등등...
그런 사람들 사이로 눈에 띄는 붉은 머리가 있었다.
"크하하! 그러니까! 내가 그래서 그놈한테 한 대 먹여줬지."
과장 되게 소리치며 술을 들이켜는 신화준.
진영은 녀석이 잘 보이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혼자가 아니군.`
신화준은 15층을 공략하기 전까지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슷한 척 어울렸다는 말.
녀석 주변으로 세 명의 사람들이 술잔을 마주치고 있었다.
진영이 눈빛이 깊어졌다.
`이시안이 신화준하고 이때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단 말이야?`
이시안.
현재 한국 멸망의 탑 5위에 있는 플레이어였다.
그의 등 뒤에 매달린 커다란 식칼이 그가 누군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클래스는 A급 도살자였다.
`예언의 다섯 왕이 랭커를 지칭하는 거였나.`
그 정도 위치에 있는 플레이어가 지금 신화준과 술을 마시다니 특이한 일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는 걸지도 모르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영도 자세하게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진영이 노리는 건 어디까지나 신화준.
아직 신화준은 진영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은 기다린다.`
섣부르게 행동해서 좋을 게 없었다.
신화준이 진영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눈치챈다면, 그때부터는 일이 크게 틀어진다.
단순히 처리하는 게 아니라, 녀석에게서 들어야 할 정보도 있었다.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귀를 기울이자, 시끄러운 주점의 소음을 뚫고 신화준이 앉은 테이블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강화된 스탯으로 예민해진 감각 덕분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야, 너는 그게 문제야.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거. 누가 들으면 내가 아니라 니가 랭커인 줄 알겠다."
"큭, 내 얘기 들으면 깜짝 놀랄 거다. 너 새끼한테는 평생 말할 일 없지만 말이야."
"지랄하고 있네."
술잔을 들어 올리는 신화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랄? 지랄이라고?"
"지랄 맞지 새끼야. 가오만 더럽게 잡지,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냐?"
그러면서 이시안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진영이 아는 신화준은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참지 않는다.
덜컹!
예상대로 신화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시안의 멱살을 잡았다.
이시안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5위 랭커 이시안과 클랜조차 없는 신화준.
그 결과는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일행들도 이런 일이 일상이라는 듯 말리지 않았다.
"많이 취했나 본데 말로 할 때 가라."
생각해보면 신화준이 실력을 숨기고, 자신의 실력을 기르기 위해 오랜 시간 참아왔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진영이 아는 신화준은 그런 놈이 아니었으니까.
"야, 따라 나와. 진짜 지랄이 뭔지 보여줄 테니까."
그 말에 자리에 앉은 일행들의 웃음이 터졌다.
"웃기지 말고, 그냥 가라."
이시안이 신화준의 등을 밀었다. 이미 주먹이 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러나 신화준은 참았다.
'저걸 참는다고?'
대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퉤.
녀석은 침을 한 번 뱉은 뒤 주점을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잘 됐다.'
계속해서 일행과 같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는데, 마침 신화준이 알아서 떨어져 나와주다니.
진영은 한 발 빨리 가게 앞으로 나갔다.
`이대로 미행한다.`
절대 은폐로 만들어낸 구역 안에서 진영은 신화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뒤이어 신화준이 바깥으로 나왔다.
"씨발, 내가 저 새끼를 몇 번을 죽였는데... 팔찌만 있었어도 아무것도 아닌 새끼가. 씨발....그게 대체 어디로 간거야?"
신화준은 이를 악물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진영이 조용하게 따랐다.
기척을 죽이고 미행하는 일은 진영의 특기였다.
스탯이 크게 오른 진영의 미행을 술에 취한 신화준이 눈치 챌 리 없었다.
얼마남지 않았다. 진영이 숨 죽인 채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에게는 물어야할 것과 갚아야할 빚이 있었다.
`어디로 갈 거냐 신화준.`
신화준을 바라보는 진영이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