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의 본질(3)
천장의 균열 사이로 황금빛이 일렁였다.
`이계의 본질이 표시해준 건가?`
여태껏 보이는 황금빛은 `이계`와 관련된 것들 뿐이었다. 특수 게이트에 입장할 때 금빛으로 형태가 바뀐 것도 이계와 관련된 이 팔찌 때문일 테고. 근원은 이런 식으로 아이템을 표시해 준 적이 없었다.
`즉 천장에서 보이는 빛은 이계의 본질 덕이라는 건가.`
이계의 근원과 본질.
이계 녀석들은 어떠한 힘을 통해 탑에 간섭할 수 있는 게 확실하다. 이계와 관련된 아이템과 스킬의 효과는 기존 스킬보다 아득히 좋았으니까.
`절대 은폐도, 스틸의 부가 효과인 탐욕의 왼손도.`
멸망의 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굉장한 효과였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간섭하고, 탑의 규칙을 마음대로 비틀어 내고 있는 것이다.
진영은 망설이지 않고 황금빛이 새어 나오는 천장을 향해 뛰어올랐다.
"이 불경한 놈이 어딜 뛰어오르는가!"
검은 개의 머리를 가진 아눕이 발광하며 철도끼를 휘둘러댔다.
쉬익-! 쉬익-!
녀석이 여기의 실질적인 보스인 것 같지만, 신화준에게 당한 상처 때문이지 확실히 움직임이 느렸다.
진영은 오히려 녀석의 공격에 맞춰 도끼를 피한 뒤, 가슴팍을 밟으며 하늘 위로 도움닫기를 시도했다.
"커헉!"
폐가 눌리며 기침을 내뱉는 아눕의 얼굴을 한 번 더 밟아 준 뒤, 진영은 천장을 향해 단검을 찍었다.
쿵! 쩌저적!
마력이 실린 일격에 천장 한구석이 부서져 내렸다. 그렇지만 황금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진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땅에 착지했다.
`단단한 무언가가 있다.`
레전더리급 단검 카른웨난으로도 단번에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이었다.
그래도 분명 천장을 잘라내는 느낌이 들었다. 몇 번 정도 더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여신상을 부수고 신전을 더럽힌 것도 모자라서 이곳의 제사장인 나를 두들겨 패고, 멸시해 놓고서 이번에는 나를 무시하는 건가!"
아눕이 이를 드러내며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진영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신화준한테 당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문제는 화내는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거다.
쉬이익-!
아눕의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도끼가 휘둘러 질 때마다 땅이 박살나고, 신전이 무너져 내렸다. 진영은 가볍게 스텝을 밟아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냈다.
"네 녀석 덕분에 신전이 난리가 났지 않은가! 죽어서 죄를 씻어라!"
진영은 계속해서 아눕을 살피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어쩌면 신전을 박살 내놓은 건 신화준이 아니라 이 녀석일지도 몰랐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하면 빠르겠네.`
타악.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진영이 아눕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 전 당했던 걸 떠올린 아눕이 급히 도끼를 들어 올렸지만, 진영은 개의치 않고 녀석의 도끼를 밟았다.
아이템 보정으로 민첩 스탯이 아눕보다 앞서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 매달리면!`
진영은 천장에 생긴 틈을 향해 뛰어올랐다. 커진 균열 사이의 틈을 붙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아눕은 자신의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균열을 향해 아눕의 도끼가 쇄도했다.
녀석은 분노에 취해 자신이 지키는 신전을 부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쿠과광!
예상대로였다.
진영이 도끼를 피해 땅으로 내려옴과 동시에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투욱.
부서진 천장 속에서 검은 상자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겉면에 황금빛이 맴돌고 있었다.
`저거다.`
진영은 잽싸게 상자를 주워 아눕과의 거리를 벌렸다.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음에도 상자는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진영이 흥미로운 눈으로 상자를 열었다.
`이건...`
상자에서 나온 건 30cm 정도의 새하얀 조각상이었다.
신전에 있던 여신상을 복구하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여신상의 뒤쪽으로 원모양의 밝은 마력이 맺혀 있다는 것 정도.
그것 말고는 특이할 게 없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있는 아눕의 반응이 이상했다.
도끼를 휘두르는 대신 경악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서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네 놈. 그...그걸 어떻게...."
지금까지의 노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거?"
"......"
진영은 조각상을 가리켰다.
아눕이 감격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였다면 놀랄 일이 없었으나.
쿠웅.
아눕이 갑작스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응?"
이어진 상황은 진영조차 놀랄 정도로 뜬금없었다.
아눕의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미, 미천한 종이..."
엄숙한 태도로 도끼를 땅에 내려다 놓고, 고개를 조아리기까지 했으니.
"이름 없는 여신님을 뵙습니다."
"....?"
진영은 들고 있는 여신상과 아눕을 번갈아 쳐다봤다.
침묵은 한 동안 이어졌다.
이윽고 고개를 슬쩍 든 아눕이 진영을 향해 물었다.
"그... 혹시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 * *
11층의 히든 피스에 대해서 진영이 알고 있는 건, 거대한 여신상을 부수면 히든 피스가 나온다는 것뿐이었다. 신화준은 가장 빠르고 편하게 히든 피스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한 퀘스트가 존재했다.
"그렇게해서 제가 영겁의 시간 동안 찾고 있던 여신님의 진체(眞體)를 진영님께서 찾아주신 겁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눕은 진영을 향해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그제야 대강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본래 미션은 사막 어딘가에 있는 여신의 본체를 찾아내는 거였구나.`
별 하늘 아래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사막에서 여신의 본체를 찾는 미션.
말 그대로 사막에서 바늘찾기였다.
가장 악질적인 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본체가 신전 천장 한 귀퉁이에 있었다는 거다.
`못 찾을 만 했네.`
천장을 부수지 않으면 상자를 찾을 수도 없다.
자신이 모시는 신의 신전을 부술 생각은 보통 하지 않을 테니, 평생을 못 찾은 게 당연했다. 플레이어가 어딘가에 숨겨진 본체를 찾으러 움직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면 진영님께서는 이전에 왔던 그 망나니가 아니신겁니까?"
어느덧 깍듯하게 존대까지 하는 아눕.
그 망나니는 신화준을 말하는 거겠지.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긴 것부터가 완전히 다른데, 같은 사람 취급은 너무 하네."
"듣고보니 그 망나니는 좀 더 어려보였던 것 같기도합니다."
"그래."
신화준이 실제로 나이가 3살 정도 어리다.
다른 종족이니 생김새를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여신님의 진체를 돌려주시겠습니까?"
아눕은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내밀었다.
진영이 잠시 고민했다. 돌려줘야하나?
`일단 이 조각상은 히든피스가 아니다.`
아눕이 애타게 찾고 있던 아이템은 맞지만 그게 전부였다.
`...뭐 가지고 있어 봤자 쓸데도 없긴 해.`
차라리 건네주는 게 더 좋은 아이템을 받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진영은 원래 있던 상자에 여신상을 넣어 던졌다.
"허어억!"
우왕좌왕하던 아눕이 몸을 던져 여신상을 받아냈다.
상자가 있으니 괜찮을 텐데.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이는 아눕.
"그 답례라고 할까, 감사의 표시라고 할까. 저희 신전에서 보물로 여기는 아이템을 드리겠습니다."
역시 이어지는 보상이 있었다. 진짜 히든피스를 보게 되는 건가 싶었는데, 고개를 돌린 아눕이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그 썩을 놈이 훔쳐가서 드릴 게 없네요.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정말로 없는 모양이었다. 여신상의 본체를 찾는 건 정석적인 절차를 밟는 미션이었다. 그런데도 보상이 없다는 건 정말로 없는 거다.
"정말 없나 보네."
여신상에 다가가서 수십 차례 스틸을 사용해 보았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애초에 반신반의하는 상황이기는 했다.
1층도 따로 진 히든 피스가 있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저 드릴 건 없지만, 여신님을 되찾은 기념으로 제가 신탁을 하나 내려드리겠습니다."
진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탑에 속한 존재가 믿는 신이야 뻔했다.
탑이 만들어낸 성좌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신들.
실질적인 영향력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처억.
어울리지 않게 두 손을 꼭 잡은 아눕이 눈을 감았다.
`돌아가야되나.`
큰 소득은 없었지만, 무기와 새로운 스탯에 적응하기에는 충분했다.
이계의 본질이라는 새로운 이계의 존재도 끌어왔고.
그때, 번쩍하는 안광과 함께 아눕이 눈을 떴다.
"이계의 존재들과 함께하는 그대여, 삶을 포기하지 말지어다. 규율에 따르지 말지어다."
신탁의 내용에 신전을 빠져나가려던 진영의 고개가 돌아갔다.
[ 이계의 근원이 신탁의 내용에 의문을 가집니다. ]
[ 이계의 본질이 여신에게 호기심을 나타냅니다. ]
신탁을 마친 아눕이 차분한 표정으로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지도 않은, 그리고 진영조차 99층까지 알지 못했던 이계의 존재에 대해 아눕의 여신은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입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군요."
"잠깐만, 대체 어떻게..."
진영의 놀란 표정을 본 아눕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래간만의 신탁이라 그런지, 기분이 홀가분합니다. 전부 진영님의 덕입니다. 여신님께서도 진영님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네 여신은 대체 누구지?"
아무리 신탁이라지만, 효과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지금 진영은 정보 차단 효과를 가진 히든 피스도 소지하고 있다. 진영의 속마음이나 기억을 꿰뚫어 본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여신께서는 이름이 없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신에게 이름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이름 없는 여신이라는 건가."
1층에서 진영이 손에 넣은 히든 피스의 이름은 `이름 없는 신의 에고`.
무슨 연관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만 당장은 알 수 없었다.
"여신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데, 그렇게는 안 되나?"
강림이라던가, 빙의라던가 그런 거 있지 않던가.
아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여신께서는 오랫동안 잊혀 계시느라 많은 힘을 잃어버리셨습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더 이상은 불가능 할 것 같..."
아눕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잠시 몽롱한 환각 상태에 빠진 듯 초점이 풀렸던 아눕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신탁은 불가능하지만, 가시는 길에 선물을 드리겠다고 하십니다. 유용한 곳에 써달라고 하시는군요."
아눕이 비켜서자, 부서진 조각상 안쪽에서 성스러운 푸른빛이 솟아났다.
가까이 다가가자 전에는 없던 푸른 보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진영이 보석을 들어 올렸다.
[ 아이템 설명 ]
이름 : 이름 없는 여신의 축복
등급 : 신화
종류 : 소모품
효과 : 사용시 15분 간, 온전한 정신으로 모든 등급을 2.5단계 상승시킵니다. 모든 나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건...."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50층을 넘어가야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등급이었다.
효과를 읽어 내려가는 진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거면 되겠는데."
"맘에 들어 해주시니 저도 기쁘군요."
패널티 없이 2.5단계의 등급 향상. 디버프 무효화.
베르세르크의 특성 광폭화보다 아득히 좋았다.
정신 이상이라는 패널티도 없다. 멀쩡한 정신인 주오령이 이상한 거지,
본래대로라면 스탯 등급을 향상하는 데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예상과는 다르지만,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오히려 좋다.`
본래 얻고자 했던 히든 피스는 아니었지만, 신화준을 처리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적절했다.
히든 피스는 신화준에게서 뺏으면 그만이었으므로.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시거나, 신탁이 필요하시면 찾아주십시오. 진영님을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겠습니다!"
아눕은 신전 밖까지 나와 고개를 숙이며 배웅했다.
진영은 손을 흔들어주고는 왔던 길을 따라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손에 들린 푸른 보석과 함께 말이다.
[ 이계의 근원이 이후 당신의 행보에 관심을 가집니다. ]
[ 이계의 본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이제부터 진영이 할 일에 이계의 존재들도 어느 정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여태껏 진영의 행적을 봤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신화준을 만나 담판을 지으러 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