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의 본질(2)
"이계의 본질...?
줄곧 진영을 지켜보던 것은 이계의 근원이었다.
녀석이 성좌와 비슷한 개념이라면, 여럿이 있는 것도 이해할 만 했으나.
"너는 또 뭐야?"
진영은 허공을 향해 말했다.
누가 보면 혼잣말이라도 하는가 싶겠지만,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 이계의 본질이 당신의 히스토리를 탐색합니다. ]
근원과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은 절차였다.
본질과 근원.
두 이름이 의미하는 건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명확히 구별되는 두 존재이기에 이런 식으로 나뉘는 것이겠지.
[ 이계의 본질이 단 한 번의 회귀로 이뤄낸 당신의 업적에 감탄하며 후원을 자처합니다. ]
`후원?`
[ 이계 스킬 강화석이 제공되었습니다. ]
메시지와 함께 익숙한 금색 보석이 떠올랐다.
근원 녀석은 지원하는 걸 아끼는 모습이었는데, 이 녀석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아이템을 지원해 온다.
`뭐 나야 좋지만.`
얼마 전 이계의 근원과의 대화에서 유추한 바에 따르면, 녀석은 탑 공략을 원하지만 직접 하지는 못한다.
성좌가 플레이어를 후원하듯,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계의 존재들도 플레이어를 후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범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클지도 몰라.`
이계라는 말 자체부터가 다른 세계이지 않던가.
또한 히스토리를 확인한 이계의 존재들은 진영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성좌보다, 어쩌면 탑의 주인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지도 모른다.
파삭!
새로 얻은 보석을 부수자 금빛이 터져 나왔다.
[ 이계의 근원이 떨떠름한 기색을 나타냅니다. ]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가?
본질이 선물한 아이템을 사용하자, 근원이 어쩐지 실망한 기색이다.
물론 신경쓸 바는 아니다.
몰빵하겠다고 선언한 것에 비해 근원 녀석은 준 게 없으니까.
[ 이계 스킬 강화석을 사용하셨습니다. ]
[ 스틸의 부가효과 '탐욕의 왼손S'의 성공 확률이 2% 증가합니다. ]
지금까지 주력으로 사용해 왔던 스킬의 부가효과 탐욕의 왼손.
3%였던 성공 확률이 5%가 되었다.
"오케이."
진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낮은 확률 때문에 여러 번 사용하는 게 일상이던 스킬이었다.
2%의 상승으로도 스킬 사용에 여유가 생긴다.
무엇보다 확률을 상승 시킬 수 있다는 게 큰 발견이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올려나가면 100% 확률로 아이템을 훔칠 수도 있는건가?`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진영은 다시금 허공을 바라보고 말했다.
"고맙다. 너는 어떤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후원할 거라면 나한테 하는 게 좋을 거야."
[ 이계의 본질이 당신의 제안에 수긍합니다. ]
[ 이계의 근원이 다른 존재의 참견에 불만을 표합니다. ]
어쨌든 이 상황은 진영에게 전적으로 좋았다.
이계의 존재와 목적이 일치하는 이상, 자신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늘어서 나쁠 게 없었다.
지금까지는 독점적인 구도가 둘의 경쟁 구도가 된다면, 진영으로서는 선택지와 보상이 늘어나는 셈이니.
스릉-.
진영은 품 안에 숨기고 있었던 레전더리급 단검을 꺼내 들었다.
칼집에서 검을 뽑자 하얀빛과 함께 검날이 드러났다.
`새로 얻은 단검 성능도 한 번 확인해 둬야지.`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로 신전 하나가 보였다.
사막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신전.
본래대로였다면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는 곳이었겠지만.
`히든 피스는 신화준이 이미 챙겨갔을 거고.`
진영의 목표는 진짜 히든 피스였다.
신화준은 직접 미션을 클리어하고 얻기보다는 가장 빠르고 쉽게 얻는 방법을 선호했던 것 같다.
자물쇠를 부숴버린다든지, 정령들을 박살 내고 아이템을 뺏는다든지.
그 결과 얻은 건 열화판 히든 피스였다.
그것만으로도 기가 막힌 성능을 내기는 하지만, 진짜에 비하면 못 미치는 성능이었다.
`나라고 정석적인 루트를 밟는 건 아니었지만.`
진영의 왼손은 어떤 대상에게서든 아이템을 훔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진(眞)히든 피스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있다면, 충분히 신화준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저벅-.
신전을 주시하던 진영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처억.
단순한 마수의 발소리였지만, 신전 안으로 숨어드는 진영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붉은 갑주를 걸친 기사가 신전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녀석의 투구에 새하얀 별 하나가 새겨져 있다.
`1성 기사인가.`
이 히든 플레이스는 처음 오는 장소였지만, 기사의 갑옷은 익숙했다.
이곳의 마수는 탑의 분류 체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양.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마수가 되어 탑을 지키는 이들이었다.
전투력만 따지면 20층의 일반 몹 정도에 해당한다.
`저 녀석들이 있다는 건 신화준이 여기에 온 적이 없다는 건가?`
신화준이 히든 피스를 챙겨갔다면, 마수들은 박살이 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귀찮다고 지나쳐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진영이 재빨리 기사의 뒤로 숨어들었다.
슷.
사막의 바람 소리보다 작은 소리였다.
지금 진영의 스탯은 4단계 : 영웅.
진영이라면 20층의 일반 마수를 상대로도 충분한 능력치였다.
`몸이 확실히 가벼워서 좋군.`
2단계 정도에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가벼움이었다.
진영의 은밀한 움직임 덕에, 기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위이잉.
단검에 푸른 마력이 둘러졌다.
단검을 시험 할 겸 상대할 대상으로 적격이었다.
`일단 갑주의 연약한 부분부터 노려볼까.`
타닥.
진영은 가볍게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기사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순간.
진영의 단검이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그런데 감촉이 뭔가 달랐다.
촤아악!
"?!"
기사의 투구 너머 속 눈빛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놀랍기는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갑주를 뚫고 데미지를 주려던 진영의 의도와 다르게, 단검이 갑주 자체를 갈라 버린 것이다.
"크으윽!"
기사는 허리 부근에 일자로 된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치명상이었지만.
"이 놈!"
1성 기사 또한 일평생을 검에 바쳐 온 자.
쓰러지는 와중에도 진영을 향해 검을 휘두를 정도의 정신력이 있었다.
"죽어라! 침입자!"
쉬이익-!
있는 힘을 끌어 모은 최후의 공격인만큼 날에 서린 마력이 굉장했다.
그러나 진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 전투 상태 돌입하여 힘, 민첩 스탯이 30% 증가합니다. ]
레전더리 등급 카른 웨난의 특수 효과.
일순 진영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영웅 등급에서 증가하는 30%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떨어지는 상대의 검이 순간적으로 느릿하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스윽. 푸욱!
가볍게 검을 피해낸 진영이 다시 한 번 단검을 휘둘러 기사를 마무리했다.
단단한 갑주가 스티로폼 잘라내듯 부드럽게 부서졌다.
`굉장한데.`
단검의 효과를 체감한 진영이 씨익 웃었다.
전생에도 레전더리급의 단검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 단검처럼 공격력이 높은 건 처음이었다.
`남은 기사들도 빠르게 처리하고 신전 안으로 들어간다.`
그 뒤로는 어렵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다가가 베어내면 될 뿐.
촤아악.
신전 주변을 경비 서고 있던 기사 셋이 순식간에 진영의 단검에 도륙 났다.
단검 카른웨난 앞에서 붉은 갑주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단말마도 내지 못한 기사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 이계의 본질이 흡족한 표정을 짓습니다. ]
[ 이계의 근원이 자신의 사람 보는 눈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
어차피 진짜는 신전 내부에 있을 녀석들이었다.
바깥을 돌아다니는 기사들은 잡몹에 지나지 않는다.
* * *
`역시...`
신전 안으로 발을 들이자, 예상했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저곳 금이 간 신전, 박살난 기둥과 산산조각이 난 채로 흩어진 푸른 갑주들.
`신화준이 거하게 벌여놓고 갔나 보네.`
바깥에 서 있던 기사들이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단순히 신화준이 귀찮아서였으리라.
자아를 잃고 같은 구역을 빙빙 도는 녀석들이었으니, 신전 내부가 털려도 부지런히 바깥을 경계하고 있던 모양이다.
신전 끝에 서 있는 거대한 여신상이 가로로 절반 쪼개져 있었다.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닥에 떨어져 조각나 있었다.
`저 안에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었을거야.`
이미 신화준이 히든 피스를 챙겨 간 건 확실시 되는 상황이지만 진영은 조각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아 있는 아이템이 있을 지도 모른다.
정령수처럼 진짜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을 경우에는 진영이 훔쳐낼 수 있다.
진영이 손이 부숴진 조각상 위로 올려지려는 그때.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신전의 벽면이 부서졌다.
"오오! 가련하고도 위대한 우리의 여신이시여. 당신의 원수를 드디어 찾았나이다!"
검은 개의 머리를 한 거인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영을 바라 보았다.
바깥을 배회하는 기사들과 달리 자아가 살아 있는 녀석이었다.
`놀?`
개의 머리를 한 인간형 마수 놀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히보니 다르게 느껴졌다.
분노하고 있기는 하지만 흉포함보다는 지성이 깃든 눈빛이었다.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 특이한 모습도 그렇고, 그냥 놀하고는 달라 보였다.
`1층에 있던 염소 마수하고 비슷해 보이는데.`
진영을 노려보던 개마수가 손에 쥔 철도끼를 들어 올렸다.
"내 이름 두 글자 아눕을 걸고, 너를 찢어 우리의 여신에게 바치리라!"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온 몸에 감은 붕대가 어쩌면 신화준에게 당한 상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아아.
진영은 계속해서 조각상을 향해 스틸 스킬을 사용했다.
보스급 마수일 게 뻔했다. 굳이 무리하며 싸울 필요가 없었다.
진영은 아이템만 가져가면 될 뿐이니.
그러나 아눕은 진영이 아이템을 훔치는 걸 기다려 주지 않았다.
육중한 무게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도끼로 땅을 내려찍었다.
쿠웅!
진영이 서 있던 자리가 쩌억 갈라졌다.
그 충격파에 옆에 있던 조각상이 조각났다.
아눕이 경악한 눈으로 입을 떡 벌렸다.
"허억... 이 불경한! 감히 여신님의 조각상을! 용서치 않겠다!"
예상하고 공격인만큼 진영은 가볍게 공격을 피해 조각상의 뒤로 이동했다.
자기가 조각상을 부숴놓고, 성을 낼 줄이야.
진영이 미간을 좁혔다. 아눕 때문이 아니었다.
`확률이 올라갔는데도 안 나오는 걸 보면 여기에는 없는 건가?`
이제 막 스무 번째 스틸을 시도한 참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냥 운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쿠웅!
아눕이 발을 구르고서 다시 한 번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녀석의 눈은 이미 한 바퀴 돌아 있었다.
`조각상이 부숴지는 건 막아야한다.`
진영은 재빠르게 조각상을 딛고 높이 뛰어올랐다.
콰아앙!
거대한 도끼와 진영의 단검이 마주쳤다.
크기 차이는 지대했지만, 힘에서 진영이 밀리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눕이 진영의 공격을 받아내고서 크게 휘청거렸다.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없을 확률도 다분히 존재했다.
1층 같은 경우도 따로 진짜 히든 피스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만약 진짜가 있었으면 진영의 손에 집혔을 테니까.
"굉장한 힘! 역시 그 놈이 맞군!"
아눕은 엉뚱한 오해를 한 채로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따지고 보면 오해가 아니기도 했다.
진영도 아이템을 훔치러 들어 온 것은 맞았으니.
아눕의 몸 주변으로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해도 공기 너머로 따가운 마력이 전해졌다.
`하는 수 없군.`
진영이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일단은 눈앞의 놈부터 쓰러뜨리고 확인하는 게 나았다.
스텟이 4단계에 오르고 레전더리 아이템을 두 개 착용한 지금 진영은 최상의 상태였다.
히든 플레이스의 보스를 상대로도 충분히 해볼 법 했다.
그때였다.
"응?"
아눕을 상대하기 위해 고개를 든 진영이 한 쪽 눈을 찡그렸다.
신전의 천장 한 켠에서 황금빛을 발하는 물체가 보이고 있었다.
[ 이계의 본질이 당신의 발견에 미소짓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