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의 본질(1)
신화준은 전설이었다.
혜성처럼 나타나 15층을 격파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실력으로 탑을 공략해 나간다.
천부적인 센스와 압도적인 무력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성과.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곳에는 신화준이 있었고, 신화준이 있는 곳에는 기적이 따랐다.
그가 등장한 이후로 랭킹 1위의 자리는 단 한 번도 빼긴 적이 없으며, 신화준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탑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 또한 신화준을 믿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가 회귀자이거나, 다른 플레이어들을 농락하고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탑에서 회귀가 가능한 건 회귀자 클래스 뿐이다. 그러나 신화준의 클래스는 S급 무신.
녀석은 자신이 회귀자임을 철저히 숨기고 다녔다.
`아이템으로 회귀가 가능할 거라곤 아무도 몰랐다.`
99층까지 올라 온 진영조차, 그리고 최후의 6인조차 몰랐던 사실이다.
그렇기에 신화준은 더욱 전설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미래에 대해 모르면서, 자신의 타고난 직감과 재능으로 시련을 돌파해 나가는 그의 모습은 진정 영웅으로 비춰졌던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진영에게 있어서 신화준은 결코 영웅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배신자이자 기만자. 팀을 속이고 자신을 살해한 살인범에 지나지 않았다.
타악!
신화준은 지붕을 박차고 건물 위를 달려 나가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순식간에 사건 현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진영은 본능적으로 신화준을 뒤따라 움직였다.
`빠르다.`
신화준의 이동 속도는 눈으로 쫒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신화준은 진영보다 반 년 이상 먼저 탑에 들어왔다.
녀석의 평균 스탯은 최소 4단계.
평균 2단계 정도인 진영이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신화준을 보게 된 상황 자체가 이례적인 상황.
'젠장.'
진영이 분한 듯 주먹을 움켜 쥐었다.
당장이라도 녀석을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하루, 하루가 더 필요하다.'
"야! 갑자기 뭐야?"
뛰쳐나간 진영을 이상하게 여긴 염태준이 다가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까 있던 데로 돌아가자."
"참나, 뭐가 뭔지.
진영은 몸을 틀어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다.
붕괴된 건물의 잔해 속에서 화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목이 깔끔하게 절단된 채 쓰러진 플레이어가 있다.
`익숙하게 느껴진 이유가 있었어.`
건물을 무너뜨린 일격도, 처리 방식도 신화준의 것이었다.
탑 중후반부에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진영은 그에 대해서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 보던 염태준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보통 솜씨가 아니네."
진영의 생각이 깊어졌다. 어떤 목적으로 이런 테러를 자행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염태준, 모레쯤에 찾아갈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응? 벌써 가게? 한 잔 걸치려고 했더니. 뭐, 좋아. 도자기에 적힌 글귀를 해석해 놓고 있으면 되는 거지?"
"그래."
염태준을 뒤로 한 채 진영은 그랑블루 클랜을 향해 걸었다.
예정이 바뀌었다. 신화준이 있다는 걸 알아챈 이상, 서둘러야 했다.
`녀석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회귀에 관해 간단하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다.
진영은 수십 번의 회귀를 반복한 신화준에게서 `이계 규율 - 절대 회귀` 라는 팔찌를 빼앗았다.
그리고 회귀했다.
`적어도 나랑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 건 확실하다.`
만약 팔찌를 빼앗긴 신화준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진영을 진작에 찾아내고도 남았을 거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신화준은 몇 회차를 반복한 놈인가.
회귀를 모르는 0회차의 신화준인가?
아니면 진영이 모르는 회차의 신화준인가.
`추측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야.`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였다.
신화준을 잡아 물어보면 된다.
* * *
"어, 음.... 무슨 일이십니까?"
그랑블루 클랜 건물 안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던 당직 클랜원이 고개를 들었다.
새벽 시간이라, 클랜 건물 내부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진영이 말했다.
"지금 깨어 있는 사람 중에 간부급이 혹시 있습니까? "
"간부라면 제가 있는데, 이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무슨 불편하신 일이라도?"
낮에 협상에 나왔던 고정민이 진영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가왔다.
"낮에 주신 정보 덕분에 15층의 일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실제로 마수 폭주가 일어난 15층이 그랑블루 주도하에 해결되는 중이었다.
진영이 제공한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기에, 진영을 바라보는 고정민의 태도도 한 층 부드러웠다.
"아, 네. 낮에 이야기했던 s급 지원 프로그램 때문에 왔습니다. 저 말고 다른 일행은 그대로 진행하되, 저는 지금 당장 코인으로 받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고정민의 눈이 커졌다.
오히려 좋다는 눈치였다.
"그 정도라면 제 권한으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셔주시죠."
S급 지원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건 코인 뿐만이 아니다. 플레이어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실력 있는 클랜원이 최소한 한 명씩은 붙어야했다. 그것말고 지원해야 되는 장비까지 생각하면 코인으로 지급하는 게 그랑블루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정민이 묵직한 코인 주머니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 6500 코인입니다. 코인 계좌가 없으실까봐 개설비용까지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계좌는 있었지만, 많이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15층에서 일어나는 일이 일단락되면,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고정민은 진영을 빤히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개인적으로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진영이 씨익 미소지었다.
15층에 관한 진영의 정보가 맞아 떨어지자, 고정민도 진영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미래를 알고 싶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욕망이기도 했다.
진영이 대답했다.
"간단한 거라면 코인으로 교환하시죠."
* * *
몇 가지 간단한 사실을 알려주고, 진영은 500코인을 받았다.
그렇게 얻은 7000코인과 진영의 수중에 있는 코인을 합치면 약 1만 1천 코인.
3단계에서 4단계로 100% 등급 업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코인은 1200개.
체력, 힘, 민첩, 마력, 기력 총 5개의 스탯을 올려야했다.
6천 코인 정도가 순식간에 진영의 손에서 사라졌다.
[ 스탯이 크게 강화됩니다! ]
[ 현재 평균 스탯 : 4등급 - 영웅(英雄) ]
진영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변화된 신체를 살폈다.
갑작스레 스텟의 변화가 생기면 적응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그랑블루의 S급 지원프로그램도 코인만 건네주고 끝이 아니라, 그만한 실력을 쌓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영에게는 이미 지나온 길.
오히려 스텟이 높을수록 익숙하게 느껴졌다.
타닥, 탓.
스텝을 잠시 밟아본 진영이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좋아, 확실히 할 수 있는 기술이 더 많아졌어.`
스킬 이외에도 착실히 쌓아왔던 감각과 기술들은 스텟이 높을수록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아직 신화준을 무조건 이긴다고 하기엔 모자르다만.`
신화준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준비되어야하는 몇 가지가 있었다.
현재 녀석의 스탯은 4단계가 무조건 넘는다. 어쩌면 5단계에 근접해 있을지도 모른다.
2단계에서 3단계까지 100개.
3단계에서 4단계 1천개.
4단계에서 5단계 1만개.
스탯 등급 업에 필요한 코인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때문에 현시점에서 평균 5단계 스탯에 도달한 플레이어는 국내에서도 손에 꼽을 것이다.
그들이야 말로 랭커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자들이다.
`아직은 신화준도 생각만큼 강하지는 않을 때다.`
15층 격파 당시 신화준은 그런 랭커들조차 씹어먹을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그 정도까지 힘을 쌓지는 못했을 것이다.
녀석은 자신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은밀하게 활동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내 예상보다 신화준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랐을지도 모른다.`
녀석의 행적은 그가 드문드문 말하던 일들을 진영이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확인해 보아야한다.
[ 11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
구역마다 하나씩 놓여 있는 포탈 안으로 발을 들이자, 정보창이 떠올랐다.
10층까지는 층을 오르기 위해 개인의 권한이 필요한 `퍼스널 에리어`다.
11층부터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클리어해도 해당 국가의 플레이어 모두가 다음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인터널 에리어`로 변경된다.
`11층의 히든피스부터 확인한다.`
진영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새하얀 빛무리가 주위를 맴돌며 일순 풍경이 바뀌었다.
소수층에 있는 히든 피스들을 신화준은 위층에서부터 가지고 내려온다.
[ 11층 : 게이트 필드 - 브레이크 저지 ]
*해당 플로어는 클리어 되었습니다.
3층과 비슷하지만 스산한 기분이 느껴지는 평원이 진영을 반겼다.
붉은 줄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이것은 탑이 나누어둔 것이 아닌 플레이어들이 임의로 정한 경계이다.
`그랑블루 파밍지역은 저긴가?`
파밍지역.
플로어는 공략되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기존의 성질을 유지한 채로 존재하기에, 플레이어들은 계속해서 해당 플로어를 탐사하고, 마수를 사냥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오는 부산물들과 코인은 플레이어들이 사냥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 원동력을 토대로 다음 층을 공략해 나가게 된다.
`문제는 사람들이 다음 층을 공략하는 데 관심이 크지 않다는 거지만.`
현재 멸망의 탑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충분히 잘 먹고 잘살 수 있는데, 무리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진영은 그랑블루의 파밍 지역 앞으로 발을 옮겼다. 붉은 선 뒤로 수 십개의 게이트가 늘어서 있었다.
[ 그랑블루의 거점에 입장하셨습니다. ]
이곳을 이용하는 것도 S급 지원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는 일부였다.
고정민에게서 미리 받은 증표를 가지고 입장하자, 마력장을 쉽게 지나칠 수 있었다.
`그랑블루 파밍 지역 안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진영은 수 십개나 되는 게이트를 자세히 살폈다.
11층의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는 장소로 가기 위해서는 특수 게이트를 찾는 게 중요했다.
가끔씩 변칙적으로 발생하는 특수 게이트는 내부에 더 강한 마물과 보스가 등장한다,
11층에서는 특수 게이트에서만 히든 피스를 얻을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찾았다.`
특수 게이트 자체가 희귀한 건 아니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게이트 너머로 넘실거리는 마력의 형태가 다른 게이트와 조금 다르다.
진영은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레전더리급 단검 `카른웨난`을 꺼냈다.
스릉.
검집에서 빠져 나온 단검의 검날이 반짝였다. 새로 얻은 무기를 시험해보고, 이곳에 있는 히든 피스를 챙겨가야했다.
설령 신화준이 이미 11층의 히든 피스를 가져갔다고 해도 괜찮았다.
다른 층처럼 진(眞)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농후했다.
진영은 특수 게이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
그리고 그 순간.
치지직!
검은 팔찌에서 황금빛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특수 게이트로 흡수된 스파크는 순식간에 퍼져나가며 게이트 자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무언가 반응하기도 전에 게이트가 진영을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변화된 풍경 앞에서 진영이 숨을 머금었다.
별들로 가득찬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 히든 플레이스 : 별들의 함성 ]
변화된 특수 게이트는 곧장 히든 플레이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진영이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 이계의 근원이 황급히 당신을 주시합니다. ]
익숙한 정보창 하나가 떠올랐다. 오히려 안심했다.
그것도 잠시 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정보창 아래로 이질적인 내용이 보였다.
[ 이계의 본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당신을 주시합니다. ]
또 하나의 이계의 존재가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