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콜렉션(2)
새하얀 칼자루가 빛나는 단검이 진영의 손에 들어왔다.
레전더리 등급임을 증명하는 주황색 기운이 검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국내에 존재하는 레전더리 등급의 아이템의 수는 30개 언저리.
헌터와 플레이어, 길드와 클랜 모두가 넘보는 최강의 아이템.
그 중 두 개가 진영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단검 카른 웨난.
그리고 헤르메스의 장갑.
‘장갑은 히든 피스를 통해서 등급을 올려놓은 것뿐이지만.’
그래도 레전더리가 두 개나 모였다.
아이템과 더불어 그랑블루에서 제공할 S급 지원 프로그램을 받는다면, 진영은 단숨에 대한민국 내의 랭커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기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염태준이 아이템이 사라진 것을 모르게 해야한다.’
훔친 아이템이 별거 아닌 거라면, 본래의 소유주도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몇백 원이 사라졌다면 설령 그것이 도둑 맞았다 치더라도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사라진 물건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었다면, 가치가 큰 물건이라면 경찰을 불러서라도 찾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이곳에 있는 아이템을 전부 쓸어가는 거라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염태준은 아이템을 계속 모을 것이고, 지속적으로 비밀 창고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염태준이 도난 사실 자체를 몰라야 했다.
만약 도난 사실을 눈치채면 비밀 창고의 위치를 바꾸거나, 새로운 방범책을 찾을테니.
진영은 곧장 비밀 창고의 문을 닫고 밖으로 빠져나와 폐쇄 구역에 위치한 낡은 가게를 찾았다.
‘최대한 신속하게 끝낸다.’
하늘 높이 떠오른 두 개의 달이 빛나고 있었다.
이 시간대라면 깨어 있을 것이다.
낡은 철문 앞에선 진영이 문걸이를 쥐었다.
철컥.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자, 자욱한 담배 연기가 진영을 맞이했다.
“콜록, 계십니까?”
손을 휘휘 저으며 던진 말에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연기가 자욱해 그 너머의 NPC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이 든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 올 뿐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는가?”
폐쇄 구역의 NPC들은, 거주 지역에서 쫓겨난 일종의 범법자들이었다.
플레이어들이 NPC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은 단순히 게임 속의 인공지능과 비교해서는 곤란했다.
적어도 10층의 NPC들은 탑 안에서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주민이었다.
“복제품을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 두 개 입니다.”
“흐음······. 제대로 찾아왔구만. 하나는 열쇠고, 하나는 레전더리급. 가격이 꽤 나갈 텐데 괜찮겠나?”
짙은 연기를 뚫고 NPC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복제품을 만들어내는 장인 NPC였다.
그가 만들어내는 복제품은 진품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다.
시스템을 속일 정도로 완벽한 그의 실력은 완벽했다.
일설에 따르면 탑의 규칙을 어기고 코인을 복사해 폐쇄 구역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1천 코인이면 되겠습니까?”
“······.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고말고.”
진영이 가진 4천 코인 중에 1천 코인이었다.
물론 3천 코인 정도는 빌린 것이었지만, 추후 그랑블루의 지원을 받을 걸 생각하면 공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염태준의 비밀 창고에는 그 중요한 게 없었어.’
나중에 털어먹을 것도 생각하면 투자가치가 충분했다.
스윽.
연기 안에서 앙상한 손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진영이 내민 아이템을 가지고 사라졌다.
“금방 될 걸세.”
노인의 말대로 그가 아이템을 복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30분 정도.
담배 연기 속에서 갖가지 색의 빛이 번쩍였다.
다시금 연기를 뚫고 노인의 손 두 개가 드러났다.
양손에 단검과 열쇠가 하나씩 걸려 있었다.
그 두 개는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자네 쪽에서 왼쪽이 진짜, 오른쪽이 가짜. 열쇠는 상관없겠지만, 무기는 헷갈리지 않게 조심하게.”
진영이 코인을 내놓자, 세 번째 손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코인을 가져갔다.
“종종 이용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도둑과 복제품 제작사는 무엇보다 어울리는 조합이다.
스륵-.
노인은 다시 짙은 안갯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복제품을 받아 든 진영은 가게 바깥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후우,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네. 담배도 안 피우는데.”
복제품을 향해 시선을 옮기고 정보를 확인했다.
[ 아이템 설명 ]
이름 : 카른웨난
등급 : 레전더리
분류 : 단검
효과 : 공격력 80, 장착 후 전투시 민첩, 힘 스탯 30% 증가
기존의 진영이 사용하던 예리한 컴뱃 나이프의 4배에 달하는 공격력.
심지어 전투시에 민첩과 힘 스탯을 증가시켜주는 사기적인 능력이다.
장착하고 싸워야 했기에 염태준은 전시용도로 만족한 듯했지만, 주무기로 사용할 진영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무기였다.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네.’
복제품이지만 시스템이 내보내는 정보창은 동일하다.
실제로 사용해 보면 성능은 다르겠지만.
그 이후로는 간단했다. 창고에 다시 복제품을 가져다 놓으면 그만이었다.
전시대 위로 특수한 마법이 아이템의 존재를 감지한다.
헤르메스 장갑의 특수 스킬 ‘축복받은 도둑’ 덕분에 지금은 아이템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터.
진영이 복제품을 조심스럽게 위에서부터 떨어뜨렸다.
치직.
그제야 이변을 감지한 도난 방지 마법이 작은 스파크를 튀겼지만, 그게 전부였다.
진품과 완전히 똑같은 가품.
함정 마법이 작동하는 일은 없었다.
“그럼 염태준한테 열쇠를 돌려주러 가볼까.”
손을 털어낸 진영이 유유자적하게 비밀 창고를 빠져나왔다.
* * *
콰아앙!
허공을 날아간 나무 의자에 근처의 가구들이 산산히 부숴졌다.
열 명 가량의 NPC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지기 싫으면 말하라니까.”
벌써 몇 시간 째.
진영의 말대로 염태준은 ‘탑이 품은 다섯 가지 보물’ 중 하나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상업지구에 있는 ‘흑장미 상회’를 방문했다.
문제는 이놈들이 보물에 대한 정보를 뱉을 생각이 없어 보인단 것.
‘여기가 확실한데 말이야.’
그가 확신을 가지는 이유가 있었다.
보물이 숨겨진 위치는 탑 곳곳에 수수께끼처럼 남겨져 있었다.
난해한 수수께끼였지만, 진영이 말해준 것과 이 장소의 NPC의 모습은 분명히 일치하고 있었다.
보물에 대한 단서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벌써 몇 시간째 때리고, 윽박지르고, 고문하고 협박하고 있건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염태준이 칼을 들어 NPC 하나의 팔을 베어내려는 그때였다.
“아직까지도 이러고 있는 거야? 네 성격에 이미 다 죽여버렸을 줄 알았는데.”
“아? 뭐야, 너냐 이진영. 이놈들 절대로 이야기 안 하는데 말이야.”
진영은 천천히 걸어가며 전에 사용하던 컴뱃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선 망설임 없이 남자 NPC 하나를 향해 내리찍었다.
“쿠에엑!”
그는 사람답지 않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곳 흑장미 상회의 NPC들은 사람이 아니라 전부 몬스터였다.
“야! 죽여버리면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
당황한 염태준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는 단서가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충분히 시간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꾸르륵.
바닥에 쓰러진 남성 NPC가 몸을 기이하게 비틀더니, 검은 액체를 토해냈다.
슬라임. 그게 남성의 정체다.
“보물에 대한 단서를 얻고 싶으면 죽여야 해.”
진영이 설명하자 그제야 염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임은 사람의 형태로 변하더니, 바로 앞에 있는 진영을 지나쳐 염태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꾸루룩!
지금까지 받았던 고통에 대해 복수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슬라임을 가볍게 회피할 거로 생각했던 염태준의 예상과 달리.
“어?”
순간적으로 가속한 슬라임은 염태준을 넘어뜨렸다.
보기에는 이래도 이 놈들은 블랙 슬라임이다.
2층의 관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강한 놈들이었다.
“크, 크윽! 이 새끼가!”
슬라임은 기습 공격에 당한 염태준을 옥죄기 시작했다.
“이 틈에 도망가자!”
“빨리!”
남은 흑장미 상회의 NPC들이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다.
진영은 그들이 도망가게 놔두었다.
촤악!
“별 것도 아닌 새끼가 까불고 있어!”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라기는 했지만, 염태준의 힘이 더욱 강했다.
블랙 슬라임은 허무하게 핵이 절단되며 생을 마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영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너 뭐 떨어뜨렸는데? 열쇠인가?”
“응? 아, 고맙다.”
감사의 말과 함께 염태준이 진영이 바닥에 뿌린 열쇠를 주워 품 안에 넣었다.
“여기 새로운 단서도 있네.”
끈적한 진액 사이에는 푸른색 도자기 조각이 들어 있었다.
진영이 조각을 염태준에게 건네자 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캬, 좋아. 이거지! 수수께끼에 딱 들어 맞는군.”
아마 도자기에 새겨진 글귀를 해석하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고생 끝에 얻게 되는 건 무의미한 쓰레기 다섯 개겠지만 말이다.
* * *
바깥은 여전히 어두웠다.
염태준이 새롭게 얻은 도자기 조각을 달빛에 비춰보며 말했다.
“이진영, 솔직히 난 네가 꽤 마음에 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관계가 유지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염원하던 보물 하나를 손에 넣고, 다음 보물로 이어지는 힌트까지 얻어냈다.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진영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탑을 공략할 필요가 있어. 네가 협조만 잘한다면 보물 다섯 개를 모으는 건 생각보다 금방일지도 모르지.”
“크하하, 골 때리는 놈이구만.”
염태준은 만약 진영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언제든지 돌아설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 남자였다.
암시장에서 해결사로 활동하는 그는 설득보다 폭력이 빠르게 먹힌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진영을 가두고 정보를 뽑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진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높은 층에서 내려온 회귀자가 힘의 차이 앞에서 보여준 기량과 담대함에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그래, 네가 협력한다면야 나도 그만한 답례를 해야겠지. 이미 레드 리버의 의뢰도 집어 던졌으니까, 연을 이어나갔으면 좋겠군.”
이어지지 않는다면, 약속을 어기겠다면 진영에게 합당한 조치가 있을 거라는 암시.
진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피차 서로가 필요한 사이이니, 얼굴 붉힐 일 없는 게 좋겠지. 잘 부탁한다.”
이 계약이 오래 유지 될수록, 진영이 얻을 이익 또한 많아지리라.
황금 거위의 배는 가르는 게 아니라, 살찌워야 하는 법이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거처로 헤어지려는 찰나였다.
콰아아아앙!
불과 100m도 되지 않는 건물의 반대편에서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뭐야? 어떤 미친놈이 테러라도 한 건가.”
눈썹을 일그러뜨린 염태준이 중얼거렸다.
생각을 해도 자기가 할 법만 한 생각을 하는 법이었다.
플레이어 거주 지역 내에서의 테러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탑의 제재가 가해진다.
그러나 그런 진영의 예상과는 달리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콰아아앙!
다시 한 번 강력한 굉음과 함께 건물 파편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
“도와주세요!”
“으아악!”
“사, 살려줘요!”
무너지는 건물 사이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염태준은 망설이지 않고 뛰쳐나갔다. 사람들을 구하러 나간 게 아니었다.
“재밌는 구경이 되겠는데.”
그 뒤를 진영이 바짝 쫓았다.
사고 현장을 향해 달려가는 진영의 머리 한 켠에서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고 있었다.
익숙한 폭발과 붕괴였다.
어디선가 본듯한 그런 느낌.
그 이유를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쿠구궁!
폭발과 함께 연쇄적으로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단순한 플레이어의 테러라고 보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컸다.
“구경 좀 하려고 그랬더니, 장난이 아니네.”
가까이 갔다가 오히려 붕괴에 휘말릴 지경이었다.
불과 함께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탁, 타닥!
건물들의 위쪽을 밟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진영에 눈에 보였다.
가볍지만 신속한 발걸음이었다.
‘잠깐···.’
평소에도 사방을 향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진영이었다.
때문에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영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뭐야, 왜 잘 가다가 멈춰?”
염태준의 물음에 진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직감적으로 폭발과 화재, 건물 붕괴의 원인이 그 자임을 알 수 있었다.
‘틀림없다.’
방금 지나쳐간 인영은 분명히 진영이 잘 알고 있는 플레이어였다.
알다마다 그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으득.
진영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 물었다.
신화준!
스쳐간 그림자의 주인은 신화준이었다.
진영에게 누명을 씌워 죽인 장본인.
무신(武神) 신화준.
그 새끼가 이곳 10층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