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외곽(4)
영롱한 주황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 오, 레전더리 아이템이라···. 좋은 선택이지.】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높은 등급의 아이템은 어려운 난이도의 게이트나 플로어에서 등장한다.좋은 성능일 수록 얻기 어려운 것은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동일했다.
인류가 도달한 최상층 15층.
100층까지 있다고 알려져 있는 멸망의 탑에서 고작 15층이었다.
그러니 플레이어들이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의 등급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알려져 있는 레전더리 등급의 아이템은 전부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자, 돈이 많아도 구할 수 없는 것이 레전더리 아이템이었다.
“효과는 예상했던대로 만족스럽네.”
진영이 아이템의 설명을 바라보며 미소를 씩 지었다.
[ 아이템 설명 ]
이름 : 신록의 향기
등급 : 레전더리
분류 : 목걸이
효과 :
- 마력 스탯 25% 증가
- 자연 친화력 대폭 상승
- 자연계 NPC에게서 압도적인 호감을 얻습니다.
- 자연계 NPC와의 관계가 ‘동류 수준’으로 변합니다.
정령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어주는 수준에서 그쳤던 ‘신록의 향기’의 효과가 대폭 업그레이드 되었다.
압도적인 호감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그들과 ‘동류 수준’으로 관계를 맺게 해주는 마법 같은 효과 였다.
특별히 계약 관계로 묶여 있는 게 아니라면 정령들은 다른 종족을 배척하고, 경계한다.
‘그런 정령들을 상대로 아이템을 장착하는 것만으로 호감을 얻어 낼 수 있다니.’
우우-!
진영이 아이템을 착용하는 순간, 근처에 있던 수 백 마리의 정령이 진영 근처로 몰려 들었다.
정령들은 하늘거리는 움직임으로 진영을 둘러싸고 춤을 추듯 맴돌았다.
“와···.”
다채로운 색이 반짝이며 꿈에 나올 듯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레전더리 아이템의 효과가 대단한데? 그 까칠한 정령들이 좋다고 달려드네. 】
이계의 근원 말대로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령들이 여기저기서 진영이 먹을만한 과일과 물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순식간에 진영 앞에 숲의 진귀한 과일과 식물로 이루어진 거한 한상이 차려졌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사과, 향긋한 내음을 품은 바나나, 삐죽삐죽하지만 달콤한 냄새가 나는 정체 모를 과일 등등.
“너무 잘해줘서 미안할 지경인데.”
정령들은 진영을 아주 귀한 손님처럼 대접하고 있었다. 진영은 새삼 아이템의 효과를 절감했다.
탑을 오르는 동안 희귀한 아이템과, 좋은 성능의 아이템은 모두 팀원에게 양보해왔던 그였다. 그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진영은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넘겨주고 그림자처럼 활동했다.
‘그 때는 그게 옳다고 믿었으니까.’
아이템의 효과를 제대로 체감하고나자,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발견한 좋은 건 진작에 내가 낄 걸 그랬네.’
지난 건 지난거고,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아삭-.
[ 크리스탈 애플을 섭취하여 체력과 회복이 100% 회복됩니다. ]
정령들이 챙겨준 과일 중에 가장 효과가 좋을 것 같은 놈을 베어 물었다.
상큼한 과즙이 터져나왔다.
2층의 분수대와 마찬가지로 체력과 피로를 전부 회복 시켜주는 사과였다.
‘여길 나가면 먹어 볼 일 없을테니 맛이라도 봐둬야지.’
이 정도로 좋은 성능을 가진 소비 아이템은 대개 지역 아이템이라,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면 효과가 없다.
【 녀석들, 아무것도 모르고 좋다고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바치고 있구만. 】
정령들의 행동은 마치 은인을 향한 극진한 대접 같았다.
진영은 고개를 돌려 뒤편의 거대한 검은 산을 바라보았다.
꿈틀-.
산을 휘감은 드래곤이 몸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마도 2층과 마찬가지로 진짜 히든 피스를 얻으려면 드래곤을 처치해야되는 거겠지.’
하지만 8시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드래곤을 상대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머쥐려면 최소한 70층 정도의 전투력은 있어야 했다.
신화준도 드래곤을 잡지 않고 정령수 위의 샘물을 가져오는 걸로 히든 피스를 획득했다.
어쨌든 샘물을 획득하기만하면 히든 플레이스를 탈출할 수 있으니, 아이템만 손에 넣으면 그 뒷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샘물을 도둑 맞은 정령들이 화를 내며 미쳐 날 뛰건 말건.
남은 시간은 6시간 반.
아이템을 획득하면 자동적으로 바깥으로 나가게 되니, 이계의 규율과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놔야했다.
이계와 멀어진 곳에서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어려우니까.
“이봐, 이계의 근원. 너는 여길 나가면 더 이상 대화 할 수 없는 건가?”
진영의 물음에 팔찌가 진동하며 대답을 토해냈다.
【 뭐, 그렇지. 하지만 이번처럼 이계와 근접한 곳에 있다면 대화를 나눌 수 있어. 】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이계가 대체 어디냐는 질문이 생겨난다.
“그 이계라는 곳은 멸망의 탑과는 다른 곳인가?”
멸망의 탑에 혼재되어 있는 수많은 세계에서도 동떨어진 곳이 이계가 아닐까. 적어도 진영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이계의 근원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글쎄, 지금 그걸 설명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지···. 중요한 건 너와 내 목적이 같다는 것. 그거 하나만 알아두면 충분할 것 같은데. 】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이계의 근원은 탑에 존재하면서도, 탑의 권한을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탑의 공략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너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 ······. 】
정곡을 찔린 듯 이계의 근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웃긴이야기지만 녀석도 아무래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성좌처럼 아이템이나 능력을 부여해 줄 수 있는 힘은 있었지만, 말하는 걸 들어보면 무한한 것 같지도 않고. 진영에게만 모든 것을 쏟을 수 없다는 발언도 그랬다.
녀석 또한 무언가 선택을 고심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의 힘에 절대적인 믿을 가진 초월자들이나 성좌들과는 다른 태도였다.
그때, 이계 규율이 선심 쓰듯 말을 내뱉었다.
【 네가 50층에 도달하면 그 때 모든 걸 알려줄게. 이제 겨우 7층에 오른 녀석하고 할 말은 없어. 】
‘······?’
마지막 한마디가 결정적인 단서였다.
그것을 진영이 놓칠 리가 없었다.
이계의 근원은 진영에게 꼬리를 단단히 잡힌 셈이었다.
‘50층?’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바깥에서 메시지만을 통해서 반응을 확인할 때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보니 이 놈은 진영이 99층까지 올랐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진영의 회귀 전을 모르고 있었다.
진영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무래도 우리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은데.”
* * *
【 99층? 말도 안 돼. 】
진영의 설명을 들은 이계의 근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설마···. 】
“뭐가 말도 안된다는 거야. 충분히 설명했잖아.”
자세히 이야기 해 본 결과, 이 녀석 진짜로 아무것도 모른다.
진영이 50층도 못 가본 애송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 어쩐지 하는 행동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는데···. 정말로 99층에서 왔단 말이야? 】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50층 이후의 이야기를 대강 늘어놓자 녀석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팔찌에 대해서도 모르는 건가?’
무한한 회귀를 제공하는 아이템.
‘이계 규율 - 절대 회귀’.
그에 대해 진영이 묻자, 이계 규율이 재빨리 답했다.
【 팔찌? 모르겠는데. 규율의 매개체인가 본데···. 】
“신화준에 대해서도 혹시 몰라?”
【 알긴 아는데, 너랑 관련이 있어? 】
“오케이. 잘 알았다.”
진영은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이 녀석은 아는 게 거의 없다고.
모르는 척 숨기는 게 아니라, 아예 모르는 거다.
눈을 가늘게 뜨고 팔찌를 바라보던 진영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나한테 이계 관련 능력을 전부 몰아서 줘.”
【 그건 좀···. 내 입장에서도 안전하게 분산투자를 해야해서 말이야. 】
직접적으로 대놓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녀석은 여러 플레이어를 주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서는 조금 넘겨 짚더라도 주도권을 가지고 올 필요가 있었다.
“미안한데, 네가 주시하고 있는 플레이어 중에 99층까지 올라갔던 나보다 탑을 공략할 확률이 높은 사람이 있어?”
정확히 이 녀석이 어떤 플레이어를, 어디에서 주시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성좌처럼 다른 플레이어들을 후원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게 하는데 이용한다는 것이다.
【 큭···. 일단 선택권은 나한테 있어. 결정은 내가 하는 거라고···. 】
핵심을 찔린 녀석의 목소리에 힘이 없어지고 있었다.
이제 쇄기를 박아 마무리하면 된다.
“싫으면 난 10층에서 바깥으로 나가서 헌터나 하고 놀지 뭐. 세계 멸망? 알게 뭐야. 그 전까지는 떵떵거리고 잘 살텐데.”
【 아니···. 잠깐만. 】
진영의 협박에 이계의 근원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진영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탑이 공략되기를 원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이 점에서만큼은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한다.
얼핏 보면 선택의 주도권이 이계의 근원에게 있는 듯 했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 탑을 공략하는 건 진영이었다.
그렇기에 진영은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싫으면 말라고.
“거래하기 싫으면 말아, 99층까지 올라 보긴 했지만 굳이 탑을 공략 할 필요는 없지. 나가서 남은 인생 헌터로 돈 긁어 모은 다음에 행복하게 살다 뒤지면 되는데.”
이계의 규율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 알았어! 몰빵할게, 네 말대로 할테니까. 탑 공략 부탁할게! 】
“그래, 그러면 나가서부터 잘 부탁한다.”
진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의 근원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 * *
“그러면 슬슬 히든 피스를 챙겨야겠군.”
【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지치는 것 같지. 】
이계의 근원과의 대화를 나누고도 남은 시간은 충분했지만,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진영은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정령들을 헤치고 정령수를 향해 다가갔다.
【 야, 혹시 몰라 말하는데, 아무리 레전더리급 아이템이더라도 정령수에 다가가는 건···. 】
‘정령수’
정령에게 있어선 그들이 태어난 장소이자, 지속적으로 마력을 공급 받는 어머니보다 중요한 존재였다.
다행히 호기심 어린 정령들의 시선이 느껴질 뿐 별 다른 제지는 없었다.
이계의 근원이 탄성을 토해냈다.
【 맙소사, 아무리 그래도 정령수에게 근접하는 것까지 허용할 줄이야. 그 아이템 장난 아니네. 】
때문에 절대로 외부인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 진영에게는 예외였다.
정령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버릴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진영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날아다니는 빛 뭉치 같은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녀석들의 전투력은 하나 하나가 괴랄했다.
- 오염된 땅에 있는 더러운 마력이 담긴 흙을 듬뿍가져가면 정령들은 물러설 수 밖에 없거든. 끝까지 반항하는 녀석은 슥삭 베어내면 되는 거고.
신화준은 그런 식으로 정령수를 타고 올라 히든 피스를 챙겼던 모양이었다.
진영의 방식과는 달랐다.
진영은 나무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그저 손을 나무의 줄기에 가져다 대면 그만이었다.
【 그래도 위험한거 아니야? 지금 정령들이 엄청나게 쳐다보고 있는데. 】
레전드리급 아이템의 성능은 확실하다.
이계의 근원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스윽-.
진영은 느릿하게 정령수 위로 손을 가져다대었다.
방해는 없었다.
정령들이 진영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미안하지만 아이템은 가져가야겠다.’
이제 그 신뢰를 배신하고, 정령수에서 아이템을 훔쳐낼 차례였다.
[ 대상과의 격차가 지대하여 스틸 스킬의 효과가 무효화 됩니다. ]
[ 부가효과 ‘탐욕의 왼손’이 발동됩니다. ]
[ 모든 대상을 상대로 3% 확률로 아이템을 훔쳐낼 수 있습니다. ]
진영의 손 주변으로 푸른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있을 아이템 ‘거짓을 쫒는 샘물’을 노리고 진영은 스틸 스킬을 연달아 사용했다.
파아아-!
노렸던 대로 진영의 손바닥 위로 차가운 수정이 잡혔다.
그런데,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 이계 시간축에서 최초로 획득한 아이템입니다. ]
[ 히든피스 ‘진실을 밝히는 샘물’ 획득하셨습니다. ]
아무래도, 퀘스트를 건너뛰고 진짜 히든 피스를 손에 넣은 듯 했다.
【···이거 진짜 몰빵해야겠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