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리버(5)
콰앙!
벽을 부수는 것 같은 굉음이 울리며, 이성철의 턱이 흔들렸다.
“크헉!”
주오령의 발차기를 맞고 주저 앉은 이성철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환해 뒀던 오크들도 반응이 없어. 설마 이 녀석들 우리가 올 걸 알고···.’
주오령을 바라보는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성철은 상황 파악이 빨랐다.
윤기윤이 있었을 때면 몰라도, 혼자 남은 상황에서 객기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저 놈은 자신들이 레드 리버의 암살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젠장, 회귀자를 너무 얕봤어.’
그간 나타난 회귀자와, 눈 앞의 회귀자는 차원이 다르다.
레드 리버의 뒷부분까지 모두 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성철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잠깐의 틈만 만들어내면 충분했다.
코인을 사용해서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틈 정도면 충분하다.
‘살아서 윗선에 보고 해야 해. 애초에 우리 두 명이서 해결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잖아. 이건!’
회귀자는 레드 리버의 뒷공작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회귀자가 그랑블루로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뻐억!
‘사, 살려달라고 했는데!’
주오령의 발차기에는 자비가 없었다.
어쨌든 다음 층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됐다.
회귀자 일행은 7층 입장 권한이 없다. 올라가면 잡을 길이 없었다.
“크흑, 두고 보자 새끼들아!”
이성철이 악을 쓰며 다음층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어?”
[ 코인이 부족합니다. ]
탑의 아랫층을 오가기 위해 충분히 가지고 있을 코인이 하나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두둑하게 챙겨나왔었는데.
짤랑.
진영이 손에 쥔 코인들을 튕겼다.
동료인척 접근 했을 때 훔쳐낸 코인들이었다.
이걸로 이성철은 다른 층으로 도망칠 수 없다.
“도망, 도망쳐야 돼.”
적어도 이 숲에서만이라도 벗어나려고 이성철이 몸부림쳤지만,
주오령과 진영은 그걸 용납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성철은 얼마가지 못하고 주오령에게 붙잡혔다.
“크아악!”
레슬링 기술에 온 몸이 단단히 얽매여 이성철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성철 앞으로 진영이 천천히 다가왔다.
푸욱.
자비는 없었다.
그들 또한 상황이 반대였다면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 * *
진영은 이성철과 윤기윤이 가지고 있었던 아이템을 가져와 바닥에 늘어 놓았다.
[ 신록의 향기(유니크) / 목걸이 ]
[ 영웅 벨트(유니크) / 벨트 ]
[ 가벼운 신발(일반) / 신발 ]
[ 나이프(레어) / 무기 ]
[ 나이프(레어) / 무기 ]
그 외 일반 등급의 아이템을 두르고 있었다.
한 두 개의 핵심적인 아이템을 제외하고는 일반 등급으로 맞춰 둔 듯 했다.
아이템이 너무 눈에 띄면 받을 수 있는 의심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자, 이번에는 너도 한 건 했으니까 받아.”
진영은 주오령을 향해 영웅 벨트를 내밀었다.
일정 수준 이하의 피해를 무시하고 방어력을 올려주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필요 없다.”
아이템을 유심히 살펴보던 주오령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보니···.’
진영은 회귀 전에 보았던 주오령의 모습을 떠올렸다.
녀석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오로지 맨 몸으로 마수를 때려잡았다.
‘능력치가 붙은 아이템을 사용하지 말아야할 이유라도 있나?’
알면 알수록 신기한 놈이었다.
진영은 가장 중요한 신록의 향기를 목에 걸었다.
이성철이 가지고 있던 아이템이다.
[ 신록의 향기를 장착해 마력 스탯이 8% 상승합니다. ]
[ 자연 친화력이 상승합니다. ]
[ 자연계 NPC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합니다. ]
이어서 벨트도 착용한다.
[ 영웅 벨트를 장착해 약한 피해를 무시합니다. ]
[ 방어력이 20 증가합니다. ]
[ 영웅계 NPC에게 호의를 얻습니다. ]
여기서 말하는 NPC란 탑에 있는 모든 마수와, 종족을 총괄한다.
적대적인 녀석을 상대로는 효과가 미미하겠지만 적어도 중립 상태 NPC의 호감을 끌어내기는 충분한 정도였다.
그리고 두 명이 가지고 있던 코인을 합해 총 400개.
아이템을 대신 주오령에게 코인을 절반 건네주었다.
코인은 거부하지 않는 듯했다.
“대강 정리가 끝난 것 같은데.”
시체를 적당한 곳에 던져 넣고, 마무리를 하자 멀리서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에요?”
오크들을 처리하고 일행을 찾아 온 민아영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김지훈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 이계의 근원이 중요한 장면을 놓쳐 안타까워합니다. ]
“레드 리버에서 자객을 보냈었습니다. 회귀자를 데려가려고요. 결과와 상관 없이 저희는 죽일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 레드리버에서요?”
“보고 하려면 하셔도 됩니다만, 물론 증거는 없습니다. 다 죽었거든요. 그보다 오크들은 잘 처리하셨나보네요.”
민아영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크의 전투 능력은 6층의 것이 아니었다.
얼마전 있었던 그랑블루 클랜원 살인 사건도 그렇고, 레드 리버의 뒷소문에 대해서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성철과 윤기윤이 레드 리버가 보낸 자객인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하지만 주오령과 이진영 둘이서 그 남자들을 처리한 건 이해가 안갔다.
레드 리버 클랜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플레이어의 실력은 보증되어 있었다.
그들은 바깥으로 나가면 A급 헌터 이상의 칭호가 붙는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미쳤어.’
10층에서 내려 온 플레이어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이들을 상대하고도 멀쩡한 얼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이유가 있었다.
탑의 위쪽으로 갈 수록 코인과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수급처가 늘어난다.
탑을 등반하는 사람보다, 이미 정점에 올라있는 기득권 플레이어가 강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런 당연한 일이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꿀꺽.
민아영은 지금 이 순간, 진영이 같은 편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레드 리버로 가겠다고 결정하기라도 했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형, 정리 도와드릴게요. 이거랑 이건 인벤토리에 보관해 두면 되죠?”
“그래. 민아영씨 다른 헬퍼들하고 접선 장소는 7층인 거 맞죠?”
“네, 맞아요.”
그랑블루에서 회귀자에게 걸고 있는 부분은 꽤 컸다.
실제로 성장세였을 때 회귀자가 클랜에 준 도움은 상당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몬스터를 사냥해서 마력을 모으죠.”
아이템 정리를 마친 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게를 폈다.
레드 리버에서도 자객이 당했다는 것을 알면, 새로운 움직임을 취할 것이다.
‘이번 회귀자는 이전까지와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겠지.’
회귀자 클래스라고 해서 거창한 힘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우위에 있는 것은 ‘정보’ 뿐이다.
남들보다 단 한 번 더 살아봤다는 그 장점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때문에 회귀자는 이득을 쌓아 올리지 못한 초기에는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걸 노리고 클랜들이 전부 달려드는 거겠지.’
성장을 지원하거나, 큰 줄기를 뻗어내기 이전에 새싹 단계에서 잘라내거나.
‘그보다 이제 슬슬 만날 수도 있겠어. 신화준.’
진영을 죽이고, 회귀하게 만든 장본인.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는 알지는 못하지만, 이제부터는 녀석을 만날 확률이 증가한다.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두지 않으면 곤란했다.
* * *
촤아악!
쿠웅.
공격을 받은 오크가 힘 없이 몸을 뉘였다.
이미 진영 일행의 수준은 10층에 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제대로 코인을 얻지 못하고 10층까지 간신히 살아남는 자들도 많았다.
“지훈이한테 진영씨가 알려준거죠?”
“어떤 걸요?”
진영이 잡아떼자 민아영이 양 손에 든 무기를 보여줬다.
아까 얻은 나이프와 채찍을 동시에 쥐고 있었다.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멸망의 탑에서는 그게 된다.
오히려 기가 막히는 시너지를 일으킨다.
클래스와 특성이란 그런 것이었다.
“네, 맞습니다. 거래하기로 했잖아요. 민아영씨가 제가 회귀자라는 걸 숨겨준만큼 저도 민아영씨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 대체 어디까지 알고있는거에요?”
“말했잖아요. 17층까지라고.”
푸슛!
김지훈의 활약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탑에 들어온지 사실상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놀랄만한 발전이었다.
더 이상 김지훈의 눈에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타고난 사냥꾼처럼 침착하게 손에 쥔 석궁을 쏘아냈다.
‘역시 김지훈도 탑에서 네임드가 될만한 이유가 있어.’
뛰어난 적응력과 침착한 상황판단 능력은 가히 발군.
과거에 탑에 들어왔던 진영도 저런 식으로 빨리 적응하지는 못했었다.
파악!
주오령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근육질로 된 신체에서 뿜어져나오는 압도적인 힘이 오크의 머리통을 쪼갰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근력 앞에 오크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
헬퍼로서 여러 번 6층에 와본 경험이 있는 민아영조차 상상 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진행 속도에 놀라는 중이었다.
‘6층에서 하루는 넘게 있을 계획이었는데······. 이런 속도라면 3시간도 안 걸리겠어.’
진영 일행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전투력 자체가 뛰어났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힘들여서 잡는 오크나 변종 늑대들이 그들에게는 잡몹이나 다름 없었다.
“이 정도면 아까 말했던만큼 모인 것 같아요!”
일행이 사냥을 하고, 마수를 하나 잡을 때마다 나오는 검은 구슬을 김지훈이 열심히 주워 담은 결과 2시간 30분 만에 마력구 충전에 필요한 구슬을 모을 수 있었다.
미리 봐두었던 장소에 있는 텅 빈 마력구에 검은 구슬을 채워넣자, 진동과 함께 마력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 마력이 100% 모였습니다. 10분 후에 미션이 완료됩니다. ]
[ 근방 1km 안에 있는 플레이어에게 알림이 전송 됩니다. ]
섬뜩한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6층에 조금 오래 머문 플레이어들은 알고 있는 상식.
직접 마수를 잡아 마력을 모으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모은 마력구를 빼앗는 게 편하다.
심지어 시스템이 메시지로 알려 주기까지하니 굳이 힘빼가며 마수를 사냥할 필요가 없었다.
“헉, 저 사람들 저희 쪽으로 오고 있는데요?”
알림을 확인한 플레이어들이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6명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근처에 도착해서 진영 일행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 준비해 온 게 있거든.”
놀라는 김지훈을 민아영이 안심시키며 품 안에서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드디어 그랑블루의 헬퍼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오히려 기뻤다.
투욱.
파아앗.
민아영이 푸른 던진 돌멩이에서 푸른 마력이 새어나오더니 반구 모양의 실드가 생성되었다.
“이게 뭐에요?”
“실드 마법이 각인되어 있는 돌멩이야. 이제 이걸로 다른 플레이어들은 우리 주변으로 못 다가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실드가 가까이 다가온 플레이어 하나를 튕겨냈다.
“크윽, 뭐야 이거?”
떨어져나간 플레이어는 인상을 쓴 채로 뒤로 물러섰다.
쿵쿵!
그 뒤로도 다른 플레이어들의 공격 시도가 이어졌지만 실드에는 흠집하나 나지 않았다.
“드디어 도움이 되셨네요. 민아영씨.”
“그 쪽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진영한테 들으니 왜 열이 받는 걸까.
진영은 실드 바깥을 바라보았다.
실드를 뚫어 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남은 플레이어들이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치열하군.’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간절하고, 필사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탑을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서, 헌터가 되기 위해서 그들은 계속해서 탑을 오를 것이다.
[ 마력 정제가 완료되었습니다. 마력구와 가장 가까운 6명의 플레이어가 다음층으로 이동됩니다. ]
7층.
새로운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는 곳.
그곳에는 더 강한 플레이어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진영을 죽인 원흉. 신화준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더욱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진영 일행은 다음 층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