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리버(1)
이곳 멸망의 탑에서 스킬을 얻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스킬석.
미지의 힘을 숨긴 스킬석을 사용하면 플레이어는 자신의 클래스와 관계된 스킬 하나를 획득할 수 있다.
‘문제는 얻을 수 있는 스킬이 자신의 클래스와 관련된 스킬 뿐이라는 거지.’
때문에 전투 계열은 계속해서 전투 스킬을 얻고, 보조 계열은 보조 관련 스킬만을 습득한다.
마법사는 마법 스킬을 가지고, 악사는 악기 관련 스킬을 가지는 이 당연한 사실은 탑의 고층으로 갈수록 단점으로 작용한다.
강력한 마수가 층의 보스로 군림하고 있기에, 플레이어들은 전투 관련 스킬을 최강으로 여겨왔다.
전투 스킬은 아이템의 달려 있는 전용 스킬보다 월등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솔직히 이번에도 별 기대는 안하지만······.’
진영의 클래스는 도둑이다.
회귀 전에 그가 가지고 있는 스킬들은 변변치 않은 것들이었다.
스틸, 숨죽이기, 탐색, 은폐 같은 전투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스킬들.
그런 스킬들을 사용해서 적을 처치할 궁리를 세우고 있자면, 이미 앞쪽에서 딜러들이 화려한 스킬로 마수를 폭격해 전멸 시킨 뒤다.
스킬석을 사용해서 나오는 게 그런 스킬들 뿐이니, 진영이 기대를 하지 않을 수 밖에.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스킬이 나오길래 이런 화려한 이펙트가 나오는 거야.’
이계의 스킬석을 사용하자마자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요란한 불빛.
‘이건···.’
정보창을 확인해 나가는 진영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 이계의 스킬석을 사용하여 새로운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
[ 스킬 ‘이계 규율 : 절대 은폐’ 획득 ]
‘스킬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 효과가 다르다.’
법도, 윤리도 바깥과는 다르게 적용되는 이 멸망의 탑 안에서 진영의 클래스는 그다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쁘게 악용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다른 플레이어들의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으니.
‘이게 있으면, 도둑 클래스가 가지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릴 수 있어.’
도둑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친다.
그러나 훔친다고해서 그 물건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하다.
훔친 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
물건을 도둑질 당한 주인은 필사적으로 범인을 찾기 마련이다.
결국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설사 아이템을 훔치지 않았더라고 하더라도, 클래스가 도둑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인으로 지목 당하는 게 된다.
‘멸망의 탑에서 무엇보다 중요시 되는 것은 신뢰.’
때문에 진영은 회귀 전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도둑으로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이 스킬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거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일들이 실현 가능해지게 된다.
‘이걸로 멸망의 탑 공략 기간이 또 다시 압도적으로 단축된다.’
[ 스킬 설명 ]
- 이름 : 이계 규율 : 절대 은폐
- 레벨 : Lv.1
- 숙련도 : 0%
- 설명 : 원하는 크기의 공간을 이계 규율에 따라 은폐 지역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이 은폐 지역은 사용자를 제외한 어떠한 존재에게도 발각되지 않는다. (현재 지정 가능한 은폐 지역 : 1개 )
원하는 구역을 설정해 은폐한다는 설명은 진영이 알고 있는 기본 스킬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본래의 은폐 스킬은 상대가 높은 감각을 가지고 있거나, 탐색 관련 스킬이 있다면 쉽사리 들키고 만다.
탑을 올라갈 수록 사용할 일이 적어지는 쓰레기 스킬이었다.
진영이 주목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어떠한 존재에게도 발각되지 않는다.’
스틸 스킬에 붙은 추가 옵션처럼, 이 스킬 또한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멸망의 탑에서 이 스킬이 절대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상대가 성좌이든, 멸망의 탑의 주인이든 진영이 은폐한 지역은 절대로 볼 수 없다.
‘이계의 근원에게도 통하는 걸까?’
조금은 모순적인 생각이었다. 이 스킬 자체가 이계의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니.
하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 이계의 근원이 스킬의 성능에 대해 호기심을 표합니다. ]
‘······네 녀석도 궁금한거냐.’
자신이 건네 준 스킬석에서 나온 스킬인데도, 이계의 근원은 그 내용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연기인지 아닌지 지금 시점에서는 알 방법이 없다.
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향했다.
“어디가세요? 혼자다니다가는 위험···.”
근처에서 휴식하던 민아영이 위험하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진영을 상대로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
“금방 오실거죠? 그랑블루에서 내려올 헬퍼들하고 만나려면 몇 층 더 올라가야 되거든요.”
“네, 얼마 안 걸립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민아영을 뒤로 하고 진영은 방 밖으로 나왔다.
갈림길을 지나, 몬스터가 있는 던전의 방으로 들어왔다.
숨을 쌔액거리며 멍하니 서 있는 보라빛 아종 고블린.
강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새로 얻은 스킬을 사용해 보기에는 적절한 놈이었다.
‘그전에···.’
- 절대 은폐
진영은 손을 내밀어 한 걸음 앞을 은폐 지역으로 설정했다.
그러자 1m x 1m 정도 되는 공간의 테두리가 금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오···.’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진영이 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
그 안으로 한 발자국 발을 내딛는 순간.
[ 이계 주시도가 소멸합니다. ]
화악.
“······.”
이미 익숙해졌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감각이 불현듯 사라지며, 어깨가 가벼워졌다.
진영을 짓누르고 있던 시선 하나가 사라진 기분.
[ 이계 근원이 당신의 행방을 찾습니다. ]
정보창 또한 이 은폐 스킬이 가진 효과를 그대로 밝혀주고 있었다.
이제 고블린을 향해 효과를 검증해 볼 차례.
진영은 근처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를 주워 고블린을 향해 던졌다.
휘익, 툭.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아종 고블린이 곧장 고개를 틀었다.
“끼익?”
녀석은 눈을 찌푸리며 입구 쪽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돌멩이가 날아오자 당황한 눈치였다.
“키익!”
성격이 포악한 고블린답게 자신을 도발한 상대를 찾기 위해 입구 쪽으로 쪼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고블린이 은폐 구역으로 지정된 자리를 지나치는 순간, 진영은 몸을 움직여 고블린과의 접촉을 피했다.
녀석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입구 바깥으로 나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은폐 구역 안으로 들어와도 지정된 구역은 확인하지 못하는 건가.’
실제로 고블린은 진영을 스쳐지나가고서도 아무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입구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고블린이 터덜터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진영은 가지고 있던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서걱-.
아종 고블린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을 때, 진영의 나이프가 녀석의 팔을 갈랐다.
“?”
고블린의 팔 위로 붉은 실선이 생겼다.
투욱.
“키이이익!”
영문도 모른 채 팔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종 고블린이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익숙한 던전 뿐.
‘은폐 지역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절대로 발각되지 않는건가?’
패닉 상태에 빠진 고블린은 입구 바깥으로 나가는 대신, 자신이 지키고 있던 방 안으로 들어 오려고 시도 했다.
다시 한 번 진영의 나이프가 고블린을 그었다.
촤아악!
“키엑!”
붉은 피와 함께 아종 고블린이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그제서야 진영은 은폐 지역 바깥으로 나왔다.
[ 이계의 근원이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
[ 이계 주시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
떠오르는 정보창과 함께 주변으로 가볍게 공기가 내려 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 스킬의 효과는 정보창에 적혀 있는 것 그대로였다.
“끼에에엑?”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진영을 확인한 아종 고블린이 괴성을 내질렀다.
스킬 테스트는 끝났다.
푹.
진영은 망설임 없이 고블린에게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굉장한 스킬을 얻었어. 이 스킬의 활용도는 무궁무진 해.’
이제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전적으로 진영에게 달려 있었다.
* * *
“이제 다음 층으로 올라가죠. 민아영씨, 5층에서 사용할 제물은 준비 된건가요?”
“아, 네.”
스킬의 테스트를 마치고 돌아 온 진영이 일행들을 일으켰다.
주오령도 체력을 거의 회복한 것 같았고, 김지훈도 개운한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5층부터는 클래스와 정보창, 코인의 사용법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니까, 조심해야 돼.”
3층에서 이지 난이도 이상의 게이트를 클리어한 사람은 정보창에 대해 알고 있다.
혹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다.
4층에서도 운이 좋다면 주머니에서 관련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만약 모르더라도 여기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보통 사람들은 아니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더 이상 어중이 떠중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탑에서 살아남기 위해 운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운 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흐음, 알겠다.”
“알겠어요, 형. 근데 다음 층은 뭐하는 곳인가요?”
5층부터는 헤어지자고 했었기에 다음층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 없다면 죄 없는 누군가를 불구덩이에 집어 넣어야 하는 곳.”
5층에 대한 간단한 요약은 그러했다.
“설명하는 것보다 5층에 올라가서 직접 보는 게 빠를 거야. 아, 그리고 거기 있는 관리자한테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건 다들 알고 있죠?”
헬 난이도 게이트의 보상에 섞여 들어가 있는 관리자에 대한 정보 덕에 김지훈과 주오령도 관리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 출발할게요.”
이제 다음층으로 다같이 이동하는 방법은 익숙했다.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일행은 다음층으로 이동했다.
* * *
[ 5층 : 불의 제단 - 희생 제물 ]
설명 : 하나의 생명체를 제물로 바쳐 다음층 입장 권한을 획득하세요.
도착한 곳은 넓직한 판 위였다.
두 명의 남자가 진영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맞이했다.
“아, 어서오세요.”
“드디어 시작하겠네. 이봐, 아몬! 우리 쪽 사람들 다 모였다고!”
남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관리자를 부르는 거군.’
5층에서 미션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최소 5명의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아마, 다른 쪽에서 진행을 보느라 조금 기다려야할 것 같네요. 긴장하지 마시고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죠.”
두 남자는 놀랄만큼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5층의 미션은 하나의 생명체를 제물로 바칠 것.
여기서 생명체란 꼭 인간일 필요는 없었다.
살아 있기만 하면 마수여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이 미션이 악독한 이유였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판 위에 존재하는 건 플레이어 뿐이다.
미리 알더라도, 다른 층에 있는 몬스터는 데려 올 수 없다.
몬스터 소환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가 있던가, 그런 종류의 아이템이 있어야했다.
그러나 탑을 처음 오르는 이들이 이런 준비가 되어 있을리 만무.
결국 다음 층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 판 위에 서 있는 누군가를 하나 죽여야한단 말이었다.
“사, 살려줘! 제발! 이러지마!”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내의 비명이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는 남자와, 그를 공격하는 네 명의 플레이어.
“제, 제발!”
간곡하게 빌어본다한들 어쩔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한 명을 죽이지 않는다면 꼼짝 없이 5층에 갇혀 굶어 죽는 일만을 기다려야했으니까.
기막힌 눈치 싸움 끝에 결정된 한 사람이 희생해야지만 지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으아아아아!”
판에서 큰 상처를 입고 밀려난 남자는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그 모습을 잠잠히 지켜보고 있던 주오령이 눈을 번뜩였다.
“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