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의 근원(3)
진영은 김지훈의 어깨를 붙잡고 좁은 길을 향하게 했다.
낭떠러지 사이의 좁은 길 끝에 놓여 있는 주머니.
15m 정도 되는 거리였지만,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쏟아져 나올 함정들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한데······.’
민아영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김지훈을 바라봤다.
진영은 회귀자니 그렇다고 쳐도, 김지훈은 아니었으니까.
잠시 당황하던 김지훈이 의외로 깨달았다는 표정을 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형.”
“잠깐만요, 위험하다니까요?”
“누나, 걱정마세요. 하나도 안 위험해요.”
민아영은 김지훈을 주시했다.
김지훈이 조금이라도 낭떠러지 위의 좁은 길로 발을 디딘다면, 제지할 생각이었다.
저벅-. 탁.
물론 김지훈은 낭떠러지가 시작하기 직전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이템 저장.”
김지훈이 손을 뻗어 대상을 지정하고 스킬을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15m 거리에 있는 주머니가 두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스으-.
착.
주머니는 포물선을 그리며 김지훈의 손바닥 위로 안착했다.
주머니를 들어 올린 김지훈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설치되어 있을 함정과 마법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주머니를 획득했다.
민아영은 허탈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걱정했던 게 바보 같아질 정도였다.
“게이트를 클리어하면서 스킬이랑 상태창에 대해 알아냈던거구나.”
“아뇨, 이건 진영이 형이 알려줬어요. 0층에서도 이걸로 코인을 한 번에 싹 쓸었거든요.”
“0층에서?”
“네!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김지훈의 클래스는 짐꾼.
짐꾼의 역할은 식량, 무기, 장비와 같은 물자들을 안전하게 옮겨 파티를 돕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누구보다 빠르게 아이템들을 인벤토리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짐꾼 클래스가 가장 먼저 얻는 기본 스킬은 ‘아이템 저장’이었다.
그 효과는 반경 25m 내의 아이템을 사용자를 향해 끌어 온다.
소유권이 없는 아이템이라면 코인을 포함해서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가져 올 수 있는 훌륭한 스킬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1층으로 올라갔어요. 대단하죠.”
“···. 확실히 대단하네.”
김지훈에게 0층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민아영이 침을 삼켰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랑블루에서 난리가 날 법도 했다.
물론 회귀자를 착각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못하지만.
김지훈은 자신의 능력으로 획득한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다음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카드네요.”
이제 남은 입장권은 2개였다.
민아영은 이미 입장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따로 입장권이 필요 없었다.
“제 스킬이 이번 층에서 엄청 좋은 것 같아요. 주머니가 보이면 말씀해 주세요 팍팍 가져 올게요!”
각 층마다 유리하게 작용하는 클래스는 분명히 존재했다.
범용성이 좋아 가장 선호되는 건 전투 계열 클래스지만, 다른 계열의 클래스는 방금 김지훈처럼 특화 된 층이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플레이어 개인이 막대한 이익을 쌓아 올리는 게 가능했다.
“어디, 또 없을까요?”
김지훈이 팔을 걷어 붙이고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런 김지훈을 지켜보는 진영의 머릿속으로 회귀 전 김지훈의 초반 성장 루트가 그려졌다.
3층에서 적당한 난이도의 게이트를 클리어한 뒤, 스킬 정보를 얻어 4층에서 본격적인 파밍을 시작했을 것이다.
‘4층은 김지훈을 위한 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더군다나 4층에는 관리자도 없다.
주머니를 스킬로 긁어 모은다고 해서 직접적인 제제를 가하는 일은 없었다.
김지훈이 의리로 유명해 진 것도 맞았지만, 애초에 실력이 없었다면 이름이 거론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거다.
그 실력을 기른 토대가 이곳 4층이었을 것이다.
“앗, 고블린이에요.”
“잠깐, 물러서 누나가 처리해 줄게.”
“아뇨, 괜찮아요.”
슈웅-.
민아영이 채찍을 꺼내기가 무섭게 고블린 뒤에 숨겨져 있던 주머니가 하늘을 날아 왔다.
지키고 있던 주머니가 사라지자, 고블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저 놈은 무시하고 어서 가요.”
“······.”
민아영은 갈 길 잃은 채찍을 조용히 옆구리로 원상복귀 시켰다.
* * *
그렇게 모은 주머니가 총 7개.
다음층 입장권 3개, 저급 회폭 포션 1개, 코인 15개가 나왔다.
짐꾼 스킬이 없었다면 생고생을 하며 모아야했을 아이템들이었다.
김지훈이 보상을 바닥에 늘어놨다.
줄곧 일행의 뒤를 따라오던 민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저 필요 한 거 맞긴해요?”
나름대로 명색이 그랑블루의 헬퍼인데, 진영 일행에 끼어 있으니 그냥 일반 플레이어나 다름 없게 느껴졌다. 진영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필요합니다. 이번 층에서는 아니지만요.”
김지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걸로 4층 공략이 해결되니 편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혹시, 저 남학생을 데려 온 것도 여기까지 예상해서······?”
“설마요. 제가 그런 계산적인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네, 상당히요.”
민아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진영을 바라봤다.
진영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을 뿐이었다.
“이제 얼추 근처에 있는 건 전부 파밍한 것 같은데 잠깐 쉬고 가죠.”
진영이 뒤 따라오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던전 이곳저곳에서 모은 주머니가 어느새 10개 가량 늘었다.
얻은 아이템을 확인하고, 정비를 하는 게 바람직했다.
“그게 좋겠네요. 다음층부터는 그리 마음 편히 쉬기 힘들 수 있거든요.”
민아영이 맞장구치자 김지훈이 한숨과 함께 바닥에 주저 앉았다.
“스킬을 써서 그런지 좀 피곤한 것 같기도 해요. 저 잠깐만 쉴게요······. 아!”
근처 벽에 기대려던 김지훈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떴다.
“형. 5층부터는 나뉘어서 갈거라고 하셨죠···.”
진영은 1층에서 미리 김지훈에게 동행은 4층까지라고 못박아두었었다.
5층부터는 0층처럼 플레이어끼리의 경쟁을 부추기는 요소가 많고, 위험도가 더 높았기에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바뀌었어. 다같이 올라가도 돼.”
“정말요? 아싸!”
진영이 히든 피스를 전부 손에 넣고, 민아영이 헬퍼로 내려오면서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충분히 능력과 아이템으로 커버가 가능해졌으니, 나뉘어 갈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빠르게 일행을 10층까지 올리고, 능력치를 키우도록 하는 게 유리했다.
‘10층이하는 결국 튜토리얼에 지나지 않아.’
진짜 탑의 시작은 10층부터였다.
10층에 올라가야 비로소 플레이어로 인정받으며, 다시 바깥 세계로 나가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
그 전까지는 그들이 죽거나, 살거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몇몇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말이다.
10층까지 올라 오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패배자라는 게 탑 내에서의 인식이기도 했고.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
탑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고,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자유를 얻는 것은 목숨을 건 게임을 통해 살아남은 강인한 자들 뿐이다.
“······.”
그러고보니 주오령이 묘하게 조용하다 싶었는데, 휴식을 선언하자마자 특유의 가부좌 자세를 튼 뒤 명상에 빠져있었다.
‘생각보다 내상이 심했던 모양인데.’
아무리 능력치를 올렸다고 한들, 그 거대한 보스를 맨 몸으로 받아쳤으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지훈아, 아까 주머니에서 나왔던 저급 회복 물약 좀 빌려 줄래?”
“싫어요. 빌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드릴게요. 형.”
그 말에 진영이 피식 웃으며 물약을 받아들었다.
“그래, 고맙다.”
그대로 물약을 들고 주오령에게 내밀었다.
“이걸 마시고 회복해. 그리고 코인 남은 게 있으면 체력을 올리면 괜찮아 질거야.”
진영의 기척에 슬쩍 눈을 뜬 주오령이 고개를 저었다.
“으음? 필요 없다. 지금은 회복에 집중하고 싶군.”
“그러니까 이게 회복시켜주는 아이템······.”
억지로 포션을 들이밀려던 진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주오령의 신체에서 푸른 마력이 희미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아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옅은 실루엣.
‘저 마력의 형태는···.’
이 마저도 진영이 마력 스탯을 찍었기 때문에 눈치챌 수 있는 정도였다.
‘회복 명상 스킬처럼 보이는데.’
그러고보니 주오령은 1층, 3층에서 보스와 전투를 벌인 뒤에 전부 가부좌를 틀었었다.
단순히 고통을 가라 앉히고 집중하려고 하는 행동인 줄 알았는데, 지금보니 미약한 마력이 새어나오고 있다.
‘마력 스탯을 찍지도 않았을테고, 그런 스킬도 없을텐데······.’
이미 광폭화 모드는 풀린지 한참, 주오령은 명상을 통해 미미하게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놈이었다.
사회에 있었을 때 어디서 뭘하던 사람이었을지 감조차 안잡혔다.
“저기요, 진영씨. 그랑블루 다른 헬퍼들하고는 합류하실거죠?”
구석에서 그랑블루 클랜과 통신을 하고 온 민아영이 다가왔다.
현재 그랑블루는 주오령을 회귀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였다.
3층에서 보여준 활약의 임팩트가 너무 컸기에, 그들의 착각은 더욱 심해졌다.
무조건 안전하게 그랑블루로 영입하기 위해 몇 명의 헬퍼를 더 내려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 합류합니다. 최대한 빨리 10층까지 올라가야겠죠. 그 분들을 설득하는 건 민아영씨만 믿고 있겠습니다.”
“예, 제가 해야죠.”
애당초 그랑블루의 지령은 회귀자만 데리고 올라오라했는데, 민아영은 지금 이 세 명을 동시에 데리고 가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거래에 응하기론 했지만, 얼버무리려니 쉽지 않았다.
‘으, 미리 말을 맞추려고 해도 주오령이라는 사람은 말이 통하지도 않고, 헬퍼들 오면 뭐라고 해야 되지?’
진영과의 거래를 생각하면 이들 모두를 위로 올려보내야 하기는 했는데,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하기가 참 어려웠다.
민아영이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 진영은 방 한 켠의 벽에 기대고 앉았다.
잠깐의 휴식 시간 겸 스스로를 정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아까 얻은 이계의 스킬 강화석을 확인해 봐야겠지.’
* * *
[ 이계 근원이 당신이 스킬석을 사용하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노란 보석.
‘······.’
진영은 미심쩍은 눈길로 보석을 살폈다.
‘보내는 메시지를 보면 성좌나 다름 없어보이는데······.’
문제는 여기가 5층이라는 것.
멸망의 탑에 있는 성좌들은 25층을 넘어가야 만날 수 있다.
그 전에는 플레이어를 향한 어떠한 간섭도 있을 수 없다.
‘그런 탑의 규칙을 보란듯이 무시하고 있어.’
탑에 존재하는 성좌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닌, 탑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이계의 근원이라는 녀석은 마치 실재로 존재하는 양 처음부터 자신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만.’
그리고 지금 진영은 명백히 이계의 규율에 종속 된 상태였다.
한 번의 회귀를 통해서, 그리고 스킬 강화석을 통해서 이미 증명된 일.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탑을 공략하고, 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신화준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망설여서는 안됐다.
[ 이계 근원의 주시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
진영은 손에 쥔 보석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파삭!
금빛 파편이 허공으로 흩어짐과 동시에 그 안에서 뿜어나온 빛은.
[ 이계 근원과의 연결이 한 층 더 강해집니다. ]
피보다 더 진한 붉은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