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이 잠입을 잘함(4)
“오케이.”
손을 펼치자 검은색 열쇠가 놓여 있었다.
성채 비밀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분명하다.
진영은 기억 속의 성채 내부를 더듬어 비밀 창고로 향했다.
현재 22층은 플레이어가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마수들 또한 플레이어가 존재할 거라곤 생각치 못하고 있다.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경비 수준이 떨어지네. 나한테는 잘 된 일이지만.’
허술하다 못해, 경비를 안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하급 언데드 병사들의 기강은 불사자의 왕이 보면 당장에 목을 분질러 버릴 정도로 해이해져 있었다.
‘평화에 찌든 성이라···. 도둑이 활개치기 딱 좋은 장소지.’
보아하니 여기 언데드 놈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멸망의 탑에 구속 된 채 하염 없이 플레이어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존재들.
그들에게 그 외의 목적은 없다.
서걱.
진영은 길목을 지키고 있는 언데드의 목을 그었다.
썩은 피부가 단번에 절단되며 머리가 땅에 떨어진다.
상체와 분리된 머리는 입을 뻐끔거리는 게 최선이다.
촤악, 촤악.
진영은 언데드를 조각 조각 나누고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살고 싶어···.”
“끄윽, 아파···.”
지하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진영의 귀에 들렸다.
진영을 의식하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지만, 플레이어는 아니다.
‘NPC들인가······.’
탑에 묶여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생물.
인간을 포함해, 수인, 엘프, 드워프 등 다양한 종족이 존재한다.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와는 구분되는 존재이다.
‘언데드들이 식량으로 키우는 사람들인가보군.’
탑을 오르다보면 이런 NPC들과 마주칠 경우가 많이 있다.
이들을 진짜 사람으로 보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저 마수와 마찬가지로 탑에 속한 일부로 보는 게 절대 다수.
‘볼 때마다 불쌍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특정 층에서는 판타지 세계의 인간들이 플레이어를 공격하기도 한다.
22층에서는 그런 NPC가 먹이로 전락한 것 뿐이었다.
그들에게 동정을 느끼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구해준다고 해도, 22층에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플레이어가 성채를 탈환하는 것 뿐이다.
진영은 감옥에서 시선을 돌려 비밀 창고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복도를 배회하는 언데드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 근처에 비밀창고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턱.
지나가는 언데드의 턱을 낚아챘다.
방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언데드의 발성기관을 못쓰게 한 뒤, 조각 내어 뒤쪽으로 던져낸다.
그런 식으로 세 마리쯤 잡아내고 나니 더 이상 복도를 순찰하는 녀석들은 없었다.
탁, 탁, 탁.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영은 빠르게 비밀창고가 있는 길목으로 이동했다.
비밀창고가 있는 바로 앞쪽을 지키고 있는 언데드가 보였다.
‘중급 언데드군. 기억 속에 있던 비밀 창고 위치가 틀리지 않은 모양이야.’
무장을 한 중급 언데드가 서 있는 부근은 그저 막힌 골목처럼 보였다.
지키고 있는 중급 언데드도 자신이 왜 여기에 서 있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곳이야말로 비밀 창고가 있는 곳이다.
‘하급은 간단하지만 중급부터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하급 언데드는 좀비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신체 능력은 인간과 비슷했다.
고통을 느끼지 않고 피해를 입어도 움직인다는 점이 달랐다.
하지만 중급 언데드부터는 신체 능력자체가 달라진다.
‘평균 스탯 2단계니까 나랑 거의 비슷하겠지.’
남은 코인은 400여개.
코인을 사용하면 추가로 세 개의 정도의 능력치를 ‘3단계 : 인외’까지 올릴 수 있었다.
‘지금 사용하기엔 아까워. 코인을 사용할 때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10층까지 지금 능력치로 뽕을 뽑고도 남는데 무의미하게 스탯을 올려서 좋을 게 없었다.
아이템을 사거나,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결심을 마친 진영은 나이프를 역수로 들었다.
아무리 경비가 허술하다고 해도 사라진 하급 언데드가 벌써 여럿이었다.
슬슬 눈치 챌 시기가 되었다.
중급 언데드를 최대한 빠르게 처치하고 비밀창고로 들어가야 한다.
“!”
달려드는 진영을 발견한 중급 언데드가 썩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런 진영의 공격에 녀석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응이었다.
콰직!
진영의 발차기가 언데드의 투구를 찌그러트렸다.
녀석은 자신 지키고 있던 골목으로 굴러 들어갔다.
‘언데드는 고통에 강한 내성이 있다.’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고통 내성.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움직이지 못할 상처여도 언데드라면 아무일도 없다는 듯 일어난다.
그러니 더욱 반격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콰악!
역수로 쥔 진영의 나이프가 중급 언데드의 목을 찔렀다.
마기가 실린 나이프가 언데드의 목을 파고 들었다.
“끄으윽.”
역시 중급 언데드라 그런지 맷집이 상당했다.
나이프가 발성기관을 헤짚는데는 성공했지만, 목을 완전히 잘라내지는 못했다.
분노한 중급 언데드가 급히 자신의 무기를 찾았지만, 방금 전 발차기와 함께 어딘가로 날아간 모양이었다.
“끅!”
하는 수 없이 언데드는 자신의 손을 들어 진영을 붙잡고자 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만큼 언데드는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힘을 줄 수 있다.
실수로라도 붙잡힌다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하지만 붙잡히지 않으면 그만.’
팔을 휘적대는 언데드를 피해 진영이 뒤쪽으로 물러났다.
중급 언데드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싸울 자세를 취했다.
비밀 창고를 지키는 만큼, 꽤 실력있는 언데드인게 당연했다.
‘꽤 시간이 끌리는데.’
언데드는 목을 베어낸다고 해도 움직인다.
다리를 잘라내도 끝까지 달라붙는다.
확실히 상대하기 성가신 마수였다.
쉬익!
바람을 가르며 언데드의 주먹이 날카롭게 날아왔다.
딱보니 육탄전이 특기인 놈이었다.
하지만 진영의 쌓아온 경험은 녀석의 실력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탁.
한 걸음 앞으로 내딛어 언데드의 주먹을 흘려보내는 동시에 진영의 나이프가 쇄도했다.
푸욱!
‘어쭈?’
놀랍게도 중급 언데드는 자신의 팔로 나이프를 직접 막아냈다.
언데드이기에 할 수 있는 싸움 방법이었다.
나이프가 깊숙히 박혔기에 진영은 무기를 포기하던가 바로 날아오는 왼주먹을 맞던가 선택해야했다.
“끄윽.”
발성기관이 파괴되었지만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 있음을 깨달은 중급 언데드가 끅끅 댔다.
녀석의 왼주먹이 진영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싸움 좀 할 줄 아는 놈이네.’
진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1층과 2층에서 싸웠던 패거리나, 오동성보다 이 녀석이 자신의 능력을 훨씬 더 잘 활용하고 있었다.
마수 하나가 이 정도니 15층에서 플레이어들이 고전하고 있는 이유도 이해가 갈 수 밖에.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수.’
- 컴뱃 슬래시
진영의 검에서 안개와 같은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레어 등급의 나이프에 이름 없는 신의 에고를 장착해 유니크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생겨난 무기 전용 스킬 ‘컴뱃 슬래시’.
한 순간 3배의 공격력으로 적을 절단하는 스킬이었다.
나이프가 팔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중급 언데드는 피하고 싶어도 스킬을 피할 수 없었다.
“!”
번쩍인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중급 언데드의 몸은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언데드의 시야가 거꾸로 돌아갔다.
털썩.
허탈하게 쓰러진 언데드가 바닥에 쓰러져 꿈틀냈다.
중급 언데드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진영은 잊지 않고 뒤처리를 했다.
작업이 끝나자 진영은 나이프에 묻은 썩은 피를 털어냈다.
‘이제 비밀 창고를 열기만 하면 되겠네.’
진영이 바라 보는 자리는 돌벽으로 막혀 있었다.
여기 어딘가에 열쇠를 꽂아 넣을 구멍이 있다.
손끝으로 더듬어가니 벽에 있는 조그마한 틈새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스윽. 철컥.
언데드 간부에게서 훔쳐낸 검은 열쇠를 틈새에 넣고 돌리자, 자물쇠의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드드드···.
가벼운 진동과 함께 돌벽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문이 열렸다.
‘저게 푸른 모닥불인건가. 생각보다 멋있게 되어 있네.’
비밀 창고 답게 벽에는 각종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서 검은 그릇이 불을 떠받치고 있었다.
붉은색이 아닌 푸른색으로 빛을 발하는 불.
저게 히든 피스인 청명한 불꽃일 터였다.
[ 히든 피스를 발견했습니다. ]
[ 접근 경로(2층:히든플레이스)가 유효합니다. ]
[ 취득 가능한 히든 피스입니다. ]
진영이 그 앞으로 다가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정보창이 떠올랐다.
‘2층에서 그 방을 통해서 와야지만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인거구나.’
문제는 그 난이도가 너무 극악이라는데 있었다.
진영이야 22층에 대해 빠삭히 알고 있었기에 히든 피스를 비교적 쉽게 찾아냈다.
22층이 처음이라면 주어진 24시간으로는 택도 없다.
‘회귀자가 아니라면 엄두도 못내겠는데.’
시간을 지체해서 좋을 게 없었다.
진영은 곧장 푸른 불 위로 손을 뻗었다.
화악!
그 순간, 불길이 천장으로 치솟았다.
손이 타들어가는 열기에 진영이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냥은 가져갈 수 없는건가?”
“그럼 당연히 그냥은 가져갈 수 없지.”
“!”
돌아 본 자리에는 언데드의 간부 블매쉬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검 한 자루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열쇠를 잃어 버렸나 했더니, 좀도둑이 숨어 들었던거였군.”
블매쉬는 생전에 소드마스터였다.
상급 언데드가 되며 더욱 강력한 힘을 손에 넣고, 새로운 경지에 오른 자.
지금의 진영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블매쉬.”
“음? 인간 주제에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거지?”
진영은 가까스로 블매쉬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시간을 벌어보자.’
22층 공략 당시, 녀석의 외관과 능력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진영이 블매쉬와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당시 진영은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않았으므로.
하지만 녀석에 관한 이야기라면 많이 들었다.
“잘 알고 있지. 더 높은 검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언데드가 된 소드마스터.”
“호오. 네 녀석은 이 성채에서 키우는 먹이가 아닌가보군.”
블매쉬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녀석은 플레이어의 존재를 모른다.
화르륵.
대치하는 동안에도 푸른 모닥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의 중심부에 있는 동그란 구슬이 보였다.
‘저게 히든 피스 청명한 불꽃이 분명하다. 꺼내기만 하면 되는데······.’
블매쉬가 문제였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진영을 바라보던 블매쉬가 검을 들어 올렸다.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기는 하다만, 그걸 묻는 건 팔 다리를 잘라 낸 뒤에 해도 되겠지.”
콰앙!
블매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한 검격이 비밀 창고를 뒤흔들었다.
솟아오르는 먼지 속에서 진영이 콜록댔다.
“오, 그걸 피한 건가?”
블매쉬가 문제가 아니었다.
불 속에 있는 히든피스.
이제 꺼내는 수 밖에 없었다.
치지직!
진영은 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고통에 악문 이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였다.
블매쉬가 다음 일격을 날리기 전에 꺼내야했다.
“으윽······.”
중심부로 가까이 갈 수록 보이지 않는 힘이 진영의 손을 밀어내고 있었다.
단숨에 빼내는 게 불가능한 상황.
집어 넣은 오른손이 타들어가며 까맣게 변했지만, 진영은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하지만 계속해서.
진영은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 녀석?!”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매쉬는 오히려 놀란 모양이었다.
블매쉬의 눈에는 모닥불 속의 구슬이 보이지 않았다.
불에 손을 집어 넣는 게 정상으로 보일리 없었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지만 어림 없다!”
다시 한 번 자세를 잡은 블매쉬의 검격이 진영을 향해 날아왔다.
강력한 마력이 담긴 소드 마스터의 검기.
치지지직!
살이 타오르며 새하얀 연기가 솟아올랐다.
이미 팔에는 감각이 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구슬을 손에 넣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검격은 눈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제발!’
진영의 손 끝이 구슬에 닿았다.
그 순간, 온 몸을 태우는 것 같던 열기가 한 순간에 시원한 청량감으로 바뀌었다.
[ 히든 피스 ‘청명한 불꽃’을 획득하셨습니다. ]
[ 목적을 달성해 해당 플로어에서 탈출합니다. ]
[ 업적 :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자’ 를 획득하셨습니다. ]
콰아아앙!
검기가 휩쓸고 간 자리에 더 이상 진영은 없었다.
난장판이 된 비밀 창고를 바라보며 블매쉬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검격을 피해? 아니 그냥 사라져버렸다.
“대체 그 녀석은 뭐였던거지?”
블매쉬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비밀 창고의 모닥불 또한 꺼져있었기에, 블매쉬는 이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잡혔다.
* * *
“허억, 허억······.”
진영이 도착한 곳은 2층의 분수대였다.
다시 생각해도 아슬아슬했다.
“이계 규율이 있으니, 죽어도 다시 회귀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죽고 싶지 않은 게 사람의 본능이었다.
진영은 우선 분수대로 가까이 다가가서 목을 축였다.
순식간에 갈증과 허기가 해소되며, 까맣게 타들었던 팔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멸망의 탑에서는 죽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
아직 분수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진영은 방금 얻었던 히든 피스 ‘청명한 불꽃’을 손에 들었다.
‘힘들 게 얻은 만큼 좋은 능력치 였으면 좋겠는데.’
적어도 신화준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좋았으면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지타산이 안맞는다.
진영은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정보창을 불러오려고 했다.
“!”
그 순간이었다.
[ 이계 시간축에서 최초로 획득한 아이템입니다. ]
[ 이계의 근원이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
팔찌에서 솟아난 황금빛이 구슬을 감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