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이 양심이 없음(3)
원래대로였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수 많은 사람들이 0층을 거쳐 탑을 오르지만 이곳에서 플레이어들이 협력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코인을 모아 1층으로 도망치기 급급했다.
하지만 모두가 살아남고,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했다.
충분히 도전해 볼만했다.
“지금부터 다같이 힘을 합쳐 석상을 물리치도록 하죠.”
다함께 석상을 물리치자니.
사람들은 진영은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석상의 주먹에선 방금 전 희생 된 플레이어들의 시뻘건 피가 아직까지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10m가 넘는 석상은 이미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 그 자체였다.
코인을 도둑 맞은 것도 분한데 이런 미친 소리까지 듣고 있으라니.
몇 사람이 반발하며 진영을 향해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적당히 미친 소리를 해야지.”
“차라리 우리끼리 싸우다 죽게 놔둬!”
“그래! 괜한 짓하지말고 코인을 돌려줘!”
“여기 있는 전부를 죽일 셈이냐!”
소리치지 않는 나머지 플레이어들도 마음만은 비슷했다.
저 거대한 석상과 맞서 싸우자는 건 단체로 자살하자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그럴 바에는 남아 있는 사람끼리 더러운 싸움을 해서라도 살 사람은 사는 게 맞았다.
진영 또한 그걸 모르지 않았다.
“음, 알겠습니다.”
성을 내는 사람들을 보며 진영은 무심하게 볼을 긁었다.
“하기 싫으면 마시죠. 전 그냥 가겠습니다.”
“?!”
진영은 코인 세 개를 들고 손을 들어올렸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움직임은 굉장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공터에 모인 플레이어들의 여론이 순식간에 역전되기 시작했다.
“아, 조용히 있지 시끄럽게. 아저씨들 지금 우리한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해요?”
“괜히 나대지 말고 입 좀 닥쳐라!”
“어차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진데 당신들 때문에 저 사람이 올라가버리면 우리는 그냥 개죽음이라고!”
“맞아요! 일단은 저 분 얘기를 좀 들어봐도 되잖아요!”
모든 코인은 진영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 말은 모든 주도권이 진영에게 있다는 소리였다.
자칫 열받은 진영이 코인을 가지고 1층으로 가버리기라도 한다면 남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개죽음.
코인도 없는 공터에서 멍청하게 죽음을 기다려야한다.
“아, 알았다고요···.”
“일단 무슨 말하는지 들어나 봅시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열을 내며 소리치던 몇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진영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이목이 진영에게로 집중되었다.
잠시 주위가 조용해지길 기다리던 진영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여러분들 대부분이 헌터가 될 거라는 꿈을 꾸고 이곳에 들어오셨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죠.”
멸망의 탑 10층, 플레이어 거주 지역에 도달한 플레이어는 탑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탑의 신기한 힘과 능력을 얻어 세상으로 나온 사람을 세간에서는 헌터라고 부른다.
그들은 탑 외부에서 쏟아지는 마수들을 처리하며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된다.
“탑에 들어와서 헌터가 되어 나갈 수 있는 건 극소수 선택 받은 사람 뿐입니다. 원래대로였다면 여기서 살아남는 건 고작해야 30명 안팎. 지금 남아 있는 사람 중 절반이 넘게 더 죽어야 했다는 거죠. 그걸로 괜찮나요? 지금 전 여기 있는 모두가 협력해서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겁니다.”
70명의 플레이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죽일 듯이 싸우던 상대였다.
심하게 두들겨 맞아 몸이 부러진 사람도 있었고, 그 사람을 때린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협력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의문이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두 말해보세요. ‘상태창’이라고.”
플레이어들은 탑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그들이 원하는 헌터의 힘을 부여한다.
그러나 탑은 플레이어들에게 이런 중요한 정보를 절대 설명해주지 않는다.
‘클래스’와 ‘스킬’.
인간을 뛰어 넘은 능력을 가지게 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그것.
탑을 공략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태창.
그러나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정보창에 의해 이끌려 탑에 들어왔으면서도 사람들은 정작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진영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태창을 외쳐보라는 진영의 요구가 황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몇몇은 코웃음을 치기도했다.
“여보슈,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설마 했는데 진짜 미친 사이코 새끼일 줄이야······.”
“자, 잠깐만요!”
어이 없는 요구에 사람들이 성급하게 불만을 토로하려던 그 때,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와, 진짜 나왔어! 상태창!”
“이거 뭐야? 우리 벌써 헌터가 된거야?”
“뭐해요, 빨리 상태창이라고 외쳐봐요.”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다. 진영은 그런 모습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고작 이거 하나를 몰라서 죽는 사람들이 탑 초반부에는 수두룩하니까.’
상태창이란 간단한 키워드가 탑 초반부에는 엄청난 고급 정보가 된다.
진영도 처음 상태창에 대해 알게 된 건 5층을 넘어서였다.
[ 남은 시간 : 41m 05s ]
이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공중의 홀로그램창을 확인한 진영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다들 상태창을 확인하면 자신의 클래스와 등급이 나와 있을 겁니다. 저랑 가까운 분부터 순서대로 자신의 클래스와 등급을 말해주세요.”
더 이상 진영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영의 말대로 상태창을 외치자 특수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밖에서 꿈꿨던 헌터에 한 발 가까워졌다. 정보창의 내용을 살핀 사람들은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저 석상을 물리치고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이 사람들 사이로 솟아오르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제 등급은 D급이고 클래스는 약초 감별사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등급과 이름만 빠르게 말해주세요.”
“E급 악사입니다.”
사람들이 순서대로 자신의 등급과 클래스를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진영은 겉으로는 차분히 그들의 클래스를 듣고 있었지만 조금 초조했다. 방금 전 상태창을 확인할 때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훑어봤지만 그 안에 진영이 아는 사람은 하나 뿐이었다.
‘아까 구해줬던 김지훈을 빼고는 전부 모르는 사람이야.’
석상이 나타나기 전 양아치에게 두드려 맞던 남학생이 바로 김지훈이었다.
그가 같은 0층에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양아치한테 두들겨 맞고 있을 줄이야.
김지훈은 탑 내에서 꽤 이름을 날리게 되는 플레이어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건 몇 번 안됐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김지훈은 전투 계열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거야.’
탑에 입장한 사람들은 플레이어라고 불리며, 고유한 클래스를 부여 받게 된다.
요리사, 궁수, 마법사, 군인과 같은 다양한 클래스들은 여러 계열로 나뉜다.
간단히 말하자면 요리사는 보조계열, 궁수는 전투 계열이다.
‘전투 계열이 많아야 승산이 생긴다. 가능하면 쓸만한 스킬도 있으면 좋고.’
극단적으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보조 계열이라면 사실상 승산이 없었다.
석상을 상대하는데 노래를 부르고 요리나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만큼 탑을 공략하는데 전투 계열이 중요했다.
회귀 전, 진영이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까지 모두 양보한 주된 이유이기도 했고.
“저는 B급 마법사인데······. 이거 좋은 건가요?”
“일단 오른쪽으로 서 주세요.”
다행히도 괜찮은 클래스의 플레이어가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무기 없이 마력을 쏘아낼 수 있는 플레이어는 중요한 전력이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10명 정도, 쓸만한 클래스와 스킬을 가진 사람을 추려내기는 했지만 튜토리얼 클리어를 100%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저는 C급 점성술사에요. 저기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대로가면 저희······.”
“나중에 듣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서주세요.”
그녀는 아까 전 사람들에게 석상에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사람이었다.
탑에 입장한 사람들 중에는 우연히 스킬 사용법을 깨닫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부류인 듯 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 진영 혼자 듣는 게 나았다.
괜히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
나머지 사람들도 이어서 클래스와 등급을 밝혔다. 이제 남은 시간은 33분 가량.
‘전투계열만 보면 B급 4명에 C급 10명, D급 18명. 이 중에서 무기 없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속으로 셈을 마친 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0층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석상. 녀석은 갑주 속에 새하얀 코인더미를 품고 있다.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보라는 듯 코인을 가지고 있었다.
‘승산이 있다.’
저 석상의 정체는 0층을 지키는 가디언이다. 0층에 자리를 떡하니 잡고 있으니 그 위압감이 상당하지만 탑을 조금만 올라가도 저런 가디언들은 무더기로 나온다. 전투 계열이 아닌 진영도 회귀 전에는 혼자서 제압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귀 전 99층에서의 이야기. 회귀와 동시에 능력치가 처음으로 돌아간 진영이 가진 거라곤 탑에 대한 지식 밖에 없었다. 혼자서 맨 몸으로 싸워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처음에는 스틸 스킬로 가디언이 가지고 있는 코인만 빼내온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스틸의 레벨 또한 1이 되버려서 불가능 했다. 직접 접촉 해야 발동 되는 건 둘째치고 능력차이가 많이 나면 스킬이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결국 남은 것은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쳐 물리친다는 정공법.
사람들은 초조해하면서도 진영이 무언가를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진영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제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 * *
슈유우-
파란 마력 덩어리가 호선을 그리며 석상을 향해 날아갔다.
투웅!
마력탄이 석상의 머리에 정확히 떨어졌다. 10m에 달하는 몸집을 생각하면 아파 보이지도 않는 공격이었지만 석상은 분명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파앗.
푸른 안광을 뿜어낸 석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상의 고개가 마력탄을 쏜 마법사 플레이어를 향해 돌아갔다.
“히이익!”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마법사 플레이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석상과의 거리가 멀어 잠깐은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도 잠시.
쿠웅!
석상은 거대한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거대한 그림자가 혼자 남은 마법사 플레이어에게 드리워지는 순간.
“도발!”
“약올리기!”
“전사의 함성!”
반대편에 있던 플레이어들에 의해 몬스터의 주의를 끌 수 있는 스킬들이 일제히 발동 되었다. 그러자 공중으로 날아 올랐던 석상은 스킬의 힘에 의해 자석에 이끌리듯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쿠구궁!
“머, 먹혔다!”
“계속 스킬을 써!”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스킬 명을 크게 외치세요!”
우왕좌왕하면서도 플레이어들은 서로에게 윽박지르며 맡은 일을 행했다.
땅에 넘어진 석상이 곧장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바로 앞에 처음 공격을 시작했던 마법사 플레이어가 덜덜 떨고 있었지만, 석상의 고개는 스킬을 사용했던 플레이어 무리를 향해 돌아갔다. 공격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쿠웅, 쿠웅, 쿠웅.
석상은 화가 난 듯 거침 없이 돌진 했다. 녀석이 발을 한 번 내딛을 때마다 땅이 강하게 흔들렸다.
그 압박감에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선택지는 없었다.
석상이 플레이어 무리를 향해 주먹을 내리치기 일보직전.
“배리어!”
“마법 강화!”
“활력 증강!”
콰아앙!
플레이어들이 스킬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배리어가 석상의 공격을 막아 냈다.
“마, 막아냈어!”
“우리가 해낸 거야?”
“좋았어!”
자신들의 스킬이 통하는 걸 확인하자, 플레이어들은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지금입니다. 딜러들은 다시 석상을 공격해주세요!”
배리어 뒤에서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진영이 소리치자 반대편의 마법사 플레이어와 합류한 전투계열 클래스의 플레이어들이 마력을 쏘아냈다.
“매직 애로우!”
“하급 마력탄!”
“장풍!”
투웅, 투웅, 투웅.
그리 강한 위력은 아니었지만 전투 계열 플레이어들의 공격은 확실히 석상에게 데미지를 주고 있었다.
석상의 갑주에 조금이지만 미세한 금이 가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데미지가 누적되자 석상은 배리어를 부수는 것을 포기하고 뒤를 돌아 마법을 쏜 플레이어들 바라보았다.
“지금입니다. 도발 스킬을 다시 쓰세요!”
그그그극.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스킬을 사용하자, 석상이 부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보더니 원래 공격하려던 대상에 대해 새까맣게 잊은 채 도발을 사용한 플레이어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대로만 계속하면 된다.’
어그로의 방향을 바꿔주며 지속적인 딜링을 하는 작전이었다. 작전이 먹힌다는 것을 깨닫자 플레이어들은 더욱 의욕적으로 변했다.
“가즈아!”
“부숴버려!”
“개같은 석상아!”
사실 0층에서 처음으로 탑을 마주한 플레이어들이 협력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클래스라는 개념도, 스킬의 존재 자체도 제대로 몰랐으니 말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석상 앞에서 사람들은 힘을 모아 대적하기 보다는 서로의 코인을 빼앗아 탈출하는 게 그들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지금 진영이라는 회귀자에 의해서 협력할 리 없었던 초보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치고 있었다.
쩌저적!
부숴질 것 같지 않던 석상의 갑주 한 모퉁이가 플레이어들의 공격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에 플레이어들이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함성을 내보냈다.
“뒤져라!!!”
“어딜가냐, 이 자식아!”
무력했던 모습은 던져버린 사람들은 석상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서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제 거의 다 됐어.’
남은 시간 15분. 시간은 충분했다. 너덜너덜해진 갑주는 완전히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진영을 향해 다가왔다.
팔을 붙잡으려 하기에 진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 탓에 여성은 몸을 휘청였지만 금세 중심을 잡고 진영을 바라봤다.
“저 아까 점성술사인데, 꼭 말씀 드릴게 있어서요. 이대로 가면 저희 다 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