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항해 뜻밖의 해적-150화 (150/159)

0150 / 0160 ----------------------------------------------

충신의 빛

그랜트 제독이 만나뵙고자 합니다. 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왕은 벌써 기분이 나빠졌다.

요즘 들어서 계속해서 눈에 밟힌다. 그것이 좋은 방식으로 밟히는게 아니라 안 좋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밟히고 있다.

"그 정도로 말했으면 자중하는게 예의거늘."

그랜트가 자신을 방문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전에는 항상 인정했던 육군에까지 미치고 있던 그랜트의 영향력도, 이제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위협으로 느껴질 뿐이다. 이 왕국은 나의 것이고, 내가 지배하는 곳이다. 이 땅에 나는 잡초 한 포기, 백성들의 뱃 속에 들어있는 태아 하나까지도 모조리 자신의 것이어야만 한다.

그랜트는 항상 왕에게 방해가 되고 있었다. 최근 들어서 깨달았을 뿐.

이번에 찾아와서도, 또다시 하찮은 이야기를 한다면 과거에 함께했던 인연과 기억은 거기까지로 끊어야겠군. 왕은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들라해라. 뭐라고 떠들지 궁금하군."

잠시 뒤에 문이 열리고, 그랜트는 지팡이를 짚은 채로 천천히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국왕폐하를 뵙습니다."

왕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그랜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말했다.

"되었다, 찾아온 용건을 말하라."

문이 닫히고, 방 안에 서 있던 그랜트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이제 이 늙은 몸뚱아리를 위해 의자 하나 허락하지 않으시는구나. 계절이 멀다하고 항상 챙기고, 항상 믿어주시던 분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피하고 불편하게 여기게 된 걸까.

다행인 점은, 그랜트는 이전부터 세워온 공로로 독대의 영광을 받은 적이 있었고 이를 청하게 된다면 국왕은 이전의 자신의 말 때문에 이를 허가해야 한다는 것.

그랜트는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의 머리를 따고, 안에 들어있는 물을 그대로 폐하에게 뿌렸다.

물이 카멜롯 국왕의 얼굴에 확 끼얹어지고, 왕은 얼굴 색이 변한채로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무엄..."

그리고, 국왕의 눈이 그대로 휙 돌아가버리고. 입을 벌린 채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랜트는 그 모습에 당황하면서 자신의 왕을 바라봤다. 뭔가 잘못 된 것인가. 믿으면 안될 자들을 믿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랜트는 확인하게 되었다. 돌아간 흰자가, 더 이상 하얗지 않고 새까만 그 광경을.

"폐하... 폐하...!"

사람의 눈이 아니다. 그 눈동자 속에서, 게르하르크를 볼 때 느꼈던 그 잔혹할 정도로 독한 탐욕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의 눈에서 시커먼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대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왕은 그랜트의 손을 뿌리치고 자신의 눈을 감싸고 아... 아아... 하는 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제독, 지금의 행위에 대해서 설명해주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내 몸에 흘러내리는 이 물은 다 뭐고. 갑자기 왠 물이."

그 말에 그랜트는 눈물이 흐를 뻔했다. 저 목소리는, 그가 알고 있던 그 목소리다. 방금 전까지의 아집과 탐욕에 물들어 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랜트는 자신의 오랜 적이었던 해적들에게 감사의 말을 보내고 싶었다. 한 번 만이라도, 다시 저 목소리를 듣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지금이 며칠인지 기억하십니까."

그랜트는 그 말과 함께 오늘의 날짜를 말했고, 국왕은 약간 당황했다. 그랜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사실이겠지. 그렇다면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기에 내 기억이 하나도 없는가?"

그랜트는 서둘러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을 국왕에게 털어놓았다. 국왕이 한 일, 게르하르크에게 해군의 권한을 넘기고, 왕국 안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사건들을 모조리 미루어두고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아이리 공화국과의 해전.

그 모든 것들을 듣고 있던 국왕이 머리를 저었다.

"그런 미치광이 같은 행위를 내가 정녕 지시했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곧 다시 그것이 다가올 것이다. 물이 다 마르고 나면, 아마도 자신의 국왕은 다시 이전의 아집과 집념, 탐욕에 가득찬 암군으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그대의 말대로, 내가 그 사략 해적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면... 그리고 다시 그렇게 된다면."

왕이 자신의 턱을 감싸고 조용히 침묵했다. 그랜트는 그 모습을 잔뜩 긴장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온 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세월의 무게와 다리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랜트는 집중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몸을 적시고 있던 물방울들이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왕은 빠르게 종이 한 장을 꺼내서 깃펜에 잉크를 적시고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났다. 물은 거의 다 말라가고 있었다. 왕은 글을 다 쓰고 나서 왼 손가락을 작은 단도로 살짝 긋고, 그 피를 자신의 반지에 묻혀서 그대로 종이 위에 찍었다.

"받게. 그리고 잊지 말게, 그랜트 제독."

왕은 고개를 들어서 그랜트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 이후로, 그대가 말한 그 해적놈의 사특한 술법에서 내가 완전히 풀려나기 전까지는. 그대가 카멜롯을 향해 겨누는 칼은 반란의 칼날이 아니야."

그대는 지금 반란군과 싸우고 있는 것이네. 나에게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말이 이 방 안에 또렷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왕은 자신이 방금 전에 써내려간 그 문서를 그랜트에게 넘겨주었다.

"나의 의지와 생각을 흐리고, 이 왕국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반란군들을 이 왕국에서... 하나도 남김 없이 모조리 쓸어내도록 하라. 이것이야말로... 제정신으로! 해군 제독 그랜트에게 내리는 참된 나의 교지니."

바닥에 흘려져 있던 검은 액체들이 천천히 왕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왕은 그것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이 그대가 말한 그 힘인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은 모양이군."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대로 그랜트의 늙은 몸을 끌어안았다. 목덜미를 타고, 그 액체들은 천천히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이 이후에, 그대에게 어떤 폭언을 하고, 어떤 푸대접을 하더라도... 부디 잊지 말아주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세상 그 누구보다 그대를 신뢰하고 있네."

말을 마치고 난 다음에, 왕은 거의 눈 밑까지 치고 올라온 액체를 느끼면서 그랜트를 살짝 밀어내고는 말했다.

"이제 나가게. 더 이상 여기에 있다가는, 내가 그대에게 또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 예는 차릴 필요 없어."

그랜트는 그 말에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나갔다.

왕이, 눈꺼풀 아래까지 올라오기 시작한 검은 물들을 느끼면서, 동시에 축축하게 자신의 어깨를 적신 그랜트의 눈물을 느꼈다. 그랜트는, 왕에게 안겨서 울고 있었다.

"거참... 다 늙어서는 체통머리도 없이, 제독이라는 남자가 울기나 하고 말이야. 나중에... 놀려먹어야겠구만."

그리고, 다시 왕의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왕의 모든 것이 끊없는 탐욕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고 스스로의 의식이 그 끊없는 검은 탐욕 덩어리 속에서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

그랜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서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종이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그대들, 카멜롯 왕국에 충성과 목숨을 바친 자랑스런 군인들은 삼가 이 명을 받들라.

사특하고 간교한 가르시아의 해적 게르하르크에게 위임했던 모든 권한은, 이 교지가 작성되는 순간부터 무효이며. 카멜롯의 모든 해군은 나의 신뢰하는 충신, 제독 그랜트에게 돌아간다.

아이리 공화국으로의 모든 공격은 중단될 것이고. 현재 왕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항구와 어촌의 불미스러운 일의 원인인 게르하르크를 비롯한 모든 위협들을 향해 총칼을 돌려라.

.....

왕국 내에 있는 불미스러운 사략 해적과,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문무백관을 반란군으로써 토벌하라.]

그랜트는 그 종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종이를 재빨리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거기에는, 바리스가 서 있었다.

"폐하는 만나셨습니까."

그랜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종이를 바리스에게 보여주었다. 바리스는 그 글을 읽은 다음 조용히 대답했다.

"그 해적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군요."

바리스는 말을 마치고 나서 숨을 내쉬고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은 어금니의 선장이 폐하의 교지를 받듭니다."

그랜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은밀하고,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

그랜트는 종이를 꺼내서 마리아 해적단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다가, 이내 찢어버렸다.

"이곳은 반란군의 근거지다. 오래 시간을 끌 수가 없구나. 검은 어금니를 준비해라. 우리는 바로 바다의 담요로 떠난다."

그랜트의 인식 자체도 확실하게 바뀌어 있었다. 여기는 왕궁도 아니고, 수도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폐하의 판단을 흐리고 그를 속박해놓은 반란군의 소굴일 뿐이다. 더 이상 자신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무거운 죄책감도 없어졌다.

"알겠습니다, 제독."

바리스는 말하고 나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좋은 하루 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