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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 down
레이먼드와의 이야기를 마친 다음에, 자신의 배 선장실 안으로 들어간 에밀은 덥혀놓은 물에 위스키를 약간 섞어서 마시며 하품을 했다.
굳이 남들보다 똑똑해 보일 필요는 없다. 실제로 누가 똑똑하냐가 중요한 일이지. 에밀은 눈 앞에서 태연하게 앞에 내세워 놓은 가짜를 지적하는 레이먼드를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장난을 쳐도, 조금 조잡하지 않았나 싶은데."
레이먼드의 말을 들으면서, 에밀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의 빈틈을 파고 들어가려고 한다면 방심을 시키는게 최고다. 에밀이 레이먼드라는 남자에 대해서 궁금해했던 만큼, 레이먼드도 에밀이라는 남자를 궁금해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레이먼드라는 남자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 만큼이나, 레이먼드도 자신을 궁금해할 것이다.
에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남 생각 맞춰서 움직여주는 건 내 취향이 아니지. 에밀은 계속해서 빈틈을 만들고. 레이먼드는 무심하게 그 빈틈들을 쑤시고 들어왔다.
로제에 대한 지적, 개발 중인 함포에 관한 정보들. 모두 실제로 에밀이 감탄할 만한 내용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에밀이 얼굴에 그런 표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감탄이나 당황의 표정을 드러내 주었다.
"그래도 훌륭했어."
어디서 갑자기 저런 녀석이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밀은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했다. 만약에, 자신이 로제가 이미 자신의 저택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졌을까?
그랬으면 손을 쓰지도 못하고 에밀은 이 싸움에서 졌을 수도 있다. 그 생각을 하면 등 뒤에 아직도 날카로운 칼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 처럼 섬뜩하다. 그래서 너무 좋은거다. 에밀은 잔의 내용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웃었다.
"미나 웨스트우드가 간첩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까."
이전에 에밀이 머리를 굴릴 때 가장 어려운 일은 상대의 수준에 맞추는 것이었다. 머리 잘 굴리는 놈들이 늘상 하는 실수라는게 비슷하니까. 남들도 자기처럼 생각할 거라고 생각하고 움직이다가 어이없이 당한다.
"이번에는 진짜로 재미있어."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하는 생각을, 내 앞의 이 녀석도 하고 있을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은 필요가 없는 진짜 머리싸움. 내가 아는 건 당연히 녀석도 알고 있을거라는 전제를 하고 움직이는 싸움.
레이먼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미나 웨스트우드의 마리아 해적단 합류는 수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을테니까.
그가 미나가 간첩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면, 수를 써서 확인하고 싶어할 것이고. 할 수 있다면 미나 웨스트우드를 해적들의 편으로 돌려놓고 싶을 것이다.
"내가 병신도 아니고."
미나가 눈치채는 걸 피하기 위해서 적당히 시선을 돌리고, 하루 안에 메이너스 항구와 최대한 가까운 곳 까지 배를 가져다놓는다. 거기에서 믿을 수 있는 선원을 내리게 하고. 그 선원이 에밀의 저택으로 침입해서 미나의 남동생을 구한다.
에밀은 피식 웃었다.
다른 새끼들이 모두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소설 쓰고 자빠졌다고 비웃겠지.
근데, 진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예상하고 있던 경로를 바다의 날개가 지나가고. 그것을 에밀이 물 아래에 깔아놓았던 방랑자가 캐치하는데 성공했다.
배가 출발하기 전에, 이미 에밀은 자신의 저택으로 누군가 습격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누가 침입하려고 들지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로제 발미온이겠지. 아, 이제 성을 쓰면 안되겠군 그래."
애초에, 이전에 현상금 명단을 훔치는 것도 그 아이가 했을테니까. 한 번 맡기고 결과가 좋았던 사람에게 계속 맡기는 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한 방에 두 마리를 다 잡는 것이다. 로제로 담보를 쓰는 척 하면 마리아 해적단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취향에 꼭 맞는 장난감까지 들어온다.
"두 번째 싸움은, 내가 이겨야 공평하지."
에밀은 웃으면서 술잔을 홀짝이며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봤다.
저택 안에 대기하고 있는 고용된 용병들만 300명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쥐죽은 듯이 있다가. 로제 발미온이 저택으로 들어온 것이 확인되는 순간 일제히 뛰쳐나올 것이다.
마비독, 그물, 구속용 볼라... 죽이지 않고 잡기 위한 준비도 철저하다.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가장 원하던 장난감이 들어올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나중에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저 레이먼드라는 친구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해 죽겠는데. 나중에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서 소포로 보내줘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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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머니가 말씀하셨지.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면. 진짜로 찝찝한 일이 생기고 있는 거라고. 이 느낌은 마치 예전에 어머니가 돈까스 사준다고 하면서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갈 때와 대충 일치한다. 그 찝찝한 기분을 무시한 대가로, 이전 세상에서 살고 있던 나의 몸은 안타깝게 고추의 살점이 뜯어져 나가야했지.
"근데 씨발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항해사실 안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방 안을 빙빙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뭐냐 이 몸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은? 틀어진 것은 없다. 에밀은 여기에 와 있고 로제는 저택으로 향하고 있다. 게다가 에밀은 로제가 여기에 없는 것에 대해서 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낌새가 아닌데.
찝찝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한 채로 밖에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갑판으로 나왔을 때. 미나와 마리아가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방랑자는, 어땠어? 바다 아래로 돌아다니면 남들 눈에 띄지도 않잖아. 존나 외로울 것 같은데."
마리아의 목소리가 들리고. 불어오는 바람이 내 싸대기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방랑자?
내 안색이 퍼렇게 죽었다. 선장은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배. 미나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방랑자에 새로운 선장은 임명이 되어있을 것이다. 바다의 날개는 다른 배들의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건 확신한다. 로제를 데려다 주면서, 바다의 날개는 한 척의 배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만약에 방랑자가 바다의 날개를 발견했었다면. 에밀은 지금 로제가 어디에 있는 지 예측할 수 있을텐데.
아니, 아니! 이건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멀쩡하게 진행되고 있는 계획을 내가 너무 신경을 집중하는 바람에 괜히 망칠 수도 있다.
안절부절 하는 사이에, 마리아가 밖으로 나와서 나를 보고는 눈을 잠깐 깜박였다.
"뭐야, 똥 마려워?"
차라리 그런 간단한 문제였으면 좋겠다. 나는 마리아에게 빠르게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털어놓았고. 마리아는 내 생각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 했다.
"니 말대로 존나 과대망상 같기는 하네."
그치? 내가 지금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런 거겠지? 나는 마리아의 말에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역시 그렇겠지요."
나의 말에 마리아가 대답했다.
"근데, 생각해보자고. 내가 너한테 이런 류의 일로 조언을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녀는 그러면서 갑판에서 조타륜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주저 앉아서 나를 보고 오른손을 들었다.
"감당할 수 있는 손해라는게 있고. 감당할 수 없는 손해라는게 있는 법이잖아."
만약에...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으음... 내가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한 번 들어봐라. 이미 너는 알고 있는 걸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선장님이 이야기하는 거니까 귀 닦고 듣도록 해."
마리아의 대답에 나는 침묵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사위 게임 해봤냐?"
난데없이 주사위 게임이 또 왜 튀어나오는 거야. 나는 멍한 표정으로 마리아를 바라봤고.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건데. 주사위 게임은 원래 돈을 딸 수가 없는 구조라고 하더라고. 뭐 기대 효용? 막 그런 이름이었는데 말이지. 여튼 그런 단어를 가지고 설명하더라고."
그리고 마리아는 그 계산에 대해서 알려주기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수준의 경제학에서 가끔 나오는 이야기인 기대 이득에 관한 이야기었다. 돈을 딸 확률과 잃을 확률을 포함시켜서 도박 한 판에 기대할 수 있는 이득은. 언제나 적자라는 거지.
"그 계산법 약간 마음에 들더라고. 90달란트를 딸 확률이 5%, 5달란트를 잃을 확률이 95%면... 이런 도박을 여러번 하게 된다면 결국은 돈을 잃는다는 이야기였어."
확률까지 고려해서 계산해보면 매 판마다 0.25 달란트를 잃는 거랑 다름이 없는 상황이 되니까.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에 시가를 물고 씨익 웃었다.
"그 이야기를 이 상황에 대입시켜보자고. 이 일을 계속하면 굉장히 낮은 확률로 로제가 위험해지는 거잖아, 그치?"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봤다.
"근데 로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발생할 피해는... 무한대라고 생각하는데."
씻을 수 없는 로제에 대한 나의 죄책감, 선원들의 쇼크. 마리아라는 선장의 절망. 마리아는 그렇게 읊조리면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0.0001% 확률로 무한대의 손해가 나고. 99.9999% 확률로 일만 달란트를 딸 수 있는 도박이라면, 기대 효용은 얼마인거냐?"
... 무한대의 손해지. 나는 허허허 하고 웃으면서 마리아를 바라봤다.
"별로 설득되지는 않는 어거지입니다만."
개똥같은 소리잖아. 세상에 무한대의 피해 같은게 존재하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마리아가 하고 싶어하는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떤 이득이 생긴다고 해도,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선원의 목숨을 거는 도박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거겠지.
"마음에 드는 궤변이네요."
그런데도 설득이 되는 이유는, 나 자신도 마리아의 말이 달콤하게 들려서였을 뿐이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소리가 얼마나 웃긴 궤변인지는 알 수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 궤변이 마음에 든다. 나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마리아가 히죽 웃으며 그지? 하고 말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마리아를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이걸 그냥 끌고 가는 것 보다는. 바다의 담요를 들러서 날개를 타고 가는게 더 빠를거야."
그렇지.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여기에서 다 털고 일어나면 미나 웨스트우드를 확실히 편입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어쩌면 잘 지낼 수도 있었던 아이리 공화국 해군들과도 사이가 틀어지겠지만. 그건 어떻게든 규모를 확정할 수 있는 수준의 리스크다. 하지만, 그게 아까워서 계속 진행하다가 일이 잘못되면... 내 과대한 망상이 실제로 메이너스 군항 안에서 일어난다면 로제는 죽을 수도 있어.
그런 미친 리스크를 지고 일을 진행할 수야 없지. 역시 인생의 진리는 교과서에 있다고 하더니만. 고등학교 수준 경제가 나에게 이런 도움을 주다니.
에밀한테는... 나는 마리아를 보면서 말했다.
"생각해보고 나서 연락 넣어주겠다는 쪽지 하나 그쪽 병사에게 넘겨주고. 우리는 바로 배 타고 떠나죠."
시간이 없다. 이미 에밀이 출발했을 때 부터 로제는 메이너스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를 했을 거고...
어쩌면 이미 붙잡혀 있을 지도 모른다. 계산을 해보면. 여기에서 우리가 약간 더 일찍 출발한다고 하면. 에밀 메이너스가 다시 자신의 집에 가기 하루 전 쯤 까지는 메이너스 군항에 도착 할 수 있을거다.
마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면서 말했다.
"시팔, 우리 귀염둥이가 멀쩡하게 잘 있으면 우리만 병신짓 한게 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항해사 실로 들어가서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좋은 밤 되세요.
ps. 이런걸 한다고 해도, 독자님들이 얼마나 코멘트를 해줄지는 알 수 없지만요. 제가 소통을 너무 안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날을 하루 잡아보려고 합니다!
질문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성심 성의껏 다음번 후기에서는 답을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