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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싱!
꽤 좋은 생각이 하나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요즘 하도 잔머리를 굴려대다보니 이제는 머리가 그쪽 방면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기똥차게 굴러간다.
눈 앞에 보이는 두 척의 배를 두고, 나는 마리아에게 귓속말을 했다. 마리아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픽 웃었다.
"그럴듯 하지만, 레이먼드. 괜찮겠어?"
좋아, 일단 마리아의 허락을 받았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서 로제를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배에 오르면, 선원 다섯 명만 갑판 위에 올려."
나의 말을 듣고, 로제가 나를 응시했다. 그 눈이 잠깐 의문을 품고 있다가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나를 바라봤다.
"... 괜찮겠어요?"
안 괜찮을건 또 뭐야. 나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로제를 보며 말을 이었다.
"완전히 알아 들은거지?"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하다. 파비앙이 나에게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럼, 항해사 대 항해사로 명예로운 승부를 보자고 레이먼드."
파비앙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그러도록 하지."
배 위에 올라탄 나는 바람을 한 번 확인하고 웃었다. 사람 머리가 신기한게, 범선을 가지고 항해를 한 때가 꽤 예전이라서 조금은 막힐 줄 알았는데. 타자마자 다시 머리가 범선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북서로 건들바람, 해류는 동쪽으로 가는게 하나 있고 북동으로 가는게 하나 있군. 건너편의 배에서, 파비앙이 외쳤다.
"출발한다!"
내가 타고 있는 범선과 파비앙이 타고 있는 범선은 서로 나란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파비앙이 내가 타고 있는 범선을 슬쩍 보고는 외쳤다.
"선원을 너무 적게 운용하는거 아닌가?"
그 말에 나는 씨익 웃으면서 파비앙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이걸로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지!"
파비앙이 내 말을 듣고는 얼굴을 확 구겼다. 기분 더럽냐? 조금 있으면 이제 말도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 기분이 더러워 질 텐데. 고작 이런 걸로 그런 표정 지으면 어떻하려고 그래?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네놈이 지을 표정이 궁금해지는구나 불쌍한 육체야. 나는 주변을 슥 둘러보고 나서 아래를 향해 크게 외쳤다.
"로제!"
나의 외침이 울려퍼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타고 있는 범선의 측면 포문이 일제히 열리고, 대포의 머리가 포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걸 보는 파비앙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뭐하는... 네 녀석, 설마!"
뭘 네 녀석이야. 설마는 개뿔, 병신같은 새끼. 나는 그를 보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슬슬 흔들었다.
"잘가라. 이 한심한 영혼아."
내가 타고 있는 배의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바로 옆에서 나란히 항해를 하고 있던 파비앙의 배 옆구리에 대포알 수십개가 박혀든다. 나무조각들이 비산하고, 파비앙의 배 위에 타고 있던 선원 몇 명이 비명과 함께 바다로 쳐박힌다.
"네 녀석은 항해사로써,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냐아아아!"
파비앙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나는 귀를 후비면서 말했다.
"그 자존심 한 번 대단하네, 지고한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 배로 경주하는거냐?"
난 그런 초라한 자존심 마음 속에 키운 적이 없는데. 나는 그를 보면서 손톱에 모인 귓밥을 후 불어버리고 외쳤다.
"역시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내가 봤을 때 가장 빠른 길은 이거더라고. 로제!"
다시 한 번, 내가 탄 범선에서 불꽃이 토해지고, 파비앙이 타고 있는 범선에서 나무조각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아니 애초에 숫자 싸움으로 밀리는 건 땅 위에서나 밀리는 거지. 바다 위에 있으면 나도 배 한 척, 너도 배 한 척 공평한 싸움이잖아.
대포는 공평하니까, 나도 한 방 너도 한 방이라고. 이런 근거리에서 선빵 맞으면 맞은 범선은 그 날로 범선 수명이 끝나는거야.
너네들을 배 째로 침몰시키고 나서 다시 섬으로 돌아가서 구슬에 비늘 붙이면 될 걸 뭐하러 금쪽같은 시간이랑 노력을 들여서 배로 경주나 하고 앉아있냐. 나 그런 비효율적인 짓거리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말이지.
"나는 그냥 항해사가 아니야 병신아."
해적 항해사지. 두 직업의 차이를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걸? 의사도 앞에 야매, 라는 단어가 붙으면 이미지가 확 달라지잖아. 이것도 그런거야. 아니면, 성폭력자 앞에다가 아동,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네.
심지어 나는 항해사 해적도 아니라고. 해적이 먼저야. 항해사들끼리의 명예로운 대결 좋아하시네. 이게 무슨 기사들이 말 타고 벌이는 토너먼트로 보이냐.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떡 하니 보이는데 내가 왜 질 수도 있는 경주를 병신같이 하고 있겠어.
아, 물론 절대로 내가 질 리는 없지만. 세상 만사가 만약이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끼더니 벼락이 딱 떨어져서 나를 죽이면 어떡해? 나는 여전히 악을 쓰면서 나에게 욕과 저주를 퍼붓는 파비앙을 보면서 양 손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바다에 쳐박혀서 니가 왜 그 꼴이 되었는지 한 번 곰곰히 생각해봐라."
원래 후회 할 때는 항상 너무 늦은 법이야. 그 정신 상태로 배에다가 졸리로져 달고 아직까지 살아있는게 신기하다.
"명예로운 항해사님이 돌아올 수 없는 먼 길 가신단다, 대포를 갈겨서 조의를 표시해라!"
침몰하고 있는 배를 향해 다시 한 번 함포가 불을 뿜고,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파비앙이 타고 있던 범선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후회 안하냐?"
나는 마리아의 말에 그녀를 슬쩍 바라봤다.
"예? 전 스스로가 자랑스러운데요. 이게 바로 정의구현 아니겠습니까. 멍텅구리 같은 항해사 한 녀석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거니까."
그리고 잠깐 침묵하고 있다가 다시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아까부터 저 녀석 때문에 굉장히 기분이 더러웠거든요."
저 녀석에게도 말했지만, 항해가 무슨 애들 장난이냐. 지 공명심에 눈이 팔려서 수십이 넘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를 가지고 경주를 하자고 하다니. 항해사 자격도 없는 놈의 새끼.
마리아가 다시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래도, 너도 항해사잖아. 승부욕 같은 건 있을 거 아니야. 나름대로 너 항해사라는 직업에 자부심 강한 걸로 아는데?"
자부심 있지요.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있지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난간에 기대었다. 내 뒤편에서는 아직도 배가 침몰하는 소리가 들린다.
"배를 빠르게 움직이는건 항해사로써 자랑할 거리가 절대 아닙니다. 다른 항해사들을 이겨먹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랑거리도 못되는 물건이죠. 그런 너저분하고 잡다한 거에 집착하면..."
나는 엄지로 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꼴이 나는 겁니다. 항해사 병신 같은 거 둔 죄로 선원들까지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버리지요. 자기만 죽는게 아니라, 같이 타고 있던 녀석들도 싸그리 같이 길동무로 데려갑니다. 아마, 심연으로 가라앉는 동안에 저 파비앙이라는 항해사는 선원들한테 엄청 욕을 먹을걸요."
예전에 미나에게도 말했던 거다. 배를 조종하는 항해사라는 직업에는 사람 목숨이 항상 턱 아래에서 달랑달랑거린다고. 그래서 예전에 싸늘한 앤에서 미나가 암초를 못 봤을 때, 그게 어쩌면 당연한 건데도 미나의 영혼을 붙들고 꺼꾸로 세운 다음에 탈탈탈 흔들었던 거다. 항해사들은 레이싱 카를 조종하는게 아니다. 운전석 뒤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타 있는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제 자부심은, 저와 함께 배에 타고 있는 녀석들을 최대한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는 겁니다. 빨리 가고 누구 이겨먹고 그러는 건 관심사 밖이에요."
보자... 가끔 해전도 하니까, 버스 운전사 보다는 군용 트럭 운전사인가? 나는 다시 허리를 일으킨 다음, 불을 붙인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파이프를 입에 문 채로 조타륜을 잡은 나는 선원들을 보며 말했다.
"배 돌린다! 스팽커 바람 흘리고, 갑판 아래에 있는 새끼들도 이제 다 나와서 바람 잡아! 언제까지 갑판 아래에 숨어있을 건데?! 일 안할거냐? 내가 돛 조종할테니 니들이 조타륜 잡을래!"
바람을 맞고, 뱃머리가 다시 천천히 회전한다. 나는 한 손으로 조타륜을 잡고 하품을 한 번 했다 막 저물기 시작하는 해와 함께, 다시 아까의 그 섬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싸늘한 앤을 탈 때도 느꼈지만... 진짜 돌아버릴 정도로 배가 느리다. 지금 가고 있는 거 맞긴 한가.
나는 얼굴을 확 구기고 짜증을 가득 섞어서 외쳤다.
"범선은 이제 씨팔 느려 터져서 못 타먹겠다! 후딱 머맨이 시킨 일 끝내고 바다의 날개로 갈아타자!"
나의 분노섞인 포효에 선원들이 동의하며 한 손을 높이 들었다.
"좋습니다아아아!"
맨날 포르셰 타고 다니다가 갑자기 장작으로 물 끓여서 힘겹게 굴러가는 괴상한 차를 탄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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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