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항해 뜻밖의 해적-89화 (89/159)

0089 / 0160 ----------------------------------------------

방랑자, 풀려나는 어둠

새하얀 통로는, 안에 조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통로 안을 걸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눈 앞에는 문 하나가 보였다. 정교하게, 물거품 하나하나까지 표현해 놓은 파도와, 파도 한 가운데에 네모난 돌판이 놓여있는 섬세한 조각이었다.

[많은 이들 바다가 넓은 줄은 알지만.

그 넓은 바다, 깊은 줄 아는 배는 방랑자 뿐이리.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 항상 기억하라.]

미나는 천천히 그 문구를 읽었고.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 처럼 아래에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는, 검은 색 석판에 별 모양으로 금을 새겨넣은 바닥과, 통짜 유리로 된 동그란 원형의 벽이 있었다.

안으로 걸어들어가자, 미나의 아래를 받치고 있던 검은 석판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아래로.. 계속해서 아래로.

"도대체 언제까지."

온통 검은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얼마나 아래로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늘 위에서 비추고 있던 태양이 이 깊은 바다 아래까지는 더 이상 빛을 비추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투명한 원형의 벽은, 어디까지 계속되는 걸까. 아래로 내려갈 수록 미나는 자신의 몸을 어둠이 먹어치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꽤 무게가 나가는 석판이 움직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고.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이 공간에서는, 몸을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어도 볼 수가 없었다.

완벽할 정도의 어둠. 그리고, 유리 판 아래, 저 깊은 바다 아래에서 미나는 작은 불빛 하나를 발견했다.

이 석판은 분명히 저 빛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고.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그 자그마한 불빛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사이에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무언가의 형체.

움직이던 석판이 멈추고. 투명한 유리판에, 하늘색으로 빛나는 글자들이 써내려가지기 시작한다.

[나는 한 곳에 멈추지 않고 떠도는 방랑자. 어떤 항구에도, 육지에도... 선장에게도 정착하지 않는다.]

미나가 글자들을 읽기 시작하자. 천천히 글씨들이 바뀌어가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글을 써가기 시작했다.

이 배는, 다른 더 쉽들과는 다르다. 미나가 이해한 바로는 그랬다.

다른 배들이, 함께할 반려를 정하고 나면 배신하는 법이 없는 절개있는 여자라면. 이 배는 굉장히 헤픈 여자다. 방랑자가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조건은 단 하나.

조타실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배의 주인이다. 그가 멀어지고 다른 사람이 가까워지면 배는 가까워진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섬긴다. 조타실에는 단 한 명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고 조타실에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이 배의 주인이 된다. 그가 조타실에서 나가게 되는 순간 방랑자는 조타실로 들어오는 길을 자유롭게 열어놓을 것이고...

조타실이 비어있는 사이 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다시 방랑자의 선장이 된다.

이 배를 습격한 무리도, 이 배에서 단순히 선원 일을 하던 사람도. 선장이 일이 생겨서 조타실을 나서게 된다면 그를 대신해서 방랑자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푸른 글자는 계속해서 지워지고 써내려가졌다.

[뭍으로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항구에 머무르고 싶으면 머무르되, 잊지 말아라. 조타실을 나가는 순간, 배의 주인이 앞으로도 그대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미나가 글자들을 다 이해하고 나자, 주변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윽...!"

미나는 자신의 눈을 잠깐 가렸다.

푸시이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정면의 유리가 위로 밀려올라갔다. 정면에 보이는, 조타실이라고 써져 있는 커다란 문. 미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걸어서 그 앞으로 가자, 문이 열렸다. 미나의 눈에 바로 들어온 것은 방의 제일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웅덩이였다. 그것 이외의 다른 것들이라고 해봐야, 침대나 테이블 같은 흔한 물건들 뿐이니까 시선이 절로 그 웅덩이로 향했다.

웅덩이 안의 액체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라서 미나의 몸을 덮치고, 그대로 그녀의 몸과 옷 위를 타고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그 동안 미나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모든 먼지와 때가 닦여나간다.

그렇게, 그 액체들이 미나의 몸을 한 번 휩쓸고. 이내 미나의 눈 앞에 하나로 뭉쳐 액체로 이루어진, 미나의 알몸과 똑같은 모습이 된다. 그리고, 미나의 팔뚝에 날카로운 고통이 달린다. 미나가 자신의 팔뚝을 확인하자, 거기에는 검은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선장, 지금은.]

미나의 알몸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액체가 여러 갈래로 쪼개진다.

몇 개의 물방울들은 서로 합쳐지며 큰 네모를 만들더니, 해도가 되었고. 몇몇 물방울들은 검게 물들더니 수심과 항해 속도, 위도와 경도 같은 숫자가 되어서 미나의 시선을 따라다닌다. 그리고, 꽤 거대한 덩어리의 물방울이 그대로 꿈틀거리면서 배의 모습과 함께, 배를 포함한 주변의 입체적인 조감도가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아까 미나가 타고 내려온 그 유리관도 표시되어있었지만, 시야의 범위가 있는 건지 수표면 위에 있었던 그 돌섬은 표시되지 않았고, 뻗어져 있는 유리관도 일부만이 표시되고 있을 뿐이었다.

방랑자의 모습은 이전에 미나가 봤던 어떠한 배와도 달랐다. 유려하고 길쭉한 곡선의 형태에 바깥으로 나가는 부분이 전혀 없고 모든 공간이 물이 들어올 수 없도록 감싸져있다.

미나는 계속해서 눈 앞에 떠오르는 물방울들이 만들어내는 형체들을 바라보며 이것 저것 만져보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정도 확인을 마친 미나가 눈 앞의 물방울들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몇 가지를 하기 시작하자. 배와 연결되어있던 유리관이 분리되고. 더 쉽 중 아직까지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던  방랑자가 주인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방랑자가 자리를 떠나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방랑자가 가라앉어 있던 해저의 바닥 아래에 붉은 색의 오각형이 빛나기 시작하고, 오각형 주변의 물들이 천천히 그쪽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바닷 속에서 강한 진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몰아치는 파도, 빠르게 흘러가는 수많은 조류와 해류들. 쏜살같이 달리는 바다.

물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오각형의 꼭대기 꼭지점에 작은 원이 하나 생긴다.

-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지와 공포의 바다.

오각형의 왼쪽 꼭지점에 작은 원이 생겨난다.

- 잔혹할 정도로 공평한, 냉정하고 싸늘한 바다.

오각형의 오른쪽 꼭지점에 작은 원이 생겨난다.

- 모든 것을 순식간에 부수는 파괴적인 바다.

오각형의 오른쪽 아래 꼭지점에 원이 생겨난다.

- 끊임없이 흐르고, 멈춰있지 않으며 쉬지않고 변하는 바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꼭지점에 원이 생기고. 서로가 이어져 오각형 안에 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별은 빙글 빙글 회전한다.

- 나는 심연에서 꿈꾸는자. 통일된 하나, 또한 나누어진 여럿의 하나. 바다의 힘에 묶여있던 우리는 바다들이 주인을 찾으면서 다시 부상하리니. 마침내 그 날이 오고 있다. 우리는 묶인채로 오랜 세월을 견뎠지만, 우리가 바다에 안겨줄 파멸은 순식간에 다가오리! 멸망은 순식간에 해일처럼 일어나 모두를 쓸어버릴 것이다.

별과 오각형에 금이 가고, 빛 한 조각 없는 어두운 심해 안에서도, 더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칠흑같이 검은 나락이 금이 간 공간 사이에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많은 형체들이 천천히 그 구멍에서 기어올라오기 시작한다.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기어 올라왔다. 소름끼치게 거대한 문어의 형상을 한 무언가도 기어올라왔다. 구체적인 형상이 없이 녹조와 해초들이 끊임없이 뭉쳐졌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역겨운 형상도 기어올라왔다. 번쩍거리면서 이따끔 짙은 녹색의 액체를 이리 저리 흘리는 거대한 해파리를 닮은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바다에 생겨난 검은 구멍에서 기어올라온 존재들은 곧바로 바다 위로 항하려고 했지만. 아직 완전히 부서지지 않고 있던 붉은 오각형에서 네 개의 사슬들이 튀어나와 그 존재들의 몸을 하나하나 바느질 하듯이 꿰뚫고 지나가며 한데 엮어 묶는다.

- 하나는 이미 처리한 걸로 아는데?

그들 중, 흐릿거리는 녹조와 해초의 형상이 빠르게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형체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그 몸뚱아리도, 어떻게 된 이유인지 분명히 그 사슬들에 꿰뚫려서 묶여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네 개의 사슬들 중 하나가 그 형상의 몸부림에 부르르르 떨리다가 그대로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 앞으로 세 개 남았나.

그 말에 다른 목소리가 하나 아쉬운 듯이 대답한다.

- 추가로 하나 더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 미치광이 말하는 건가? 다른 목소리가 다시 그 목소리의 말에 끼어든다. 하나는 우리의 물건이 반응 할 정도의 탐욕을 가져서 저 무저갱 안에서 유혹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가지고 있는 광기가 너무도 강해 물건조차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 그는 우리의 품격에 걸맞은 광기를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를 듣지 않더군.

하지만 이제 그런 귀찮은 제약 따위는 없다. 우리의 입맛에 맞는 녀석들을 세 명 더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다.

- 옛날 생각나는군. 그 시뻘건 배 기억나나?

그 목소리에 세 개의 목소리가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 그들에게 영혼을 팔았던 어리석은 남자. 대놓고 판다고 이야기를 해서 받아두었고, 계약은 가두어진 상태에서도 제한적이나마 가능해서 얼른 이쪽으로 가져왔었다.

- 아. 그의 영혼은 아직 우리 손에 있으니 조금 가지고 놀아...

그렇게 말하면서 문어가 자신의 다리 하나를 휘휘 저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 이상한 일이로군.

약간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다시 문어가 다리들 중 하나를 휘휘 젓는다.

- 상관없다. 단순한 심심풀이를 조달하는 건 이제 어렵지도 않을테니.

============================ 작품 후기 ============================

더 쉽들을 최초에 구상할 때.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막상 설정해 놓고 보니까 전설의 배들은 뭔가 주인 하나만 바라보고. 그 주인이 아니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에요. 다섯 척이 모두 일편단심이야.

그래서, 누가 나를 조종하던 상관없어! 같은 헤픈 전설의 배를 하나 넣어보고 싶었어요. 애초에 정처 없이 떠돈다는 방랑자의 이미지랑도 좀 어울리는 것 같고...?

전형적으로 얻기는 어렵지 않은데 지키는게 잦되는 물건이라고 할까요.

쇠사슬에 묶여있는 바다생물 친구들은 이제 한참 뒤에야 나올 거에요. 원래는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 한 번 시간을 되감고(이것은, 미나가 방랑자를 얻을 당시의 이야기다 같은 느낌으로?) 넣으려고 했는데... 별로 안 매끄러울 것 같아서요.

이제 바운티 크래시 시즌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이상이에요. 좋은 밤 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