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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티 크러시
극장 안에서는 오페라가 상연되고 있었고, 에밀은 발코니 석에 앉아서 공연을 보고 있었다. 뒤편에서 조심스럽게 남자 한 명이 에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고. 에밀은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넋이 나간 듯 무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소프라노의 열창이 끝나고 나서, 에밀은 다시 손가락을 몇 번 까닥였고, 남자가 입을 열어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에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에밀의 뒤 편에 서 있던 남자는 빠르게 경례를 붙이고 사라졌고. 에밀은 깍지를 낀 채로 오페라를 바라보기 시작했지만, 그 눈 안에 더 이상 오페라의 무대는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는 약간 비틀린 듯한 미소가 달려 있었고, 머릿 속의 수많은 생각들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서로 뒤얽히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리아의 해적단에 관한 보고를 듣는 순간 부터 감이 왔다.
이 놈들 중에 하나가 이쪽의 수를 읽었다. 눈 앞에 떨어져 있는 문제인 현상금 뒤편에 숨어있는 아이리 공화국 해군의 생각을, 내 생각을 훔쳐보았다.
그 점이 에밀은 견딜 수 없이 짜증이 나면서, 동시에 견딜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몸 안에서 뭔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느낌. 그 안에는 증오와 희열이 바리톤과 소프라노처럼 얽혀서 화음을 만들어 에밀의 몸 속에서 징징 울려퍼지려 한다.
"아직은."
에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는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밀은 의자의 손잡이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빠져들었다.
바다의 날개가 해군을 공격하고 있다면, 보통의 범선으로는 대항이 힘들지. 그리고 바로 에밀의 머릿 속에서 카드 하나가 쉽게 떠올랐다. 싸늘한 앤. 바다의 날개랑 싸늘한 앤이 싸우게 된다면 싸늘한 앤이 이길 것이라는 건 뻔하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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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해 중이었고, 새로 들어온 신입들은 여전히 물대포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덕분에 기동을 하는 게 영 자유롭지 않아서 이전만큼 쉽게 다른 배들에 붙을 수가 없다. 가속이라고 외쳤다가는 지진이라도 난 것 처럼 배가 덩실덩실 춤을 추니까.
그 문제로 나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근데 말이야."
마리아는 하품을 하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마리아를 돌아봤다.
"나는 싸늘한 앤이 신경쓰이는데."
아, 그 얼음땡이 배? 마리아가 나의 대답에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배가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여러가지로 힘들어지긴 하겠지만. 난 전혀 걱정되지 않는데 말이야. 그도 그런게...
"싸늘한 앤은, 로만의 배입니다."
그 배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로만의 배라는게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리의 해군은 싸늘한 앤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못 쓰는게 아니라. 안 쓸거다. 절대로 안 쓴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대책이지만 쓸 수 없는 카드. 이유는 명쾌하다.
"지금 아이리의 해군 제독이 로만에서 에밀로 바뀐 지가 얼마나 됬지요?"
몇 개월 되지도 않았다.
"바뀐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아직 로만의 입김이 해군 내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지는 않을 겁니다."
에밀이 나름대로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사람들을 가려내기는 했겠지만. 아직 로만과 함께 일하던 녀석들을 완전히 처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더 쉽의 하나인 싸늘한 앤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미 지금 제독을 잡고 있는 에밀의 입장에서는 휙 하고 숙청하기도 난처할텐데.
그 상황에서 바다의 날개와 여해적 마리아라는 유명인사를 잡기 위해서 로만을 출격시킨다고?
"싸늘한 앤이 우리를 잡아내면, 그 다음은 어찌 될 것 같습니까?"
그 과정에서 로만이 가질 공로는? 해군에서 열심히 로만의 입김을 몰아내고 있었는데, 로만에게 다시 해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공적을 쌓게 해줄리가 없잖아.
해적 잡는거 중요하겠지. 중요한데.
지 자리 위태로워지면서까지 우리를 잡으려고 하는 잔 다르크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갑자기 배가 한 번 휘청 흔들렸고. 나는 목에 핏대가 벌떡 일어난 상태로 외쳤다.
"야 이 물방개 같은 놈들아! 제대로 안해!?"
원래 가속이나 전투 중이 아니면 물대포를 쏘지 않지만. 나는 일부러 멀쩡하게 가는 배 위에서 선원들에게 물대포를 잡고 있게 했다. 덕분에 바다의 날개는 유래없이 오랜 시간 동안 양쪽 포문에서 물대포를 쫙쫙 쏴올리면서 항해를 하고 있었고...
나는 손을 슥 조타륜에 올리고는 그대로 살짝 틀었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덩실거리는 배. 나는 허허허 웃다가 외쳤다.
"물대포 잡고 있는 새끼들 다 갑판으로!"
잠시 뒤에, 물대포가 멈추고 선원들이 올라왔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방향 바뀐다고 말해주고 돌려야겠냐, 응? 싸울때도 그딴 식으로 할 거냐."
나는 난간에 올라타서 양반다리를 하고 턱을 괸 다음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다 죽여버리고 싶네. 하루도 멀쩡하게 운용된 적이 없냐."
내 말에 마리아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쯤 해둬라. 저것들도 저러고 싶어 저러겠냐."
그 말에 나는 인상을 팍 쓰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재수가 좋아서 살았지요. 솔직히 어떻게 해군 군함 잡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배가 무슨 최신식 바이브레이터도 아니고. 뭐만 하면 부르르르르 떨리냐. 나는 해가 저물어가는 걸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닻 내려라. 오늘 여기에서 쉰다."
나는 말을 마치고 조타륜을 놓은 다음 항해사실 안으로 들어가서 해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해군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안 그래도 환절기라 바람들이 바뀌고 있을텐데. 일단 지금도 안정적으로 바람이 부는 곳은 몇 군데 있지만 거기는 갈 수가 없다. 원래라면 그냥 가서 다니는 함선들을 다 털어버리겠지만 말이야. 지금은 선원들이 물대포를 제대로 못 다룬다는 말이지.
함선 하나 잡는데 2시간이 걸렸다고. 그 사이에 다른 함선이 오면 위험할 수도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 선원들이 제대로 가속을 해줄 리가 없다. 진짜 얼척없이 그냥 범선에 바다의 날개가 털릴 각오도 해야 할 정도니.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발소리만 들어도 그냥 로제다. 뭔가 조심스럽게 총총거리는 발걸음 소리.
"뭐하고 계세요?"
나는 해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해군들이 다닐 것 같기는 한데 많이 다니지는 않을 것 같은 항로를 찾고 있지."
그러니까, 청순 글레머에 섹시 큐트한 동안 누님 같은거 찾는거랑 비슷해. 내 대답에 로제가 아하, 하는 소리와 함께 해도를 바라본다.
... 보면 뭔지 아냐?
"우와, 모르겠다."
로제는 그렇게 말하면서 해도에서 눈을 떼고는 나를 바라봤다.
"레이먼드는 선장님 좋아하죠?"
그렇다, 바야흐로 마침내 정말로 대답하기 어려운 숙명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나는 마리아랑 많이 잠을 잤다. 로제와도 잤다. 마리아는 뭐, 니 좆이니 니가 맘대로 놀려라 같은 희안한 주의를 고수하고 있어서 애초에 이런 대사를 하지도 않지만.
로제가 그럴리가 없잖아. 이런 질문을 하는 날이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엇지만 그 날이 오늘일 줄이야. 현명한 탈출로를 찾아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로제를 바라봤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 이거 완전히 역풍인데.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번 항해도 역시 보람찬데. 흔들리는 눈망울을 한 소녀와, 해군과 병신같은 선원들이 한꺼번에 나에게 밀려들다니. 오늘 크리스마스인가.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자 로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안 들을래요."
나는 대답을 위해서 약간 입을 벌린 상태로 가만히 있었고. 로제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여자로써 매력이 없어요?"
이건 난데없이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신 걸까요. 나는 로제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서 가만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건 무슨 소리야."
나의 말에 로제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결국 뭔가를 마음먹었는지 선반으로 가서 럼주를 꺼내더니 쭉 들이켰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약간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로제가 말했다.
"역시 나 작아서 그래요?"
미쳐 가는구나. 그러면서 지 가슴에 손을 올리는 이유가 뭐야.
"키는 좀 작은 편이지?"
말 돌리지 말아요. 라면서 로제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서 나를 올려봤다.
"해적 하기 전에는 나 좋다던 사람들 많았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로제가 그대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취한 것 같은데."
나의 말에 로제가 픽 웃었다.
"약간 미친 것 같기도 해요. 좋은 날 잡아서 레이먼드랑 자고 나서 애가 생기면... 그러면 선장님도 별 말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니까."
어린 나이에 굉장히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러면서 몸을 반바퀴 돌린 다음 내 쪽으로 기대자, 로제의 뒤통수가 내 가슴팍에 툭 닿는다. 로제의 어깨가 들썩, 하고는 가벼운 딸꾹질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곧바로 보이는 로제의 하얀 목에 천천히 빨간 술기운이 타고 올라온다. 와 술기운이 이렇게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걸 관찰하는 건 또 각별한 경험이네. 그렇게 가만히 있던 로제가 입을 열었다.
"어제는 꿈도 꿨어요."
무슨 꿈, 이라고 물어본 나는 로제의 대답을 듣고 그대로 후회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나는 취해서 레이먼드한테 칭얼거리다가. 딱 이런 모습이 되었었는데."
로제의 뒤통수가 내 가슴팍을 살살 비비기 시작하고, 덕분에 내 가슴팍에 간질거리는 감촉이 달린다. 그러다가 로제가 뒤통수로 내 가슴팍을 툭 쳤다.
"아니, 이게 아니에요. 여기에서 레이먼드는 저를 안아줘야 해요. 엄청 따뜻하게."
무슨 최면 같은거라도 거는 건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마력 같은게 내 몸을 움직이는 건가. 나는 내 양 손을 천천히 움직여 뒤에서 부터 로제를 살짝 끌어안았다. 로제는 으응, 소리를 내고 말했다.
"조금 더 세게요."
팔에 약간 힘이 들어가고. 로제가 푸흐으으으 하는 숨을 내쉬고, 손등에 그 입김이 간질거리며 닿는다.
"이제 제가 고개만 돌려서 레이먼드를 볼 건데요. 거기에서 레이먼드가 키스를 해줘야 해요."
아바타냐? 나 아바타냐고. 하지만, 로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내 얼굴은 천천히 로제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로제의 입술과 내 입술이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잠시 뒤에 입술을 떼자 로제가 미소지었다.
"맞아요, 딱 이정도 입맞춤이었어."
그리고 로제는 살짝 몸을 틀어서 자신의 귀를 내 가슴에 가져갔다.
"음, 심장 뛰는 소리도 똑같아요."
그리고 로제의 손이 내 가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로제의 얼굴에는 술기운이 올라온 건지 뭔지 모를 정도로 빨갛게 변해있었다. 딸꾹질은 멈춰 있었다. 귀를 가슴에 가져간 채로, 내 가슴을 매만지면서 로제가 말했다.
"여기에서, 이제 레이먼드가 저를 번쩍 들어서 침대로 가는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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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침대, 오늘은 못 갈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