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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의 이야기
해적과 두 해군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 3~4주 후, 호른 항구의 선술집 안에는, 세 명의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저기 때가 묻어있는 승마복을 입고, 뭐가 좋은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로제와.
금발을 슥 쓸어내리고 맥주를 마시는 여해적, 마리아.
그리고 항해사 레이먼드.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서 눈 앞에 놓여있는 냄비가 부글부글 끓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용캐 여기까지 왔네."
마리아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로제에게 맥주잔을 살짝 흔들었고, 로제가 거기에 다시 맥주를 한가득 부어주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나름대로 힘들었다고요."
레이먼드가 그 말에 로제를 바라보았다. 마리아도 역시 눈을 들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에, 로제가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 허리를 뒤로 뺀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입을 연 건 마리아가 먼저였다.
"말해봐,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그 꼬맹이에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가. 여기까지 진짜 오다니, 이쪽은 지금 신기해서 뒤로 넘어갈 지경이라고."
마리아의 재촉에, 로제아 으음, 하면서 가볍게 관자놀이를 누르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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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의 대화는 나를 너무 피곤하게 만들었다. 푹신한 침대와 따뜻한 방. 바다 위에 있을 떄에는 쉽게 꿈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잠깐 침대에 앉아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녀 몇 명이 뜨거운 물을 욕조에 잔뜩 담아오고, 물 안에 향수를 약간 풀어놓는다.
하녀들이 내 옷을 벗겨주기 위해서 다가오자,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아니야, 나도 손 있어."
드레스를 손수 벗은 나는 잘 정리해서 침대 위에 두고 천천히 욕조 안에 몸을 넣었다. 그리고, 하녀 두어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내 팔과 어깨, 다리 등을 안마하기 시작한다.
"..."
당연하게 느껴지던 이 생활이 갑자기 어색하다. 안마라니, 향료를 푼 온수라니. 나는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오고, 그 웃음 한 번에도 어깨를 주무르던 하녀들의 손길이 움찔한다. 내가 엄청 무서운걸까, 아니면 내 아버지가 엄청 무서운 걸까?
나는 안마를 받던 오른 손을 가져와서 살펴본다. 슬슬 굳은살이 박히고 여기저기 잔 상처들이 나기 시작하던 나의 손.
아쉬워. 조금만 더 있었으면 완벽하게 굳은 일들도 소화 할 수 있었을텐데. 하녀 한 명이 옷을 가지고 가려고 하는데, 옷 안에서 툭 하고 뭔가가 떨어진다.
작은 가죽주머니다. 나는 그걸 곧바로 알아보고 말했다.
"화장대 위에 올려놔줘."
하녀는 군말 없이 그 지시를 따르고. 나머지는 계속해서 안마를 하는 동안 옷을 챙겨 나간 하녀가 새 드레스를 가지고 온다. 목욕을 마친 나는 다시 옷을 챙겨 입고 하녀들이 나간 다음 화장대 위에 올려둔 가죽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낡은 가죽 주머니. 저 모습은 익숙해. 이전에 선장님에 나한테 건네주던 돈 주머니를 꼭 닮아있잖아. 이건... 거친 느낌은 가느다란 새끼줄을 풀어내리자, 그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 매번 보름달이 뜰 때 마다, 호른 항구로 가 볼거야. 가능하면 거기에서 보자고. 덤으로 넣은 건 여비로 쓰도록! 해적 선장 마리아께서 쓰심.
선장의 글씨체네. 보자마자 알 수 있어. 대충대충 그려넣은 듯한 막 쓴 글이지만. 그 글과 함께 들어있는 진주 다섯알을 보고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봐 로제. 너는 거기에서 배운 것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자. 거기에는 여전히 내가 서 있었다. 여전히 검은 머리카락, 여전히 하얀 피부. 배를 타고 나서 거울을 볼 일이 별로 없었다. 항상 바빴던으니까.
간만에 들여다보고 있는 나의 얼굴은, 다른 곳은 다 같았지만. 눈빛은 약간 틀려진 것 같다.
"해야하는 일."
나의 아버지가 말했던 것 처럼. 나를 여태동안 키워주고 먹여준 이 가문을 위해서 나 하나를 헌신하는 일. 의무.
"하고 싶은 일."
도망치고 싶은 나의 마음. 그런 의무 다 집어 치우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하고 싶은 걸 하는 것. 다른 말로는 무책임. 방종.
선장이 말했었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중에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게 해적이라고.
"해적이 되고 싶어서 사람까지 죽였었는데."
그것도 그렇지만... 레이먼드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고 싶은 일을 할래."
나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서 내 옷을 바라봤다. 이런 치렁치렁한 드레스로 나가면 불편하겠지.
나는 옷장에서 은실로 구름무늬를 넣은 사슴가죽 승마복과 검게 염색한 실크 셔츠를 꺼냈다. 선장실에서 잠을 잘 때, 선장과 함께 매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 남들한테 얕보이면 안된다는 거지. 니가 나와 만났을 때 입고 있던 복장은 말이지. 돈도 많고 고귀한 집안의 철없는 꼬맹이들 같은 모습이었다고. 그러면 안돼.
중요한 건. 위압감, 권위 같은 거야. 남들이 너를 엽신어기지 못하는 복장. 그냥 하늘하늘하고 귀엽고 깜찍한 복장들은 너를 우습게 보이게 한다고. 거대한 저택에서 주는 거 받아먹고 입혀주는거 입고 자란 인형같은 모습이지.
아름답고, 비싸보이는 노리개. 누구든지 그런 이쁘장한 장난감은 가지고 싶어하는 법이지. 길거리에 여자가 혼자 다닐 때 그러고 다니면 큰일난다. 그런 옷은 말이지. 뒤편에 플레이트 메일 같은 걸 입은 병사가 한 여덟명 정도 달라붙어있지 않다면 밖에 돌아다닐 생각은 접어야해.
... 활동을 편하게 하려면 바지가 좋으려나. 나는 천천히 살피다가 짙은 갈색의 승마바지를 하나 꺼내었다.
아버지는 나한테 알몸으로 나가라고 하셨지만.
어차피 집을 나가는 것 자체가 반항인데 거기에 더해서 사소한 불복종 하나 정도는 더해도 상관없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무릎 약간 아래까지 올라오는 부츠의 끈을 조였다. 모습을 한 번 점검한 나는, 기왕에 털어가는거 조금 더 털자. 라고 마음을 먹은 다음 승마복을 두어벌 정도 더 챙기고, 돈으로 바꿀 수 있을 만한 물건들을 챙겼다.
단벌숙녀로 살 수는 없잖아? 기왕에 집 나가는 거면 뭐라도 챙겨서 나가야지.
이제 와서 느끼지만,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복장이 이 거대한 드레스룸에 승마복 뿐이라는 것도 새삼스럽게 웃긴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는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짐을 싸서 침대 밑에다가 감추어 둔 다음 펜과 종이를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보통, 이 나이에 집을 나간다면 사람들은 가출이 아니라 출가했다고 표현하더라고요.
아버지 말대로 저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출가를 한다고 표현하는게 적절할 것 같아요.
출가합니다. 그 동안 제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것이 모두 가문의 휘광 덕분이니까. 거기에 따르는 의무를 수행하고 싶지 않아진다면 나가는게 맞겠지요.
몸 건강하세요. 아, 그리고 옷 몇 가지랑 돈 될 만한 물건들을 가져가는데. 이건 그냥 재수없어서 도둑맞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종이를 봉투에 넣어 촛농으로 봉인한 다음. 나는 나갈 채비를 마치고 벽을 장식하고 있던 검 한 자루를 꺼내서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음, 충분해."
장식용으로 걸어둔 거라서 영 별로일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잘 만들어졌으면 문제 없겠지?
굳이 내가 집 밖으로 걸어나가에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어차피 메이너스 항구는 배를 타고 가야하는 곳이니까. 게다가 국가가 다르다는 건 이전에 레이먼드와 함께 타고 다니던 바다의 날개라고 해도 가는 와중에 보급을 최소한 한 번은 해야 하는 거리다. 그렇다는 말은 중간에 몇 번은 항구에 배를 정착시킨다는 말이고.
이 짐을 잘 숨겨서 탄 다음, 중간 기착지에서 슬쩍 내려버리면 될 일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나를 찾겠다고 사람들이 온 항구를 다 뒤지고 다니겠지.
그걸 피하는게 가장 어려운 일이 되겠지.
나를 메이너스 항구로 데려가던 사람들은 내가 없어진 걸 알면 그 근처를 해적 럼주 찾듯이 뒤지고 다닐 테니까. 아버지 성격 안 좋은건 본인 빼고 다 알테고, 나를 메이너스 항구로 옮기는 일은 중요하니까. 그 사람들은 살고 싶어서라도 나를 찾으려고 애를 쓸거야.
로제는 깊게 숨을 내쉰 다음 침대에 누웠다.
============================ 작품 후기 ============================
마침내, 로제가 나온다.
좋은 밤 되세요.
ps. 이 글 읽는 분들은 학점 포기해주세요. 저는 포기했거든요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