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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VS 해군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나자, 다시 싸늘한 앤은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스트의 꼭대기에서 주변을 관찰하던 군인이 외쳤다.
"서북 12도! 해적선이 있습니다!"
그 말에 로만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망원경으로 살펴보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도착하는 때를 확인하는 건가. 곤란한데."
로만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생각했다. 레이먼드가 말한 시간에 비해서 훨씬 일찍 도착할 예정이라는 것을 굳이 그 여해적에게 알려야 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서 침몰시키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이번 기회에 저 항해사가 진짜로 해적일을 그만 둘 확신이 생긴 건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미나 웨스트우드를 교육시키고 있는 것도 그렇고, 항해에 있어서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저 모든 것들이 거짓일 수도 있으니까. 한 번 떠보는 편이 마음이 안심이 될 것이다. 해적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깐 더 생각하던 로만의 머리에는 다른 생각도 하나 떠올랐다.
굳이 저 배의 모든 인원들을 얼려죽일 필요는 없겠어. 몇 명 살려두는 편이 좋겠군. 적당히 얼리자고, 가까스로 배는 움직여서 도착할 수 있도록.
그러면 배의 위치는 들통이 나겠지만, 그걸 감수하고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곳으로 향한다. 다른 배들은 대기하도록 해라."
그리고, 배가 약간 방향을 바꾸어서 선원이 말한 방향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범위 내에 그 해적선이 보였다. 큰 배는 아니었다. 애초에 싸울 생각보다는 정찰이 목적이었기에, 속도에 중점을 둔 모양이다.
그럼... 얼려볼까.
급격하게, 싸늘한 앤의 선체가 식기 시작한다. 선원들의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기 시작하고, 레이먼드는 갑작스러운 온도의 변화에 당황하는 눈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왜 굳이 이 싸늘한 앤이 저 해적선 방향으로 향했는지, 어째서 배가 이렇게 차갑게 식어버렸는지 눈치채지 못한 눈치다.
허연 서리가 덕지덕지 앉을 정도로 식어버린 싸늘한 앤 위에서, 로만이 멀쩡한 손을 뻗어서 그 배를 가리키기고 살짝 손을 쥐었다. 그걸로...
"맙소사..."
레이먼드가 그 장면을 보면서 기겁을 한다. 뭐가 발사된 것도 아니고 어떤 전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 배 주변의 바다가 그대로 꽝꽝 얼어버렸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나는 생각했다.
갑판에 물이 발라지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리안이 왜 이 싸늘한 앤이 바다의 날개의 천적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이거 즉발식이잖아. 무슨 공간좌표 설정해서 날려버리는 것 처럼 전조도 없고 날아가는 것도 없고 그냥 손을 쥐는 것 만으로 로만이 바라보고 있던 곳이 그대로 얼어붙어버린다.
배가 아무리 빠르면 뭐해, 뭐가 날아오는게 아니라서 피할 수가 없는데. 최소한 투사체 같은 거라도 날려야 배를 빠르게 움직여서 도망치든 피하든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답이 없다. 선상에서 싸우는 건 이 배 자체가 멋대로 움직여서 올라탄 선원들을 갈아마셔버릴 것이고, 바다의 날개가 가지고 있는 빠른 속도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물대포를 쏘기는 개뿔이 쏘냐. 보이는 순간 얼어버릴텐데.
싸움이 시작되면, 싸늘한 앤은 일단 체온을 떨어뜨리고 있을 텐데. 저게 몇 발의 제한이 달려있는지는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싸우면 곧바로 얼테니까. 다리가 잘린 바다의 날개는 다른 배들에 비해서 그닥 나을게 하나도 없다.
아니 더 나쁘지. 그것들은 거기에 고정되어서 대포라도 쏠 수 있지만...
바다의 날개는 포도 물대포잖아. 아무것도 못한다고.
"... 대단하네요."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는 척 했다. 로만이 뭘 원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니들은 해적을 이기지 못하는 거야. 우리들은 존나 나쁜 새끼들이라서 말이야. 근본적으로, 내가 관련있는 배만 아니면 다른 배들이 어떻게 되던 상관없어 주의라고. 저 배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있을 확률도 없고.
저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굉장히 슬프겠지만, 나는 뭐...
어깨를 으쓱 하고 말했다.
"싸늘한 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더 없습니까?"
그 말에 로만이 가볍게 다시 손을 저으며 시선을 스으윽 이동시켰다. 그리고, 싸늘한 앤 주변의 바다가 바도가 치는 듯한 모양을 유지한 채로 얼어붙었다.
... 도리안의 미스가이드가 아니면 이 녀석은 답이 없다고 확신했다. 항해사의 역량이고 지랄이고 다 법규나 먹으라고 해. 저 배랑 바다의 날개는 싸우면 안되는 녀석이야. 극상성이라고. 파이리 꼬랑지를 욕조에 담그는 것 보다 위험해.
이거 연발도 되는 건가? 라면서 나는 크게 눈을 뜬 채로 중얼거렸고, 거기에 미나가 자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야, 저 여자도 웃을 줄 아는구나.
"굳이 손을 움직이는 행동을 하는 건 제독님의 취향이다. 그냥 시선이 닿고, 얼리겠다는 의지만 제독님이 가지신다면, 그 장소는 얼어붙는다."
...
미스가이드가 싸늘한 앤과 싸우면 이기는 건 확실하다.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시선이 닿아야 하는 거잖아. 근데 미스가이드의 안개는...
경험해 봤는데. 코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안개로 감싸버린 다음에 버려두면 제대로 항해도 못하고 바다 위에서 길을 잃어 선원들과 선장이 다 굶어 죽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가?"
로만이 나를 보면서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 해적들이 죽은 것 말씀이십니까? 썩 좋지는 않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안색을 약간 어둡게 했다. 그리고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나는 로만을 바라봤다.
"하지만, 저는 이제 아이리의 항해사니까. 해적들과 싸우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 물음에 내가 예? 어차피 저는 아이리의 항해사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라고 하면 의심을 받게 된다. 내가 무슨 12등급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며칠 전까지 함께 하던 동료들이 눈 앞에서 얼어붙어 죽었는데 거기에서 '난 이제 저것들이랑 같은 소속이 아니니까 알 바 아닙니다.' 같은 말을 하면 의심을 더 사거나, 아니면 굉장히 위험한 멘탈을 가진 남자로 비추어지겠지.
오히려 여기에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좋다.
나의 말에 로만이 납득하고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소속이다. 잊지 말도록."
나는 약간 쳐진 목소리로 고민하다가 말했다.
"...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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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머리를 긁었다.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출발을 한 건 확실할 텐데. 어째서 보내놓은 녀석들이 돌아오지를 않는거냐. 한 4~5일 정도는 그녀도 이해를 한다.
"... 수상하기 짝이 없어."
아직 할 게 조금 남아있는데. 어떻게 한담. 녀석들이 뭔가 눈치를 챈 건가.
"이 새끼, 멀쩡하기는 한 거야? 어디 묶여서 채찍 맞으면서 울고 있는거 아니야?"
마리아는 레이먼드를 떠올리면서 눈 앞에 올려놓은 커틀러스를 노려보았다. 너무 빨리 빼놓으면 안되고, 너무 늦게 빼두어도 안된다. 빼놓은 함선들의 선원들도 밥을 먹을 것이고, 애초에 그 안에 포탄과 화약을 잔뜩 실을 예정이기에 식량은 최소한으로 적재해야 한다. 길어야 배 위에서 그 함선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2~3일 정도.
타이밍이 생명인데, 녀석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고가 들어오지 않으면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아, 이 짓거리 끝나고 나면 아주 그냥 바다 위에서 해적질이나 실컷 하고, 럼주나 퍼마실거야."
이게 뭐야, 해군도 아니고 내가 왜 여기에서 이렇게 서류들이나 붙잡고 고민하고 있어야 하는데. 성미에 안많게. 마리아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이마에 손을 턱 올리고 등받이에 몸의 무게를 실었다.
그때, 보고가 하나 들어왔다.
여기 저기 잔뜩 동상을 입어서 퍼렇게 썩어가는 팔고 다리를 한 채로 다른 자들의 부축을 받아서 돌아온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 얼음땡이 배 위에서... 항해사 레이먼드와 로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서로에게 적의가 전혀 없어보였습니다. 아니, 두 사람 사이가 굉장히 가까워보였습니다."
마리아가 그를 바라보면서 눈쌀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가 바로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선장님의 항해사가 배신을 한 것으로 밖에..."
마리아가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하하하핫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리 없잖아, 병신아."
말하고 있는 마리아의 눈은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레이먼드는 원래 탐험선에서 항해사를 하던 녀석이고 함께 해적일을 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이리 공화국에서 그를 회유하고 해적 신분을 벗겨준다고 했으면.
그가 그 유혹을 참아낼 수 있을까?
마리아가 휘휘 머리를 젓고는 그를 바라봤다. 그건 그거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이니까.
"어디 쯤에서 발견했냐? 그 배는."
선원이 퍼렇게 질린 입술로 말했다.
"여기에서 3일도 떨어져있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뒤로 빠지기로 했던 배들 뺄 준비하고, 내일 아침에 바로 항구 나서. 너는 가서 치료 받도록 하고."
마리아는 말을 마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혼자 계속해서 멍하니 앉아서 책상을 바라보는데, 눈에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와 씨발, 내가 미쳤나봐. 같은 배에 있던 새끼를 못 믿는거냐?!"
그럴리 없어.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는 없을거야. 그러지는 않겠지...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함께 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 농도는 분명히 진했다. 함께 한 고난들, 함께 보낸 시간들, 함께 살을 섞은 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먼드가 나를 배신했다면.
그러면 어떡하지....?
마리아는 후우우우 하고 깊게 숨을 내쉰 다음 파이프를 꺼내서 담배를 넣고 불을 붙였다. 연초를 태우던 마리아가 스스로의 머리위에 양 손을 올려놓고 아아악 하는 비명소리 비슷한 걸 지르고 중얼거렸다.
"... 오늘 잠은 다 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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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로제 이야기를 써야겠네요.
이야기가 너무 늘어진 건 아닐까 걱정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