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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모르는 사이에 만나다
다음날 낮이 되었다. 나는 떠있는 배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을 보았다. 구슬을 올리는 건 별 문제 없었던 모양이다. 돛단배가 모든 선원이 나르자, 잠시 뒤에 배 근처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해적들의 고개가 일시에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배의 옆에 얼굴을 드러낸 엘론델.
- 고마워요.
목소리가 언제 들어도 기막히게 아름답단 말이지. 벌써 눈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선원들과, 그 모습을 보면서도 별 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이 이쪽을 보며 생글거리고 있는 엘론델.
- 약속한 것을 드릴게요.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옆에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함 하나가 떠올랐다.
- 정확하게 400개에요. 도와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이야기를 끝내고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엘론델과 거기에 맞추어서 단체로 고개를 숙이는 선원들. 왕이 행차를 해도 해적들이 이렇게까지 공손해 질 수 있을까 싶다. 그럼, 이라는 말과 함께 손을 몇 번 흔들고 다시 바다로 사라지는 엘론델과, 배 옆에 둥실둥실 떠 있는 검은 함.
끌어올려서 열어보자, 그 안에는 뽀얀 진주가 정확하게 400개 들어있었다. 나는 그 함을 든 채로 선장실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에는 약간 멍한 모습으로 밖을 보고 있던 마리아가 보였다.
"어, 그래."
그러면서 시선을 살짝 돌리는 마리아. 나는 함을 턱 하고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400개 확인했습니다."
마리아가 두고가. 라고 말했지만 나는 함을 턱 하고 내려놓고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고개는 돌리고 있지만 내가 오고 있는 걸 알고 있는 눈치다. 나는 말했다.
"선장, 보기보다 부끄럼이 많으시네요."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고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닫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마리아.
그럴 일이 있었지.
그 등 긁어달라는 사건 말고.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저 손으로 식사를 할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 내가 떠서 먹여줬고. 손을 쓰질 못하니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도 내가 닦아주고. 물론, 그 전에 전신을 한 번 로제가 닦아주기는 했지만 말이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꾀죄죄한 얼굴을 내가 닦아낸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제법 귀여웠습니다."
그 말에 마리아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꺼져."
그 말에 나는 피식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눈곱이 생각보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부르르 떠는 마리아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나에게로 던져지는 베게를 잡아서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고 나는 인사를 했다.
"그럼, 일단 어디로 모실까요."
그 말에, 마리아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싱긋 웃었다.
"좋아, 녹슨 면도날로 자랑하러가자."
그래, 그 러셀의 배다. 자랑하는게 당연하지. 우리가 씨발 이거 얻느라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소용돌이 뚫고, 머맨이랑 싸워서 얻은거다. 소용돌이는 내가 뚫었고, 머맨은 마리아가 조졌지. 선장과 항해사의 환상적인 콜라보가 없었으면 망했을 거라고!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장."
그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사람 없을때는 마리아라고 불러 그냥."
그 말에 나는 그녀를 슥 돌아보고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마리아."
그 말에 오히려 마리아가 당황한다. 뭐, 적응이 빨라서 놀랐냐? 니가 시킨거니까 낙장불입이다. 나는 히죽 웃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선원들의 눈이 일제히 나에게로 향했다. 선장이 없으면 항해사가 지휘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이 나를 향하는 거겠지. 나는 그들을 보면서 말했다.
"녹슨 면도날로 간다."
예에에에에이!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일제히 껄껄거리고 그 사이에서 로제는 나를 보며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녀석들 고향 같은 곳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조타륜으로 다가가서 꽂혀있는 러셀의 검을 꽂아넣고 돌렸다. 깊게 한숨을 쉬고 나는 바다를 바라봤다.
시발 이제 집에 좀 가자. 배의 속도가 쫙 올라가고, 바다의 날개가 해양을 달리기 시작한다.
천천히 조타륜을 조작하면서 달리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수평선 너머로 아른아른 지기 시작할 때에. 나는 외쳤다.
"멈춰봐...!"
러셀의 검을 0노트로 돌리고, 물대포들이 각도를 최대한 앞으로 돌린채로 물을 뿜어낸다. 앞으로 확 쏠리는 느낌과 함께 바다의 날개가 멈추고. 나는 눈 앞에 거대한 벽처럼 넘실거리는 짙은 안개를 바라봤다.
"이거랑 비교하면 카민 루주힐의 안개는 속이 다 비치는 네글리제였군."
만지면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이 짙은 안개가. 뭉실뭉실거리다가, 빠르게 이쪽으로 밀려오기 시작햇다. 보통 배들은 순식간에 따라잡힐 정도로 빠르게 밀려오는 안개! 다분히 적의가 느껴지는 안개의 움직임인데! 더 이상 유령선과 얽히는건 네이버다!
"배 돌려라아아아아!"
나의 말에 배가 확 뒤로 돌고. 나는 그대로 러셀의 검을 40노트로 돌리고 외쳤다.
"가속해!"
뒤로 뻗어지는 물대포들과 함께 확 튀어나가는 바다의 날개. 안개는 우리의 배를 따라잡지 못했다.
도대체 저건 또 뭐야?! 뭉글거리는 안개 한 덩어리가 툭, 하고 그 거대한 안개뭉치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이쪽을 향해서 다가오지만, 쫒아오지 못한다.
부득이하지만, 일단 항로를 변경해야겠어. 나는 이 주변의 해도를 떠올리면서 조타륜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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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서로 해칠 수가 없는 건가."
안개의 미아. 농밀한 안개에 감싸인 채로 돌아다니는 배 위에서,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곤란하군."
저 배는 디스가이드의 손아귀를 피한다. 안개가 움직이는 속도가 따라가지를 못한다. 설사 안개로 붙잡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녀석이 최고 속도로 항해를 시작하면 안개가 녀석을 쫒아갈 수가 없다.
그러면, 저 러셀의 배에게 남자의 배는 지는 건가.
그렇지도 않다. 저 배로는 미스가이드를 볼 수 조차 없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배를 상대로 어떻게 싸움을 하겠나. 두 배는 싸우게 된다면 누구도 이기지 못하고, 누구도 지지 않는다. 미스가이드는 자체적인 공격력은 보통의 배들과 똑같지만, 그녀는 스스로 포를 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그녀를 조종하는 선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방식은, 조금 더 고풍스럽고, 스스로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방식이다.
마침, 안개 주변으로 다가온 전투함 한 척을 느낀 남자가 지휘봉을 꺼내들어서 살살 흔들었다.
뭉클, 안개 한 덩어리가 미스가이드에서 떨어져나오더니 그 배를 휘감고 돌기 시작했다.
저 배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이 목숨이 다할때 까지, 저 짙은 안개는 저 배를 감싸고 사라지지 않을것이다. 저 안개 안에 갇혀서, 어디로 배가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암초에 부딪치던가, 폭풍을 만나던가, 물과 식량을 다 쓰던가 해서 죽겠지. 그러고 나면 저 안개는 다시 미스가이드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안개에게 돌아올 것이다.
레이먼드와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다른 더 쉽의 하나를 만난 줄도 모른채로, 목적지를 향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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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롯 왕국과, 아이리 공화국은 사이가 좋지 않다. 외교적으로 으르렁거리는 사이기도 하지만. 바다에서는 실제로 해전도 자주 일어났었던 사이다. 바리스가 검은 어금니를 타게 된 이후로 아이리 공화국은 바다 위에서 제법 조신하게 굴었지만.
요즘 들어서 상당히 깝죽거리기 시작한다.
"위아래도 없는 것들(공화정)이 벌써 재교육이 필요할 줄은 몰랐는데. 뭘 믿자고 배 덜렁 한 척 가져온 거지."
바리스 제독은 자신의 기함 위에 탄 채로 전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 해전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는 아득히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스 제독은 그 장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검은 어금니의 어마어마하게 긴 사정거리를 사용할 수가 없겠지. 검은 어금니의 조타륜 옆에 있는 구슬에 손을 올리면, 검은 어금니의 사거리가 닿는 범위 내의 모든 물체들이 느껴진다. 시각이나, 청각과는 다른 느낌. 그냥 느낄 수 있다.
심심할 때에는 그냥 직접 눈으로 관찰해서 쏘지만. 육안으로 관측이 불가능한 거리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검은 어금니의 진정한 운용 방식이다.
지금도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군의 함대들과, 아이리 공화국의 어떤 배 한 척이 싸우고 있는 것을.
그 느껴지는 공간 위에, 원이 하나 생기고, 그 원이 바리스의 손놀림에 따라서 천천히 움직여 어떤 배 위에 멈춘다.
"발사."
그 말과 동시에 발사되는 거대한 검은 작살. 볼 것도 없다. 3초 이상 그 원이 한 물체 위에 올려져 있게 되면, 설사 녀석이 깨닫고 회피를 한다고 해도 허공에서 경로를 바꾸어 목표 위로 떨어진다. 상대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서, 저 검은 작살이 쫒아가지 못할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최고 속도로 항해하고 있는 클리퍼도 피하지 못하는게 이 작살이다. 이 바다 위에서 이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배는 없다.
작살이 목표물을 꿰뚫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다. 바리스가 손을 구슬에 올려놓은 채로 중얼거렸다.
"회수."
약한 빛무리가 잠깐 일어나더니, 다시 검은 어금니의 발사구에는 그 거대한 검은 작살이 장전되어 있었다. 바리스가 그걸 보면서 하품을 한 번 하고 구슬에 손을 올려놓는다. 구슬에 느껴지는 물체를 보고 살짝 고개를 갸웃한다.
"... 멀쩡하다고? 의외인데."
느긋한 목소리지만 상당히 짜증난 듯한 목소리.
바리스가 작살이 꿰뚫었는데도 멀쩡한 배 때문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아이리 공화국의 해군 장교인 로만은 황당해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가 타고 있는 배는, 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져서 태양 빛을 반짝반짝 반사하고 있었다. 싸늘한 앤. 더 쉽의 하나, 전설의 배! 바다를 얼린다는 전설의 배는 방금 전에 어디서 날아온 지도 알 수 없는 뭔가에 피격당했다.
"...방금 전에 그건?"
자신의 오른팔을 싸늘한 앤을 위해 내주고. 은색의 갈고리로 그 손을 대체한 로만은 자신의 배 중앙을 꿰뚫고 지나간 그 미상물체 때문에 황당해하고 있었다. 갈고리를 이용해서 코를 가볍게 비빈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물론, 전혀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야...
이 배는 얼음으로 되어있으니까. 로만은 자신의 배를 향해서 발사되는 포들에 배의 옆구리가 박살나는 것을 보면서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싸늘한 앤은 침몰시킬 수가 없다.
주변의 바다가 얼어붙더니, 그대로 허공에 떠서 박살난 부위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다시 새것처럼 멀쩡해진 싸늘한 앤.
이래서 바리스의 공격이 아무 피해가 없었던 거다. 분명히 배를 꿰뚫고 갔지만. 싸늘한 앤은 순식간에 주변의 바다를 얼리고, 그 얼음으로 선체를 수복한다. 구멍난 선체 바닥은 수리되는데 2초도 걸리지 않았다. 며칠에 이어지는 전투를 하더라도, 늘 새로 건조한 배 처럼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는 싸늘한 앤.
주변에서 쿵쾅거리는 소리 속에서 로만이 짜증을 낸다.
"아 거 더럽게 시끄럽네."
다시, 선체의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배가 다시 수복된다. 로만은 깨달았다. 카멜롯 제국에는 싸늘한 앤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전설의 배가 한 척 있지. 바리스 제독이 타고 다니는 검은 어금니.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공격하는 배.
그 녀석이 쏘아내는 그 거대 작살이었던 모양이다. 로만이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고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얼마나 있었을까. 아무리 주변을 돌아봐도. 특이하게 생긴 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 아! 어디서 날아오는 거냐고!"
로만이 짜증을 부리다가 주변을 슥 훑어보고 말한다. 여전히 이쪽을 향해서 격렬하게 포격중인 함선들.
"일단 이 잡것들 부터 처리하자, 앤."
로만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잠깐 감고. 싸늘한 앤의 투명한 선체 위로 새하얀 서리가 갑옷처럼 덮힌다.
그리고, 로만이 왼 손을 들어서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하자, 겨누고 있던 배 아래의 바다가 꽝꽝 얼어버리고. 그 배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10척의 배를 그대로 바다에 고정시켜버린 다음, 앤의 화포들이 불을 뿜고. 얼음과 함께 박살나서 바다 아래로 쳐박히는 카멜롯 왕국의 함선들.
그 와중에 벌써, 앤은 다섯번이나 검은 어금니의 작살에 쳐맞고 몸을 수복했다.
"어디에서 쏘는거냐고오오오!"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주변의 배가 다 침몰한 것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배가 다 부서지자 더 이상 그 정체 불명의 공격은 싸늘한 앤을 향해서 날아오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전설의 배들인데. 하나만 짱짱 쎄면 이상하잖아요.
방금은 서로 침몰시킬수 없는 상황을 보셨습니다.
전설의 배들끼리도 상성이 있다는 거죠.
.... 이걸 후기에서 다시 말로 설명해야 하는 나의 비참한 표현력ㅠㅜ
자정에 다시 잠깐 얼굴을 비출 거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