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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다니는 전설들
두꺼운, 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손으로 잡아서 뜯어낼 수 있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깔려있는 바다 위에, 회색의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세 개의 커다란 마스트와, 뱃머리 부분에 달려있는 커다란 해골 모양의 선수상. 그 아래로 길쭉하게 뻗어 있는 두꺼운 충각(들이 받을 때 쓰는 돌출부).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으면서 스물스물 안개 속에서 안개처럼 움직이는 배 한 척.
그 위에는, 검은 코트를 입고 회중 시계를 들고, 오른쪽 어깨에는 앵무새를 올린 채로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다른 남자가 입을 연다.
"선장님, 무슨 일이 있으신지.."
그 말에, 남자는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던 매에게 날고기를 한 덩이 건네주면서 말했다.
"러셀의 함이 열렸다. 느낄 수 있어. 그래... 그 녀석도 주인을 찾을 때가 되었지."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다 탁, 하고 시계를 닫은 남자는 뒤를 돌아서 말했다.
"오른쪽으로 세 개."
그 말에, 조타수가 오른쪽으로 세 개! 라고 복창하면서 조타륜을 조정했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배와, 그것을 따라가듯이 함께 움직이는 안개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매의 다리에 편지를 메달고, 가볍게 부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언가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하늘로 날아가는 매.
짙은 안개 때문에, 어깨에서 떠나는 순간부터 그 매는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의 난간을 살살 쓰다듬었다.
"바다로 가자. 우리의 적을 길 잃게 하자. 미스가이드."
배가 이동하면서 안개는 함께 일렁거리며 이동했다.
미스가이드, 잘못 인도하는 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 배가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이 이동하고. 안개가 사라진 자리에는...
여섯 척의 배가, 자신을 움직여 주던 모든 선원들을 잃고 표류선이 되어버린채 바다를 떠돌고 있었다.
50cm 만 떨어져 있어도 물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벽 같이 촘촘한 안개 속에서, 이렇게 거대한 배가 전혀 꺼리낌 없이 이동할 수 있는 이유를 알고 있는 자들을 아무도 없다. 여기에 있는, 앞으로도 죽을 때 까지 이 안개의 미아 위에서 함께하게될 선원들을 제외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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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숨결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냉기의 공간. 너무 급하게 심호흡을 하면 그대로 폐가 얼어서 죽어버린다고 전해지는 극지. 소리조차 얼어붙었는지, 소름끼치는 적막만이 가득한 이 얼음의 벌판 위로, 다섯명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호흡을 하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로만, 이대로 가다가는 다 얼어 죽겠어!"
뒤 편에 있는 여자의 말에, 맨 앞에 서서 다른 이들을 묶고 있는 끈을 잡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거의... 거의 다 왔으니까!"
그 말을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온통 두꺼운 털가죽으로 뒤덮혀 있었고, 입김이 나오고 있는 곳에는 새하얗게 얼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다. 제대로 걸어다닐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껍게 껴입은 그들의 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수에 살얼음이 끼는 것 같은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2시간 동안 다섯 사람이 걸어나간 거리는 고작 400m.
발 끝에서 타고 올라오는 핏줄을 얼리는 냉기, 두터운 옷의 아주 작은 틈을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와 온 몸으로 독같이 퍼지는 칼바람. 그 모든 것을 견뎌내면서 그들은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마침내, 그들은 그 거대한 얼음벌판 위에 한 곳에 멈추었고, 로만이라고 불린 남자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이고 그 통짜 얼음 벌판 위에 쌓인 눈을 살살살 쓸어내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맑은 얼음 위에 찍혀있는 손바닥 모양.
"... 찾았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둘러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싸늘하게 굳어있는 시체의 손을 꺼내어 그 얼음 위에 가져갔다. 얼음이 작게 반짝, 하고 빛나고.
끄드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얼음들이 한 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귀신들이 이를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뼈가 서로 부딪치는 것 같기도 한 그 소름끼치는 소리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얼음은 서로 합쳐지고, 압축되고, 다시 더 합쳐지고를 반복하며 거대한 배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빙산을 깎아 배의 몸을 만들고, 서리로 날실을 짜고 북풍으로 씨실을 짜서 돛을 만들어 내었으며, 수정처럼 맑은 얼음으로 마스트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더 쉽'
싸늘한 앤.
그 거대한 배를 확인한 그는 얼어붙기 직전까지 식어버린 자신의 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그는 다시 아까 시체의 손을 올렸던 그 손 모양의 얼음에, 자신의 손을 보호해주던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고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이내, 그는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손은 삽시간에 얼어붙어 보랏빛으로 괴사해버리고, 그 위에 서리가 새하얗게 달라붙는다.
그리고, 한 동안 그 자세로 엎드려 있던 남자는 자신의 손을 천천히 그 얼음에서 때어내려고 했다.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손은 여전히 그 판 위에 붙어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오른손을 잃었다. 뜯겨져 나간 절단부는, 피조차 얼어붙었는지 한 방울의 붉은 혈흔도 흘리지 않았다.
오른손을 잃은 대신, 오늘부로 로만은 세상 모든 얼음과 빙하를 몰고다니는 바다의 재앙. 싸늘한 앤을 자신의 오른손 삼아 곁에 둘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바리스 제독님!"
오른쪽 눈을 가릴 정도까지 길게 내린 탁한 갈색의 머리카락. 짧게 다듬은 수염과 서늘한 검은 눈동자. 카멜롯 왕국의 수호신. 해적들의 재앙.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자, 임페일러. 제독 바리스를 부르는 이름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수많은 별명들의 몇십배에 달할 정도로 많다.
검은 어금니의 주인. 타오르는 피 같은 붉은 셔츠를 가슴 언저리까지 풀어놓고 머리에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있는 카멜롯의 제독 바리스가 자신에게 다가온 병사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제군."
그 말에 병사가 급한 숨을 확 몰아쉬고 그대로 차렷 자세로 바리스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편지가 와 있습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바리스 제독이 그 작은 편지를 꺼내서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고. 이내 쓰게 웃었다.
"해적놈 따위가 끌고 다니던 배 따위, 다시 주인이 생겨도 검은 어금니에게 대항할 수는 없다."
마스트의 꼭대기에서 바리스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전방에! 해적함 발견했습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바리스는 조타륜 옆에 있는 은색의 수정 위에 손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사."
배의 하부가 순간적으로 바다 아래로 쑥 가라앉으면서, 배의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던 거대한 검은 작대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지도 않고 바리스는 항해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집에 간다."
천천히 검은 어금니의 뱃머리가 돌아가는 동안, 마스트 꼭대기에서 관측하고 있었던 해적선의 머리 위로는 거대한 검은 작대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어째서 배가 침몰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겠지.
그들은, 자신들이 방금 전 검은 어금니와 싸웠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결국! 이 깊은 밤! 저는 해냈습니다!
4번째 글이 올라왔습니다ㅠㅜ
한 척의 배와 주인공 일행이 찾고 있는 배 이외에는 다 소개가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