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 / 0160 ----------------------------------------------
녹슨 면도날
아코디언이 뽭뽜밥 하는 소리를 내고, 피리가 휘릴리 거리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장소.
"여기 술집인데요!?"
나의 말에 마리아가 허,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원래 밥 먹으면서 술 먹고, 술 먹으면서 밥 먹고 하는거지."
아니, 지금 대낮인데 이 사람들은 왜 여기 앉아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거야? 그런 사람이 한 두명도 아니고 너무 많잖아.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잇는 거냐 당신들은?
저기에서는 술병이 깨지는 소리. 저기에서는 여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킬킬거리는 소리.
이 상황에서 밥이 참 잘도 넘어가겠다. 마리아가 주변을 슥 훑어보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역시 고향에 온 기분이야."
고향이 테러리스트들 근거지 같은 장소냐? 이런 삭막한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가는 해적같은거 되기 십...
해적이구나. 이 여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냐. 그래도 술집 안에는 제법 여러가지로 먹을 만한 것들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주인장의 앞에 담긴 커다란 솥은 가끔 열릴 때 마다 뜨거운 김을 훌훌 내뱉는, 조개와 감자로 맛을 낸 수프가 끓고 있었고, 그 옆에는 제법 그럴듯하게 끼워서 빙글빙글 돌며 기름기를 살살 흘리며 이따끔 지지직하는 소리를 내는 꼬치구이가 있다. 옆의 바구니에는 큼지막한 빵덩이들이 턱하니 놓여 있고, 가끔 오븐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고깃점들과 탁탁탁하는 소리와 함께 다듬어지는 신선해 보이는 야채까지.
그래, 맛은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수프랑 빵, 레귤러 사이즈로."
그 말에 순식간에 커다란 접시에 수프가 담기고 커다란 빵 두어개가 턱 하고 놓여서 마리아 앞으로 내밀어진다. 레귤러 사이즈라고? 씨름 선수가 쳐먹어도 배부를 만한 양이잖아. 레귤러 같은 소리하네. 이레귤러 사이즈다 이건.
하지만 그런 점이 좋아!
"이쪽도 같은 걸로."
그 말에 내 앞에 놓이는 수프와 빵. 수프 자체도 슬쩍 떠 보면 국물보다 감자와 조개 양이 더 많을 정도로 건더기가 넘치고, 빵도 제법 잘 구워져서 겉은 바삭거리고 속은 부드럽다. 게다가 방금 구웠는지 살짝 쪼개니 안에서 더운 김이 무럭무럭 올라온다.
"여긴 다 맛있는데, 맥주가 별로야."
그 말에, 이쪽으로 다가오던 여자가 말한다.
"개소리하지마! 우리 맥주는 녹슨 면도날에서 제일가는 맥주다!"
그 말에 마리아가 픽 웃으면서 대답한다.
"니네 맥주는 녹슨 면도날에서 제일가는 말 오줌이야, 리사."
그 말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자를 슥 바라봤다. 어두운 갈색 머리카락에, 왼쪽 눈 아래에 점 하나. 마리아와는 다르게 별로 해를 쬐고 사는 타입은 아닌지 우유처럼 뿌연 피부. 나름 위생을 신경쓰는 모양인지 머리에 녹색의 두건을 쓰고 있는 여자가 이쪽으로 씩씩거리며 다가온다.
다가올때마다 뭐가 출렁출렁 거리는데. 말 그대로 인체공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정도로 큰 가슴을 가진 리사라는 여자는 씩씩거리면서 이쪽 앞으로 두 잔의 맥주를 턱 하고 내려놓는데. 그 행동으로 발생한 충격에 다시 그 거대한 흉기가 출렁인다. 그걸 보던 마리아가 비웃듯이 그녀를 보며 말한다.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메뉴에 한 번 추가시켜보라니까? 리사의 우유. 뒤에 검은 하트 하나까지 붙이면 불티나게 팔릴걸."
그 말에 내가 대답했다.
"저기, 조금 거북한 대화 주제입니다."
그 말에 리사가 이쪽을 슥 보고 웃는다.
"맙소사, 이 멧돼지 같은 남자들만 드글거리는 녹슨 면도날 섬에 왠 일로 이런 훌륭한 남자가?"
비실한 녀석에서 훌륭한 남자로 평가가 상승한 나는 약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마리아 선장의 배에서 항해사를 하고 있는 레이먼드입니다."
그 말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마리아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봐. 보신용 도시락?"
낙차가 큰데. 비실한 녀석에서 훌륭한 남자로 올라갔다가 다시 도시락 수준으로 떨어지자 생각보다 더 충격이 크다. 마리아가 키들거리면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짜 안주만 별로였어도 여기는 쳐다보지도 않는데."
그 말에 리사가 다시 발끈하며 말한다.
"아, 맛있다고 이 나쁜 년아. 거기 당신, 한 번 마셔봐."
그 말에 나는 천천히 나무 잔에 담겨 있는 맥주를 마셔본다.
"... 맛 괜찮은데?"
그 중얼거림에 리사가 흐흠, 하는 소리를 내면서 양 팔을 허리에 척 올리고 마리아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거 혓바닥 참 별로인 친구네 이거."
그 말에 내가 재빠르게 응수한다.
"보신용 도시락이 무슨 맛을 알겠습니까?"
그 말에 리사가 킥킥거리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이구, 삐졌어?"
그 말에 내가 다시 응수한다.
"까짓거, 우유 한 잔 주면 깔끔하게 화를 풀지요."
어디서 애 취급이야. 이 가슴괴물아. 내 말을 듣고 급격하게 무너지는 리사의 얼굴과 유쾌하게 웃어재끼는 마리아.
"제대로 들어갔는데."
그러는 와중에, 저 쪽에서 들리던 병 깨지는 소리가 조용해지고, 스르릉 하는 칼 뽑는 소리가 들려온다. 와, 칼싸움이다.
"개판이구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수프에 빵을 적셔서 입 안으로 집어넣는다. 여기 분위기가 이 모양 이꼴이라고 한다면 내가 적응해야지. 별 수 있나. 그리고, 그걸 바라보던 리사가 입맛을 다시다가 그쪽으로 다가간다. 마리아는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맥주를 마시고 푸근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괸다.
"고향의 분위기."
그러니까. 고향이 어디냐고. 저쪽의 테이블이 밀리기 시작하며 공터가 하나 생기고. 리사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말한다.
"자아, 준비하시고.... 총 금지, 낭심 공격 금지. 손님들 테이블에 피해 끼치는거 금지. 시작."
올레에에에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 사람들이 고함을 치고, 그 사이로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 마리아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수프와 맥주를 비우고 리사가 서 있던 곳에 다가가 꼬치 두 개를 가져온다.
"밥이 넘어가십니까?"
그 말에 마리아가 대답한다.
"그냥 스포츠라고 생각해."
스포츠 같은 소리하네. 저기 피 튀잖아. 분위기가 아니라 진짜로 피가 튄다고. 사람 비명소리도 들리고. 우우우 하는 야유 소리에 섞여서 신음소리도 들린다. 내가 지금 콜로세움에서 공짜로 던져주는 빵쪼가리 쳐먹는 것도 아니고. 교양있는 문화시민인데. 이런 분위기 안에서 꿀떡꿀떡 쇠꼬챙이에 꽂혀있는 고기를 뜯어먹는 너님을 바라보면 약간 싸이코 같단 말이지.
북적이던 그 장소가 이내 조용해지고. 리사가 말한다.
"이거 누구네 뱃사람이야? 시체 치워!"
죽었어?! 여기 사람들 신경 너무 굵은데?! 배 지을때 용골로 박아넣어도 괜찮을 정도잖아. 아 씨바, 귀찮게 라고 궁시렁거리면서 두어명의 사람이 나와서 가슴에 구멍이 뚫린 남자의 시체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 경로를 따라서 그려지는 붉은 핏빛의 궤적.
진짜 리얼 개판이다.
그리고 리사가 꿍얼거리면서 대걸레를 들고와서 무슨 토마토 주스 흘린 것 마냥 슥슥 문질러서 바닥의 핏자국들을 지운다.
마리아가 꼬치를 먹는 동안 나도 부지런히 식사를 마저 처리하기 시작한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이쪽 테이블로 다가온 리사가 입을 연다.
"그래서, 이 남자 실력은 어때?"
그 말에 마리아가 대답한다.
"잘 다루던데. 제법 베테랑이었어. 항해에 있어서는..."
그 말에 남자 한 명이 턱 하고 이쪽 테이블에 앉는다.
"항해사? 이런 꼬맹이가?"
라고 말하면서 파이프를 빨고 내 쪽을 향해서 연기를 후우 뿜어낸다. 이 새끼가. 흡연의 매너도 모르나. 팔뚝에 올록볼록한 근육이 잔뜩 달라붙고, 오른 팔에서 발견한 문신만 다섯 개에 달할 정도로 온 몸에 문신을 쳐바른 남자가 나를 보며 히죽 웃는다. 그리고 드러나는 누런 금니들.
"안녕 꼬맹이."
새끼가 내가 몇 살인줄 알고 반말이야. 내가 이래뵈도 이전에 살아온 것 까지 합치면 마흔은 넘는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안녕, 늙은이."
그 말에 픽 웃은 남자가 마리아를 보면서 말한다.
"전에 있던 그 허접한 녀석은 어디에 버려두고, 이런 비실한 친구를 항해사로 삼은 거야?"
그 말에 마리아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네가 알 바는 아니지."
그 말에 그가 은근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알 바가 아니라니. 내 사랑이 타고 있는 배를 이런 허접한 녀석에게 맡겨서야."
그 말에 마리아가 지랄하네, 라는 말과 함께 재수없다는 듯이 다 먹어치운 꼬챙이를 접시 위에 툭 던지고 말한다.
"성욕이 고프면 니 배에 타고 있는 살집 두둑한 남자놈 엉덩이나 쑤셔. 괜히 기어와서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오, 강한데. 남자는 딱히 그 말에 응수를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본다.
"그래, '항해사'씨. 실력은 괜찮은 편인가?"
그 말에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까먹은 듯이 아참, 하는 말과 함께 그를 바라본다.
"그래서, 뭐하는 사람이라고?"
그 말에 그가 대답한다.
"구스토, 현재 벨루가 해적단의 항해사지."
아, 같은 물질하는 녀석이었나. 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글쎄, 이 바닥에서 항해사라고 칭하는 놈들 중에 진짜 물질 할 줄 아는 놈은 본 기억이 없어서."
애초에 무슨 자격증 같은게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개나 소나 항해사라고 자기를 칭하는 놈들이 너무 많다.
"근방 지리는 아나?"
그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대답했다.
"모르는데."
그 말에 구스토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항해를 한다고."
오 주님. 이 친구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는겁니까?
"지도는 똥 닦을때 쓰나?"
아니 그걸 왜 외우고 있어. 요즘 지도 잘 나와서 다니는데 문제도 없구만.
뭐 잘 된건가.
안 그래도 이 바닥 자칭 항해사들에게 나는 불만이 조금 있거든. 이번 기회에 그거나 한 번 풀어볼까. 나는 소매에서 파이프를 꺼내 담배를 눌러넣고 불을 붙인 다음 그의 얼굴에 후욱 뿜었다.
"니 지도는 볼 줄 아냐?"
그 말에 그가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내 머릿 속에 이 근방 해역은 다 들어있지. 지도 따위 필요없어."
그 말에 나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세요, 이 바닥 새끼들 중에서 진짜 항해사는 한 마리도 없다니까요. 들었어요? 지도가 필요 없답니다."
나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고 말했다.
"태양이랑 시계로 경도 측정할 줄은 아냐? 육분의는 볼 줄 알고? 불어오는 바람과 해수 온도, 별자리가 떠오르는 시간과 위치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냐?"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나는 그를 보며 말한다.
"병신 같은 것들이 그냥 배 띄우고 바람 불면 부는데로 떠다니면 그게 항해인줄 알지. 그건 말이야, 뱃놀이라고 하는거다. 어디가서 항해한다고 말하지 마라."
그 말에 남자의 이마에 십자로가 뚫린다. 그리고 그가 말한다.
"폭풍은 겪어봤나? 이론만 빠삭한 새끼들이 갑자기 폭풍을 만나게 되면 얼탱이를 놔버리곤 하지."
아, 경험으로 한 번 눌러보시겠다? 귀엽네. 나는 다시 마리아를 보고 대답한다.
"사실, 제일 무능한 항해사는 폭풍 안에서 항해하는 녀석들입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서 뚫고 나갔지만. 사실 피하는게 순풍이죠."
그리고 나는 다시 구스토인지 구토인지 하는 놈을 보고 말했다.
"폭풍은 병신아, 오기 전에 피하는거야. 오는 지도 모르고 있다가 폭풍을 만나는 녀석은 이미 항해사 자격도 없지."
그리고 나는 그를 보며 비웃었다.
"갑.자.기 폭풍을 만나? 항해사가? 집어 치우자. 뭐 말이 통해야 대화를 나누지."
나는 맥주잔을 탁 소리나게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했다.
"배 위에 오래 있었다고 다 경험이 되는게 아니다. 가치 있는 경험을 해야 그게 경험이지. 뭣 하면 조금 가르쳐줄까?"
옆에서 리사가 듣고 있다가 땡땡,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쪽에 손가락 두 개를 올리고 구스토 쪽에 주먹을 하나 올렸다. 개쳐발렸다는 거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마리아를 바라본다.
"근데 제가 왜 이런 친구랑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겁니까?"
그 말에 마리아가 머리를 긁는다.
"그게, 저 녀석 자꾸 우리 배로 들어오고 싶어해서 말이지."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가는데. 나는 불쌍하다는 듯이 그를 보면서 말했다.
"임마, 여자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가서 물질을 더 배워. 그 실력으로 무슨... 나이가 아깝다."
그 말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마리아가 턱을 괴고 실실 웃는다.
"뭐, 칼이라도 뽑게? 그럼 선장인 내가 나서야 하는데. 괜찮겠어?"
그 말에, 그가 잠깐 주저하다가 조용히 일어나 욕을 궁시렁거리며 가게를 나간다.
"결국 저 인간 뭐하러 온 겁니까?"
그 말에 마리아가 히죽 웃고는 말한다.
"몰라. 당분간은 찌그러져 있으려나. 저 친구 나름 물질에는 자신이 있어보이던데."
그 말에 내가 몸을 부르르 떨고 말했다.
"다들 저 정도 수준이라고 한다면 제 앞에서는 항해의 ㅎ도 꺼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거렁뱅이 같은 사기꾼들. 그리고 마리아가 대답한다.
"너, 나 없었으면 칼 맞고 죽었어."
그 말에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거야 기정 사실이지. 나는 지금까지 10년을 물질 하면서 암초지대고 무풍지대고 폭풍이고 역병이고 별에 별 물건을 다 겪어봤지만. 싸움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거든.
칼은 무섭다고. 찔리면 피 나오잖아. 아프잖아. 그런거 싫단 말이야.
"곁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선장."
마리아가 술잔을 들고, 나는 그 술잔에 내 잔을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