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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뜻밖의 해적-6화 (6/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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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면도날

흔들리는 배의 항해실에서 눈을 뜬 나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뇌 속에다가 진동안마기 하나를 쳐박아 놓은 것 처럼 눈 앞이 덜덜 흔들리고 머리 속이 깨질 것 같다. 자리에 일어나 앉은 나는 머리를 살살 흔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와, 존나 토할 것 같아. 어제 선장의 모가지를 그은 다음에, 나는 약간 멍해져서 선원들이 건네주는 술을 주는 데로 넙죽넙죽 받아마시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꿈은 꾸지 않았지만.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는 다시 어제 내가 똑똑히 보았던 그 눈이 떠올랐다. 약간 어두운 갈색의 홍채, 확장되는 동공... 허옇게 뒤집어지는 눈.

속이 메슥거리는 이유는 숙취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서일까. 이 빌어쳐먹을 놈의 배가 흔들거리는 바람에 더 속이 미숙거린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해적이다. 저 녀석들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거두고,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는 해적! 씨발, 뭘 생각했던거냐 레이먼드! 바다 돌아다니면서 원x스라도 모으는 소년만화 같은 해적일 줄 알았어? 교육을 만화로 받은건 저 해적들이 아니라 나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제 절대로, 다시는 평범한 항해를 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해일과 폭풍이 가장 무서운 녀석인줄 알고 있던 그 시절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지.

육분의를 챙겨 방 문을 열고 나가자, 날카로운 뙤약볕이 내 머리를 찌르고 들어오며 눈알이 찌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준다.

"여, 눈 떴네."

선장모 밑으로 흘러내리는 금발을 뒤로 넘기며, 타륜 옆 난간에 양 팔을 올리고 씨익 웃고 있는 마리아.

"머리는 좀 괜찮나?"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죽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슥 주변을 본 다음 습관적으로 육분의에 눈을 가져가 위도를 확인하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확인한다.

"오른쪽으로 다섯 작대기 꺾고, 횡범 펼쳐라."

약간 지친 나의 목소리에 해적들이 지들끼리 쪼개면서 내 지시에 따른다. 새끼들 뭐가 웃겨서 실실 웃고 있냐. 그리고, 마리아가 나를 향해서 휙 하고 말린 망고를 던져준다.

"먹어, 의외로 나쁘지 않은데 이거."

말린 망고조각을 씹다가 나는 난간에 기대어서 바닷바람을 쐬었다. 머릿 속이 너무 복잡하다.

"이 배에 탄 걸 후회해?"

이 배에 탄 걸 후회하냐, 라는 질문을 들으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어떻게 후회를 하겠냐. 그럴 수는 없지.

"이 배에 타지 않았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사실이다. 거기에서 하루만 더 있었더라도 나는 말라 비틀어진 미라꼴이 되었겠지.

"사람을 죽인건?"

그 말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말했다.

"존나 후회되는데, 후회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면 세상 천지에 죽은채로 있을 놈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아아아아악! 무슨 내가 종교 창시자들 처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건 잘못이지만. 일단 나도 살아는 있어야 미안해 할 것 아니야. 그때 내가 그 사람의 목을 긋지 않았으면 분명히 마리아가 내 목을 그었을 거라고! 내가 나쁜 새끼인건 나도 안다!

내가 무슨 왼뺨을 맞으면 오른 뺨도 내어줄 정도로 정의감이 넘치는 훌륭한 사람도 아닌데!

"아, 집어치우시죠."

그렇게 말하고 나는 입으로 육포를 하나 던져넣고 씹었다.

항해는 이어지고, 마침내 나의 눈 앞에는 하나의 섬이 보이고 있었다. 크로노미터 양호, 육분의 양호, 나침반 양호. 여기다. 무조건 여기가 그렇게 이 해적들이 가고 싶어 환장을 하던 그 섬이 맞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어, 그래... 녹슨 면도날이네. 저 섬의 모습을 해적이 까먹을 리가 없지."

마리아가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난간에 발을 척 올리고 말했다.

"집이다! 자식들아."

녹슨 면도날. 섬의 이름을 왜 이딴 식으로 지었는지 처음 출발할 떄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는 짐작이 간다. 해적이라는 것들이, 생각보다 겉멋이 엄청 든 병신들이다. 그러니까 쓸 줄도 모르는 항해용구를 자기 방에다가 가져다 놓고, 배 이름도 거창하고 어마어마한 것으로 지어놓고. 소박하게 검은 깃발 하나 척 하고 올리면 될 걸 거기에다가 해골을 그리고 뼉다구를 그리고...

요점은, 이 새끼들 그럴듯한 이름을 좋아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흔해빠진 섬에다가 녹슨 면도날 같은 황폐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달아놓은거지.

이 새끼들은 몸 속에 다들 흑염룡 같은 거 하나 쯤 키우고 있는 것이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고, 마리아가 선원들을 보다가 선장실에 가서 묵직한 주머니 서너개를 가져오고는 선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야, 딱 일주일 준다. 놀다가 일주일 뒤에 배로 와라."

선원들이 올레! 같은 소리를 외치면서 각자 흩어지고. 마리아가 나를 붙들었다.

"너는, 같이 다니지. 어차피 이 섬에는 처음일테니까."

혼자 다니면 호구잡히기 딱 좋다고. 마리아가 어깨를 으쓱 하며 웃고는 나를 데리고 느긋하게 섬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바다와 소녀라..."

써져있는 제목만 보면 제법 고급진 이름이지만. 실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염이 북실거리는 북실이 아저씨들과 아하하하핫! 하면서 마녀웃음을 내는 아주머니들이 가득한 여관이다.

자, 이제 소녀를 보여줘 나쁜 사기꾼들아.

마리아는 익숙한 듯이 척척 주인장에게 걸어가서 테이블을 두어번 탁탁 두들긴다.

"방 두 개, 목욕물 넣어주고. 아, 그리고 혹시 저 녀석 입을 만한 옷도 구해다 주겠어?"

그 말에 주인장이 마리아를 보고 아는 척을 한다.

"이야, 이게 누구야."

덥수룩한 수염과, 튼실한 뱃살을 가지고 있는 주인장이 마리아를 보며 반갑다는 듯이 한 손을 올리고, 마리아가 척 하고 그 손을 잡으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 중년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이 비실한 친구는?"

거 비실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가 이렇게 비실하고 싶어서 비실한 것도 아닌데 초면부터 그렇게 말해주시니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씩 내려가네요.

"새로 들어온 우리 항해사."

아, 이제는 해적 항해사 확정이구나. 나는 그녀의 소개에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레이먼드입니다."

별로 관심없다는 듯이 나를 슥 바라본 다음 다시 시선을 마리아에게로 향한 그가 말한다.

"한 동안 멀리 다닌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래서, 뭐 수익 얻은거라도 있나?"

그 말에 마리아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하고는 엄지로 나를 가리킨다.

"글쎄, 이 녀석 정도? 실력이 괜찮던데."

그래? 겉 보기에는 영 아니올시다인데 말이지. 라는 말과 함께 나를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주인장. 마리아가 약간 잔기침을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 방과 목욕물은 언제 줄 건데?"

그 말에 그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거 보채기는."

그러면서 주인장이 열쇠 두 개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물은, 곧바로 보내줄 테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마리아가 주인에게 돈을 내밀고 나에게 열쇠 하나를 건네주었다.

"일단 씻고 나오라고."

야호, 목욕이다. 배를 타고 있으면 몸을 닦을 일이 없다. 심하면 비가 오는 날에는 샤워다! 하고 외치면서 옷을 훌떡훌떡 벗어 제껴야 할 때도 있으니까. 제대로 소금기 없는 물이 몸에 닿는 경우는 배 위에서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덕분에 겨드랑이고 가랑이고 냄새가 어마어마하다. 방 안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자, 더운 물이 한 가득 담겨 있는 욕조와 새로 갈아입을 만한 옷이 준비되고. 나는 그대로 옷을 벗고 물 속에 몸을 집어넣었다.

"으히히히히힉."

몸을 다 닦고 나왔을 때에, 욕조 안은 심각하게 오염되어있었다. 정말로 저 노폐물이 내 몸에 끼어있었다고 생각하면 여태동안 병에 걸리지 않은게 기적이다. 한 번 몸을 씻고 나니 몸이 훨씬 거뜬해진다. 밖으로 나온 나는 눈을 가볍게 비볐다. 저게 도대체 누구...?

"뭐야, 그 얼빠진 표정은?"

아니, 그냥 예전에도 이런 말을 하기는 한 것 같은데 말이야. 왜 이렇게 사람들이 가끔 나를 놀래키냐. 어색하잖아. 하얀 실크 드레스 셔츠에 검은 가죽바지를 입고 이쪽을 보고 있는 마리아의 얼굴은 멀끔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유를 듬뿍 탄 카페라떼 같은 색깔의 피부와 약간 물기를 잡은 채로 흘러내린 금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야, 선장도 여자구나 싶어서."

웃음기를 섞은채로 개소리하고 있네. 라는 말과 함께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는 반응을 보면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그 살벌한 선장이 맞는데 말이지.

"그럼, 뭐라도 좀 먹자고. 입에서 건빵냄새 날 것 같으니까."

격하게 공감한다! 아무리 양치질을 해도 저 위장 깊은 하부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이 소름끼치는 무언가를 빨리 제거해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뭘 먹을 생각이신지?"

그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아는 거 없잖아. 그럼 따라와."

그리고 앞장 서서 걸어가는 마리아. 난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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