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쿤의 이야기>
공화국 수도, 남부 평원.
황금빛 물결이 몰아치는 수확지 인근에 거대한 건물이 세워지고 있다. 정밀하게 새겨진 조각과 정갈한 색채. 경외감을 불러오는 그림이 그 겉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수확을 위해 농기구를 든 농부들이 그 앞을 스쳐가며 한 번씩 머리를 조아렸다.
기도. 풍족한 수확에 대한 감사의 인사다. 건물은 아직 전부 완성되지 않았지만 농부들은 모두 알고 있다. 저 건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오, 세튼 왔는가. 오늘은 또 뭐하다 이리 늦었나?”
“둘째가 열이 좀 있어서 말이야. 새벽같이 목검 들고 나간다 싶더니, 금세 감기가 걸려왔지 뭔가.”
“클클. 그 나이 대 애들이 다 그렇지. 잘 먹고 푹 쉬면 나을 걸세.”
“오는 길에 신관께 한 번 보이고 왔네. 축복을 내려 주셨으니, 금세 털고 일어나겠지.”
세튼이라 불린 농부가 주름 진 미소를 지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이구 축복이라니. 별거 아닌 일로 괜히 신관님들 괴롭히지 말라고.”
“크흠. 이럴 때 찾아야지 언제 찾겠나. 그리고 신관님들도 분명히 말 했지 않나? 무슨 일이든 필요하다면 찾아 달라고.”
“거 친구, 말을 다 곧이곧대로 들으니 문제라니까.”
툴툴거리며 말꼬리를 잡지만, 세튼의 친구. 밀러도 부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공화국의 대격변 이후. 새롭게 들어선 공왕은 종교의 투명성을 강조했다. 믿음은 믿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 억지로 무언가를 개종시키거나, 강제적 교리의 전파를 억제했다. 강조 한 것은 투명성. 종교가 가진 신뢰는 그 투명한 움직임에서 나온다 주장을 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서준경’교의 사도였지만 타 신의 신도를 박해하지 않았다.
믿음과 숭배는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것. 질시와 배척. 아집은 무의미한 일이라 설득했다. 많은 반발과 고충이 있었지만 지금에는 모든 것이 정착되어 잘 흘러가고 있다. 특히, 깊은 생각 없이 그날그날 믿음을 바꿔가는 농민들의 경우는 신관들과 쉽게 접촉 할 수 있는 지금의 모습을 더욱 좋아했다.
“그나저나 저 건물은 언제 다 올라가려나.”
“제국에서도 인력이 들어오고 있다 하니, 얼마 안 걸리겠지.”
“휴. 어마어마하긴 해. 안 그런가?”
“그렇지. 제국과 공화국. 각기 하나씩 세워둔다고 하니까. 상징성을 위해서라도 그 크기를 키워야했겠지.”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 건물을 보며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 평원이나, 북부 산지. 동서로 뻗은 공화국 어디에서도 지금 세워지는 건물을 볼 수 있다. 마치 세상위로 세워두는 비석과도 같다.
“뭐, 우리 같은 이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나. 가세, 오늘 내 할 일이 많으니.”
“그래야지. 서두르지 않으면 늦게 들어온다고 마누라한테 또 구박을 받겠어.”
“크하하. 아직도 바가지 긁히면서 사는 거냐?”
“이건 다 애정 표현이라고.”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솟은 건축물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을 발걸음을 돌렸다.
태양은 하늘 끝에 걸려 있었다.
* * *
“올해는 풍년이네요.”
“다행이야. 한 가지 걱정은 덜었군.”
두 농부가 바라보던 건물의 상층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교각 위로 두 사람이 올라와 있다.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의 여성과, 근엄한 자태를 보이는 남성.
라라와 쿤이었다.
“다른 신들이 도와 준 덕분이죠.”
“다 모이니까 그럭저럭 이름값은 하더군.”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글쎄. 듣는다고 우리에게 뭐라 할 처지던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신성의 회복을 도와 준 건 우리잖아. 그리고 사실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미 사라졌을 존재이거늘.”
단단한 쿤의 얼굴에 라라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다른 신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이런 식이다. 토라진 아이 같다. 정말로 숭배를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 다만, 가르침이 있기에 포용력을 넓히고 인간을 위해 다른 신들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라라가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쿤의 어깨에 기댔다.
“공화국과 제국. 그분을 기리기 위한 구조물이 올라가고 있잖아요. 하늘의 끝. 다른 차원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게요.”
“……그래. 보실 수 있을 거야.”
“우리 자랑스러운 공왕폐하께서는 여전히 그리운가 보네요.”
장난스러운 라라의 말에 쿤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의 증거를 받고, 그 존재의 강렬함을 가까이서 느꼈다. 자신의 몸과 같이. 그 무겁고 깊은 존재감은 사라지고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부모를 여읜 아이와 같이.
“고개를 드세요. 당신이 이룩한 일들이 있잖아요. 그분께서도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자랑스러워 하실 거예요.”
“그런가…….”
“제국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국경을 개방. 주변 왕국과의 유대를 깊이하며 왕성한 교류를 하고 있잖아요. 전쟁은 멈추고 굶주리는 이는 없어요. 세상 어디를 봐도 당신을 칭송하는 목소리밖에 없죠.”
긴 시간이 걸렸지만 쿤은 성공했다.
각국의 앙금은 깊이 파인 상처와 같은 것.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종교와 문화를 교류하고 많은 타협안을 주고받았다. 이에는 다른 신들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전 대륙을 하나로 잇는 것에 성공했다.
신성왕 쿤.
공화국의 통령이라는 직책이 있지만, 세간에서는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모든 신의 사랑을 받고, 운명의 노를 손에 쥔 자. 시대에는 수많은 별들이 뜨나, 그의 시간에는 오직 환한 달 뿐이다. 유례없을 평화의 시대는 그의 신성함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 평화만큼 좋은 것도 없지.”
“그러니까 어깨를 펴요. 당신의 마음은 그분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후후. 역시 아내 좋다는 게 이런 건가 보군. 애들 재워놓고, 한 잔 할까?”
“……주책이에요.”
말은 그렇지만 얼굴은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다.
쿤이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아쉬움은 있지만, 삶은 어느 때보다 풍족하다. 괴롭히던 적도 없고 대륙도 평화롭다.
쿠우우우우……!!
가끔 등장하는 이런 존재를 제외하면.
“하아, 저건 또 저러고 있군.”
“저 위에 앉은 건 준이겠죠?”
“너무 좋아해서 탈이군. 저 나이대의 애들은 무서워서 다가가지도 못하는데.”
검은 그림자와 함께 드래곤의 거체가 건물 위쪽으로 지나갔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얼굴을 때렸다. 괴악스러운 일이지만, 아래에서 일하는 인부들 중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수호룡 로리안의 이름은 알 만 한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통령의 막내아들이 그 드래곤을 타기 좋아한다는 사실도.
“준아, 내려 오거라. 바람이 차다.”
쿤이 가볍게 말 하고는 라라의 손을 잡은 채, 건물 아래로 몸을 날렸다.
힘은 잃었지만 수많은 도구들이 그를 보조하고 있다. 바람이 아래로 뭉쳐서 그의 길을 밝혀 주었다.
넓은 공터에 내려서니, 때마침 긴 바람과 함께 로리안도 착륙하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나 이번에는 북쪽 끝에까지 다녀왔어요!”
“허, 그놈 참. 저 높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 게냐?”
“전혀 안 무서워요! 재미있는 걸요!? 새들도 많고, 색색의 정령들도 쉼 없이 다가와요! 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웃고 떠들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어요!”
다섯 살 정도.
또랑또랑한 눈을 한 채, 준이 열심히 설명을 했다. 쿤과 라라가 나란히 웃었다. 발그레한 볼과 격한 손짓이 귀여웠던 탓이다.
“우우욱!!”
“어머!”
“에이나?”
그때, 인간형으로 몸을 축소하는 로리안 옆으로 하얀 안색의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속이 안 좋은지 바닥을 짚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다. 라라가 황급히 다가가서는 마법으로 그녀를 회복시켰다.
“하. 준아, 너 설마 누나도 데리고 간 거냐?”
“히히. 누나도 재미있는 걸 봐야죠! 매일같이 무섭다고 빼기만 하고. 이번에는 제가 자고 있는 걸 몰래 묶어서 데려갔어요!”
“으아아아앙!!”
자랑스럽게 말 하는 준과, 대성통곡을 시작한 에이나.
나이는 에이나가 많지만 성격은 준이 훨씬 셌다. 쿤이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준의 앞에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준아, 잘 들으렴.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에이나는 싫어할 수 있는 거야.”
“왜요? 새들도 막 있고, 정령도 되게 많은데요?”
“음. 그럼 이건 어때? 준은 피망이 좋니?”
“엑! 싫어요! 맛도 없고.”
“하지만 에이나는 좋아하잖아. 만약 에이나가 피망이 좋다고 너한테 억지로 먹이려 한다면 좋을까?”
준이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졌다. 쿤이 작은 미소를 베어 문채 머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래, 그런 거란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가 같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마음을 열고 포용해 주며, 다름을 이해해야 한단다. 그래야 서로의 좋은 점을 다툼 없이 나눌 수 있지.”
“포용…… 어려워요.”
“하하. 아직은 그렇겠구나. 하지만 크면 다 이해하게 될 거야. 그때까지는 누나가 싫다고 하면 억지로 시키면 안 돼. 알았지?”
“네! 안 그럴게요.”
장난꾸러기에 사고도 많이 치지만, 맑은 성정이다.
쿤이 준을 번쩍 안아서는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 사이, 에이나도 울음을 그치고는 라라의 손을 잡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누나, 누나!”
“으, 응?”
“미안. 난 누나가 그걸 보면 좋아할 줄 알았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응…… 괜찮아. 무서웠지만, 새들은 귀여웠어. 나중에. 나중에 안 무서워지면 같이 가자.”
“헤헤헤. 약속!”
손을 꼭 쥐는 둘을 보며, 쿤과 라라가 마주 웃었다.
“이거 참. 내 노고를 칭찬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야?”
화목한 가족 사이에 낀 로리안이 툴툴 거렸다.
오랜 시간 비행을 해서 조금은 피곤해져 있는 상태였다. ‘아빠, 나 내려줘요.’ 손을 툭툭 친 준이 바닥에 내려서서는, 그녀에게로 쪼르륵 다가갔다.
“누나, 누나. 오늘 재미있었어요!”
“으, 응? 그러냐?”
“다음에도 또 같이 가요!”
“그래, 뭐…….”
로리안이 조금 어색하게 답을 하자, 준이 발뒤꿈치를 쭉 들고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키 차이만 크게 나지 않았다면 볼에라도 했을 거 같다. 로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뭐, 뭐하는 거야?”
“약속!”
“으, 으. 그, 그런 건 말로 해도 되잖아. 나, 나는 이만 가 볼 테야!”
그러더니, 금세 날개를 펴서는 하늘 위로 도망치듯 날아갔다.
멀리서 봐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붉었다. 그 모습을 보며 쿤과 라라가 나란히 웃었다.
“누굴 닮아서 저러는 걸까?”
“글쎄요. 당신을 닮지 않았을까요? 의외로 여자 홀리는데 능숙하던데.”
“에이나 듣는데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괘, 괜찮아요. 에이나는 아무것도 안 들려요.”
에이나가 귀를 손으로 꼭 막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고 있다.
그 모습에 라라와 쿤이 다시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응? 응? 뭔데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 사이 준이 종종 걸음으로돌아왔다.
“글쎄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웃음기 가득한 쿤의 말이 넓은 평원을 타고 흘러갔다.
“그래, 뭐가 그리고 재미있을까.”
지금 이곳. 그리고 이 시간.
쿤이 달려온 준을 번쩍 안아 들고는 하늘 높이 올라가는 건물을 바라봤다. 그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 올린 건물.
‘당신께서도 저와 같겠죠?’
그리움 사이로 행복이 끼어들고 있었다.
『히어로 메이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