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지금 카메라에 잡히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방송용 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 대가 아니다. 수십 대의 헬기가 도심 한복판에 떠 있는 중이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일. 방송국간의 알력이나 영공통제조차 오늘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청에서는 이름 없는 존재를 부르며 촛불집회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네요.]
[한국뿐이 아닙니다. 세계 각지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몇 몇 종교 단체에서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거죠.]
[자신들의 신앙과 반하는 움직임일 텐데 신기한 노릇이군요.]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다수의 종교계는 이름 없는 자를 신의 개시. 혹은 신의 사자라 여기고 있죠. 교만과 나태를 경고하기 위해서 세상이 내려준 징표와 같은 존재로 말입니다.]
수십 대의 방송차량도 지상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특파원으로 나간 이들이 바람에 고개를 숙인 채 방송에 열을 올렸다. 국내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모인 언론인들이 한 곳에 뭉쳐 있다.
[향간에서는 ‘벨’이라 불린 신을 따라야 한다는 말도 있던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인간의 방종이 지나쳐, 규율을 잡기 위해 등장한 신이라는 말도 있죠. 어쩌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러 왔기 때문이죠.]
[아, 그럼 오 아나운서는 벨을 찬성하는 쪽입니까?]
[글쎄요. 제 의지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이것이 신들의 싸움이라면 결국 승리하는 쪽 아래에 우리는 놓이게 될 텐데요.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지금까지의 삶과는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릴 테죠.]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것이야 말로 정확한 말이네요.]
군부대에서 나온 병력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일차 공방으로 폐하가 된 거리위로는 개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과 부서진 잔해가 굴러가는 소리 뿐.
그 위로 내려섰다.
— 쿤.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지?
— 성전의 개시를 알렸습니다. 신도들은 모두 제단 앞으로 나와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 내가 했던 말을 잊지 마라. 만약이라도 내가 패배하게 된다면 너는 전력으로 게이트를 부숴야 해. 균형의 정수가 있는 너라면 그 힘으로 만들어진 게이트를 부술 수 있을 거야.
— 알겠습니다. 하지만 신께서 질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승리하고 제게 영광의 길을 보여 주십시오.
낯간지러운 소리지만 싫지는 않다.
가볍게 웃음을 띠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크게 열린 게이트 사이로 힘이 넘실거리고 있다. 숭배의 힘. 존재가 신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원천이다. 크게 호흡을 하며 이것을 받아들였다. 흰 빛이 몸 위로 겹쳐지기 시작했다.
될까?
아직도 의문이다.
나는 균형의 정수를 넘기고 인간 ‘서준경’인 상태로 숭배의 힘을 모았다. 신격의 탄생. 힘은 넘치고 그 규모는 지금까지 누렸던 힘 중 가장 높은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할 수 없다.
헬기에 탄 특파원이 말 한 것처럼, 세간에는 벨을 숭배하는 자들이 있다.
압도적인 힘을 보이며 세계의 정상들을 찍어 눌렀다. 그 사실이 퍼져나간 것은 당연한 일. 벨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전투 도중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의미 없었다. 숭배의 대상. 자신들을 이끌어 줄 존재가 등장했다는 것이 열광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벨 교. 우습지만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의 신도가 등장했다.
기회와 부의 불균형. 정치적 불신. 사회에 대한 불만. 억압받고 눌려왔던 이들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세계를 평등하게 만들어 줄 신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속의 세계.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이어지는 세계는 만민이 평등한 파라다이스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지켜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벨. 이제 모습을 드러내라.”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소리가 빈 공간을 타고 흘렀다. 적막이 기묘할 정도로 내려왔다.
“내가 본 인간 중에서는 아마도 네가 제일 이상한 거 같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의 한 부분이 갈라지고 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마찬가지로 흰 옷에 금색 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오만하게 내려 보는 눈빛에서는 부상당한 흔적을 읽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끝을 낸다. 너와 나. 그리고 지겨운 신의 이야기를.”
“끝이 아니다. 이곳은 시작. 내가 바라는 영속의 세계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무의미한 영원을 바라지는 않아. 아무리 어긋난 것이 많아도 그것을 결정하는 건 우리가 되어야 한다.”
벨과 내 힘이 충돌하면서 원형의 고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먹고 먹히고. 밀고 밀리고. 맞물린 힘은 팽팽하게 맞서 주변 공간을 밀어냈다. 남아있던 잔해가 한순간에 증발하여 먼지조차 안 남겼다.
“아직 모르겠나? 네가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인간들이 나를 숭배하고 있어. 목에 고리를 달아 줄 주인을 바라면서. 정말로 인간이 자유를 원하며, 스스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종족이라면 이것은 어찌 설명할 생각인가.”
“어리석음을 종족의 의지로 보지 마라. 누구나 그런 것은 있다. 고달픔, 괴로움, 지침, 슬픔. 부정적인 것이 모여서, 내가 아닌 거대한 누군가가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단순한 의지에서 태어난 너는 이것을 알 수 없겠지.”
“그런 것을 부질없다 말한다. 어째서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필요한 거지? 어째서 괴로워하고 힘겨워 하면서 스스로 헤쳐 나가는 삶을 꾸려야 하는 거지? 그냥 내 세계로 들어와라. 누구도 괴로워 할 필요가 없고, 죽어라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냥 살아가는 거다. 영원히. 아무런 고통도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 목소리는 방송국 헬기를 타고 전 세계로 전해지고 있다. 숭배라는 도구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상황. 그의 말이 달콤하게 느껴진다면,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다.
“너는 삶의 즐거움을 아는가?”
“…….”
“알 리 없지. 오직 재생이라는 의미를 위해 태어난 존재니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고생하고, 그것을 이루었을 때 피어나는 성취감.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만족감.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고양감. 믿음과 신뢰를 받았을 때 생겨나는 충족감. 멈춰있는 세계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의지가 형상화 된 것이 신이라면 벨은 단지 재생을 위해 존재 할 뿐이다.
부서진 세계를 다시 만들기 위한 존재. 그것에는 즐거움도 고통도. 어떠한 굴곡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단 하나의 의미만을 위해서 끝없이 굴러가는 쳇바퀴 속 다람쥐와 같은 처지.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음?”
“무의미하게 이어지던 삶 속에서 유일하게 한 번 굴레를 벗어나 본 적이 있으니까. 재생을 멈추고 파괴를 내려다 본 적이. 새카맣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죽어버린 생명.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저갱을 바라본 적이 있나? 나는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내가 경험해 본 적 있는 것을 부정하며 영속을 추구하는 것이다. 왜 모든 사람이 굴곡어린 삶의 환희를 즐거워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고정 된. 변화 없는 영속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고통과 좌절의 구덩이에서 벗어나 적어도 사람답게 살 수 있으면서 말이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계급은 나누어지고 있다.
과거와 같은 귀족제는 아니지만,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그보다 더 심해졌다. 단 돈 만원이 없어서 배를 잡고 죽어가는 이들이 수천수만에 이르지만, 수억 원을 땅에 버리는 이들이 그에 버금갈 정도로 많다. 상대적 박탈은, 오를 수 없는 계단을 만들었고, 이는 삶 자체를 부정하는 감정을 토해냈다.
벨의 목소리는 이들의 감정을 흔들고 있다.
좌절과 고통을 벗어나, 적어도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세계. 고난을 이겨내고 환희를 움켜 쥘 힘조차 없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달콤한 꿀과 같다.
“그래서 고통 없는 세상 속에 사람을 박제하겠다? 그것이 네가 가진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인가? 스스로를 얽맨 굴레는 어쩔 수 없으니, 다른 곳에서라도 만족을 느끼는?”
“난 이미 굴레를 벗어났다. 아노스로 도망간 그놈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피할 수 있을까? 결국 두 형제는 내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굴레를 벗어났다면 네 갈 길을 가라. 어째서 남의 세계에 와서 이런 행패를 부리는 거지? 사실은 네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네 존재는 그 의미를 이어가지 않으면 성립 할 수 없다는 것을.”
재생이라는 의미로 탄생한 것이 벨이다.
그 재생을 이어가지 않으면 존재가 소멸한다. 유르고와 균형의 신이 계속 싸우며 그 책무를 다한 것과는 달리 벨은 지금껏 침묵했었다. 결국 지구를 영속의 세계로 삼겠다는 건, 끊이지 않는 재생의 여건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
“결국 책무를 피해 도망쳐 나온 주제에, 이제 와서 남을 위하는 척 위선 떠는 것에 불과하지. 너라는 놈은 신도 아니다. 그저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찬 어린아이일 뿐.”
“……시끄럽다. 한낱 인간이 신의 괴로움을 어찌 안다는 말이냐.”
“오래 산다고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그 나름대로의 신격을 지녀야 하는 법. 너는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했다. 태어났던 세계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라.”
“건방진. 그 잘난 입을 틀어막아 주마.”
힘의 균형은……
잘 모르겠다.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뿐이다. 언론에 내 출연을 알리고,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시청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었던 것. 영속을 거부하고,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내 생각만큼 많다면 내게 힘을 부여해 줄 것이다.
“덤벼라, 되다 만 애새끼.”
덜떨어진 신 하나를 박살내기 위해서.
* * *
힘과 힘의 싸움은 큰 피해를 남길 뿐이다.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싸울 필요가 있다. 신은 하지 못하지만 나는 능숙한.
화아악—!
힘이 농밀하게 뻗어나가 벨을 감싸고 돌았다.
벨도 즉시 힘을 뿜어 이에 응수했다. 마치 손을 마주잡고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팽팽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상성은 의미가 없다. 내 힘은 이제 균형의 신이 넘긴 것과도 또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균형이라기보다는 경계.
질서라기보다는 철퇴.
조금 더 거칠고 강경한 기운으로 벨의 기운을 파고들었다.
공간이 삐걱 이고 뒤섞인 힘들이 하나로 뭉쳐서 안개마냥 퍼져갔다.
내가 원하던 상황이다. 서로의 전력이 파괴력으로 돌아서면 서울이 아니라 한국이 아작 나는 것도 금방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전력을 뭉개버리고 남은 힘으로 싸우게 되면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원하는 싸움 방식을 고수 할 수 있다.
“연습은 됐을까 모르겠군.”
“건방진 인간. 한계를 보여주마.”
회색 빛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그때마가 대기가 펑펑 퍼지며 나를 밀어냈다. 금세 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힘을 갑옷마냥 몸에 두른 채 다가오는 나를 향해 쏘아냈다.
요란할 뿐이다.
날카롭게 쏘아오는 가시들을 전부 흘려보낸 뒤 검으로 머리를 찍었다. 둔탁한 울림과 함께 흰 색 벽이 검면을 밀어냈다. 힘으로? 그건 무리 같다. 손을 빼고 검을 해제하며 힘을 주먹에 모아 그대로 벽을 후려쳤다.
콰르르릉—!
하늘이 떨고 공간이 마구 우그러졌다.
시야가 이상해지며 벨의 모습을 앞에서 지웠다. 하지만 굳이 안 봐도 그의 위치는 알 수 있다. 너무나 단순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뻔하다. 등 뒤로 힘을 방출해 벨의 공격을 튕기고, 그대로 고검을 만들어 횡으로 그었다.
“크윽……! 건방진 놈!”
“그게 인간의 본능이라서. 우리는 우리 잘난 맛에 산다. 어차피 오만한 병신이라면 우뚝 선 병신이고 싶으니까,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찌끄레기는 이만 사라져라.”
“닥쳐!!”
흰색 철퇴가 가슴팍에 충돌했다.
반응하지 못한 속도. 그 사이에 전력을 급증시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핏물이 입에서 올라와 밖으로 튀어나갔다. 간신히 방어는 했지만 타격은 무시 할 수 없었다.
“그대로 찢어 발겨주마!!”
백색의 창들이 유성우처럼 날아왔다.
한 번 재미 보더니 또 같은 수인가. 하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는다. 수백, 수천의 돌조각들이 주변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백색의 창을 산란시켰다. 부딪치고 부딪치면서 순식간에 숫자가 줄어갔다.
“쏴—!”
명령.
지상에서 흰 색 빛줄기가 쏟아져 오르기 시작했다.
과거, 준비해 두었던 W.K들. 힘을 내 것으로 대처한 뒤 약간의 개조를 했다. 한 번 사용으로 부서져 버릴 테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콰콰쾅!! 콰쾅!!!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폭음 속에서 벨의 모습이 잡혔다.
큰 기술을 쓴 후유증인지 기세가 흔들리고 있다. 회색 빛 고검을 움켜 쥔 채 그의 목을 가로로 베었다.
카아앙—!
강렬하게 충돌하는 고검.
저릿한 울림과 함께 힘의 여백이 공간에서 느껴졌다. 나도 벨도 주변으로 힘을 방출한 상태에서는 이 이상의 출력을 낼 수 없었다. 벨이 이를 바득 갈고는 안개처럼 퍼져있는 힘을 빨아들이며 거대한 창을 만들었다. 내 힘은 그 뒤를 쫓으며 아직 따라오는 중. 약간의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
“죽어라, 인간!!”
기회라 여긴 걸까.
벨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힘을 쏘아냈다.
“지금이다, 쿤!!”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싸움은 유리한 방식으로 이끌기 위한 포석이라고. 힘의 넓은 배치와 근접한 막싸움. 그리고 뻔히 보이는 약점.
“뭐, 뭐!?”
“함정이다, 머저리.”
게이트를 통해서 거대한 빛줄기가 벨을 향해 떨어졌다.
* * *
일부러 수습하지 않고 남겨 둔 힘.
아노스에서 넘어온 힘이 기둥처럼 넘어와 벨을 후려쳤다. 섬광과 거대한 충격파가 번갈아 터져 나왔다. 비명도 없이 벨의 몸이 빛에 휩쓸리며 타들어갔다.
억눌린 비명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회는 놓치지 않는다.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힘을 날카롭게 갈았다. 처음으로 의식의 검을 사용했던 때처럼. 적을 배제하기 위한 내 의지가 칼날이 되어 손에 자리 잡혔다. 뜨겁고 강렬한 힘이 그 안에서 느껴졌다. 타인의 것이 아닌 나만의 힘.
벤다.
그리고 모든 것을 끝낸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훼방 놓는 것도, 항거 할 수 없는 존재에 벌벌 떨며 숨죽이며 사는 것도. 세상은 다시 인간에게. 그것을 위해 눈앞의 적을 처리한다.
호흡을 뱉는 것과 동시에 회색의 검이 빛기둥에 작렬했다.
‘신’이라는 존재로 빚어진 육체가 이에 저항했다. 강렬한 저항력에 공간이 일그러지고 사위가 덜덜 떨렸다. 힘의 충돌이 불러온 기현상. 경계가 무너지고 법칙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죽을 거 같으냐!?”
기둥을 뚫고 거대한 날개가 튀어나와 손을 휘어 감았다.
일그러진 공간 안으로 벨의 눈동자가 보였다. 찬란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어긋난 집착만이 그 안에 서려 있었다.
신이라 해도 겨우 저런 것에는 지지 않는다.
“나는 신이다!! 인간 따위에게 죽지 않는다!!”
발버둥치는 벨. 어마어마한 힘이 몰려들었다.
신격마저 포기 한 채, 나를 주살하고자 한다. 신이 목숨을 걸었다는 말. 그렇다면 나도 그에 걸맞은 힘으로 상대를 해 줘야겠지. 떨어지는 빛기둥으로 몸을 바싹 붙인 채, 날개를 힘으로 밀어냈다.
힘과 힘이 대치했다.
몸이 점차 타들어갔다. 나는 신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닌 바. 육체는 보잘것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나지는 않는다. 승부는 한 걸음. 하나의 각오에서 갈라지는 것이다.
쿠르릉……!
날개와 손이 덜덜 떨리고, 그에 따라 주변 공간도 마구잡이로 일렁였다. 낮이 되고 밤이 되고 비가 오기도 하며, 바람이 불기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 아득하게 맞물린 두 힘이 이치를 거스르며 한 곳에서 이상 현상을 불러오고 있었다.
“전부 다 날려 버리겠다!!”
“영속의 세계조차 포기하는 것이냐!?”
“하나 둘 정도는 살아남겠지. 어차피 너희 인간들은 너무 많았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공간의 일렁거림이 더욱 커져갔다.
이대로 힘이 확장되어 폭발한다면 피해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동북아 전체? 아니, 어쩌면 인류가 멸절할지도 모르겠다. 아집에 휩싸인 신 하나 때문에 모두가 죽는 건 사양하고 싶다.
“그렇게 둘 거 같으냐!!”
여럿의 친구이고, 한 여자의 애인이며, 작고 여린 딸의 아버지다.
이제야 겨우 짝짜꿍 하면서 행복하게 살겠다는데, 빌어먹을 외계의 신이 와서 망치게 둘 수는 없다. 세상이 더러워도 그곳에서 구르는 것이 인간이다. 살아보지도 않은 애먼 놈이 와서 무슨 권리로 부순다는 말인가.
“떨어져라!!!!”
모든 힘을 쥐어짜 벨의 날개를 좌우로 뜯어버렸다.
비명과 같은 울림이 바람을 가르며 터져 나갔다.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사방으로 날렸다. 어쩌면 축복과 같은 것. 하지만 쓰는 이가 그르다면 의미가 없다.
“네놈이이이이!!!”
붉게 물들어버린 벨의 눈동자가 보였다.
신도 분노하는 것인가. 하지만 알 바 아니다. 그가 골방에 처박혀 재생과 파괴의 고리에 진저리가 났든, 내 상관 할 일이 아니다. 괴로우면 혼자서 머리 쥐어뜯고 뒈지던가, 왜 남의 세계에 와서 깽판이란 말인가.
텅 비어버린 벨의 몸통을 힘껏 발로 걷어찼다.
“꺼져!!! 이곳의 주연은 우리들이다!!”
“그아아아아!!”
흰 포말과 함께 날개가 완전히 뜯겨지고 벨이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흰 빛이 똬리를 치며 바닥으로 이어졌다. 폭음과 거대한 충격파가 뒤를 이었다.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지고 밀려난 토사가 헤일처럼 주변으로 밀려갔다. 미리 사람들을 소개시키지 않았다면 여럾 죽어나갔을 것이다.
“하아…… 하아. 이 길고 지루한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자고.”
벨의 뒤를 쫓아와 지상에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눈앞에 붉고 고통이 전신을 잠심하고 있다. 싸움이 끝난다 해도 한 동안은 병원 신세를 못 벗어날 거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곁에서 간병 해 줄 사람들이 있다. 소중한 딸이. 사랑하는 연인이.
“……쿨럭! 쿨럭! 인간이…… 인간 따위가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냐?”
잔해 속. 넝마가 되어버린 벨의 모습이 보였다.
양 손과 양 발이 부서져 흔적만 남아있고, 얼굴은 절반이 불에 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신격이 무너졌기 때문. 다른 세계의 근원에서 탄생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지는 않겠지만 지금 상태라면 영원토록 봉인할 수도 있어 보였다.
“신의 뜻? 누가 그런 걸 바랐다는 거지? 네 잘난 망상에 우리를 끌어 들이지 마라.”
“쿨럭……! 인간은…… 나약하다. 아니, 다른 생명도 모두 마찬가지지. 사랑하고 즐거워하다가도 어느 순간 증오와 분노로 모든 것을 망가뜨려 버린다. 파괴와 재생. 무의미하게 이어지는 이 영원한 굴레가 두렵지 않은 것이냐?”
나는 쳇바퀴 위의 다람쥐처럼 살아왔다.
돈 벌어 집에 바치고 삭막한 회사생활에 찌들어서 고통을 고통으로 못 느끼는. 숱하게 있을 삶.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도 힘든 사람.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내 삶이다. 이게 이어지든, 이어지지 않든. 고리의 일부이든 일부이지 않든 상관없다. 내가 가진 삶을 꼭 쥐고 그 안에서 작은 행복이라도 찾고자 했던 것이 나니까. 아니, 나뿐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 넓은 세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것을 갉고 닦아가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의 목소리.
“이 세계에 신은 필요 없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희미한 빛이 그 위에서 일렁이고 있다. 이것으로 신을 묶는다. 아마도 나조차 무사하지 못하겠지. 몸이 넝마가 되어 나뒹굴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다. 내 작은 삶 속에는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내가! 내가 이대로 포기 할 것 같으냐!? 인간이 아니라면 좋다! 지금이 아니라도 좋다!! 나는 신이다!! 영원히 이어지는 존재!! 이 세계를 부수고 다시 시작하겠다!! 인간이여 과연 네가 다음번에도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발악과 같은 외침이 들리고, 벨의 가슴팍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심장이다. 파괴를 상징하는 유르고의 심장. 그것이 강렬한 파동과 함께 순식간에 힘을 부풀리고 있었다.
어떻게? 의문이 있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은 없다. 한 줄기 바람처럼 모여든 힘을 움켜쥐어 그대로 벨을 향해 휘둘렀다. 회색 빛 선이 나와 벨 사이의 공간을 양단했다.
“……큿!”
가슴을 가르고 그의 근원을 침범하려는 순간 검이 멈췄다.
손끝이 부르르 떨리고 이마위로 땀방울이 흘러나왔다. 팽팽히 맞서는 힘. 벨을 찍어 누르고 침묵하게끔 하는 내 힘과 이에 저항하는 반발력이 맞서고 있다. 벨과 유르고. 두 가지 힘이 꼬리를 물고 있다.
콰릉……!!!
거대한 폭음과 함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간신히 만들어 두었던 회색의 검 역시 흩어졌다. 핏물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 바닥을 적셨다. 머리가 어지럽고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바닥을 손으로 짚고 고개만 들었다.
“저건 또 뭐지…….”
기형적으로 증식하는 붉은 덩어리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유르고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중이다. 가슴의 깊은 상처에서 혈관과 같은 것들이 나와 돌과 흙. 주변의 모든 것들을 씹어 먹고 있었다.
“크, 크크크크. 이대로 세계는 끝이 난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을 때, 다시 시작하자. 이번에는 남이 만든 세계가 아닌, 내가 직접 고안한 세계에서. 모든 것이 짜인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 내겠다.”
“미친 새끼가…….”
심장에서 올라오는 붉은 혈관에 얼굴을 먹힌 채 벨이 웃고 있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상극인 유르고의 힘으로 주변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가리는 것이 없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으니, 그대로 둔다면 벨의 말 대로 끝장이 날 판이다.
“크하하하하! 좌절해라 인간!! 이게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마…….”
콰르륵.
벨의 말은 끝맺음을 짓지 못했다.
얼굴을 덮어가던 혈관의 크기가 갑자기 늘어나며 그를 통째로 삼켜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붉게 물들어 있는 심장 그 자체.
“꼬리를 문 뱀이 싫다고 말 하더니, 결말은 그 꼴인가.”
재생과 파괴의 고리.
지금의 모습은 딱 그러했다. 끝없이 재생되고 파괴되는 심장. 유르고의 힘이 주변을 파괴하면, 벨의 힘이 심장을 증식시키고 있었다. 상극의 힘으로 심장 자체도 파괴되고 있지만 방향이 외부로 뻗어나가는 걸 막지는 못했다.
완전히 어긋나 버린 고리.
이건 선순환이 아닌, 영속한 파괴의 고리일 뾐이다. 끝없이 파괴를 이어가는 재생이 물결. 그야말로 종말의 사자와도 같은 모습이다. 어긋난 신의 집착이 낳은 것은 결국 이름도 없는 괴물.
통쾌함도 슬픔도 분노도 없이. 남은 건 깊이 토해지는 한숨뿐이었다.
“막을 수 있을까?”
이대로 두면 지구상의 생명체를 모조리 집어삼키고 거대한 암 덩어리가 될 것이다. 재생과 파괴를 끝없이 이어가는 존재. 영속도 뭐도 아닌 무(無)의 세계가 되고 만다. 그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제가 하겠습니다.”
“……쿤!?”
날개가 달린 말을 타고 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세이혼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중심을 잡고 있었다. 벨과의 싸움 이후, 제대로 힘을 회복하지 못한 모습.
“파괴와 재생이 꼬리를 물었다면 이를 중재하기 위해서 균형의 힘이 필요합니다. 본디 하나에서 태어난 삼거신. 다시 하나로 돌아가 세계 밖으로 추방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겠죠.”
“무리다. 지금 네 힘은 이들을 감당 할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둘 수는 없죠. 이대로 둔다면 이 세계를 모두 집어삼키고 아노스로 넘어 올 겁니다. 모든 생명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끝없이 팽창하겠죠.”
쿤이 말이 옳다.
하지만 안 된다. 지금의 쿤은 정수를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 억지로 벨과 유르고의 힘을 중재하려 한다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쿤을 희생하라?
나는 절대로 그렇게 말 할 수 없었다.
“죽지 않습니다. 두고 온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안 된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이런 결과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을 불러온 것은 제 세계의 인물들. 그 뒷수습을 하는 것도 저희가 되어야 옳은 겁니다.”
“그걸 어째서 네가 해야 한다는 말이냐!?”
과욕으로 실수를 한 건 탑지기들이다.
그들이 불러온 재앙의 씨앗을 어째서 쿤이 책임진다는 말인가.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행복을 손에 쥐었는지 잘 아는 나로서는 인정 할 수 없었다.
“저 아니면 할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담담한 쿤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무언가 대안을 내야 한다. 그의 희생이 없이 이 상황을 막을 수 있는 방법. 빌어먹을 신들의 난장판을 치워버릴 방법!
툭. 쿤이 어깨를 두드리며 내 옆으로 스쳐갔다.
“괜찮습니다. 신이시여. 그대는 지금껏 충분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한 번 만큼은 저를 믾어 주시기를.”
“……쿤!”
회색빛이 쿤에게서 터져 나오고 심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박동 치며 확장하던 심장이 순간 주춤거렸다. 고동이 빛과 공명을 하더니 천천히 줄어들어갔다. 재생과 파괴. 그리고 균형까지 자리 잡힌 완전체.
하지만……
이내 균형이 깨어지고 고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쿤의 힘은 지금의 상태를 감당 할 수 없었다. 그대로 가면 그 조차 먹혀버린 채, 끝없는 고리의 일부가 되고 만다.
꾹꾹. 그 순간, 누군가 내 소매를 당겼다.
“아도란?”
“준경. 저거. 저거.”
“……헬기. 방송 카메라? 아!! 그렇지!”
힘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즉시 하늘 위로 몸을 날려서 멀찍이 피신 중이던 헬기를 하나 잡았다. 특파원이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이거 지금 방송이 되고 있는 건가?”
“네, 네. 그렇습니다만…….”
“좋아. 카메라를 나와 저 아래에 있는 심장으로 연결해서 잡아. 다른 방송국의 헬기들도 이쪽을 잡으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거친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여러 대의 방송 헬기가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심장의 약동소리는 점차 더 커지고 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잘 들어라, 인간들이여. 나는 이름 없는 존재. 다른 세계의 신과 싸우며 인류를 지키고자 한 사람이다. 나는 완벽하지 않고, 홀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없다. 너희의 도움이 필요하다. 저 아래를 보아라. 끔찍한 모습의 심장이 보이는가? 저것은 끝없는 파괴를 갈구하는 괴물이다. 저것이 성장하면 이 세계를 집어삼키고 모든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꼴깍. 마이크를 내민 특파원의 얼굴이 하얗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저 안에서 싸우는 인간이 있다. 이름은 쿤.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죽을 걸 알면서도 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진 작은 도구가 빌어먹을 신의 난장판을 수습할 수 있기 때문에. 그건 용기다. 죽음마저 각오할 수 있는 용기. 그러니 인간들이여 부디 저 아래에서 사투를 벌이는 친우에게 힘을 전해다오.”
카메라의 방행이 지상으로 바뀌었다.
중계를 통해서 전 세계, 곳곳으로 내 말이 전파되었다. 통역은 필요 없었다. 내 의지는 송곳같이 모든 사람의 뇌리로 틀어박혔다.
“외쳐라, 그의 이름을. 기도해라 그의 이름을. 쿤. 저 아래에 있는 용사의 이름은 쿤이다.”
“……쿤.”
“쿤! 쿤이라고?”
“쿤! 이렇게 외치면 되는 겁니까?”
헬기에 탄 이들부터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부르라!! 기도하라!! 그대들을 위해서 목숨조차 감수한 그 용사의 이름을!!”
“쿤!! 쿤!!”
“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위부터 아래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고동이 번지고, 울림은 힘이 되어 모여들었다. 붉게 물든 심장을 흰 빛이 감싸갔다.
“돌아오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쿤. 내 친구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 * *
[정부지정 신설 국립 유공자 무덤.]
정갈하게 정비된 잔디 위로 반듯한 비석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살다 간 시간들. 푸른 빛 반석 위로 꽃과 술잔이 나란히 그 앞을 기리고 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마른 꽃잎이 하늘 위로 날렸다.
[……용기를 추모하여 이곳에서 기린다.]
비석 말미에 적힌 문구 하나.
손끝으로 훑어보자 그 의미가 더욱 깊게 다가온다. 용기에 대한 추모.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먹먹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 있었군요.”
“아, 여보.”
분홍 코트에 날렵하게 말아 올린 머리.
상큼한 모습으로 서율이가 다가왔다. 조금은 부른 배가 걸음걸이를 조심스럽게 했다. 무릎을 펴고 그녀의 옆으로 가서 부축했다. ‘아직 괜찮아요.’ 부끄러운 듯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기다리지 왜 왔어.”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당신을 위해서 힘 써준 사람인데. 적어도 마음만큼은 제대로 전하고 싶어요.”
“그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돌렸다.
“벌서 1년이나 흘렀네요.”
“시간이 정말 빠르군. 영원할 것 같던 혼란도 점차 줄어들고.”
“오빠의 유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노력한 덕분이죠. 피해 복구를 위해 대대적으로 모금 운동이 벌어지고, 자발적인 갱생 활동도 벌어졌잖아요. 각국의 정부나 여러 사회 집단에서도 이해관계를 떠나서 움직였고. 아마 인류의 역사 상 처음으로 있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멸망의 시간을 눈으로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1년 전의 그 싸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멸망의 노래가 불리어진 그 날의 일 때문이다. 세상은 상상으로만 하던 자신들의 최후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정치, 사회, 종교. 모든 것을 떠나서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그 어떤 때 보다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국경을 떠나 인간 스스로가 살아가기 위한 노력에 매진하는 건 아마도 그 덕일 터.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일어나기 힘들 일이다.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힘들었겠죠.”
“그렇지.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는 없었을 거야. 아니, 그 전에 나부터 살아있지 못했겠지.”
“아쉬워요. 제대로 인사조차 해 보지 못한 것이.”
씁쓸해 보이는 서율이의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안타까운 마음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크다. 신도이며 친구이자 내 분신 같았던 인물이다. 잔을 마주 대며 술을 마시고, 커가는 아이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싶다.
“어쩌면 그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작은 후회와 아쉬움.
입가로 흘러나가는 탄식이 그날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 * *
“쿤!!!!”
다급한 부름에 힘이 실려 지상으로 내려갔다.
붉게 물들어 땅을 덮고 있던 거대한 심장이 요동쳤다. 힘과 힘의 충돌. 그 여파가 땅을 집어삼키고 바람을 빨아 들였다.
마른하늘 위로 먹구름이 몰려오고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경계 밖으로 대피해 있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다급한 군인과 소방관. 경찰들의 목소리가 휘몰아치는 폭풍 속을 뚫고 나왔다.
“부족해!! 아직 부족하다!”
카메라를 손으로 잡고 외쳤다.
아직 힘이 부족하다. 쿤을 위해. 인류를 위해. 나를 위해서. 더 많은 기원이 필요하다.
“끝없이 외쳐라. 쿤의 힘만이 지금 우리에게 남은 희망이다.”
“아, 알겠습니다!”
카메라를 다시 넘기고는 하늘 위로 몸을 날렸다.
티비로 이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들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 오지에 있거나, 문명의 해택을 받지 않은 이들의 손도 필요하다.
끝도 없이 퍼져가는 먹구름 위에 발을 올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모든 기원은 쿤으로 이어져, 내 힘은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한계.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쿤도 저렇게 목숨을 걸고 노력하는데, 힘들다고 포기 할 수는 없다.
[들어라 인간들아!!!]
요락의 진언을 통해서 내 의지를 세상으로 전달했다.
쩌렁쩌렁 퍼지는 목소리에 시선들이 몰려들었다. 세상을 감싸는 목소리. 쉽지 않은 일. 숨이 턱 막히고 핏물이 올라오는 거 같았다.
혀를 깨물어 정신을 차렸다.
[하늘이 보이는가!? 땅의 울림이 느껴지는가!? 우리는 멸망의 기로에 서 있다!!]
길게 말할 수는 없다.
구구절절 어떻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가장 와 닿고, 급히 움직일 수 있는 수단. 인류가. 인간이 태어나 지금껏 가장 깊이 머금고 있는 본능이 필요하다. 바로 삶에 대한 집착. 생존의 본능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으로 강력한 의지다.
[살고자 한다면 쿤의 이름을 외쳐라! 그의 이름에 경배하라!! 그의 구원을 요구하라!!!]
팍. 하고 핏물이 튀어나왔다.
귀와 눈에서도 마찬가지. 힘을 잃고 그대로 추락했다. 시야가 깜빡깜빡.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푹. 무언가 따듯하고 부드러운 것이 등 뒤로 닿았다.
돌아가지 않은 목을 억지로 틀어 바라봤다. 하얀 날개와 긴 털.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세이혼의 모습이 들어왔다.
“쿤이 말하더군. 그대는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고.”
“……그런가.”
“신도이나, 신을 적극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그대를 위해 희생하는 쿤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는 않고. 하지만 그가 이렇게나 이루고 싶은 일이라면 돕고 싶다. 부디 죽지 말고, 그를 도와 다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쿤과 내 관계는 시작부터 그러했다. 그는 나에게 도움만을 받았다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그에게 수많은 도움을 받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 마치 선을 두고 마주 본 쌍둥이처럼 우리는 서로를 위해 많은 것들을 해 주었다.
“……그래, 서로를 위해서.”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몸을 안 좋았다. 후들거리며 간신히 부여잡을 수 있는 수준. 앞은 뿌옇고 힘이라고는 먼지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여유롭게 살았는가.
바닥에서 기어 올라와 지금처럼 된 거 아니던가? 긴 호흡과 함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쿤은 여전히 심장과 엮인 채 팽팽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날 저 심장 쪽으로 던져 줘.”
“……괜찮은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쿤과 나는 오랫동안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사이야. 부족한 숭배를 채워주기에는 나보다 좋은 사람이 없지.”
“신이 쿤을 위해서 숭배를 하겠다?”
나는 신이 아니다.
쿤도 신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살고자 하는 인간일 뿐.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최고의 힘을 전해 줄 수 있다.
“망설일 시간은 없다.”
“그렇군. 쿤을 부탁한다!”
세이혼이 말을 몰아 나를 심장 위에서 떨어뜨렸다.
바람이 밀리고, 비틀린 공간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심장이 눈에 들어왔다. 재생과 파괴의 고리. 심장을 바스러뜨릴 만큼의 압력이 느껴졌다.
“쿨럭……!”
핏물이 다시 한 움큼.
심장에 닿는 순간 몸이 죽일 듯 떨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삼거신과 쿤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편을 나눠서 줄다리기 하는 것처럼 힘이 팽팽했다. 내가 그 안으로 접촉하자 곧바로 몰려와 물어뜯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어째서 이곳에!]
쿤이 즉시 나를 보호했다.
[내가 얻은 신성까지 네게 전하겠다. 신의 숭배라면 힘이 될 것이다. 삼거신을 하나로 묶고 그대로 봉인을 해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신께서는…….]
[괜찮다. 신성이라는 건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의 숭배보다 중요한 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지.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소중히 해라. 그것이면 충분히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거창한 척 신을 연기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내 진심이다. 나는 신의 권능까지 얻었던 사람이다. 그 압도적인 힘의 쾌감은 얻지 않은 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곁에 선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면.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곁에 선 이를 소중히 하라.
삶과 욕망.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옆을 돌아봐야 한다.
[……당신을 만난 건 제게 있어서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나 역시. 널 만나 최고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의식이 공명하며 쿤과 나의 힘이 섞이기 시작했다.
봉인을 위해서는 균형의 신이 필요하다. 내가 얻은 신성을 그에게 넘기며 균형을 잡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파괴의 재생의 엇갈린 고리. 그 중간을 잘라내고 힘이 개입했다. 반발이 공간을 흔들고 내 의지를 송두리째 밀어냈다.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
쿤 역시 비슷할 것이다. 한 세계가 가지는 거대한 근원 중 둘이 우리에게 반발하는 중. 아무리 균형을 위한 힘이 이를 잡아주고 있다지만 버티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쿤! 힘을 내요, 쿤!]
[쿠, 쿤!? 이렇게 부르면 되나!? 제발 도와 달라고! 죽기는 싫어!]
[도와주세요. 무서워요, 쿤 님!]
수많은 의식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왔다.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기 시작한 수많은 인간들의 기원. 살고자 하는 의지. 쿤이라는 이름을 매개체로 우리에게 힘을 전달했다. 균형의 힘은 강해지고 속박은 더욱 단단해졌다. 유르고와 벨의 버둥거림은 끝을 향해 다가갔다.
[이대로는 폭발합니다.]
[이대로는 폭발한다.]
쿤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봉인은 된다. 하지만 정수를 제외한 다른 힘들은 커다란 여파를 남기고 만다. 이건 막을 수 없다.
— 게이트! 차원. 경계.
그 순간, 아도란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굳이 쿤을 볼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지금 하나. 이해의 벽은 없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나와 쿤이 밖으로 튕겨 나왔다.
심장은 거대한 고리로 칭칭 동여매진 채 박동을 멈췄다. 세정수의 봉인. 맞물린 힘은 처음 태어났던 그 혼돈의 상태로 묶여버렸다.
다만……
기잉. 기이잉. 기잉.
남은 여력이다.
봉인의 주변을 돌면서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이건 조만간 밖으로 튀어나온다. 봉인은 정수를 지키며 본래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 남은 여력은 그대로 방출하고 말 것이다.
“서둘러!”
다급한 쿤의 외침.
아도란이 푸른 색 로브를 넓게 펼치며 주문을 영창 했다. 바닥부터 거대한 바람이 불어와 심장을 그대로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폐쇄. 우리가 넘어 간 뒤. 게이트.”
“알고 있다.”
아도란의 말에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답을 했다.
세이혼을 비롯하여 쿤과 함께 이곳으로 합류했던 이들이 다시 하늘 위로 올라서고 있다.
우리는 게이트를 통해서 봉인을 차원 간 경계 속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다.
본래, 벨이 갇혀있던 경계. 세 신의 정수가 한곳으로 묶인 채 그곳에 머물러 있다면 다른 어떤 곳보다 든든한 봉인일 될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열려있는 게이트를 닫아야 한다.
아노스에서, 우리 쪽에서. 그리고 그렇게 되면 본래 이를 유지하던 균형의 힘 역시 사라질 터. 다시는 두 세계를 연결 할 수 없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페가수스 위에 올라선 채, 쿤이 손을 뻗었다.
긴 말을 하지 않은 채 마주잡아 주었다. 주고받는 온기. 더 이상은 서로를 느끼지도,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면 되었다.
“가라.”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아도란을 중심으로 아노스의 인물들이 게이트 쪽으로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넘어간다면 아도란을 중심으로 게이트는 닫히게 될 터.
— 죠엘. 군에 연락을 해. 마지막으로 할 것이 있다.
작별은 화려한 불꽃놀이로 끝날 거 같다.
점점이 멀어지는 친우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