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37화 (237/240)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나는 지금이 그 끝이라 생각했다. 비록 주연으로 완결을 보지 못한다 해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조연이 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보람이 있다. 비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게 되는 것이 슬프지만.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족하다 여겼다.

빛이 겹겹이 밀려들었다.

아득한 느낌. 삶을 떠나 죽음으로 가는 느낌이 이런 걸까. 그것에 몸을 맡긴 채, 힘을 뺐다. 아니, 이제는 힘조차 없다. 가죽만 남고 남은 정수는 모두 쿤에게 넘겼으니까. 그가 잘 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해!”

무언가 귓가에서 울렸다.

바람 소리인가. 아니면 저승으로 가는 뱃길의 소리? 귀찮다. 무언인지 확인하기도. 그냥 이대로 흘러가고 싶다. 조금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길고 긴 싸움에. 신들 사이에 끼어서 고분 분투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어나!!”

다시 귓가가 간지럽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일까? 하지만 그럴 리 없다. 나는 이미 죽었지 않은가. 다른 누군가 나를 부를 리는 없다. 무슨 영매사도 아니고, 죽은 사람을 무슨 수로 부른다는 건가. 그냥 착각이겠지.

“일어나요!!”

“……!”

갑자기 눈이 팍 뜨이고 빛이 몰려왔다.

“……아! 아아! 깨어났군요!”

“……서율아? 미소야?”

품에 안긴 두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율이랑 미소. 꿈인가? 아니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이렇게 그리운 이들을 보여주는 건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정신 차려. 너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태고의 정령? 안 죽었던 거냐?”

“심장을 빼앗기고 거의 다 죽어가던 상황에서 겨우 힘을 회복했다. 덕분에 너도 빼돌릴 수 있었지.”

날개를 파르르 흔들며 태고의 정령이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심장이 탈취 당했을 때 당연히 죽었다 생각했다. 한데, 횡액을 피해서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나를 구했다고 한다. 그 난장판에서. 정말인가?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쿤. 그의 도움으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몸이 완전히 박살나서 구하는데 애를 먹었어.”

“……아! 상처가 전부 사라졌군. 어떻게?”

“네가 준비해 둔 것들이 도움이 됐다. 축복의 기반은 재생. 곡식을 키우기 위해 설치해 둔 축복에 네 몸 속의 힘이 공명을 해 들러 들어갔다. 저 아래쪽은 지금 열대 우림이야.”

“운이 좋았다는 건가…….”

그게 말이 되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살았다는 건 사실 같다. 미소와 서율이를 다독이며 허리를 세웠다. 상처는 없지만 몸에 힘이 없었다. 살쩍 휘청이자, 미소와 서율이가 황급히 나를 부축했다.

“아빠, 무리하지 마요.”

“음. 너도 결국 알게 됐구나.”

“지금까지 속였던 건 밉지만…… 그래도 아빠가 다치는 것보다는 나아요. 무리하지 마요.”

이런 상황에서까지 미소에게 거짓말 하는 건 불가능했겠지.

서운함과 괴로움. 슬픔이 담긴 미소의 목소리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소를 품에 안아 다독여 주었다.

“상황은? 밖은 지금 어떻게 됐지?”

“……그게 조금 충격적일 수 있어요.”

“음? 무슨 일인데?”

서율이가 조금 뜸을 들인다.

설마 쿤이 당했다는 걸까? 그렇게 된다면 최악이다. 신의 정수까지 넘긴 상황에서 쿤이 당하면 벨을 막아 낼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진다.

“오빠는, 한 달 만에 일어난 거예요.”

“……뭐?”

“한 달 동안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어요. 그리고 그 동안 밖의 싸움은 끝났죠.”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달? 내가 그렇게나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다는 건가? 아니, 그럼 밖의 싸움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서율이를 봤다.

“오빠가 쓰러지고 쿤이 그 위로 뛰어 들었어요. 벨은 거칠게 포효하며 날뛰었죠. 아도란의 도움이 없었다면 서울이 증발 할 뻔 했어요. 싸움은 치열했고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이어졌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쿤의 모습이 사라졌죠.”

“사라졌다고?”

“네. 영상이 남아 있어요. 직접 보실래요?”

고개를 끄덕이자 서율이가 노트북을 들고 와 저장된 영상을 틀어 주었다.

피격지 너머에서 고성능 장비로 녹화 한 듯 보였다. 화질은 조금 안 좋았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건 가능했다.

“게이트 너머로 도망쳤군. 벨은?”

“싸움이 종식되고 난 뒤 벨은 세계의 정상들을 자신의 앞으로 소환했어요. 그리고 오빠를 찾으라 명령했죠.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어요. 지금 밖에서는 오빠를 찾기 위한 행렬이 줄을 서고 있어요.”

“쿤이 패배한 건가…….”

“꼭 그렇지는 않아요. 벨도 그 명령을 내리고 모습을 감췄어요. 벌서 3주가 넘었는데,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죠.”

화면을 다시 느리게 재생하며 모습을 살폈다.

안 좋은 화질이지만 몇 번이고 보다보니 놓쳤던 것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쿤과 벨은 양패구상을 했다. 다만, 보다 손해가 심한 건 쿤. 로리안과 아도란이 끼어들어 그를 구출하고, 병력을 수습하여 즉시 게이트로 후퇴를 했다.

“그렇다면 벨도 타격을 받아서 수습중이라 이건가? 아니, 그게 확실하겠군. 그가 정상이었다면 내가 어디에 숨든지 이미 찾아냈을 테니까.”

벨의 전력은 지구를 다 덮고도 남는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내가 벙커에 숨는다 해도 찾아 낼 수 있다. 즉, 쿤과의 싸움에서 타격을 받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겼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 한들, 무슨 수로 벨을 쓰러뜨리란 말인가.

힘은 바닥이고 쿤도 게이트 너머로 퇴진했다. 벨이 치료에 들어갔다는 건 쿤도 최소 중태. 몸을 회복한 벨이 아노스로 넘어가 그를 찾아내면 모든 희망은 꺼지고 만다.

“무슨 수를 내어야 해. 죠엘은 어디에 있지? 하퍼에게서 연락은 왔나?”

“……현재 둘 다 구금중이에요.”

“구금? 무슨 소리야?”

“벨이 명령을 내리고 난 뒤 세계정부가 합심하여 오빠의 흔적을 쫓았어요. 그 동안 잘 숨겨오기는 했으나, 이런 조사를 전부 피할 수는 없었죠. 관계자들부터 하나씩 잡혀갔어요. 죠엘 양은 우리를 숨기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출두했어요.”

“빌어먹을……!”

벨의 위용을 본 세계의 지도자들.

겁을 집어먹고 명령에 따르는 건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싸움을 보았다면. 진실의 조각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무언가 수를 내어 주어도 되지 않을까. 힘도 바닥인데 손과 발까지 모두 잘려버린 상황이 되고 말았다.

“……큭!”

“아빠! 일단 안정을 취해야 해요.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무리하면 큰일 나요.”

“하지만 시간이 없다. 벨이 힘을 회복하고 나오면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어.”

“아빠!”

미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깜짝 놀라서 그녀를 돌아봤다.

“그만해요. 왜 아빠가 다 껴안고 가야 해요. 그냥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해 주면 안 돼요? 아빠가 다치고…… 죽거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요? 네?”

“아…… 미소야.”

너무 급했다.

미소를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한 달이다. 한 달 동안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나를 보며 미소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미 한 번 그런 경험이 있던 그녀이거늘. 상처 입은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다. 이래놓고 무슨 아빠라고……

“미안하다. 아빠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그만 하면 안 돼요? 왜 꼭 아빠가 전부 책임져야 하는데요?”

“하아. 미소야. 아빠도 싫어. 우리 귀여운 미소를 두고 왜 사지에 나가고 싶겠니. 하지만 내가 손을 떼면…… 막을 사람이 없어. 벨은 우리를 지배하고 모든 자유를 박탈할 거야. 박제된 짐승처럼 아무것도 못한 채, 그저 껍데기만 가진 채 살아가겠지.”

“하지만…….”

“아빠는 우리 미소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해. 하고 싶은 걸 하고, 만나고 싶은 친구를 만나며. 가끔은 모험도 즐기는. 실패하고 성공하며 좌절도 겪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어.”

미소를 더욱 꼭 안았다.

눈물이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속이 답답했다. 그녀를 이해하는 마음이. 그럼에도 나가야 하는 현실이. 이길 가망성이 현저히 낮은 지금의 상황이.

“방법은 있나? 네 힘이 바닥난 건 안 봐도 알 수 있어. 그 상태로 벨과 싸우는 건 무리일 텐데.”

태고의 정령이 표르륵 날아오르며 질문했다.

“살아있다면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지.”

“무엇이든 서두르는 것이 좋을 거다. 벨이 깨어나면 이 세계는 지옥이 되고 말 터. 우리 정령들 역시 피해 갈 수는 없다.”

“정령이라……혹시 아노스나 이쪽에서 정령을 부릴 수는 없나?”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단순 인력으로 사용할 수 있나 싶어서.”

“가능은 하다만,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아직 잘 모르겠다.

우선은 쿤을 확인하고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정령은 상태가 회복되었을 시, 다른 차례를 위한 수단. 그마저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그래도 수를 내어 두는 것이 좋았다.

“일단은 뭐라도 해 봐야지.”

말을 뱉고 등을 벽에 기대었다.

미소가 황급히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아프다고 생각한 걸까? 작게 웃어주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전에 이 낡은 몸부터 회복을 하고.”

“응! 응! 일단 쉬세요!”

그렇게 듣고 싶었을까.

걱정만 끼치는 못난 아빠가 아니기 위해서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거 같다. 정수까지 뽑아다 던진 몸뚱이가 얼마나 회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다시 몸을 뉘였다.

* * *

몸은 밑 빠진 독이었다.

단순히 신에게 넘겨받은 정수를 쿤에게 건넸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니다. 폭주한 차남혁과 마찬가지로 신의 힘은 내 육체를 좀먹었다. 신이기 때문에 신의 힘을 담을 수 있었던 것.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인간인 내게 신의 힘은 과했다. 간신히 육체를 이어붙이기는 하였으나 이미 너덜너덜한 걸레짝이었다.

“하아…….”

주변의 힘을 끌어 모아 균형의 힘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들어오는 족족 새어나갔다. 이래서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본래의 힘을 회복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쿤의 상태를 알고 그와 협작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회복이 필요한데.

“잘 안 돼요?”

“어려워. 이대로는 시간만 낭비 할 뿐이야.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거 같은데.”

“지금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해요. 사방에 오빠를 찾기 위한 군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요.”

“쯧…… 공공의 적이 된 건가.”

죽어라 싸운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콧바람 불어서 날아갈 사람들이 연명하고자 한 선택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이런 개같은 상황을 만든 벨을 욕해야지.

“정 답답하면, 티비라도 볼래요? 방송이라고는 다 긴급회의나 뉴스 밖에 없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꼴은 볼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나갈 수도 없고, 일에는 진척이 없다.

답답함을 풀고 밖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라도 봐 줄 필요가 있겠지. 서율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미소는 태고의 정령을 품에 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빠. 몸은 좀 어때요?”

“미소가 걱정해 준 덕분에 아주 건강해졌지.”

“피. 어제랑 레퍼토리가 똑같은데요?”

“아, 그런가? 이거 노력 좀 해야겠는데.”

그나마 밝아진 미소에게 농담을 던지며 옆에 엉덩이를 걸쳤다.

왼쪽에는 미소, 오른쪽에는 서율이. 가족이다. 상황이 암담하지만 않았더라도 참 기꺼워했을 장면이다. 내가 바라고, 그리고 싶은 가족의 모습.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괜찮을 텐데.

치익……!

서율이가 티비를 켰다.

거리를 확보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먼저 들어왔다. 나를 찾기 위해 매일같이 지역을 순찰하고 검문하는 것이다. 과거 군부정권 시대보다 더욱 빡빡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민들의 원성은 높고 그만큼 사건과 사고도 많이 벌어진다.

“저게 현재의 모습이라니, 씁쓸하네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더욱 아프지. 저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오빠는 최선을 다했잖아요.”

“……다른 채널은 없나?”

채널을 옆으로 휙휙 넘겼다.

그때마다 다른 방송들이 나왔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방송채널도 정부의 제약으로 정지당한 상태. 몇 몇 환기용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한 것을 방송하고 있었다.

……치익!

그때, 낯선 노이즈와 함께 화면이 돌아갔다.

요상한 깃발과 손수건을 입에 두른 장정들. 무언가 이상한 방송 화면이 나타났다. 혼선인가 싶어 채널을 위아래로 돌려 보았지만 변하지 않았다.

— 우리는 이름 없는 이들! 세계 정부를 장악한 사악한 신에 맞서서 혁명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

“……응?”

뭔가 테러조직 성명과 같은 내용이다.

— 정부는 인간을 노예로 하려는 사악한 신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에 반발한다! 자유의지를 지닌 자들이여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자께서 경고했던 바! 경계하고 경계하라! 지금 그 때가 왔으니, 우리의 의기로 들고 일어나 성전의 촛불을 밝히라!

“저거 오빠 얘기하는 거죠?”

“……알라 된 기분이군.”

“하긴 계엄령 상태가 너무 길었어요. 아무리 압도적인 신의 위용이라 해도 반발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죠. 이런 모습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워요.”

“…….”

“오빠? 왜 그래요?”

서율이의 뒷말은 잘 듣지 못했다.

그 동안 죽어라 노력해도 꼼짝도 하지 않던 힘이 지금 작게나마 뭉치고 있었다. 마치 부름에 일어나는 오래된 용사처럼.

— 이름 없는 자를 경배하라!! 사악한 신을 몰아내자!!

아, 정말이다.

힘이 회복되고 있다.

“방법을 찾았다.”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 * *

나는 이미 과거에 그것을 느껴 본 적이 있다.

숭배에서 오는 기묘한 느낌. 인간을 탈피해서 다른 것이 돼 가는 감각. 인간이고 싶어서 이를 억지로 거부했지만,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말과 같다.

본래부터 존재했던 신과 만들어진 신.

정수를 넘기고 힘이 메말라 버린 내게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인류의 숫자는 70억을 넘어선다.

70억의 숭배는 과연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까. 어쩌면 신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다만……

“방법이 문제네요.”

“70억과 소통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들의 숭배를 받아내는 것은 더욱 어렵겠지. 신이 등장하고, 별세계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아직 본래의 신앙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잖아.”

“믿음이라는 건 어떨 때는 돌보다 더 단단하니까요.”

순수한 신앙자들도 그렇지만, 아예 믿음이란 게 없는 이들도 있다.

잇속에 따라 믿음을 선택하는 자들. 그런 경우는 숭배의 힘을 얻기가 어렵다. 결국 70억 중 내가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숫자만이 아닌 신앙으로 치지면 우리보다 아노스 쪽이 뛰어나겠지.”

현대 문물에 찌들어 있는 현대 인류보다 신과 가까이 생활하는 아노스 쪽이 훨씬 신앙의 강도가 높다. 제단의 건립이나, 종교 행사 역시 보다 숭배에 치중해 있으니까. 70억의 인구 중 활용 할 수 있는 숫자가 생각보다 적다면 다른 곳에서 이를 보충하는 것도 나을 수 있다.

“하늘에 열린 게이트는 어때?”

“아직 그대로 있어요.”

“두 세계가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거지. 유르고의 힘도 넘어오고 균형의 신의 힘도 넘어왔으니 제약이 없다는 말. 결국 방향성만 잡을 수 있다면 내 쪽으로 힘을 연결하는 것도 가능하겠어.”

“게이트로 아노스의 힘을 이어받겠다는 건가요?”

아노스에서 숭배하는 ‘서준경’이라는 이름의 신이다.

쿤이 정수를 가지고 있지만, 숭배의 대상은 직접적으로 내가 된다. 다만, 사람들의 숭배는 그 세계에 국한되어 있는 것. 게이트 너머의 존재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것만 바로잡을 수 있다면 모자란 힘을 보충 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하다 외투를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율이와 미소가 반사적으로 같이 일어나며 나를 바라봤다.

“어디 가시게요?”

“밖에. 방송도 막힌 상황에서 이대로 있어서는 힘을 수급할 수 없어.”

“아빠, 위험해요. 지금 밖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걱정하지 마렴. 이게 있으니까.”

신체변형이 가능한 반지를 보여 주었다.

능력으로 얼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이거라면 하루 정도 여유롭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다. 필요 한 건 숭배의 현장. 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힘을 회복해야 한다.

서율이와 미소가 계속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해한다. 죽음에 발을 디뎠던 내가 다시 위험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걱정이 되는 거겠지.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일이다. 결말이 없이 이 세계는 안전해 질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나는 멈출 수 없다.

둘을 당겨서 꼭 끌어안았다.

온기가 가슴으로 전해지는 거 같다.

이것이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다. 한 번 포기했던 목숨. 하늘이 나를 도와 이렇게 살려 주었으니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는다.

평범한 얼굴을 한 채 밖으로 움직였다.

* * *

밖은 삭막했다.

무장한 군인들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탱크와 중화기가 심심치 않게 보였다. 거리 위를 돌아다는 사람들의 숫자는 과거와 비교하여 현저하게 줄었다. 즐겨듣던 가요도,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작정 걸었다.

그리고 느꼈다. 지금의 모습이 어쩌면 앞으로 생길 일의 전초전이지 않을까. 벨이 영속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한 모습이 될 것이다. 그에게 삶의 즐거움은 상관이 없다. 파괴와 재생의 고리를 잇지 않는 세계의 유지가 중요하다.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쾅……!!

“이거 놔!! 너희한테 이럴 권리는 없어!!”

“움직이지 마라! 더 이상 반항하면 즉결 처분하겠다!”

“즉결? 미쳤군! 너희가 뭐라고!?”

폭음과 함께, 건물 한쪽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일전에 보았던 오묘한 모양의 깃발과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다. 군인들에게 제압당한 채 각을 세우고 있었다.

퍽! 거친 외모의 군인이 반항하던 남자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쳤다.

핏물이 촤악 퍼지고 동요가 거세졌다. 제압당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흥분한 기색을 내비쳤다. 여차하면 크게 부딪칠 거 같았다. 한 쪽은 맨손, 다른 한 쪽은 완전 무장한 군인. 일방적인 학살이 되고 만다.

“그만하시죠.”

“……넌 또 뭐야!? 공무 집행중인 거 안 보이나!?”

슬쩍 개입하자, 거친 말이 날아들었다.

삭막한 환경에 날 선 모습. 굳이 그가 나쁜 인간이라는 건 아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광기는 본래의 인성과 다르게 튀어나올 수도 있다. 바닥에서 움직이는 힘을 끌어 모아 주변으로 풀었다.

“그 정도면 알아들었을 겁니다. 아직 어린 청년들인데, 너무 과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으, 으음. 하지만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구금하라는 명령이다.”

“그야 알지만, 한 때 실수 안 하는 이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쪽 분도 어릴 때는 한 번 쯤 반항을 해 보았겠죠?”

“뭐……그렇기야 하다만.”

힘이 말라붙은 정신을 매만져 주었다.

이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은 건 그들도 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압박이 행동을 몰아가는 것. 이것만 잘 다독여 주면 충돌은 피할 수 있다.

“누가 대신 나서달라고 했어!? 우리는……!”

“조용히 하세요. 지금은 반성하고 물러나는 걸로 하죠.”

제압당한 남자들 중 일부가 반발했지만 쏘아보는 내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어리고 거친 애들 정도를 다루는 건 어렵지 않다. 침묵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군인을 바라봤다.

“반성하는 거 같은데, 오늘은 그냥 주의만 주고 풀어주시죠.”

“으음…….”

“아량에 감복하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큼! 그래, 좋다. 어이! 너희 모두 잘 들었겠지? 또 이런 짓 저지르면 씨알도 없을 줄 알아! 똑바로 행동 하라고.”

한껏 으름장을 놓고는 병사들과 함께 물러났다.

명령에 반발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인물은 없었다. 속으로는 다들 ‘너무 심한데…….’ 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장내가 정리되고 난 뒤 부상당한 남자를 부축하며 손짓했다.

“쉴 곳이 있나?”

“네, 네. 이쪽으로 오세요.”

필요한 것의 말단. 일단 이것부터 시작하자.

* * *

오래 된 아파트를 개조해서 아지트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그것도 서울 안에서 이런 모습을 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부상당한 남자를 소파에 눕히고는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언제부터 활동을 한 거지?”

“보름 정도 됐어요. 아저씨도 우리 쪽 사람인가요?”

“어떤 면에서는. 혹시 다른 이들과도 연락이 닿나? 일전에 보니까 방송에 끼어드는 친구들도 있던데.”

“비상 연락망은 있어요. 대장이 급할 때 쓰라고 나눠 줬거든요.”

“흠. 일이 벌어진 게 한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굉장히 빠른 대처군.”

“흐흐. 대장이랑 크루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분께서도 경고했잖아요. 혼탁함이 몰려온다고. 예상대로 일이 벌어졌으니 우리가 봉기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죠.”

한 달이 아니라 그 전부터.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내가 이름 없는 자로 활동한 건 꽤나 됐으니, 그때부터 영감을 받아 이런 움직임을 조직했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사조직이 과격하게 움직이면 테러리스트가 되는 거겠지만, 방향만 잘 잡아 준다면 혁명군이 된다.

내게 필요한 것은 혁명군이다.

“너희는 믿을 수 있겠구나.”

“……네?”

답 대신, 부상 입은 남자의 곁으로 가서 힘을 사역했다.

얼마 없는 힘이 빠져나가며 가슴으로 통증이 밀려왔다. 오래된 가뭄으로 논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찰과상 정도를 치유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흰 빛이 너울거리며 퍼지고 난 뒤 남자의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와, 왁!! 뭐, 뭐에요!?”

“뭐야? 방금 어떻게 된 거야?”

“저 아저씨가 치료했어. 그냥 손을 가져다 대니까 빛이 나오더니…….”

웅성거리며 건물 안의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다. 영향 받기 쉽고 활동하기 충분한 열정이 있는 나이. 지그시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그, 글쎄요?”

“야, 너 누군지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인데.”

소란이 퍼져갈 때 즈음 손을 뻗어 침묵시켰다.

사위가 조용해졌다. 남은 힘을 쥐어짜서 손 위로 집중시킨 뒤 빛을 만들어 흔들었다. 가장 접하기 쉽고, 편안하게 느끼는 재생의 힘이다. 뭐, 본래라면 균형의 힘을 써야겠지만 애들 설득 하는 데는 이쪽이 더 편하다.

“내 경고를 따른 자들이 이렇게나 남아 있다니 기쁘구나.”

“……아! 설마, 당신이?”

“에이! 에이!! 얼굴이 다른데!?”

“하지만 저 빛은 그분의 힘 아니야?”

힘들어 죽겠다.

힘을 다시 속으로 수습한 뒤 숨을 골랐다.

“얼굴은 내게 의미가 없다. 적이 너무나 강대하여 모습을 바꾸고 숨어있을 뿐.”

“그, 그럼 정말로 이름 없는 자…… 본인이 맞는 거예요?”

“나는 이름이 없는 존재. 너희가 지칭하는 바로 그대로의 인물이다.”

“와……와!”

“이름 없는 자야! 그분이 우리 앞에 있다고!”

“정말인가? 진짜야?”

북적거리며 달라붙는 모양새가 광신도와 닮아 있다.

잘 제어해 주어야겠지. 손으로 진정시킨 뒤 떨어져 있던 의자 하나를 당겨왔다. 드르륵 하고 끌려오는 의자에 다들 비명을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잘 들어라. 나는 세상으로 넘어오는 혼탁한 신과의 싸움에서 패했다. 힘은 바닥이 났고, 세계 저편으로 숨은 그를 쫓아 갈 여력조차 없다.”

“그, 그럼 어떻게 해요!?”

“놈은……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세계의 신. 삶을 재생해 주는 축복의 힘을 지니고 있으나, 광기에 휘둘려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영속시키려 하고 있다. 이것을 막지 않는다면 모든 자유가 박탈당한 멈춰버린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건 바라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너희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부, 부탁이요!?”

귀들이 쫑긋.

모이를 바라는 병아리들 같다.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못내 걸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본디, 세계에서 난 자. 허나, 지금은 그 힘이 바닥나 다른 세계의 신과 싸울 수 없다. 그렇기에 믿음이 필요하다. 너희가 나를 필요로 하는. 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건…… 어떻게 하면 되죠?”

“알려라. 그리고 새겨라. 작은 제단이라도 좋다. 내 존재를 세계에 각인시켜, 힘의 회복을 도와 다오.”

“제단? 무엇을 새기라는 말인가요?”

힘을 써 바닥에 한 가지 문양을 새겼다.

저울추. 균형의 신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생각해 보면 아노스에 그 문양이 새겨진 제단이 있었다는 건 오래전에 그를 섬겼던 이들이 있었다는 말. 같은 효과를 바란다면 이 문양이 옳다.

“이걸 새겨놓고 기도하면 되는 건가요?”

“숭배는 방향성을 가질 때 힘이 된다. 저울로 상징되는 내 존재와 너희가 인지하고 있는 내 자신. 두 가지가 결부되면 나는 힘을 회복할 수 있다.”

“저울…… 알겠어요. 동지들한테 연락해서 당장 시행하도록 할게요.”

반짝거리는 눈빛들이 가슴에 와 닿을 때마다 힘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이 느껴진다.

숭배라는 것은 그렇다. 막연히 누군가를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신’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구현하는 힘. 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붙여서 기도를 하면 대상은 분명해진다.

“알려라. 세상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그리고 기억해라. 숭배의 의미를. 나는 이름 없는 자. 세상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 온 존재. 어긋남을 경계하고 균형을 주지하라. 그리했을 때, 온전한 존재를 영접할 수 있을 테니.”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몸을 움직였다.

그림자가 몸 위로 덮이며 나를 지워갔다. 은신은 기본적인 능력일 뿐이다.

‘뭐, 뭐야? 어디로 갔어?’

당황한 목소리가 내 뒤를 쫓아왔다.

힘이 조금씩 차오른다.

벨,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너의 가슴에 비수를 박아주마.

* * *

조금씩 세력을 넓혀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힘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강바닥이 조금씩 젖어오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어디겠는가. 적어도 몸을 운신할 정도는 됐다.

“음? 누구십니까? 이곳은 관계자 외에는 접근이 불가…… 컥!!”

“무슨 짓을!”

“잠들어 있어라.”

경비를 모두 잠재우고 걸음을 옮겼다.

회색의 단단한 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죠엘을 비롯한 내 관계자들이 갇혀있는 감옥. 정치범 수용소로 시설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감사 할 때가 아니다. 자물쇠를 손으로 부수고 들어갔다.

“……준경 씨?”

“나와라. 이곳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무사했군요!”

순찰 도는 경비들도 다 때려잡은 뒤, 죠엘 등을 탈출시켰다.

위법이고 나발이고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레지스탕스처럼 활동하는 내 숭배자들에게 그녀를 맡긴 뒤 한 가지를 물었다.

“일전에 준비하던 거. 제단을 통한 네트워크 말이야. 어느 정도가지 진척이 됐지?”

“미스터 하퍼와 연대해서 상품으로 준비하고 있었어요. 미니 불상처럼, 관광상품으로 퍼뜨린 뒤 가볍게 기도만 하면 되니까요.”

“제조 공장은 유지중인가?”

“기반은 외국에 있으니까요. 딱히 제제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필요 한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국내는 내 활동으로 추종자들이 많아졌지만 외국은 아직 미흡하다. 숭배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기반 시설이 필요하다. 출근 전에 인사 올리는 금색 신상. 장난감 같은 불상. 대수롭지 않지만 이런 것들은 마음 깊은 곳의 숭배를 의미한다.

“이 문양을 새겨서, 즉시 출품해 줘. 가능하겠어?”

“저울이라. 가능은 하지만, 시설이 위치한 곳의 정상들도 전부 명령을 받고 있는데, 허락이 떨어질까요?”

“그건 내가 해결하지. 일단은 포장을 해서 제품을 속이고 무료로 배송해버려.”

“돈이 어마어마하게…….”

“신경 쓰지 마. 실패하면 돈은 의미가 없으니까.”

“하긴 그렇군요.”

죠엘은 처리했다. 하퍼는 자택 구금중이니, 몰래 연락만 가하면 움직일 수 있다. 벨의 명령으로 나를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외는 자유. 적당히 수를 내어 상품을 발송시킬 수 있다면 곳곳으로 제단을 발송 할 수 있다. 몇이나 이를 두고 나를 숭배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다만, 걸리는 것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네…….”

벨이 상처의 치유를 위해 잠적한 것이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아무리 상처가 깊었다고 해도 몇 년이고 처박혀 있을 거 같지는 않다. 길면 한 달. 어쩌면 며칠 내로 그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준경. 준경.”

“……어!?”

묘한 어법.

익숙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잡아 세웠다. 벨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 인근 골목. 무너진 건물 가운데서 들려왔다.

“여기. 나 끼임. 도움. 필요.”

“아도란? 아노스로 도망간 거 아니었나?”

“나, 남음. 필요. 쿤 상처회복. 준경 상처회복. 다리 요구.”

아도란 어 고급반의 힘을 발휘해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전에 진언으로 해석이 되었다. 쿤과 내가 상처를 입고 각자의 세계에서 힘을 회복해야 하니, 그 중간 다리로 남았다는 것이다. 중간 다리라는 것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도란은 위기 때마다 도움을 준 기억이 있다. 이번에도 무언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무너진 잔해를 전부 걷어내고 푸른빛에 몸을 감춘 아도란을 꺼내들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갇혀 있던 거냐?”

“지금까지. 쭉. 벨. 피하기 위해. 죽은 척.”

“한 달이 넘었는데? 몸은 괜찮은 건가?”

“여기 먹을 거. 잔뜩.”

아도란이 헤진 로브를 들어 올렸다.

시커먼 공간에서 손이 불쑥 나왔는데, 말린 육포가 들려있다.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해야 할지. 여기까지 왔음에도 아도란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어쨌든 살았으니 다행.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부축했다.

“일단은 몸을 피하자.”

다행이 이번에는 빙빙 돌지 않았다.

* * *

“링크. 가능.”

1.5리터 생수를 원샷 하고 펄럭이던 로브를 안정시키고 난 뒤 아도란이 꺼낸 말이다.

“링크라면, 쿤과?”

“긍정. 쿤, 회복 중. 하지만 벨도 회복 중. 준경, 쿤. 각자로는 불가능.”

“쿤과 내가 힘을 합쳐야 벨과 싸울 수 있다는 거군.”

“긍정. 그래서 남음. 링크.”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신이 균형의 힘을 주었을 당시, 나와 쿤 모두에게 기회를 연 것과 같다. 실제로 나와 쿤 모두가 균형의 힘을 깨우치지 않았던가. 허나, 벨이라는 신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나뉜 힘으로는 무리가 있다.

“어떻게 하라는 거지?”

“쿤. 공화국 통령. 제국 황제 사위. 제 1국교, 준경 교.”

“……하. 전 대륙이 준경교로 통일 된 거냐?”

“대부분. 지금 위기. 힘을 집약 중. 게이트. 전송.”

“아노스에서 모인 힘을 전부 내게 전송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쿤은? 신의 정수는 쿤에게 넘겼을 텐데.”

아도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하긴. 그 상황에서 정수에 대한 것까지 이야기를 전했을 리는 없다. 그에게 짧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정수. 모름. 이해 불가. 계획은 링크.”

“음…….”

어느 정도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 왔던 거 같다.

하지만 정수를 쿤에게 넘긴 이상, 힘을 집중했을 때 내가 최대한의 전력을 발휘 할 거라고는 예상하기 어렵다. 과도한 힘으로 차남혁처럼 폭주하지 않으면 다행.

“아니, 어쩌면 더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태고의 정령이 날개를 표르륵 떨면서 날아왔다.

거신에 대해서도 알고, 심장을 봉인해 왔던 그녀라면 무언가 알 것 같았다.

“넌 아노스의 신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나? 3거신 말고도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뭐, 있기는 하다만 그들은 유르고에 의해서…… 아! 잠깐만. 쿤이 아노스의 상황을 정리했다면 신들 역시 멀쩡한 거 아닌가?”

“그렇지. 게이트가 크게 열리고 난 뒤 느낄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남아있던 신의 자취들이 모두 사라졌음을. 본래 있어야 할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죠엘 등도 그럼…….”

“사도의 신분은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신은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옳지. 예언을 경전에 담은 것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과거가 바뀌며 신들은 더 이상 이곳에 피신할 필요가 없어졌다.

게이트가 크게 열리고 돌아갈 길이 생기니, 곧바로 고향으로 가버린 것이다. 온갖 신들이 모여서 피난처처럼 사용되던 지구가 한적해진 셈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있지. 가장 기본적인 문제야. 아노스의 신들이 3거신에게 힘도 못 쓰고 밀리는 이유.”

“하긴 신들에게도 차이가 있군.”

“점유율?”

툭 뱉듯 아도란이 말했다.

그러자 태고의 정령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유율이라니. 차지하는 비율? 무엇이? 신이? 아……!

“세계를 3분한 삼거신보다 다양한 의미를 담은 아노스의 신들이 약하다는 건가?”

“그래. 세계가 가지는 힘은 크게 차이가 없어. 파괴와 재생. 균형이라는 근원에 초점을 맞춘 3거신과 농경부터 전투까지. 작은 의미에 초점을 맞춘 아노스의 신들은 단순한 점유율의 차이로 힘의 간극이 생긴 거지.”

“하…… 너무 단순해서 웃음이 나오는군.”

“진리는 단순한 거야.”

신의 거대의 의지나 의미 같은 게 힘을 대변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단순한 지분이라니. 이건 단순하게 땅 많고 돈 많은 사람이 이겨버리는 현대의 이치와 다를 바 없다. 넓은 세계나 좁은 세계나 결국 같은 원리로 돌아간다는 걸까.

“그래서 그게 결국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냐?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 해 봐.”

“죽치고 있던 잡다한 신들이 사라지고, 이곳이 기원이 아닌 신의 정수도 쿤에게 넘겼다. 그렇다면 이 넓은 텃밭에 종자 하나만 남은 셈이지.”

“……종자?”

“신이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지? 의미. 의식. 온갖 사상이 집결되어 형상을 취한 것이 신이다. 3거신은 세계가 가진 근원의 물음이 집결한 것이고, 아노스의 신들은 태어난 생명들의 부름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어. 그렇다면 이곳은? 이 세계의 신은 어떻게 탄생할까?”

신은. 신이라는 존재는 추상적일 뿐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을 주고 삶의 활기를 불어넣으면 신의 의미는 충분했다. 과거의 선각자나 현인들이 삶의 지혜를 전하고 추앙받기는 하지만 그것이 실존의 신이 되지는 않는다. 삶의 버팀목이고 정신적 안식처.

이 세계의 신은 그렇게 존재했다.

“이곳의 인류는 믿지만 부정한다. 믿고 싶지만 동시에 믿지를 않는다. 수많은 숭배에도 신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이지. 과거에는 신에 가까운 존재가 탄생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에 씻겨져 나갔다. 지금 남은 건 껍데기 뿐. 반짝이는 별보다 많은 숭배의 흔적은 교만의 외침일 뿐이지 진정한 믿음의 산물은 아니다.”

“믿지 않아서 신이 탄생하지 않았다……?”

“조금은 운이 없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 내가 이곳에 도착하여 알아 본 상식에 의하면 그러했다. 신이 탄생할 여건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불신의 역사가 자리했더군. 믿음은 광기로 희석되고, 깊은 불신의 뿌리를 내렸다. 신실한 숭배와 교묘한 선동은 항상 같은 길을 갔으니까.”

순수한 믿음과 정치적 도구.

지난 과거를 되새겨보면 부정 할 수 없는 말이다. 순수한 믿음이 조금 더 깊이 모였다면 정말로 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인간을 위한 신.

“그럼 네가 말 하고자 하는 건…….”

“그래. 벨을 누르기 위해서는 네가 이곳의 신이 되어야 한다.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신격을 품었던 존재이기 때문에 숭배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

맞는 말이다.

나는 숭배를 힘으로 돌리고 있다. 균형의 신이 가진 힘 때문일까 싶지만, 과거의 어느 한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지는 중이다. 숭배를 받아 인간을 탈피 할 때의 그 기분. 결국 주체는 균형의 신이 아닌 나였다. 정수를 쿤에게 넘긴 지금에도 그건 마찬가지.

“준경. 가능. 준경 교. 균형의 신 아님. 준경 이름 숭배.”

“아노스의 교단도 균형의 신이 아닌 너를 숭배하고 있다. 그 힘을 게이트로 넘겨 올 수 있다면 신격의 완성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으음…… 그럼 쿤의 정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정수. 심장. 그리고 벨. 필요분이 보이지 않는가?”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유르고는 힘이 봉인되고 심장을 남겼다. 균형의 신 역시 봉인을 위해 힘을 소모하고 정수를 쿤에게 넘겼다. 그렇다면 벨은? 그도 힘을 걷어내면 심장이나 정수 같은 게 존재할 것이다. 힘을 잘라내고 난 뒤의 삼거신의 본모습.

“봉인이 가능하겠군.”

“그래. 신은 세계의 의미를 받아 탄생했기 때문에 불멸이다. 하지만 같은 곳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라면 한 번에 묶어서 봉인하는 것이 가능하겠지.”

“혼돈에서 나온 것들은 다시 혼돈으로.”

뭔가 눈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벨을 이기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막연하게 그려지던 계획이 뚜렷해졌다. 삼거신은 묶어서 봉인해 버린다.

“링크. 링크.”

그래서 위해서는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빙빙 도는 아도란의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 * *

“아! 아빠, 고기가 타요!”

“아차차. 서율아, 고기 좀 뒤집어 줄래?”

내가 깨어나고 보름이 흐른 시점.

바쁘게 돌아가는 밖의 상황과 다르게 은신처에 숨은 우리는 평온하다. 이질적일 정도로. 어쩌면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이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도란, 안 익은 거 먹지 말라고 했지?”

“익음.”

“시뻘건데 뭐가 익어. 미소야 젓가락 뺏어.”

“아도란 아저씨 젓가락 주시죠.”

하퍼에게는 연락이 닿았다.

가동을 준비 중이던 공장은 곧바로 돌아가며 제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가진 돈을 전부 다 투입해서 물량을 맞췄다. 오지까지는 무리겠지만 배송이 가능한 곳에는 모조리 물건을 뿌렸다. 덕분에 때 아닌 산타의 등장이냐며 외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저울이 그려진 미니 제단이 티비를 타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미소도 이제 술 좀 할 수 있나?”

“에이, 당연하죠. 한 병은 거뜬하답니다.”

“주당이 되는 건 지양했으면 하는데.”

“음. 음.”

“아도란, 손으로 먹지 마.”

균형의 추. 본래라면 균형의 신을 상징해야겠지만, 그 숭배의 힘은 내게 흘러들어왔다. 상징이 더 이상 다른 신이 아니게 됐다. 매일같이 기묘한 고양 감을 느껴야 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 갈 거 같은 느낌.

쿤과의 링크도 완성했다.

본래부터 게이트로 연결되던 사이 아니던가.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한 그와 대화를 나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최종 계획은 완성되었다.

아노스를 통해서 집중되기 시작한 힘이 게이트로 풀리고 있었다. 세계가 새로운 신의 탄생에 잘게 떨었다.

“나중에 일 끝나면 다 같이 가족 여행이나 가자.”

“하와이 어때요?”

“나는 태국! 태국으로 가고 싶어요.”

“덥지 않을까? 치안도 안 좋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하와이가 좋죠. 따듯한 햇살에 파도. 이보다 좋은 휴양지가 있을까요?”

그것은 힘을 회복하고 있던 벨도 느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거대한 존재가 고개를 드리우는 것이 손끝으로 잡혔다. 아마도 나를 찾고 있는 것일 거다. 준비를 모두 마쳤다고는 하지만 앞일이라는 건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가는 거 둘 다 가지 뭐.”

“아, 그러면 되겠네요.”

“우와, 아빠 되게 머리 좋아 보였어요.”

살거나 죽거나.

그 기로에서 웃고 싶다.

그래야 이 기억을 발판으로 삼아서……

돌아올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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