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은 매우 중요하다.
아노스의 세계가 쿤의 활약으로 유르고에게서 해방 되었다 해도 심장이 있다면 유르고는 죽은 것이 아니다. 신이 왜 신이겠는가. 일반적으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장을 중심으로 유르고를 봉인하지 않으면 같은 일이 또 다시 일어 날 수 있다.
신중의 신중을 기했다.
심장의 봉인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방법으로 찾아 올 수 없는 장소를 찾아 실행했다. 봉인에도 W.K를 두어 지키게끔 했다. 여차하면 지역 자체를 붕괴해서 봉인을 지킬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데 탈취를 당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 갑자기 일어난 일이야. 빛이 번쩍인다 싶더니 봉인된 지역이 통째로 사라졌어.”
“……통째로 사라졌다고?”
“그래. 준비해 둔 것들은 하나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어. 나도 이해가 안 간다고. 그냥 사라져 버렸어!”
벨의 힘? 아니, 어쩌면 지금 안 보이는 차남혁의 수작일까?
머리가 복잡하다. 미사일과 혼의 수집이 가장 큰 계획이었던 거 아닌가? 아니면 지금 이 모든 게 나를 밖으로 빼내기 위한 술책? 본래 목적은 심장이었던 걸까?
빠득—!
이가 갈렸다.
정확하게 사정은 모르지만, 당했다는 건 알 수 있다. 시설을 파괴하고 적의 계획을 와해시켰다고 생각했는데, 크게 한 방 먹어버렸다. 심장이 있다면 벨은 유르고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얘기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유르고의 부활은 고리의 재결합으로 이어진다. 벨이 가장 바라지 않는 상황. 차남혁 등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벨은 부활 자체를 원할 리 없다. 그가 원하는 바라면……
“힘의 제어. 차원을 붕괴시키기 위한. 아, 본래부터 그런 계획이었군!”
차남혁과 빅터를 시켜서 심장을 노릴 때부터 이런 계획이었던 것이다.
유르고의 심장은 유르고가 가진 힘을 움직일 수 있는 머리. 이를 통해서 아노스에 남아있는 조각들을 사용. 차원의 벽을 허물려는 것이다. 유르고의 조각을 감싸고 있는 그리자들은 균형의 신이 남긴 봉인. 즉, 남은 조각들의 총합은 유르고와 균형의 신이 남긴 힘들의 전부. 완전한 부활 없이 그 힘만을 뽑아내어 차원을 공격하면 충분히 구멍을 낼 수 있다.
유르고의 부활이 아니다.
심장은 단지 트리거일 뿐. 벽을 허물기 위해 미사일을 날릴 계획이다. 그리고 그렇게 벽을 허물어 이 세계로 모습을 드러내면 온전한 건 벨 뿐. 봉인으로 엉켜있는 두 신을 찍어 누르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영속하는 세계.
파괴와 재생의 고리에서 벗어나 벨의 제약 속에서 세계가 굴러가는 것이다. 좋은가? 그럴 리가. 파괴하고 재생하는 흐름은 세상에 사는 이들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숙명과 같다. 그걸 억지로 틀어막고 제어한다는 것은 더 이상 삶이라 할 수 없다.
공상과학 속 기계에 지배당하는 세계처럼.
작은 어긋남조차 용납되지 않는 세계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 * *
아노스로 가기 위해서는 게이트를 사용해야 한다.
벨의 명령을 받은 차남혁이 움직이고 있다면 가장 가까운 지역을 이용했을 터. 알고 있던 게이트 이동 위치와 내가 갈 수 있는 지역의 관계를 계산해서 최적의 장소를 떠올렸다.
그가 심장을 가지고 조각을 움직이면 늦어버린다.
쿤이 아노스의 상황을 제어하고 있다 해도 유르고의 조각들을 전부 정화하기란 불가능.
끼이이이익—!!
그렇게 다시 국내로 돌아와 게이트로 향하는 순간.
기이한 소리와 함께 묘한 울렁거림이 가슴을 때렸다. 복잡했다. 역겨운 시궁창 냄새 같기도 하면서 그리운 고향집의 냄새와도 같다.
“아……!”
그리고 이내 기이한 광경이 내 시야에 잡혔다.
“게이트가?”
게이트가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열 개가 넘어간다. 각지에 퍼져있던 게이트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한 장소로 모이고 있었다. 이것은 절대 그냥 일어 날 수 없는 일. 이게 가능하다면 오직 벨 밖에 없다.
“꺄아아악! 저게 뭐야!?”
“조, 조심해! 다가가지 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비명과 고함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불안이 증폭되고 있었다. 이미 도심의 공격으로 한 차례 패닉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기현상에 침착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게이트들이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수십, 수백. 전 세계에 퍼져있던 게이트들이 한 장소에 응축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기괴한 형태를 취한 차남혁의 모습이 보였다.
“차남혁!!!”
“오……! 이제야 왔는가? 극의 주연이 이렇게 늦어서야 쓰나?”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하하. 보이지 않는가? 두 세계를 잇는 다리는 완성되고, 그분의 부활이 다가온다.”
다리? 뭉쳐지는 게이트들은 하얀 빛을 쏟아내며 일그러지고 있었다.
게이트는 두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다만 육체가 아닌 혼의 투영체만이 이동이 가능한 제약이 있었다. 차남혁이 말하는 다리는 그런 제약이 없는, 넓은 통로. 즉, 두 세계의 생명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길을 의미했다.
“미련한 짓 그만둬! 벨은 유르고를 부활시킬 생각이 없다! 그는 그 스스로가 모든 걸 통제할 생각이야!”
“유르고? 그 야만스러운 존재를 내가 왜 부활시키지?”
“……뭐?”
“나는 완벽주의다.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가야 해. 너 같은 너절한 존재가 내 삶에 끼어들어서 방해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인간이라는 한계에 묶여 있었어. 대부분의 것들을 통제 할 수 있지만, 소수는 그렇지 못했지.”
광기 어린 차남혁의 목소리.
그래, 차남혁은 미친 쏘시오패스다. 통제광에 남의 아픔을 동조하지 못하는 쓰레기. 그런 존재가 유르고와 어울리는가? 아니, 차라리 영속의 세계를 탐하는 벨과 닮아 있다. 그런 말은 즉……
“나를 통해 그분이 부활하신다. 완벽한 세계를 위해. 너 같은 오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세계! 하하하! 이제야 알겠나? 내 욕망은 애초부터 완벽함이었다!”
“개소리 집어치워!! 너 따위가 완벽을 추구한다고?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 덩어리 주제에 바라는 것이 너무 많다!”
“큭큭. 그건 두고 보면 알 터. 보아라, 세계는 이어지고 그분이 내게 내려오실 것이다.”
“……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스스로의 멍청함에 머리통을 때리고 싶었다. 세계의 통로. 그 말은 경계를 가로지르는 구멍과 같다. 차원에 갇힌 벨이 틈을 만들고 싶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멀쩡한 벽을 두드리겠는가? 아니다. 이미 뚫려있는 공간에서 틈을 찾을 것이다.
바로 게이트.
그리고 지금과 같이 게이트를 엮어서 만드는 거대한 통로에서다.
벨이 힘을 사역 할 수 있는 이유도 알 거 같다. 게이트는 균형의 신이 만들어 둔 물건. 내 신성력을 돈 대신 받은 벨이 이를 속여 힘의 일부를 풀어낸 것이다. 균형의 신은 유르고를 봉인하고 게이트를 유지하면서 중립을 잡아 줄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여력이 없다. 결국 이 통로가 완성되고 심장으로 그 틈을 공격하면……
벨이 이곳으로 넘어온다.
“그냥 둘 수는 없다!!”
“하하하! 너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차남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화려한 빛과 함께 기묘한 생김새의 생명체들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변이체? 아니다. 이 독특한 느낌은 이단의 변이체와는 다른. 그러니까……
“악마!?”
“하하하하! 숨겨 둔 전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막아 보아라. 네 이웃을 위해. 네 친구를 위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너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
“……큭!”
생각지도 못했다.
악마라니. 아르톤이 배신을 때리고 넘어갔을 때, 다른 악마왕 중 차남혁과 손을 잡은 개체가 있었던 모양이다. 심장을 탈취한 것도 아니도 그 능력. 실수다. 완벽한 실수.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싸움을 붙었으니.
“꺄아아아아!!”
“괴, 괴물이다! 사람 살려!”
“오, 오지마! 크아아악!!”
비명 소리가 귀를 후비고 들어온다.
수백 수천 수준이 아니다. 공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악마들은 도심 전역을 뒤덮고도 남았다.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기도 힘들 정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시민들의 대피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그 순간, 거친 마이크 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장내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악마를 보고 군인이 출동했다? 너무 빠른데? 아무리 변이체 사건으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해도 과한 속도다.
“저곳입니다!!”
“죠엘!?”
군 사이로 죠엘이 끼어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의문이 생겼지만 지금은 물어 볼 시간이 아니었다. 군의 등장으로 악마들의 공세는 주춤하기 시작했다. 저급의 악마는 정신체가 아닐 터라 물리화기의 공격으로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다. 시민들이 대피하고, 군인들이 그 위로 뛰어들었다.
“차남혁! 네 차례다!!”
“……하. 하하! 그래, 그냥 넘어가서야 재미가 없지!”
차남혁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펼쳐졌다.
유르고의 힘. 아니, 그건 아니다. 빅터와 마찬가지로 벨의 힘을 가지고 있다. 기괴할 정도로 증폭 된 재생의 힘. 하지만 그것이라면 이미 한 번 격파 한 경험이 있다. 의식적으로 힘을 끌어 들이며 그를 경계했다.
“잘난 균형의 힘! 그것이 무적이라 생각하는가?”
“……!”
날개에서 검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아쿤으로 베어내고 힘을 파동으로 쏘아 보냈다. 무형의 파동이 차남혁을 쓸어갔다. 그의 몸이 한 차례 흔들렸다.
기회. 의식을 한 점으로 모아서 그대로 쏘아 보냈다.
“무적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한 차례 빛이 튀고, 힘이 부서졌다.
재생의 힘으로 억지로 비틀어 낸 게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힘이 부딪혀서 터져나간 것이다. 상성의 우위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 이렇게 되려면 차남혁이 쏘아낸 것이 같은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
“네놈이 어떻게?”
“완벽하게는 무리지. 하지만 파괴와 재생의 힘이 같이 있다면 비슷하게 흉내 내는 건 가능하지 않겠나?”
“그런 잔재주로!”
“하하. 잔재주면 어떠한가? 나는 시간을 끌면 그만이다. 다리가 완성되고, 네가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시체가 되는 그 순간까지!! 과연 네가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피가 거꾸로 솟는다.
영역을 더 넓혀서 힘을 끌어왔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소리가 휘어졌다. 집중 된 힘이 거대한 광구마냥 자리해 아쿤 위로 넘실거렸다.
“어림없다! 아무리 애를 써 봐야 너는 신이 아니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 둔 작은 말일 뿐. 신이 가진 진정한 힘 앞에서는 빛을 발할 수 없다!”
차남혁의 몸 앞으로 거대한 광구가 만들어졌다.
조잡하다. 하지만 그 총량은 확실히 내 것보다 강하다. 통로를 통해 전해지는 벨의 힘과 심장으로 제어되는 유르고의 힘. 전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양임에도 내가 가진 힘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의 말 대로.
나는 신의 대리자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파괴와 재생의 고리를 이루기 위해 균형추처럼 만들어진 존재. 그저 장기판 위의 작은 말일 뿐이다. 신의 힘을 직접 받아들이고 있는 차남혁과 비교해서 힘이 부족하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무슨 영광을 누리고자 싸웠던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됐다. 살고자 싸웠고, 적이 있기에 투쟁했다. 신이라 추앙받기도 했으나, 나는 결국 인간을 택했다. 신의 힘?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걸 달라고 구걸하지도 않는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으로 싸운다.
“신이고 나발이고 우리 세계에서 꺼져!”
광구가 뒤틀리며, 충돌했다.
빛이 빨려 들어가 주변 공간이 어둠으로 휩싸였다. 소리를 비롯한 모든 법칙이 한 순간 정지했다. 그리고 폭발했다. 공간이 먼저 밀려나고 한참 뒤에야 소리가 뒤따라왔다. 빛 무리가 띠처럼 퍼져나가 하늘을 씻어버렸다.
“쿨럭……!”
핏물이 입을 타고 흘렀다.
속이 다 뒤집히는 거 같다. 시야가 붉다. 손부터 발끝까지가 덜덜 떨리며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힘의 충돌은 육체에 영향을 미쳤다.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또 다시 이런 충격에 휩싸이면 육체가 버티지 못할 것이다.
“크……크크크! 대단하군, 대단해! 버러지가 이렇게까지 하다니!!”
“…….”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이제 뭘 더 어떻게 할 셈이지? 너를 도와 줄 사람은 더 이상 없어. 신도 네 편은 아니다. 네 처지를 깨닫고 온전히 죽음을 맞이해라.”
한 쪽 날개가 부서진 상태로 차남혁이 다가왔다.
그의 상태도 멀쩡하지는 않다. 하지만 나보다는 낫다. 벨이 가진 재생의 힘이 그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나도 같은 계열의 힘으로 회복하고 있지만, 순정과 비순정의 차이는 크다.
이대로 지는가?
소시오패스같은 신과 인간의 합작에? 그 동안 죽어라 싸워 온 내 노력이 허사가 되는가? 그렇게나 죽어라 고생했는데!?
“아직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
눈앞이 뿌옇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흰 갑주에 빛나는 검.
불타는 날개를 지닌 전사가 내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다. 익숙한. 그리고 그리운 얼굴이다. 어떻게 라는 의문보다 환희가 가슴을 먼저 채워갔다.
“신이시여. 그대의 검, 쿤이 이곳에 왔습니다.”
* * *
백염을 두른 쿤의 등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은색 철갑에 장검을 든 세이혼. 푸른 색 로브에 긴 지팡이를 짚은 아도란. 불꽃으로 몸을 감고 손가락을 튕기는 루루. 새빨간 눈동자로 사위를 내려다보는 로리안. 나뭇잎으로 몸을 두른 채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숲의 여왕……
내가 알고 내가 경험했던 수많은 이들이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쿤…… 정말로 너인 것이냐?”
“네. 운명의 목소리를 듣고, 그 부름에 답을 하였습니다.”
“별의 탑지기. 그들이로군. 하하.”
이제야 군대와 죠엘의 움직임이 이해가 된다.
별의 탑지기가 쿤에게 상황을 경고하였고, 그것이 죠엘의 경전에 실린 것이다. 내가 전투로 바쁠 때 죠엘이 독단으로 일을 처리. 군을 불러온 것이다. 그리고 그와 맞물려 열린 통로로 쿤이 전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넘어온 것.
핏물을 손으로 훔치고 허리를 폈다.
“길게 이야기 할 시간은 없다. 지상의 것들을.”
“알겠습니다.”
쿤이 손을 뻗었다.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던 이들이 지상으로 낙하하여 악마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군 병력들이 새롭게 등장한 이들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아군임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금세 세를 나누어 악마와 싸우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건방 떨지 마라!!”
잊고 있던 차남혁이 힘을 줄기줄기 뽑아냈다.
힘이 파도가 되어 덮쳐왔다.
쿤과 눈을 맞췄다. 서로 양 편으로 나뉜 뒤, 힘을 뻗어 파도를 갈라냈다. 부서지는 포말이 폭풍이 튀어 주변을 쓸어갔다.
“신이시여, 이자의 힘은…….”
“재생의 신이다. 길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자를 두면 세계는 닫혀 버린다. 어떤 가능성도. 어떤 자유도 없는 세계가 되고 말아.”
“이제야 겨우 발 뻗고 사는데, 그런 건 사양하고 싶군요.”
“자식이 생긴 것이냐?”
“딸 하나와 아들 하나입니다. 보지 못한 건가요?”
“보다시피 이곳이 바빠서 말이야.”
왠지 웃음이 나왔다.
쿤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이. 오래된 친구를 긴 시간 끝에 만난 거 같다. 입가가 간질거린다. 힘이 넘치고 의욕이 샘솟았다.
“시끄러워!! 숫자가 조금 늘었다고 나를 막을 수 있을 거 같으냐!? 두 놈 다 이곳에서 신세계를 위한 재물로 삼아 주마!”
강력한 힘의 파도가 또 다시 밀려왔다.
확실히 힘의 총량에서는 상대가 안 된다. 우위에 있다면 균형의 힘이 가진 상성. 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뒤틀려 있지만, 미세하게나마 그 우위는 가지고 있다. 그것을 정밀하게 닦아서 약점을 찌르는 것이 해법.
“길을 열겠습니다.”
쿤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흰 빛을 몸을 안으로 당겨 안더니 예리한 검을 만들었다. 파괴와 재생이 뒤섞인 균형의 힘. 파도를 베어내더니 길을 만들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생각이 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겠지.
……와라.
힘을 당겨서 창처럼 만들었다.
이글거리는 백염의 창. 열린 틈 사이로 조준을 한 뒤 그대로 던졌다. 공간이 찢어지고 소리를 머금은 채 백색의 길이 만들어졌다.
쩌엉—!
차남혁의 힘과 백색의 창이 충돌하며 뒤틀림을 만들었다.
힘 자체는 차남혁이 우위에 있지만 순도와 예리함은 내가 한 수 위였다. 막이 부서지고 틈으로 파고 들어간 창이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붉은 피가 허공을 수 놓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협공하겠습니다!”
허공을 차서 몸을 띄우자 쿤이 따라왔다.
예리하게 응축한 균형의 힘이 손에 들려 있었다. 흰 띠가 우리의 등 뒤로 이어졌다. 엉키고 엉키고. 한 곳에 구현된 두 가자의 힘이 서로를 이끌어 강력한 파괴력을 만들었다. 본래 하나였던 힘이기 때문일까. 순식간에 증폭되는 힘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빛의 기둥이 허공을 강타했다.
상처 입은 차남혁의 몸이 그것에 쓸려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육체가 부서졌다. 점점이 터지는 힘이 충돌을 알려 주었으나 막을 수 없었다.
“후우…….”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시선을 두며 호흡을 정돈했다.
힘을 바닥까지 긁어낸 터라 탈력감이 대단했다. 쿤이 검을 집어놓고는 옆으로 내려왔다. 그의 얼굴도 꽤나 창백했다.
“신의 세계에서는 이런 전투가 자주 있는 겁니까?”
“그랬다면 우리도 진즉에 망했겠지. 그렇지는 않으니 안심해라.”
“다행이군요. 그럼 저 악마들만 처리하면 되는 겁니까?”
“그 전에 차남혁이 훔쳐간 심장부터 찾아야 한다.”
부서지는 파편 사이를 계속 살폈다.
심장은 신의 상징. 그냥 펑 하고 터지지 않는다. 차남혁이 가지고 있었다면 이 어딘가에 있어야 정상이다.
부우우……!
그때, 낯선 소리와 부풀어 오르는 무언가가 눈에 잡혔다.
붉은 살덩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인간의 수준으로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확 밀려오는 유르고의 기운.
“……심장! 차남혁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크……크크크!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붉은 색으로 점철 된 차남혁이 침을 뚝뚝 흘리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단으로 인한 변이체. 아니,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심장을 직접 사용해서 유르고의 힘을 증폭하고 있었다.
“내 야망을 막을 수 없다!! 힘이여 내게 오라!!”
그것에서 끝이 아니었다.
차남혁의 몸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극단적인 변이체. 있을 수 없는 거대한 유르고의 힘이 그에게로 유입되는 것이다. 우리 세계에 들어와 있는 유르고의 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게이트를 통해서 힘이 유입되고 있습니다.”
“아노스의 봉인은 어떤 수준이지?”
“상당 부분 정화를 했습니다만…….”
그리자는 유르고의 힘을 균형의 신이 자신으로 봉인한 것이다.
이를 정화한다는 것은 결국 봉인을 푼다는 의미와 같다. 재생의 힘을 사용하여 파괴를 누르면서 균형의 힘으로 이를 제어하는 형식. 즉, 안정화 상태의 유르고가 늘어가는 것이다. 균형의 신이 가장 바라는 상태.
하지만 그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봉인에서 풀린 안정화된 유르고의 힘이 아노스에 퍼져있다는 것과 같다. 이때, 심장이 게이트를 통해서 이 힘을 끌어 들이면 어떻게 될까?
— 우오오오오오!!!
이런 괴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일까? 본래 유르고의 절반? 아니면 그 이상? 파괴의 신이라 불린 유르고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이곳에 현현하고 있다.
“미친……! 정신 차려라! 전부를 다 파괴하고 나면 지배고 뭐고 할 것이 남아있지 않아!”
“크아아아아아!!!”
“젠장! 완전히 먹혀버렸군.”
벨도 틀어막아야 하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유르고. 순수하게 파괴를 지향하는 힘이라면 균형의 힘을 쓰는 내가 상성상 우위에 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적이 상대라면……상성이 의미가 있나 싶다. 쑥쑥 자란 키는 못해도 10m는 돼보였다.
“……저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합니까?”
“아노스에서 그리자를 정화하고 정수의 수급은 이루어졌나?”
“아뇨. 오래전 싸움 이후로 힘의 증감은 느낀 적이 없습니다.”
“주체가 나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유르고가 해방되어 늘어난 것처럼, 봉인에서 풀린 균형의 힘도 어딘가 존재해야 맞다. 쿤에게 수습이 되지 않았다면 그건 아노스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 유르고의 힘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당겨 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심장과 같이 완벽한 중추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
“방법이 있나 보군요. 신이시여, 이곳은 제게 맡기기를.”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며 쿤이 말했다.
흰 날개가 다시 거칠게 타오르며 전의를 북돋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는 이가 있다는 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혼자 그것을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신께서 주신 모든 고난조차 이겨낸 저입니다. 믿고 맡겨 주시기를.”
“……무리하지 말거라. 이제는 가족도 있지 않느냐.”
“하하.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용기가 나는군요.”
밝게 웃는 쿤을 두고 위로 올라갔다.
변이가 끝난 차남혁이 시뻘건 안광을 토해내며 먹이를 찾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래서 볼 때도 거대했지만, 위에서 다른 사물과 비교해보니 그 크기가 더욱 실감이 났다. 뒤늦게 자리를 차지한 전투 헬기들이 장난감처럼 보이고 있었다.
— 그오오오오!!!
전투가 시작되었다.
차남혁이 거대한 손을 휘두르며 허공에 뜬 헬기를 손으로 잡아갔다. 황급히 활강해 보지만 크기 차이가 너무 났다. 단숨에 두 대가 허공에서 폭발했다.
콰콰콰콰콰!
반격도 없지는 않았다.
남은 헬기에서 불꽃이 연달아 터져 나오며 차남혁을 두드렸다. 피부가 마구 터지고 진액 같은 것들이 바닥으로 흘렀다. 하지만 그 뿐. 타격은 그대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되레 힘이 나는 듯 보였다. 제대로 유르고의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 차남혁은 파괴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 죠엘! 차남혁에게 붙은 군을 물리라 해!
다급히 의식을 투영하여 죠엘에게 의사를 전했다.
자잘한 군의 병력으로는 차남혁을 제압 할 수 없다. 쿤이 싸우는 것을 방해만 할 뿐. 팩 하고 고개를 든 죠엘이 나를 본 뒤 크게 끄덕였다. 그녀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잘 대처를 할 것이다. 통수권과는 거리가 멀지만 대통령을 잘 잡아 두었으니 알아서 명령을 주도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이제 게이트에 접속하면 되는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쪽과 손을 잡아서. 더 이상 갈 수는 없다.”
검은 뿔에 황소와 같은 몸을 지닌 남자.
새빨간 드레스에 박쥐 날개를 단 여자.
악마왕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 * *
전투가 점차 치열해졌다.
악마왕은 강하지만 지금의 내게 대적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절대로 내게 적극적으로 붙지 않았다. 거리를 두고 견제만 하면서 게이트로 가는 것을 방해했다.
거리를 모두 무시하는 일격도 가능하지만 힘의 소모가 너무 심했다.
공간을 밟으며 최대한 근접하려 노력했다. 붙었다 물러나기를 반복했고, 어둠의 권능과 내 힘이 폭죽처럼 연이어 터져갔다.
“……저쪽은 괜찮은데.”
쿤의 상황은 계속 주시하고 있다.
나와는 반대로 쿤이 차남혁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절대적인 힘의 차남혁이지만 신의 힘을 완전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 결국 거대한 몸에 이끌리는 형국이었다. 공격에 절도가 없고 정확성 역시 떨어졌다. 적어도 한 동안은 버틸 수 있어 보였다.
결국 돌파구가 필요한 건 내 쪽.
“큰 걸 사용해야 하는가.”
아끼다가 똥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냥 크게 쏟아 붓고 전진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손을 폈다 쥐었다 반복하며 수단을 고민했다.
“악마. 내가 처리. 신. 도움.”
“……아도란?”
청색 로브가 눈앞으로 스쳐갔다.
아래에서 악마와 싸우던 아도란이다. 갈색 지팡이를 크게 휘두르더니 푸른 번개를 전면으로 쏘아냈다. 악마왕의 권능과 충돌하며 거대한 폭풍을 불러왔다.
“신이면 신답게 후딱 지나치라고. 쿤, 오빠 귀찮게 하지 말고.”
이번에는 붉은 날개가 스쳐갔다.
사람. 아니, 드래곤이었다. 로리안. 인간의 형태를 버리고 드래곤의 폼을 취하여 거대한 불꽃을 악마왕을 향해 쏘아냈다. 아니, 그 전에 쿤 오빠라고? 나이가 그렇게 되는 건가?
— 뭐 하고 있어!? 어서 가!
아……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로리안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악마왕이 나를 보며 권능을 구사하려 하였지만 그 사이로 아도린이 끼어들었다. 검은 구체와 얼음이 충돌하여 화려하게 폭발했다.
게이트.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둥글게 뭉쳐서 블랙홀 같은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노스. 가까이 갈수록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쿤을 통해 오랫동안 보았던 그 세계. 고향과도 같고, 떠나온 집과도 같다.
균형의 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위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껏 해 준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힘을 빌려 다오. 파괴와 재생의 고리건 나발이건 일단 이겨야 뭘 할 것 아닌가.
고착된 영속의 세계에서 빌어먹을 벨에게 지배당하며 사는 건 사양하고 싶다.
힘이 있다면……
도와다오.
* * *
커다란 석상. 아니, 얼굴인가.
희미한 공간 위로 누군가가 보였다. 알 수 없는 얼굴. 하지만 왜인지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눈이 크게 깜빡였다.
살아있는 건가. 나를 보는 건가? 다가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간에 박제 된 듯 시각을 제외한 다른 것들이 전부 제약을 받고 잇었다.
아니, 그 전에.
대체 이곳은 어디지? 나는 게이트를 통해서 힘을 받아내기 위해 달려들었는데. 이곳이 게이트의 사이인가? 그럼 저 석상은 뭐지?
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석상이 살짝 움직였다.
나를 보고 얼굴을 바꿨다. 묘한 표정이다. 감탄하는 거 같기도 하고, 신기해하는 거 같기도 하다.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단단한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그렇게 잠시 바라봤다.
묘한 표정의 석상과 함께 서로를. 면접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하지만 계속 보다보니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푸른 바다위에 몸을 담군 것처럼. 마음이 안온하고 빡빡하던 머리가 편해졌다.
……아!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석상이 바로 균형의 신. 지금껏 줄곧 나와 함께하며 많은 것들을 해 온 존재였다. 말없이. 단단한 입술을 다문 채 그대로 바라만보고 있지만 이해를 하자 많은 것들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신은 각자의 목적으로. 각자의 마음으로 움직였다.
유르고는 파괴를 위해. 벨은 영속의 세계를 위해. 그리고 균형의 신은 어긋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는 그 과정에서 사용된 도구일 뿐이지 사실 위대한 계획 아래 놓인 영웅은 아니었다.
실제로 균형의 신은 아노스와 지구의 차원을 열어 파괴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였으니까. 우리 쪽에서 보자면 아주 못된 신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그렇게 이해한 것처럼 그 역시 우리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를 보는 눈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하지만 어쩌면 균형의 고리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이치를 따르는 생명일수도 있다. 혼돈에서 균형을 찾고, 파괴와 재생이 이어지며 다시 혼돈으로 회귀하는. 신의 힘이 필요 없이 스스로 흐름을 만들어 가는 종족인 것이다. 그 결과가 종의 멸망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결국 그것 역시 흐름의 하나. 전체로 보자면 균형을 잡아가는 일이다.
그긍.
석상이 다시금 움직였다.
닫혀있던 입술이 밀려 올라가고 새카만 동굴과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회색의. 칙칙하지만 어지럽지 않은 색의 뭉치가 들어 있었다.
……부탁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내 목소리도 튀어나왔다.
그것으로 뿌연 공간이 부서지고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 * *
쾅! 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전쟁이 한창이었다. 폭주한 차남혁은 쿤과, 지상에서는 악마들과 군이 아노스에서 넘어온 세력이 치열하게 싸우 중이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악마왕들이 아도란, 로리안과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게이트도 그대로. 시간은 거의 흐른 거 같지 않았다.
― 어이, 뭐하고 있어!? 뭔가 하려고 했다면 빨리 하라고!
로리안의 거친 진언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살짝 현실감이 없었다. 핀트가 어긋난 느낌. 이곳에 서 있지만 다른 곳에 한 발을 걸친 거 같았다.
“신이…….”
손을 움켜쥐었다.
회색의 빛이 강하게 몰려들었다. 그 사이로 복잡한 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히어로메이커 당시에 눈으로 살피던 것과 같다. 특별한 집중도 없이 그것들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며 천천히 손 아래로 뭉쳤다.
빅터와의 싸움에서 혼란의 중심을 찾은 적이 있다.
인간이 가진 본래의 난잡한 성질을 이용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힘들을 느끼고 그 위에서 널뛰는 무당의 몸놀림으로. 당시에는 힘겨운 파일럿이었다. 신의 힘을 다루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닌 바. 이를 조율하여 흐름을 베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석상. 균형의 신과의 만남으로 하나를 알 수 있었다. 신은 신이 가진 의미를 위해 보다 나은 것에 자신을 맡겼다. 혼돈으로 가득 찬. 그렇지만 균형을 읽어 낼 수 있는 존재.
바로 나에게.
“……무책임하네.”
조금 쓰리게 중얼거렸다.
삼거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의미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남에게 모든 걸 떠맡겼다는 사실이 기쁘지는 않다. 집에서 일이 났다면 알아서 수습해야 할 거 아닌가. 이제 와서 자기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덜컥 문제와 힘을 같이 던져 주다니.
— 위험하다!!
그 순간, 들려오는 로리안의 목소리.
날 선 감각과 함께 악마왕의 권능이 머리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흑색의 물결. 파괴와 닮아 있지만 그 안에는 보다 다른 것들이 뒤섞여 있다. 그래, 사실 삼거신을 제외하고 그렇게 딱 잘라서 선을 긋는 게 어디 흔하겠는가.
흑색 권능을 손으로 잡아서 우그러뜨렸다.
수많은 힘들이 날뛰었다. 복잡하다. 하지만 알 것 같다. 빅터를 베었던 것처럼. 이러한 혼돈 속에도 균형은 존재하고 그 중심을 잡는 것이 가능하다.
“……어떻게?”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와 나의 거리를 삭제했다.
공간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개념일 뿐이다. 이곳에 있는 나와 저곳에 있는 나의 차이. 의미를 해석하고 그것을 거꾸로 풀어 낼 수 있다면 이를 제어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라.”
“……크아아아!!!”
악마왕의 머리를 잡아 어둠으로 눌렀다.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악마왕은 사념체. 욕망을 모아서 일어난 정신의 집약 체다. 어찌 보면 유르고의 미니미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의미를 해체하고 낱낱의 흐름으로 나누어 세상으로 돌려보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하, 하지마! 나는 죽고 싶…….”
하지 말라고 안 할 거였으면, 시도도 안 했다.
남은 악마왕도 머리를 잡아서 분해해 버렸다.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다 바람에 흩어졌다. 응축된 욕망이 터져 나왔지만 세계에 비교하면 조촐한 수준이다. 자연적으로 녹아들면서 사라질 것이다.
“힘. 신기함. 신의 것?”
아도린이 빙글빙글 돌면서 다가오고, 로리안이 변신을 풀고 옆에 안착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쿤을 도우러 가겠다. 너희 둘은 저 아래 상황을 정리해 줘.”
“응. 응. 나중에. 알려 줘. 그 힘. 궁금.”
“에잇, 시끄러워! 빨리 내려와!”
빙빙 도는 아도란을 잡아끌며 로리안이 하강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하카람은 무거운 면이 있는데, 그녀는 조금 가벼웠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일까? 뭐, 그렇다고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차남혁과 쿤의 전장을 바라봤다.
“……어마어마하군.”
신의 힘을 완전히 소유하게 됐기 때문일까.
차남혁이 폭주시킨 유르고의 힘을 온전히 읽을 수 있었다. 순수한 파괴. 마치 토네이도나 태풍을 보는 거 같았다. 다른 잡다한 것들을 밀쳐내고 오직 파괴를 위한 힘만이 집약되어 있었다.
신의 힘을 가졌지만 저 정도 되는 규모는 쉽지 않다.
부모라도 중학생 정도가 작정하고 날뛰면 제압하기 힘든 것이라 해야 할까? 복잡한 힘으로 폭주하는 빅터의 경우가 차라리 더 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떠맡은 일이다.
집을 지키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다. 가장의 무거움을 어깨로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거리가 사라지고 쿤의 옆으로 몸이 이동했다.
“……아! 성공하신 겁니까?”
“수고했다. 지금부터가 내가 상대를 하마.”
“하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쿤이 경쾌하게 웃으며 거리를 벌렸다.
어깨와 배. 전신이 상처로 뒤덮여 있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과거보다 확실히 밝아져 있다. 가족을 이루고 마음의 안정을 취했기 때문일까. 나 때문에 이런 곳으로 불려와 싸움에 뛰어든 것이 미안할 지경이다.
그런 만큼. 빨리 끝내줘야겠지.
“정신 챙겨라, 차남혁.”
답 대신 거대한 주먹이 날아왔다.
예전에 봤던 무슨 만화의 괴물과 같다. 붉은 피부에 거대한 크기. 정면에서 보니까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맞으면 그냥 몸이 가루가 되어 버릴 거 같다. 쿤은 잘도 이런 걸 피했다 싶다.
키이잉—!!
균형의 힘으로 주먹을 잡아챘다.
거칠게 반발했다. 힘이 폭죽처럼 튀고 경계면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뒤틀림을 만들었다. 오래 된 티비의 노이즈와 같다. 확실히 힘의 규모가 다르다 보니 악마들처럼 쉽게 해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건 가능하지.
“목이 아프다. 내려와라.”
힘으로 그를 칭칭 동여맸다.
본래 그리자에 봉인되어 있던 것처럼. 커다란 몸이 조금씩 작아지더니 본래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붉던 몸 위로는 회색의 선들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그아아아아……!!!”
차남혁이 괴성을 토하며 발버둥을 쳤다.
이미 한 번 봉인을 당해 보았던 유르고의 힘이 거칠게 반발하는 것이다. 사실 유르고에게는 딱히 잘못이 없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섭리대로 움직였다. 그것을 사이에 두고 움직인 벨이나 탑지기들이 어리석었을 뿐이다.
“후우…….”
이제야 좀 한눈에 들어오는 사이즈가 되었다.
낮게 한숨을 내쉬며 땀을 닦아냈다. 봉인을 하기 위해 대부분의 힘이 사용되었다. 아노스에 있던 그리자 덩어리가 내 쪽으로 넘어온 격이다. 폐기물 두고 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크아아아!!!”
“그래, 남은 빚은 청산해야지.”
힘의 거품은 처리했다.
남은 건 차남혁의 진신과 그것을 움직이는 의지의 소멸이다. 즉, 차 떼고 포 떼고 왕끼리 한 방 걸고 싸움하는 것이다.
으적—!
크로스 카운터로 차남혁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빨? 하얀 게 튀어나가고 코가 뭉개졌다. 아, 보기 좋아라. 그대로 손바닥으로 턱을 후려치며 몸을 돌려서 목을 뒷발로 찍었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기형적으로 꺾였다.
“크어어억!! 아, 아파!! 아프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폭주한 힘이 봉인되면서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뭐, 그래봐야 살기는 글렀다. 그 정도의 힘을 사역해 놓고 몸이 멀쩡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지금의 차남혁은 바람 빠진 풍선. 활성화 된 유르고의 힘이 그의 광기를 받아서 육체를 유지하고 있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전에 좀 더 패자.
“네, 네놈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떻게 된 거야!?”
“기억이 안 나나? 잘나신 놈들처럼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건가?”
“나, 나는…… 내 몸은…… 새로운 세상의 신을 영접하기 위해…….”
“치매라도 오는가? 똑바로 말해 봐라. 그렇게 신이 나서 떠들던 이야기를.”
“그, 그…….”
차남혁이 비틀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혀 나왔다. 육체의 한계. ‘뭐, 뭐야!?’ 기겁하며 손에 들린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목소리도 탁하다. 입가로 피와 침이 흘러내렸다.
“망가진 네놈의 머리를 위해 세 줄 요약을 해 주지. 너는 벨을 신봉했다. 그러다 나한테 털리고 유르고의 힘으로 폭주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나한테 털렸다. 이해가 쉽나?”
“그, 그럴 리 없다!! 너 따위 하찮은 것한테 내가 당할 리 없어! 나는 완전무결한 세상의 신이 될 남자다!!”
“집어치워. 자신이 저지를 과오의 책임조차 지지 못하는 인물이 신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시끄러워!!!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왕이다! 신이다! 누가 내게 잘못을 묻는다는 말인가!?”
그래, 그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널려있지.
차남혁 같은 쓰레기 말고도 여럾이다. 왕인 것처럼. 신인 것처럼. 지배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잘못을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들. 희극이다. 비극이다. 단죄의 창이 목에 떨어지지 않으니 마음껏 지껄이는 광대들의 놀음.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내가 묻는다. 균형의 신으로. 인간 서준경으로.”
“너 따위가……!”
“닥쳐. 되다 만 쓰레기.”
남은 힘을 보아 단죄의 검을 만들었다.
회색 빛 칙칙한 고검. 죄지은 자를 처단하고 더러움을 씻어 내기에는 이 정도 색이면 충분하겠지.
“아아아아아아!!!”
“폐막이다.”
회색 빛 선이 세상을 양단했다.
* * *
부서지는 차남혁이 천천히 흩어져간다.
그의 중추를 이루던 모든 힘들이 내게 해체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부활은 없다. 지긋지긋한 인연이 이렇게 끝나고 만 것이다. 어쩌면 모든 일의 시작이기도 했던 그의 최후. 후련하기도 하고 조금 복잡한 마음이다.
덜컥……!
그렇게 흩어지던 육체의 파편 중 심장이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서 정지 한 채 그대로 부유했다. 균형의 힘으로 사지를 토막 냈음에도 심장은 무사했다.
이제 저것만 손에 넣고 상황을 정리해 버리면 일은 끝이다.
아무리 벨이 나오고 싶어도 틈을 다 막아 버리면 그만.
덜컥……!
손을 뻗어서 심장을 움켜쥐려고 했다.
거리는 얼마 안 멀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잡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어째서인지 심장은 손에 닿지 않았다. 생각보다 멀었나? 아니다. 내가 잡으려 한 만큼 심장이 물러난 것이다.
덜컹……!
오래 된 차고 문이 닫히는 것처럼.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튀고 기묘한 에너지가 그 위로 점철되었다. 일종의 막 같은. 손을 뻗는 공간 위로 새파란 일렁임이 만들어지며 나를 밀어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둘 수는 없다.
균형의 힘으로 공간을 찢었다. 힘이 스파크를 내며 갈라졌다. 틈이 보이고 다시 심장을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위험합니다!!”
그 순간 들려오는 쿤의 목소리.
동시에 아득한 압력이 나를 찍어 눌렀다. 그냥 버티기에는 쉽지 않다. 얼마 안 남은 힘으로 이를 빗겨내며 몸을 틀었다. 벼락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찌그러지며 내 몸을 튕겨냈다. 손과 어깨가 저릿거리고 강한 마찰에 붉게 달아올랐다.
“하……하하. 대단해.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해 주었군.”
“……벨!”
공간이 틀어지며 그 위로 벨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심장을 쥐고 있다. 펄떡거리는 움직여 보지만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대에게는 정말로 감사패라도 하나 주고 싶은 마음이야. 균형의 힘으로 유르고를 다시 봉인하다니. 내가 해야 할 수고를 줄여 주었어.”
“어떻게. 어떻게 나온 거냐!?”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매번 나타나는 투사체가 아니다. 이건 진신. 살을 저미고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 위압감이 이를 증명한다.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떤 존재보다 차지하는 힘이 크다. 이건 강함을 논하기 전에 존재가 가지는 비중이 차이가 있다.
거신. 그 이름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봉인으로 묶여있던 유르고나, 그것을 위해 일부의 힘만을 사역하는 균형의 신이나 실제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큰 신이라 불린 이유는 정말로 그들이 크기 때문이다. 압도적으로 퍼져오는 힘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어떻게 라니. 보고도 모른 건가? 길은 열렸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있다. 파괴가 있는 곳에는 항상 재생이 있어야 하는 법. 태어난 이치에 따라 나는 차원의 벽을 넘어서 다시 세상으로 넘어 올 수 있었다.”
“……빌어먹을 그 사이에 말인가.”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으니까. 나는 옹졸한 존재가 아니다. 그대가 나에게 반대하여 투쟁한 사실은 모두 묻어주지. 이제는 순순히 내 뜻에 따라 주었으면 좋겠다. 내 가족을 모두 영구히 봉인하거든, 그 기운이 깃든 이라도 곁에 두고 싶거든.”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벨이 선언했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얼굴이다. 눈앞에 있는 나나 쿤. 아노스에서 넘어온 전력 등은 모두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상하지 않다. 세상에 발을 내린 벨의 힘은 너무나 당연하게 이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후우…….”
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다.
호흡을 정리하며 벨의 위압감을 밀어냈다. 전신이 욱신거리며 이에 반발했다. 유르고를 봉인하는데 힘을 다 낭비하지 않았다면 조금 쉽지 않았을까. 작은 아쉬움이 남아있다.
“반항하겠다는 건가?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아무리 네가 힘을 깨우치고 우리가 가진 능력을 전부 끄집어 낼 수 있다고 해도 태생이 다르다. 다룰 수 있는 역량의 차이는 분명하거늘. 포기하고 내게 복종해라.”
“네게 복종하면? 영속의 세계라는 말로 감금이라도 당하라는 건가?”
“이 세계는 재미있어. 높은 수준의 과학과 복잡한 철학을 두르고 있지. 하지만 실존이 증명되지도 않은 신을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어. 마치 누군가 자신들을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 기대를 충족시켜 준다면 나쁠 게 없지 않나?”
“파괴도 재생도 없이. 그 말은 자유도 없다는 것과 같지 않나?”
욱신거림이 사라지고 몸에 자유가 돌아왔다.
신에게 넘겨받은 권능은 확실히 예전보다 강하다. 압도적인 양의 열세로 힘겨루기가 버겁기는 하지만 틈만 잘 찾으면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도 같다.
“자유라. 어차피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는 한정적이다. 대부분, 자신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지. 필요한 건 작은 규제. 영속을 위해서는 세상을 한 곳에 고착시켜 둘 필요가 있다. 무너지지 않는 세계. 아름답지 않은가?”
“……흥. 옛말에 이런 게 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고. 머물러만 있는 사회에 인간들이 만족 할 거 같은가? 파괴든 재생이든 인간은 나아가야 살 수 있는 종족이다. 머물러 있는 것은 죽음과 같다.”
“걱정 할 필요 없다. 너희에게 더 이상 죽음도 없을 테니까.”
“……뭐!?”
벨이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흰 빛이 찬란하게 뻗어나갔다. 이는 나를 스쳐 무지막지한 속도로 세계를 일주했다. 전 세계로 빛이 전달되었다.
“사, 상처가 회복되고 있어!”
“말 도 안 돼. 잘렸던 다리가 다시 재생됐어!”
“오…… 이건 기적인가?”
악마와의 싸움으로 부상당했던 이들이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기적이라 불러도 충분한 위력이다. 거의 숨이 넘어가던 이들조차 빛에 노출되자 금방 기운을 차렸다. 더 이상 죽음이 없다는 벨의 말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불멸을 유지하겠다는 거냐!?”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변화는 무의미하다. 인구는 충분히 있어. 모든 생명은 지금 그대로를 유지하며 영원토록 살아 갈 것이다.”
“성장은? 자식은? 모든 걸 막아 버리겠다는 거냐!?”
“크게 보아라. 영속하기 위해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영원히 자신들의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지 않겠나?”
“미친…….”
희귀병이나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기적일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을 원하는 이들은? 아이가 커가는 걸 보고 싶은 부모는? 죽음을 바라보며 노년을 살고 있는 이들은?
숨이 턱하니 막혔다.
영속의 세계는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박제된 사냥감일 뿐이다. 벨이라는 뒤틀린 신에게 잡힌.
“부정한다. 그런 세계에 살아남느니 온 힘으로 부딪혀서 싸우겠다.”
“어리석다. 신의 힘이라는 것은 인간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붙어봐야 아는 일이겠지!!”
팡……!
남은 압박을 밀어내고 뛰어 들어갔다.
심해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부담이 몸이 가해졌다.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나를 이렇게 누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균형의 신에게 그 힘을 온전히 넘겨받았다. 비록 완벽하게 그 존재를 구현하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방법이 존재한다.
벤다—!
균형의 힘으로 힘의 바다를 베어냈다.
공간이 출렁이며 푸른 색 스파크를 만들었다. 순간이나마 나와 벨 사이의 공간이 열렸다. 그대로 몸을 가속하여 일검을 날렸다.
쩌억. 검을 가로막는 푸른 색 장막.
한 장, 두 장……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단순한 힘의 중첩으로 내 검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가진 놈이 더하다고, 이런 식으로 싸우다니. 이를 악다물고 힘을 쥐어짜 긁어 올렸다.
“발버둥인가. 그것 역시 인간의 본능이겠지. 이끌어 줄 사람을 원하지만 구속하려면 반항하는.”
“시끄러워!!”
검을 좌우로 나눠서 꼬았다.
주변의 힘들이 내게 빨려 들어왔다. 벨의 압력에 눌려있던 것들. 힘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모아서 때리면 그만. 회색으로 발광하는 고검을 만들어 그대로 휘둘렀다. 푸른 스파크와 함께 벨의 머리 위가 크게 출렁였다.
“하지만 진정한 신의 힘 앞에서는 그조차 버리게 될 터. 순수한 과거의 인류가 되어 온전한 숭배를 하게 될 것이다. 변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영원토록 그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다.”
“네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 일 하기 힘들어서 도망친 주제에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기는!”
“도망쳐? 내가 말인가? 웃기는 소리. 부여된 사명이라는 의미로 고리에 묶여있던 형제들과 나는 다르다. 굴레를 벗어 나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이런 내게 도망쳤다고 말을 하는가?”
“하! 부서지는 것이 싫어 떼쓰는 아이 같군! 그래서야 성장할 수 있겠느냐!?”
“건방진!”
중첩된 힘이 산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막는 건 무리. 힘으로 장벽을 둘러 둔 채 이를 옆으로 흘렸다.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터지고 왼쪽 어깨가 부서졌다. 하지만 그것은 금세 회복되었다. 힘을 흘리는 와중에 재생의 능력 역시 일부 훔쳐왔기 때문이다.
균형이 왜 균형이겠는가.
양쪽 다 쓸 수 있어서 균형이다. 밸런스가 안 맞고, 제어력에서는 밀리지만 이 정도 기교는 충분히 할 수 있다.
훔친 힘을 바탕으로 고검을 만들어 앞을 갈랐다.
“어림없다고 했을 텐데!?”
즉시, 벨이 힘을 중첩해서 고검을 찍어 눌렀다.
“그럴 줄 알았다.”
그건 내가 원했던 바.
고검을 풀고 흩어지는 힘을 당겨서 작은 단검을 만들었다. 빛 무리가 등 뒤로 스쳐가고 얕아진 힘의 장벽이 눈앞에 등장했다. 역시 신이라 그런지 싸움에는 능하지 못하다. 단검으로 벽을 찌르고 갈라지는 틈으로 힘의 창을 찔렀다.
“……큭!”
벨의 몸 앞 1cm에서 날이 정지했다.
힘의 장벽을 뚫어냈지만 그 앞으로 더한 것이 있었다. 신의 몸. 완전한 상태의 벨은 유르고나 균형의 신이 가지지 못했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육체가 아닌. 신의 것이 힘 자체를 두르고 내 진격을 막아섰다.
“너와 내 차이를 알게 해 주마.”
하늘이 점점이 쪼개지기 시작했다.
구름이 밀려나고 가시거리가 길어졌다. 저 멀리 뜬 별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언가 반짝이며 그 위로 밀려왔다.
“……유성우!?”
순식간에 대기권으로 진입한 별의 파편이 불에 휩싸이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잘게 나뉘어 크기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숫자가 많았다. 폭발과 함께 몸이 뒤로 밀렸다. 황급히 힘으로 바닥을 만들고 떨어지는 유성을 걷어냈다. 수백, 수천. 얼마나 많은지 다 셀 수도 없었다.
“크아아아악!!!”
“살려 줘!! 사람 살려!!”
“모두 실내로 도망가!! 몸을 피해라!!”
지상에 있던 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유성우의 범위는 넓었고 나 혼자 전부 처리 할 수 없었다. 군과 시민들이 이에 휩싸여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무슨 짓이냐!!”
“너와 내 차이다. 내 영속의 세계를 위해서라면 얼마 정도는 죽어도 상관없다. 너 같은 놈을 남겨 후회를 하는 것보다는 이것이 낫겠지.”
“신이라 말했으면서!!!”
“이것도 신이다. 완벽을 위해서 희생은 불가피한 것.”
“닥쳐!! 그런 게 신이라면 나는 전력으로 부정하겠다!!”
피를 토하며 힘을 쥐어짰다.
색이 어지럽게 얽혔다. 시야가 붉다. 실핏줄이 터진 거 같았다. 힘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자라다. 눈앞의 산은 너무나 높고 두껍다. 내 힘으로 이것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아래는 저희가 막겠습니다!! 신이시여, 부디 그대의 힘을!”
그때, 희미한 빛이 아래에서 올라왔다.
쿤의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균형의 힘이 내게 전달되고 있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힘이 된다. 쥐어짠 힘을 길게 만들어 사방으로 토해냈다.
회색 빛 고리가 나를 중심으로 뻗어나갔다.
콰콰쾅!!! 콰쾅!!
유성우가 회색의 장벽에 막혀 부서져나갔다.
그때마다 몸이 덜덜 거리며 떨렸다.
피할 수 있다. 유성우가 많아도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니까. 그리고 그 힘을 모아서 벨을 상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영속의 세계를 말하며 그 아래에서 사는 인간 하나하나를 부품처럼 다루는 신에게.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고, 증명하고 싶은 길이라고.
아무리 대단한 신이라 해도, 인간 하나가 가진 의지는 꺾을 수 없다.
“쿨럭……!”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참혹했다.
“이제야 신과 인간의 차이를 알겠는가?”
복부를 관통하고 들어간 벨의 손.
흘러내리는 핏물 사이로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 * *
“그 손을 놓아라!!!”
거친 울림과 함께 몸이 흔들렸다.
빛이 튀고 장막이 흩어졌다. 파편이 꽃잎처럼 날리고 붉은 빛이 그 위로 떨어졌다. 불꽃. 어스름한 그림자 사이로 쿤의 얼굴이 보였다.
“신이시여!!”
부름에 답을 하고 싶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복부를 관통한 벨의 손. 그냥 육체에만 타격을 준 것이 아니다. 그의 힘이 내부로 파고들어 나를 좀먹고 있었다. 힘의 공백이 깊게 남아있을 때 들어온 것이라 막기가 어렵다.
“모두 신을 보호하라!!!”
흰 날개가 펼쳐지고 쿤이 달려들었다.
하카림의 딸, 로리안이 불을 뿜고 라라의 불기둥이 그 위로 더해졌다. 세이혼과 그가 이끄는 정병들이 힘을 보탰다.
하늘이 쪼개질 듯한 폭음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그런 공격에도 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손짓으로 파괴의 흔적을 지우고 안개를 걷어냈다.
“소용없다. 너희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 나를 이길 수는 없다.”
“신께 손을 대게 할 것 같으냐!?”
“어리석군. 네가 섬겨야 할 신은 나다. 가짜 신 따위가 아니라.”
“닥쳐라! 네놈이 무어라 말을 해도 내가 모시는 분은 오직 하나 뿐이다!”
쿤이 회색으로 물든 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회색, 균형의 힘.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 힘을 깨우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균형의 신에게 그 근원을 물려받기 전에는 힘이 완벽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역시 무언가 모자란 점이 있다. 강력한 벨의 힘에 틈이 격정당해, 회색의 검이 그대로 부러졌다.
“오빠를 건드리지 마!”
“죽어라, 사악한 신!”
“저도 돕겠어요!”
라라와 로리안이 불을 내뿜고, 숲의 여왕이 넝쿨을 불러와 벨을 제지했다.
어마어마한 힘의 향연. 지축이 흔들리고 공간이 잘게 울었다. 지상에 있던 이들은 그 충격에 귀를 막고 몸을 숙여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벨은 상처 하나 없었다. 신의 힘이라는 것은 단순히 숫자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쿨럭……! 물러……물러나라. 너희가 상대 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신 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일단 이곳에서는 몸을 피하심이…….”
“어디로 말인가. 세상에 그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설사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그의 팔과 다리 정도는 잘라내야겠지.”
쿤을 바라봤다.
그는 나와 같은 힘을 깨우치고 있다. 비록 정수를 체득하지 못하여 모자란 부분이 있지만 그것만 메울 수 있다면 필시 막강한 힘을 사용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벨을 상처 입힐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뒤에 힘을 쿤에게 넘겨서 기회를 보게만 만들어 준다면……
“쿨럭……! 조연은 싫은데.”
넘쳐흐르는 핏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시야가 흐릿하고 몸에 힘이 안 들어온다. 어쩌면 이번에는 살아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위기가 있을 때 도와주던 신도 이제는 없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마지막 순간의 판단과 결과는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미소랑 서율이에게는 미안하게 될 거 같네.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억지로 힘을 쥐어짰다. 상처를 봉합하고, 침투한 벨의 힘을 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억지로 움직인 힘에 고통이 뒤따랐다. 육체적 고통이 아닌, 존재의 침식. 아마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나’라는 사람은 분해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균형의 신이 남긴 정수. 그 자체만이 남아서 떠돌게 되겠지.
……그 전에 넘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은 없다.
최종 보스전 전에 렙업 할 기회라도 주던가. 중간보스전을 2연속으로 하고 바로 최종 보스라니. 누가 제작한 건지 몰라도 난이도가 너무 팍팍하다.
입을 비틀어 미소 비슷한 걸 만들었다.
“내게서 눈을 떼지 마라.”
균형의 힘. 그것을 인간 서준경의 의지로 펼쳐냈다.
회색의 오오라가 몸 주변으로 피어올랐다. 벨이 침투시킨 힘을 막아 낼 여력은 없다. 이게 마지막. 이것으로 최후의 일격을 넣는다.
“……신이시여.”
“슬퍼하지 마라. 나는 죽는 것이 아니다. 나를 믿고 따라준 이들이 있으니, 그 의미는 지워지지 않는다.”
“하오나……!”
고개를 흔들어 쿤의 말을 막고 몸을 움직였다.
벨의 위압감이 나를 찍어 눌렀지만 지금의 내 힘은 얇게 갈린 칼날. 압박을 찢어발기고 공간을 줄였다.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최후의 발악인가. 인간이 과분한 힘을 넘본 대가다.”
“그럴지도. 신의 힘이라는 건 본디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생각 해 본 적 있는가. 이 세상에 너희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하하. 이 세상에 말인가? 그냥 두면 얼마 안지나 스스로 멸망해 버릴 이 세계가? 웃기는 소리군. 너희 인간은 제어해줄 절대적 존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의 욕망에 먹혀서 파멸해 버릴 뿐이지.”
“파멸 뒤에 새로운 삶이 나온다. 그 흐름을 막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 되어야지 너 같은 독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손을 타고 회색빛 균형의 힘이 줄기줄기 새어나갔다.
거대한 고검이 아닌 짧은 단검이 손에 들렸다. 마지막은 가장 익숙한 것이 낫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흥. 무의미한 논쟁이다. 그리고 어차피 결론은 났다. 네 힘을 거두어 심장과 함께 봉인을 시키겠다. 이 땅에 남은 오롯한 신은 나 뿐. 영속의 세계는 완성될 것이다.”
“좆까. 엔딩 없는 게임은 싸구려 덤핑일 뿐이다.”
호흡을 통해 실낱같은 생명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무런 제약 없이 뭉쳐있던 벨의 힘이 나를 공격했다. 타임 어택이다. 내가 죽기 전에 벨을 상처 입히고, 쿤에게 정수를 넘긴다.
“인간의 싸움법을 보여주마.”
벨을 향해 돌진했다.
* * *
힘 싸움은 절대로 안 된다.
절대적인 총량에서도 밀리는 판에 나는 타임 어택을 하는 중. 가능하다면 모든 힘을 날카롭게 벼려서 일격 일격을 치명적으로 넣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상대의 힘 사이로 파고들어 파워 게임을 빗겨나가야 한다.
우르릉……!
거대한 울림과 함께 공간이 나를 향해 밀려들어왔다.
받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검을 전면으로 뻗으며 밀려오는 흐름을 잡아서 빗겨냈다. 거친 소리가 들리고 어깨위로 긴 상처가 만들어졌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힘을 빗겨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의미 없는 짓이다.”
“의미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
줄어든 공간 사이로 벨의 모습이 잡혔다.
발끝으로 허공을 밟고는 그대로 검을 내리 찍었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막이 검극에 닿았다. 집중시킨 힘. 예상했던 부분이다. 즉시 검을 놓고 몸을 돌리며 벨의 다리를 후려쳤다. 발끝에 집중된 힘이 벨의 방어를 관통하고 그를 가격했다.
“……큿!”
“이런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가?”
허공에서 다시 균형을 잡는 벨.
날렸던 단검을 다시 손에 잡아 그대로 던졌다.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벨이 강력하게 힘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건 속임수. 공간을 넘어 벨의 등 뒤로 이동해서 칼날을 뽑아 들었다. 등 뒤로 스파크가 튀고 벨이 한 걸음 밀려났다.
“잔재주를!!”
“인간은 그렇게 성장했다.”
거대한 빛의 칼날이 회전하는 벨의 몸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막을 수 없는 힘이다. 오른 팔에 힘을 집중한 뒤 그대로 밀어 넣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힘이 빗겨나갔다.
대가는 오른 팔. 그대로 부서지며 허공으로 흩날렸다.
핏물이 꾸역꾸역 새어 나오고 허옇게 드러난 뼈 위로 시린 바람이 밀려왔다. 고통? 아득하게 들어와 머리를 흔들었다. 허나, 이것에 손 놓을 거라면 목숨을 걸었다 말 할 수 없다. 이를 거세게 물고 다시 뛰어 들었다.
신이라 해도 힘의 공백은 있다.
거대한 공격 뒤로 주춤거리는 벨이 눈에 들어왔다. 왼 손으로 단검을 잡아서 그대로 그었다. 회색빛과 흰 빛이 충돌하여 강력한 충격파를 만들었다.
“버둥거려봐야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나 하나라면. 하지만 인간은 하나가 아니다!”
그대로 단검을 놓고 튕겨 오르는 것을 입으로 물었다.
장벽은 왼손으로 긁어 비틀어 낸 뒤, 틈으로 몸을 밀었다. 손가락이 죄다 부러지고 팔꿈치부터 으스러지기 시작했지만, 틈을 벌리는 것에는 성공했다.
당황한 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잘난 거신께서는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것은 알지 못한 모양이지.
“크으윽……!”
단검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신의 육체로 막강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지만 집중한 힘은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다만, 상처가 얇다. 신에게 제대로 상처를 주기 위해서는 팔 다리 하나 정도는 끊어야 한다. 무너지는 내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만이 벨이라는 신의 존재를 흔들 수 있으니까.
탁……!
빗겨간 몸을 돌려서 벨의 다리를 걸었다.
다리와 다리가 엉켜서 중심이 어긋나고 균형을 유지하던 힘이 잠시 흔들렸다. 지상에서의 싸움이 아닌 바에는 힘을 흔드는 것으로 효력을 발휘 할 수 있다.
곧바로 몸을 바짝 붙이며 부러진 왼손을 휘둘렀다.
콰직.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나마 붙어있던 뼈가 전부 아작이 났다. 하지만 그 대가로 벨의 왼쩍 어깨에 상처를 새길 수 있었다. 피 대신 희미한 빛이 그 사이로 새어나왔다.
“떨어져라!!!”
빛이 한 곳에 모였다가 폭발했다.
앞뒤 안 가리는 공격. 몸을 웅크린 뒤 힘으로 이를 방어했다. 힘이 방파제에 걸린 파도마냥 내 위로 스쳐갔다. 분산 공격임에도 위력은 대단했다. 벽이 무너지고 충격이 장기로 이어졌다. 핏물이 널어오고 흐릿하던 시야가 더욱 좁아졌다.
남은 시간은 1분. 아니, 그보다 짧을까?
“버러지의 발악은 그 정도면 됐다!”
“쿨럭……! 신께서 화가 나셨나?”
“네놈을 죽이고, 세상에 질서를 세우겠다!”
“복날이 왔나. 왜 이렇게 개가 짖어!”
입가에 맺힌 피를 뱉어내고 다시 달려들었다.
벨의 힘이 망치처럼 날아왔다. 고개를 숙여 피한 뒤 허공의 아랫부분을 차며 몸을 날렸다. 공간이 반전되고 벨의 뒷목이 눈에 들어왔다.
“잔재주가 계속 통할 거라고 보는가!?”
기다렸다는 듯 벨의 힘이 창처럼 날아왔다.
힘은 방향성에 제약되지 않는다. 뒷목에 맺힌 빛의 창이 목 언저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황급히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절명했을 것이다. 몸에 둘러 둔 방어막은 소용없었다. 벨도 나와 마찬가지로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 번이면 된다.
부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당겨서 벨의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레슬링의 태클과 비슷한 자세. 하지만 나는 양 팔 모두를 사용 할 수 없었다. 가진 거라고는 다리와 이빨 정도?
“네놈!!”
다시 날아오는 빛의 창.
피할 수는 없다. 모든 힘을 입으로 모아서 그대로 물었다. 힘이 폭발하며 얼굴의 절반을 날려버렸다. 한 쪽 눈도 터져버린 거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혀도 잘려나갔을 까. 이제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없게 됐다.
“크으윽……!”
하지만 그것으로 접근에는 성공했다.
미리 뱉어 둔 단검을 발로 강하게 밀어서 벨의 왼쪽 팔을 관통시켰다. 힘을 집중시킨 덕에 그의 방어가 약해져 있었다. 흰 빛이 마구잡이로 튀며 고통어린 벨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붉게 물든 시야 속에서 보이는 건 뒤틀리는 벨의 실루엣뿐이었다.
“쿨럭……!”
힘이 바닥났다.
더 이상 공간을 부유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벨은 상처 입었지만 아직 멀쩡하다. 조금 더 상처를 입혔으면 좋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겠지.
……쿤.
부름이 들렸을까.
그가 나를 바라봤다.
얼마일까. 그와 함께 해 온 시간이. 차원을 넘어서 다른 운명 속에서 서로를 개척해 준 인연이.
이제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그밖에 없다.
빌어먹을 통제광 신을 물리치기 위해서. 내 딸과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비록 그곳에 내가 없다고 해도……
부탁한다, 쿤.
내 반쪽과 같은 친구여.
모든 힘이 빠져나가고, 의식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