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35화 (235/240)

차동남의 기억을 읽고 난 뒤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차남혁이 북으로 갔는지. 어째서 미사일을 가지고 시위를 하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

이런 미친놈들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여 뭇 사람이 미친 짓이라 할 법 한 인들을 거침없이 저지른다. 이번 일도 그렇다. 처음 그 일을 듣고 난 뒤 나는 차남혁이 미친 거라 생각했다. 그에게 동조하는 이들도.

“핵이라니…….”

벨은 차원 너머에 봉인되어 있고, 이는 신의 힘이 아니라면 풀 수 없다.

유르고는 심장이 없고, 균형의 신은 내게 일을 맡겼다. 그는 풀려나올 수 없는 무기수와 같은 처지.

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무기수와 면회를 하고 식중 결혼을 하는 미친 종자들이 있다. 어떤 목적이 있든 아니면 단순한 추종이든 그 숫자가 충분해지면 이 무기수를 위해 괴악한 짓을 저지를 수도 있는 법.

북에서 미사일을 가지고 긴장을 높이는 건 우리가 타깃이 아니다.

동북아의 긴장은 전 세계적인 텐션을 높인다. 지금의 도발이 과거의 것과 사정이 다르다는 건 다른 나라에서 알 테니까. 무장을 단단히 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쾅. 선제공격으로 핵탄두 600발을 소모한다.”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핵탄두 600발이라니. 그 중 태반이 소형화를 고려하여 파괴력을 줄였다지만 절반만으로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북한, 러시아, 중국. 그리고 세계 각지를 통해서 볼튼 사가 모은 핵탄수의 숫자가 그렇다.

북에서 이 600발의 핵을 쏘아 올리면, 반드시 보복 공격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세계 전쟁을 불러온다. 물론, 북의 미사일 공격도 이런 시나리오와 닿아 있지만 지금 것은 시작이 핵전쟁이다. 복잡한 계산으로 피해인구를 산출할 수는 없지만 못해도 인류의 절반은 날아갈 것이다.

일류의 절반을 날리는 것이 무슨 계획인가?

그건 바로 영혼에 있다. 영혼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다. 망령제어나 의식의 검에서 보았듯이 내재적 힘은 굉장하다. 차남혁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는 이를 이용하여 차원의 벽을 붕괴. 벨을 이곳으로 불러오려는 것이다.

유르고는 심장이 없고, 균형의 신은 내게 일을 맡겼다.

앞과 같은 설명이지만 뒷말이 더해지면 상황이 다르다. 온전히 신의 힘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벨이 유일하다. 거신 셋의 힘 균형을 내가 다 알지는 못하나, 멀쩡하지 못한 둘보다는 멀쩡한 하나가 더 셀 터.

그가 차원의 벽을 허물고 이곳으로 넘어오면 일은 개판이 된다.

“후우.”

솔직히 이게 가능한 계획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10억의 인간이 한 번에 죽는다? 그 순간 발생하는 거대한 영혼의 흐름은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나는 서울시의 인간조차 전부 체크하지 못한다. 그 몇 배나 되는 숫자가 갑자기 풀려 버리면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발생할까? 아무리 차원의 벽이 단단하다고 해도, 이를 이용 할 수만 있다면 부서지지 않을 거라 말하기 어렵다.

“이 부근인가…….”

함경북도 청진 외곽에 위치한 항구.

러시아 쪽 물자를 받아서 거대한 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공업단지 같지만 곳곳에서 보이는 무장한 군인과 이단의 기운이 관련된 장소임을 증명했다.

차동남의 정보는 완벽하지 않았다.

차남혁이 그를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아직 일이 전부 진행되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핵탄두의 행방 자체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장소에서 무언가 큰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국내의 상황을 어지럽게 만들라는 것 정도를 지령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알고자 한다면 이곳이 시작이다.

“빨리 실어. 일정을 서두르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더? 이제 막 들어왔다고.”

“시끄러워. 명령이니까 하라는 대로 하기나 해.”

“젠장. 그 빌어먹을 원숭이 놈들이 끼니까, 일이 이상하잖아.”

러시아어가 귓가로 들려왔다.

베레모와 완전 무장을 한 모습. 일반 군인은 절대 아니고 특수부대 소속으로 보였다. 러시아 정부에서 완전히 협조를 해서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일부 군부가 손을 잡고 행동에 나선 걸까.

뭐,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привет?”

어깨를 툭. 짧은 인사말에 금발의 러시아인이 돌아봤다.

하적장 전부를 눈 아래에 두는 초소. 무전기를 들고 능숙하게 지휘를 하는 인물이었다. 경비나 일꾼보다는 이쪽이 더 아는 것이 맞겠지.

철컥……!

매우 빠르게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더니 나를 조준했다.

이 반응 역시 일반적이지는 않다. 입구를 손가락으로 막은 뒤 손목을 쳐, 권총을 뺏고는 그대로 분해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부품에 얼굴이 복잡해졌다.

“앉아.”

무릎을 툭 치고, 입을 틀어막았다.

뼈가 부러지자, 눈이 주먹만 하게 커졌다. 곧바로 아쿤을 꺼내 목덜미에 댔다.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더니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모양새다.

“몇 가지를 물어보마. 제대로 대답을 한다면 살려주지. 이해했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느리게 고개를 끄덕끄덕.

그럴 수 없다고 버티는 것보다는 편한 태도다. 입을 막은 손을 떼고는 슬쩍 물러났다. 그러자 번개같이 남자의 발이 올라왔다. 군화 앞코가 있는 쪽에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거다.

“……!!!”

발로 남자의 발등을 밟아서 막은 뒤, 그가 들고 있던 무전기를 빼앗아 입에 틀어박았다. 크기가 맞지 않아 이빨이 우수수 부러졌다. 고통어린 신음과 피거품이 입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그러니까 한 번에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

“두 번은 없다. 죽고 싶다면 시도해도 좋아.”

잠시 고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무전기를 뽑았다.

컥컥 거리며 피를 토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겁먹은 눈동자. 이번에는 확실히 제압이 된 거 같다.

“들어오는 화물 목록. 그리고 배송지.”

“……저, 저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컴퓨터를 가리켰다.

화면이 깜빡이고 있었다. 슥 보니, 입출고 내역을 적는 화면 같았다. 아, 이걸 먼저 말했으면 괜히 이빨 뽑아버릴 이유는 없었을 텐데.

……골재인가?

대부분이 전문 용어라 알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는 눈에 들어왔다.

구조물의 프레임을 담당하는 재료들. 얼추 양으로 봐도 수백 톤이 넘어갔다. 출납 일지를 살펴보니 꽤나 긴 시간동안 이루어진 작업. 이런 거라면 수백 톤이 아니라 수천. 아니, 수만 톤 이상의 중량이라 예상 할 수 있다.

그 정도의 중량이 들어가는 구조물이 뭐가 있을까?

“무슨 목적으로 들여오는 거냐?”

“저, 저는 모릅니다. 그냥 출납 장부만 정리 할 뿐이라…….”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 그것까지는 잘…… 매번 다른 사람이 와서 물건을 가지고 갑니다.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대상을 잘못 정한 거 같다.

거짓말 하는 기색은 없고, 정말로 수량 체크만 하는 인원. 뒷목을 후려쳐서 기절시키고 장부를 따로 카피를 했다. 나는 전부 알아 볼 수 없지만 죠엘이나 고무식은 무언가 아는 바가 있겠지. 아니면 하퍼라도.

……띡.

알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정보를 전송했다.

지잉—!

그리고 단말기를 다시 품 안에 넣는 순간.

무언가 아득한 위기감이 몰려왔다. 전후좌우. 방향과 상관이 없었다. 마치 이 시간, 이 장소가 위기 그 자체인 것처럼.

콰아앙—!!

곧이어 이어지는 폭발.

황급히 힘을 구체로 몰아 몸을 보호했다. 초소가 박살나고 주변 집기들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내가 기절시켜 두었던 경비 역시 마찬가지. 몸이 산산이 분해되어 불꽃과 함께 사라졌다.

포격이다.

힘을 사방으로 밀어내, 폭발을 견디고 몸을 위로 뺐다. 대기가 발아래에서 터져나갔다. 그리고 한 호흡도 지나기 전에 지면이 다시 한 번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탄이 보였다. 곡사포라고 해야 하나? 사람 몸통 만 한 탄환들이 줄지어 내가 있는 지역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주변에 직원들이 아직 남아 있었음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폭발이 층층이 쌓이고 주변 일대가 쑥대밭이 되어갔다.

“미친……!”

내 침입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 치고, 이 포격은 정말이지 거침이 없다.

아무리 러시아나 북한이 깡패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도 어느 정도 거를 건 거른다. 자국 내에서 이런 포격을 가해버린다는 건 날 잡는데 무엇도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투투투투투……!!

이번에는 전투 헬기.

포격이 시작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륙한 모양이다. 어떻게 이리도 빠른 시간에 대응이 가능할까? 나는 정보를 얻고 난 뒤 모든 감시 체계를 무력화 하고 날아왔다. 아무리 대공 레이더가 좋아도 사람 하나 날아가는 것을 잡아내는 건 무리.

“벨 인가…….”

그가 건네주었던 잡다한 물건들.

어쩌면 차남혁도 그 중 일부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나를 추적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내 위치를 잡아내는 건 말이 안 된다.

콰콰콰콰콰콰—!!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전투 헬기가 나를 포위하더니 그대로 사격을 시작했다. 개틀링건이 불을 뿜고 수천발의 총알이 나를 두드렸다. 물론, 이건 문제가 없다. 나는 투사체의 공격을 방어할 만한 수단이 충분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정도의 물리력은 나를 해칠 수 없다.

챙—!

무언가 더 강한 조치가 되어 있지 않다면.

헤르스 미러가 단번에 부서졌다. 그 사이로 총알이 비집고 들어왔다. 황급히 힘으로 장막을 만들어서 이를 잡아냈다. 수천, 수만 발. 인간을 다루는 것에 비해서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다.

다만, 헤르스 미러가 부서진 것처럼 다른 공격이 추가된다면 위험 할 수 있다.

잡아 두었던 총알을 거꾸로 튕겨냈다. 철판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주변을 포위하던 전투 헬기들이 단번에 추락하기 시작했다.

새카만 연기가 긴 꼬리를 만들면서 이어졌다.

“……염병!”

하지만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먼 거리. 포격이 시작된 부근쯤에서 미사일이 나를 향해서 쏘아져 올라왔다. 척 봐도 유도 기능이 있는 물건이다. 미사일은 전부 다섯 개. 영화로 보던 것보다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내 시야로 들어왔다.

서걱—!

의식을 따라 검이 만들어져 미사일을 허공에서 베어냈다.

다만, 주인공 등 뒤에서 멋지게 폭발하던 영화와는 다르게, 내가 떠 있는 위치는 미사일의 폭발 반경이었다. 다섯 발의 미사일이 동시에 폭발을 시작하자 어마어마한 압력이 나를 두드렸다.

고온 고압의 환경. 그리고 정신을 쏙 빼 놓는 흔들림과 소음.

힘으로 장벽을 만들어서 이를 단절하고 있지만 순수한 물리력 자체를 전부 배제하지는 못했다. 내가 완벽하게 신과 같은 힘을 쓴다면 이조차 무시하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나는 이제 겨우 균형을 찾은 것에 불과하다. 파괴와 재생. 양 극단으로 향하는 힘을 완벽하게 무시 할 수 없다.

“……큭!”

이번에는 열 발이 날아온다.

한 번 당해주니까 아주 신이 나셨군.

“멈춰라!!”

망령제어의 요령으로 미사일을 허공에서 부여잡았다.

중량에 속도. 기초교육으로 알고 있는 물리 공식이 내 망령제어를 뿌리치는 에너지를 산출해냈다. 숨이 턱 막히고 손끝이 저려왔다. 에너지 총량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지만, 순간적인 방출과 제어가 아직 미진한 수준이었다.

“끄응……!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그래도 돌릴 수는 있었다.

쏘아올린 작은 미사일 열 개를 포대로 다시 돌려보냈다. 비명과 악 바친 목소리가 먼 거리를 건너 들려왔다. 어차피 전쟁에서 피해자를 없앨 방도는 없다. 적이 죽거나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인 싸움이다.

무슨 균형의 신이 그러냐고 따져 묻고 싶다면 한 마디 할 뿐이다.

나는 균형 악 성향이다.

너무 게임틱했나?

* * *

전투 헬기 다섯 대에, 자주포 4문. 그리고 미사일을 쏘아 보낸 이동형 발사대가 전부 5개. 이를 지키던 병사들은 전부 제외하고 셈한 숫자다. 내가 올 것을 예측하고, 심대한 타격을 때려 넣었다. 아마 균형의 힘을 깨우치지 못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수많은 병기들은 신의 힘조차 침범하는 수준이다.

폐허가 된 공간을 눈으로 훑었다.

난장판이 되어 있었지만, 몇 가지는 분류해 낼 수 있었다. 선적된 물건이 들어온 방향과 나간 방향. 앞서 살핀 골조의 무게는 상당하다. 그것들을 단체로 이동시켰다면 보통 중량이 아닐 터.

……있다.

차량이 지나간 흔적은 여러 개였지만, 그중 몇 개가 두드러질 정도의 흔적을 보이고 있었다. 타이어가 눌린 흔적이라 해야 할까. 보통 사람을 알 수 없겠지만, 나는 구분이 가능하다. 바퀴가 여럿이고 텀이 길다. 거대한 트레일러가 통째로 물건을 싣고 움직인 거 같다. 방향을 살피니 대충 서쪽.

“문제는 서쪽 어디인가인데…….”

좁은 지역도 아니고, 서쪽을 전부 다 뒤질 수는 없다.

이정도 물건을 뽑아내어 옮겼다는 건 역시, 핵을 이용한 계획의 밑그림이라는 뜻. 그 장소를 파악해서 미리 처리할 수만 있어도 상대의 의도를 사전에 방비 할 수 있다.

우웅……!

위성 전화. 떠나기 전에 받았던 물건이다.

하퍼의 식별 번호가 액정에 떠 있었다.

“벌써 분석이 끝난 건가?”

“분석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만, 이건 제가 아는 영역인 거 같습니다.”

“알고 있다고?”

“네. 우주공학 관련해서 몇 년째 투자하고 있는 분야가 있습니다. 태양의 플레어가 내뿜는 거대한 에너지를 수집해서 에너지원으로 삼자는 계획이죠. 일반 태양광과 다르게, 순간적인 에너지를 집적. 그것을 사용하자는 프로젝트였습니다.”

태양의 플레어는 표면 온도보다 훨씬 고온을 내뿜는다.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플레어가 발생하는 초 단위의 시간 동안 강렬한 충돌 현상이 벌어져 에너지를 뿜는다고 예측하고 있다. 이것을 순수하게 환원하면 현재 인류가 사용하는 에너지원 정도는 우습게 무시 할 수준.

“핵폭발에 이어서 발생하는 혼의 증발을 이것으로 담겠다는 건가?”

“그런 게 가능합니까?”

“상식에서는 무리. 하지만 상대해야 할 존재를 고려해 보자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 혼이라는 건 우리가 규명하지 못한 일종의 에너지. 만약 이를 담을 수 있고 활용 할 수 있다면 계획 자체가 허구는 아니다.”

플레어를 담아 내기 위한 계획이었다면 기본적으로 그 용량이 클 터. 이를 개조하여 수십억 인구의 증발을 에너지로 환원해서 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담아 둔 에너지로 차원의 벽을 허물어 벨을 불러온다는 이야기…….

“그 프로젝트에서 만들던 구조물의 크기는 어떠했나?”

“돔 구장 스무 개를 연결해 둔 것보다 컸습니다.”

“상당하군. 그렇다면 위성으로 이를 집어낼 수 없을까? 그 정도의 구조물을 건설하고 있다면 눈에 안 띄기가 어려울 텐데.”

“위성으로 말입니까? 하지만 북측을 정밀하게 훑어가는 건 군사 위성이 아니면…….”

“무리인가?”

“……음. 수를 내 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서쪽을 직접 훑어가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다.

게다가 소모된 힘도 회복해야 한다. 그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통화를 끝냈다. 새카만 연기 저편으로 군인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건 아마도 북한의 주력군이겠지.

허공을 밟으며 서쪽으로 이동했다.

* * *

한참을 서쪽으로 이동해서 작은 숲에 내려섰다.

반 쯤 토목사업으로 헐벗은 숲이었다. 기구들이 주변에 놓여있고, 허물어진 건물이 듬성듬성 배치되어 있었다. 빈곤 때문인지, 다른 연유가 있는지 사람들이 떠난 장소였다. 대충 빈 집을 하나 잡아 몸을 숨겼다.

“……”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

작은 뼈들이 집 안, 무너진 잔해 사이로 보였다. 그것도 꽤 여럿이었다. 굶주림 탓에 죽은 걸까, 아니면 이곳에서 북의 만행이 저질러진 걸까. 알 수 없었지만, 앙상하게 남아버린 뼛조각들은 가슴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런 것을 볼 때면 균형이라는 것이 의미 있나 싶다.

파괴와 재생의 고리는 대국적인 차원에서 균형을 의미한다. 하지만 세상의 안으로 눈을 돌려보면 절대 균형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부의 불균형, 기회의 박탈, 가치의 상실……

모든 것은 극단으로 위치하고, 소수의 손짓 하에 수십억이 휘둘리고 있다. 균형을 외치고, 인도와 정의를 수호하는 자는 절대적 소수. 그 일에 동조하는 이들 역시 삶을 버리고 투쟁할 만큼 열성적이지 않다. 눈과 귀. 입과 손가락. 무미건조한 울림 속에 세상은 더욱 균형과 멀어지고 있다.

만약, 유르고를 전부 처리하고 벨이 침범하지 못하게 세상을 막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그대로 두는 것이 최선일까? 70억에 가까운 인류의 삶을 내가 손에 쥐고 흔들 권리가 존재하나?

난제다.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그것이 최선이 될지는 미지수다. 선각자의 행동은 선의에서 나오나, 후대에서 이를 따르는 이는 이익과 욕심에 기록을 뒤튼다. 우리는 이미 곁에서 그런 걸 겪지 않았는가? 부의 착복과 선망의 열의에 눈이 멀어버린 종교인들. 이익의 분배와 균형어린 삶의 제공을 앞세웠으나, 커져버린 몸뚱이에 발치 아래 작은이들을 보지 못하는 거대 기업들.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해서 달라 질 수 있다고 확답하기 어렵다.

지금도 세상에는 ‘이름 없는 자’를 외치며 광신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구원이라 외치며 테러를 감행하고 거짓된 선동으로 사람을 모아 자신의 이득을 불린다. 내가 살아있는 신으로 모습을 꾸몄을 때 과연 그 모든 것을 조율 할 수 있을까?

“하아…….”

당면한 문제만큼이나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것들이다.

“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구멍 뚫린 건물의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그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모든 걸 본래대로 돌리고,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아니면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를 하며 고통을 안고 가는 것?

“……물어보나 마나한 거로군.”

바닥에서 기어 올라와 통령까지 거머쥔 인물이다.

뒤를 돌아보고 과거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그에게 없을 것이다. 오직 전진. 깨지고 박살나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선택지일 터. 아마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답일지도 모르겠다.

완벽은 없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세상은 절대적인 무언가로 돌아가지 않는다. 신앙은 저울추일 뿐, 길을 만들어주는 설계사가 아니다. 기업의 선택도 마찬가지. 누군가 몸을 불려 작은이를 누른다면,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작은이들을 이끌어야 한다.

빛만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는 것.

어둠이 있고 빛이 있고. 저울에 올려 둔 추들처럼, 세상은 계속 조율해 나가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균형. 딱 맞춰서 멈춰져 있는 것이 균형이 아니다. 변하고 어긋나고 뒤틀리면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노력하는 것.

끝없이 정진하여 나아가면 진리를 깨우칠 수 있나니.

중용은 도리의 끝이 아니나, 시작이 될 수 있다.

머무름 없이 나아가는 균형의 도리.

그래, 이것이 추구해야 할 방법인가 싶다.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어둡지는 않았다.

* * *

“백두산? 정말인가?”

“네.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다량의 열원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위성을 견제하는 듯, 주변을 통제하고 있지만 분명해 보입니다.”

“구조물의 흔적은?”

“전체 윤곽은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며칠간의 영상으로 다량의 트레일러가 백두산 부근으로 진입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백두산이라. 알았다, 수고했어.”

통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백두산. 어릴 적 책으로나 보았지만 실제로 가 본 적은 없다. 민족의 영산. 작금에 와서는 중국으로 절반이 팔리고 남은 지역마저 위태롭지만, 여전히 대표적인 산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거대 건축물을 산에서 구축하는 건 어렵다.

재료를 옮기는 것도 힘들지만, 지반이 단단하지 않아서 자칫 붕괴의 위험성이 존재한다. 게다가 백두산은 현재 내부 활동이 감지되는 휴화산. 자칫 공사가 분화를 불러오면 대재앙이 초래 될 수 있다.

“……대재앙이라.”

차념혁이 그렇게 멍청이인가?

고개를 흔들었다. 중2병식의 포부에 머저리 같은 언사를 사용하지만 머리가 나쁜 인물은 아니다. 백두산에 구조물을 설치하고자 한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령……

“에너지원 같은 것.”

태양광 패널로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과는 구동 방식이 다르다.

구조물 자체적으로 구동 에너지가 필요하다. 시동의 걸기 위한 배터리와 같은 것. 일반적이라면 평지에 세우고 플랜트를 구동하겠지만, 특수한 조건이 첨부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혼을 끌어 모으기 위한 것에 조건이 있다는 건가.”

그래야 타당하다.

아무리 집적 장비가 있다고 해서 죽음에서 해방되는 혼들을 그냥 빨아들일 수는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그냥 접근성이 편한 곳에 구조물을 올렸겠지. 적합한 지리적 위치에 에너지로 사용 할 수 있는 내부 요인.

민족의 영산이 대학살의 중추가 되게 생겼다.

서쪽으로 향하는 걸음을 서둘렀다.

바람이 찢어지고, 금세 거리가 삭제되었다. 목표를 안다면 이동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산지가 휙휙 뒤로 밀려나고 얼마 안지나 사진에서나 보던 백두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으로 엄중한 경계태세가 유지되고 있었다. 차량은 지정된 것들만 통과 할 수 있고, 사람은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이런.”

게다가 주변 곳곳에서 유르고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묘한 복장에 야시경 비슷한 것을 눈에 단 채. 등 뒤로 보이는 철통은 혼합된 약물인 것으로 보인다. 일전에 싸웠던 놈들과 비슷한 종류. 하지만 숫자가 굉장히 많았다.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숫자만 세 자리를 넘고 있었다.

전부 베면서 들어간다?

아니다. 상대도 준비를 하고 있을 터. 괜히 소란을 피워서 경각심을 내어 줄 이유는 없다. 플랜 B나 자폭 계획 등이라도 있으면 상황이 난잡해 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번에는 몰래 잠입하여 적의 중추를 먼저 뜯어내야 한다.

“후우…….”

숨을 천천히 내쉬며 백두산 안쪽의 모습을 감각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신의 힘으로 공간을 접어서 들어가면 편하겠지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는 무리. 최대한 지형을 익히며 움직인 다음에 나올 때 한 번에 탈출하는 것이 최선이다.

발끝으로 풀잎을 박차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거리는 100여 미터. 외곽 초소를 지나야 백두산 초입에 들어 갈 수 있다. 숨을 죽이고 몸을 배경에 녹인 뒤 천천히 그 위를 넘어갔다.

……발칸에 미사일에 별 게 다 있군.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많은 무기들이 안쪽에 있었다.

무장한 병력도 굉장했다. 천천히 그 곁으로 걸어서 초소를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산길 자체를 아예 포장하지는 못한 듯 본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런 곳으로 자재를 어찌 날랐는지 의문스러웠다.

“헤이. 비 섹터 재고량이 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때, 러시아어가 귓가로 스며 들어왔다.

몸을 숙이고 대화에 집중했다.

“항구가 습격을 당했다. 선적은 우회를 해서 들어올 예정이야.”

“습격? 그 괴물 말인가? 우리도 준비를 단단히 해 놓았는데, 잡았겠지?”

“글쎄.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는 없어. 만약 그 난장판에서 살아났다면 우리도 조심을 해야겠지.”

“설마 여기까지 알아내려고. 위성도 피해서 공사를 하고 있는데, 지들이 무슨 수로 알겠어?”

항구를 습격했던 내용은 이미 전해져 있다.

“그것까지야 우리가 신경 쓸 내용이 아니지. 내일이면 중국에서 마지막 자재가 들어온다고 하니까 경계나 똑바로 서라고.”

“아, 드디어 마지막 부품인가? 이제야 겨우 이 구린 동네를 떠날 수 있겠군.”

“흐흐. 말조심 하라고. 꼬린내 나는 원숭이들 중에 우리말을 알아듣는 놈들도 있으니까.”

어찌 계획 자체는 협조하는 거 같지만, 내부적으로 융화는 잘 되어 보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이내 다른 곳으로 갈라져 사라졌다.

‘마지막 자재가 들어온다.’ 들었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말이다. 생각보다 구조물의 건설이 많이 진척되어 있는 모양이다.

“음……? 넌, 누구……컥!”

길목에 서 있던 남자를 후려 눕히고는 나무 뒤로 끌고 갔다.

시간이 없다. 조금 더 서둘러야 할 거 같다.

옷을 벗기고 남자가 착용하고 있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얼굴을 흉내 내는 건 어렵지 않다. 총을 어깨에 메고 살짝 각진 발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지나치던 병사 몇이 나를 봤지만 별 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산 위로 걸음을 옮겼다.

* * *

산길 중간중간 초소가 세워져 있었다.

다섯 씩 근무를 서고, 조금 떨어진 위치에는 사수가 추가 경비를 했다. 나무가 빼곡한 산길이지만, 사각이 별로 많지는 않았다. 랜덤하게 산길을 오가는 군인들도 있었으니.

위로. 위로. 산등성이를 타고 계속 올라갔다.

두 번 정도 예상하지 않은 조우를 해서 적을 기절시켰다. 얼굴을 흉내 내고 복장을 갈아입었다고는 하지만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기절하고 사라진 사람이 발각되기 전 까지 최대한 깊은 곳에 도달해야 했다.

그렇게 절반가량을 등산했을 무렵,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올라왔으면 무언가 구조물이 보였어야 한다. 산등성이를 깎아서 구조물을 세울 수 있게 기반을 다졌다든지. 트레일러에서 내린 화물을 싣고 올라 갈 수 있는 설비도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설마.”

감각을 더욱 넓게 펼쳤다.

백두산 주변을 훑는 것이 아니라 그 안쪽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나무와 돌. 온갖 것들이 감각에 잡히고 어느 한 순간 딱 막혀있던 공간이 뻥 하고 뚫렸다. 자연적 동굴인가 싶었지만 그 통로를 타고 안을 살피면서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내부 기지다.

외부로 구조물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백두산 안쪽을 뚫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트럭이 오고 갈 수 있을 정도의 통로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오래 된 건 분명 아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기반 시설을 세우다니. 천문학적인 돈과 인력이 투입 된 것이 분명했다.

수풀을 밟고 뛰어 능선에서 벗어났다.

빙 동공의 울림을 타고 방향을 잡았다. 내가 있던 곳 반대편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단지 위치만 다른 능선이라 생각했는데 직접 돌아서서 살피니 그게 아니었다. 두터운 철문과 지하로 이어지는 길. 방공호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감각으로 살피는 방법의 한계이자 단점이었다.

넓은 곳을 손바닥 위에 놓은 듯 살필 수 있지만 지금과 같은 실수가 나올 수도 있다. 직접 보고 확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 넘겨짚고 넘어 갈 수 있는 것.

머리를 툭툭 치고 통로 옆으로 딱 붙었다.

실수했다면, 인정하고 빠르게 넘어가자.

경비는 다섯. 전부의 시야를 벗어나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바닥에서 돌을 하나 집어 수풀 너머로 던진 뒤, 움직이는 병사 옆으로 스쳐 들어갔다.

“응? 넌, 누구……0”

둘이 빠지고 셋.

돌을 움직여 둘을 치고 남은 하나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윙 하고 혼이 흔들리고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노루라도 지나갔나?”

“괜히 예민하게 굴었잖아.”

셋이 주저앉자 돌아갔던 둘이 돌아왔다.

반갑다고 나서서 뒤통수를 가격. 예쁘게 쓰러진 셋과 함께 포장해서 구석으로 끌고 갔다. 다섯이 기본 조합. 추가 인원이 이쪽으로 오기 전 까지는 적어도 발각 될 이유가 없다. 풀 등으로 보이지 않게 잘 덮은 뒤 통로 안쪽으로 이동했다.

띡—!

키카드 타입의 락.

쓰러진 이들에게서 뺏어 둔 키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군사용 건물에 사용되는 합금 내벽과 LED가 반겨주었다. 처리 상태나 통로의 규모를 볼 때 북한군 수준에서 처리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국이든 러시아든 막대한 돈을 부어서 이 장소를 구축했다.

즉, 제대로 찾아왔다는 말이다. 숨을 고르고 평정을 유지 한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장한 경비가 중간중간 보였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 타입의 인물들이 꽤 많았다.

[카사노프]

중간 규모의 방 앞쪽으로 안경 낀 노인이 걸어 나왔다.

가슴에 명찰이 달려있는데, 저 이름은 나도 알고 있다. 핵물리학자로, 노벨상에 노미네이트 된 인물이다. 반 년 전, 핵 확산 반대를 외치는 과격분자들에게 집을 습격당한 뒤 모습을 감추었었다.

그런 인물이 이곳에 있었다니…….

“박사, 너무 돌아다니지 마시오.”

“크흠. 볼일 보는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겠소?”

“5분 줄 테니, 후딱 처리하고 오시오.”

거친 억양과 함께 발자국 소리가 내 쪽으로 들려왔다.

벽을 손으로 짚어서 거꾸로 올라갔다. 천장에 툭 튀어나온 부분을 잡은 뒤 그대로 버텼다. 조금 지나자 앞서 보았던 카사노프가 안경을 매만지면서 걸어 나왔다.

화장실.

아무런 표시가 없어서 창고인줄 알았는데 화장실이었나 보다. 카사노프가 건너편 방 안으로 쑥 들어갔다. 잡고 있던 걸 풀어 바닥으로 내려온 뒤 그를 쫓았다. 저명한 핵물리학자면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큰 부분을 맡았을 터. 게다가 말하는 투로 봐서 자진해서 협력하고자 온

“빌어먹을 놈들……!”

카사노프가 거울 앞에서 분을 토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걸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화장실 안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당신 누……읍!!”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칸막이가 설치된 곳으로 끌고 갔다.

버둥거려봤지만, 힘에서 상대가 안 된다. 벽으로 밀친 뒤 단검을 목에 들이밀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딱 닫았다.

“조용히. 몇 가지 질문에 답만 해 준다면 살려는 주겠다.”

“다, 당신 대체 누구야?”

“알 것 없어. 카사노프. 핵물리학자로, 1년 전 사이언스에 실렸던 인물. 맞나?”

“그걸 어떻게…….”

깜빡이는 눈동자에 거짓은 없다.

“이곳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에너지 융합 프로젝트를…….”

“쉽게 설명해.”

“지저에 흐르는 에너지 흐름을 외부 요인과 합쳐서 증폭. 유발 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지저? 용암을 말하는 건가?”

“단편적으로 보자면…… 단층의 움직임이나 토양의 쏠림. 지반의 낙하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지하에서 발생하는 모든 흐름을 전부 총괄한다는 의미.

그것을 외부 요인으로 증폭, 유발시킨다. 작금의 프로젝트가 에너지 개발을 위해서 진행되는 건 아닐 터. 이는 특정 요인으로 강력한 재앙을 불러오려는 시도다.

“프로젝트의 이유는 알고 있나?”

“그, 그건 저도 잘…….”

“생각은 있을 것 아닌가.”

“으음. 오가며 들은 정보를 합쳐보면……아마 무언가 거대한 재앙을 일으키려는 것 같습니다. 외부 요인이라는 것이 핵이고, 이것이 동시에 폭발되어 지층의 유동을 야기한다면 국지적 지진 정도로 일이 끝나지 않을 터. 수십억 인구가 죽어 나가는 대재앙이 초래 될 것입니다.”

플랜 B……

핵으로 인한 대전쟁 시나리오가 성공하지 못하면 이것으로 인류를 뒤엎어 버릴 생각인 것이다. 수십억의 인구가 죽어 나간다면 본래 하려던 계획을 그대로 실행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이상한 부분은 남아 있다.

“그런 재앙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생각이지? 이곳 지하로는 어마어마한 마그마가 흐르고 있어. 그걸 촉발시킨다면 살아 날 수 없을 텐데.”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들은……전혀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살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처럼.”

“모종의 수가 있다는 건가?”

“……아! 제어실에 가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적극적인 태도.

단검을 내려놓고 그를 다시 바라봤다.

“나, 나라고 좋아서 이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따르지 않으면 죽인다는 협박에 어쩔 수 없이 협조를 하고 있을 뿐. 당신이 만약 무언가 방법이 있다면 내가 도움을 주겠습니다.”

“제어실이라. 그곳에 방법이 있다 이건가?”

“현대 과학으로 해석되지 않는 물건이 그곳에 더러 있습니다. 만약,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들이 자신하는 이유가 특정 물건에 있다면 그것들이 분명 할 겁니다.”

“과학으로 해석되지 않는 물건이라.”

벨의 수집품이다.

나한테는 싸구려를 팔아 놓고, 자기는 고가의 물건을 들고 온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건넨 정수나 신성력 등으로 힘을 조금 회복하여 이쪽으로 물건을 넘겨 온 건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이용당했다는 사실은 불쾌하다.

“앞장서라.”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이용해주지.

* * *

“내부 순찰중인가? 박사를 모시고 C섹터도 한 번 돌아라.”

“알겠습니다.”

주변을 순찰중인 놈 하나 잡아 얼굴과 복장을 뺐었다.

박사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는 길에 몇 몇을 만났지만 문제는 없었다.

“이곳입니다.”

“락이 걸려있군. 따로 키가 필요한가?”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인물이 들고 있습니다. 그 얼굴을 바꾸는 것처럼, 여기도 해결 할 수는 없습니까?”

핵물리학자 치고는 꽤나 대책이 없다.

손끝의 힘을 담아 그대로 문을 찔렀다. 보안 패널을 건드리면 경보가 울리게 될 터. 그렇다면 통짜 합금을 뜯어내고 문을 따로 만들면 그만이다. 슥슥 잘라내니 사람 하나 들어 갈 만 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다, 당신 대체 뭡니까?”

“알 필요 없다.”

박사를 툭 밀치고는 뒤로 따라갔다.

안은 꽤 넓었다.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다양한 물건들이 유리벽에 보관 중이었다. 벨을 통해서 넘어온 타차원의 도구. 그리고 그 통로 끝 쪽에 독특한 모양의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저겁니다. 일전에 저 의자를 보며 제어의 중추라 말을 했습니다.”

“이 방 전체를 아우르는 건가…….”

벨의 도구가 핵공격을 비롯한 재앙에서 자신의 장치를 무사히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계획의 절반을 와해시킬 수 있다. 아무리 수단이 있어도 자기도 죽는 길이라면 차남혁 등이 진행할 리 없다.

“잘도 이곳까지 왔군.”

“……음?”

그 순간, 거친 목소리와 함께 의자 뒤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기척을 미리 확인하지 못했다. 방심? 아니다. 지금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기척이 종잡을 수 없다. 마치 연기와 같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잡지 못하는. 지금껏 상대 해 본 적 없는 특이한 기운이었다.

“그 얼굴은 또 뭐지?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는 건가?”

“……설마 빅터?”

“이제와서 속이는 게 의미 있을까, 서 준경?”

그림자가 걷히고, 남자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빅터. 차남혁과 함께 아노스에서 나와 겨루었던 그 인물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모습이 완전 딴판이다. 얼굴의 일부 정도만이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게 해 줄 뿐.

“놀랐나?”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냐?”

“폰에서 퀸으로. 판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왔다. 삼 거신? 재미있는 얘기더군.”

“…….”

“가진 걸 전부 걸고 싸워야 쟁취할 수 있다. 내 모습은 그 증거다. 네가 가진 힘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

몸의 좌측은 기계로 덮여있고, 반대쪽은 흉물스러운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인 근육이 아니다.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서 기괴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마치 만화에서 과장하기 위해서 그려둔 근육이라 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근육이 꿈틀거리며 징그러운 혈관을 밖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벨의 힘인가.”

“큭큭. 네놈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어. 차원의 고립은 완전한 것이 아니야. 그 일부를 이용해 우리와 소통할 수 있었지.”

“역시 그런가…….”

내가 벨이 머무는 곳으로 끌려 간 것이나, 그의 물건이 이쪽으로 넘어온 일. 제한적이지만 벨은 분명 양 쪽 세계에 모두 간섭하고 있다. 차원으로의 완벽한 격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어쩌면 아노스의 파괴가 재생을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파괴가 날뛰면 재생을 원하는 것처럼, 우주적 이치에 따라 벽을 넘어 왔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박사 뒤로 물러나 있어라.”

그렇다면 지금 빅터의 몸을 강화한 힘은 바로 재생일 것이다.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고 밸런스 따위는 개나 줘 버린 형태. 끝없이 재생하면서 생명을 부여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저런 것이 가능 할 터.

하지만……

“무언가 다르군.”

그냥 재생의 힘이었다면 유르고의 힘처럼 내가 찍어 누를 수 있다.

나는 파괴와 재생을 모두 손에 쥔 균형의 사자. 과거 삼거신이 균형을 잡고 있었을 때의 힘이라면 상성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빅터의 힘은 그렇지 않다. 재생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지만 무언가 뒤틀려 있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 좁은 세상 너머에 그런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인간은 얼마나 강해 질 수 있을까? 육체를 초월하고 정신을 초월하고 한계를 밟고 선다! 아름답지 않은가!?”

“그래서 다른 존재의 힘을 손에 넣고, 한계를 넘겠다는 건가? 그게 네가 말 하는 강함인가?”

“하하하. 다른 놈들도 아니고,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 그리고 수단은 상관하지 않는다. 초월하여, 체득하고 그것이 나의 힘이 된다. 나는 이것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설 것이다. 과연 너는 지금의 나를 상대 할 수 있을까?”

차원의 격리는 과거 삼 거신의 힘과 다른 형태를 만들어냈다.

벨의 힘은 재생이지만 내가 다루는 것과 다르다. 뒤틀리고 기형적이며 훨씬 파괴적인. 마치 끝없이 재생하여 숙주를 집어 삼키는 암세포와 같다.

“싸워보자, 서 준경!! 누가 더 인간을 초월하였는지 겨루어 보자!!”

“미친 새끼…….”

“하하하하!!! 좋은 도발이구나!!!”

쾅—!

빅터의 모습이 일순간 눈앞에서 사라졌다.

* * *

아찔한 압박감이 얼굴을 때렸다.

고개를 숙이고 힘을 중첩해서 이를 흘렸다. 마찰음과 함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무게를 아래로 하고 중심을 잡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일격.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기세를 빼앗겼다.

“이게 다인가!?”

“좀 닥쳐 봐라.”

권격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본래 창술을 사용하던 놈인데, 이제는 주먹질이다. 하지만 위력은 더욱 강하다. 하나하나가 포탄과 같고, 빠르기는 총알보다 위에 있다. 제대로 맞으면 힘으로 두른 장벽도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콰쾅—!

아쿤에 두른 의식의 검이 권격과 충돌했다.

삐걱거리며 힘에 균열이 가고, 바닥이 갈라졌다. 뒤이어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내벽이 통째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리벽 안에 보관하고 있던 물건들도 붕괴에 휘말려 들었다.

“이곳이 산 아래인건 잊은 건가!?”

“하하! 상관없다! 초월한 내게 그런 제약 따위!”

“지랄병 나셨군.”

눈 돌아간 빅터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슬쩍 보니, 카사노프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벨의 물건을 제어하게 해주는 의자와 눈앞의 빅터.

힘을 한 곳으로 집중해서 뽑아냈다.

찬란한 검이 손 위에 자리하고, 등 뒤로 날개가 돋아났다. 빛이 안개마냥 몸 주변을 돌면서 시위했다.

“그것이 네 힘인가? 재미있군.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나와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

빅터의 공세가 다시금 폭풍처럼 몰아쳤다.

의식을 장막처럼 두르고 이를 하나하나 쳐냈다. 망치를 몸으로 막는 것처럼, 둔중한 충격이 몸으로 전해졌다. 평면적인 방어로는 버티기 힘들다. 힘을 장막 대신 몸 위로 얇게 폈다.

“포기하는 건가!?”

“좀, 닥쳐보라니까.”

광풍 같은 주먹을 빗겨서 흘린 뒤, 힘을 당겼다.

균형이 무너진 빅터가 앞쪽으로 끌려왔다. 안면에 한 대. 후려치고 난 뒤 몸을 띄워서 다시 연격을 가했다. 정타가 연속으로 성공했다. 확실히 힘을 과하게 쏟아내는 것보다 몸 주변으로 밀집해서 이용하는 것이 세밀한 싸움에서는 유리했다.

“좋군!!”

“변태냐!?”

비정상적으로 돌아갔던 목을 손으로 되돌리며 빅터가 웃었다.

타격은 강렬했지만 그를 무력화 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끝없이 샘솟는 재생력은 어지간한 파괴력으로 무마시킬 수 없었다.

……파괴로 재생과 싸워야 하는 건가?

균형의 힘은 양측을 모두 다루며, 그 중심선을 잡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그만큼 양쪽 모두를 아우르며 제압이 가능하고, 능숙하다면 둘을 모두 상대함에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빅터는 일반적인 재생의 힘이 아니다. 익히 체득한 재생의 힘으로 제어가 안 되고, 그러다 보니 힘의 총량에서 계속 밀리고 있다.

“무슨 잡생각이 그리 많은 거냐!!”

중심선으로 들어오는 권격.

발을 넓게 펼치고 양 손으로 이를 받아냈다. 힘의 흐름이 너무 거칠어 흘리는 것 조차 어려웠다. 바닥으로 분산시키며, 남은 여력을 찍어 눌렀다.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지반이 통째로 가라앉았다.

콰르르릉……!

금이 가 있던 내부 공간이 그대로 붕괴를 시작했다.

돌무더기가 떨어지고 붕괴 된 지반이 모로 기울었다. 황급히 손으로 땅을 쳐 몸을 띄운 뒤 천장을 밟으며 빅터를 넘어갔다. 싸움은 싸움이고, 일단 목표를 챙겨야 한다.

“어딜……!”

하지만 빅터를 넘어가는 순간, 그가 손을 뻗어 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곧이어 시야가 뒤로 휙 넘어가며 등 뒤로 충격이 전해졌다. 다리를 잡아챈 빅터가 그대로 나를 휘둘러 바닥에 찍어버린 것이다.

답답한 충격이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힘으로 방어를 했다고는 하지만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나를 피해서 갈 수 없다.”

“크윽……!”

바닥을 손으로 치며 몸을 뒤틀었다.

잡힌 다리가 풀리고 살짝 물러난 빅터가 시야에 잡혔다. 의식의 검. 아무런 도구의 도움 없이 의식으로 검을 만들어 그를 찔렀다. 하얀 빛이 전면에서 터졌다. ‘크……’ 이 정도로 먹히지 않음은 알고 있다. 다시 중심을 잡고는 몸을 옆으로 뺐다.

콰르릉!!

무거운 울림과 함께 옆구리가 벌겋게 타올랐다.

권격을 회피한 대가. 등 뒤로 이어져 있던 벽이 빨간 테두리를 남긴 채 녹아내렸다. 강력한 권격이 물리적 파괴를 넘어서 대상을 녹여버린 것이다.

입을 찢은 채 웃는 빅터가 눈에 들어왔다.

“도망칠 수 없다고 했지?”

“……스토커는 사절인데.”

붕괴하는 건물.

하지만 피할 곳은 없었다.

* * *

한 번 시작된 붕괴는 멈추지 않았다.

백두산 아래로 뚫어 둔 공간으로 지반이 낙하하고, 약해진 바닥면을 통해서 토사가 헤일처럼 밀려왔다. 내부 공간이 흙과 돌로 막히고 순식간에 사방이 어둠으로 휩싸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는 돌무덤만이 남아야 정상.

그렇게 되어야 했을 텐데……

“이게. 그 물건의 힘인가?”

“큭큭. 설마하니 내가 본거지를 부수면서까지 싸울 정도로 멍청하다 생각한 건가?”

“뭐, 그렇게 보였으니까.”

붕괴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지하 공간을 침범하지 못했다.

희미한 빛을 내는 의자와 경계선을 이루며 낙반을 막아서는 공간. 붕괴되는 지반의 영향을 무시 한 채 내부 구조물은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나와 싸워 보자고!”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빅터의 공세는 파괴적이고 노도와 같았다. 끝없이 몰아쳤다. 소소한 피해는 무시 한 채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막고 쳐내면, 더 강하게 달려들었고 몸을 베어내면 웃으며 회복했다.

싸움은 쉬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흘린 피가 증발하여 붉은 안개를 남기고, 떨어진 낙반이 가루가 되어 흙먼지가 되는 순간에도 싸움은 결착이 나지 않았다.

……모든 힘의 우위는 잊자.

삼 거신의 상성은 그들의 이야기다.

벨이 그것을 벗어나고, 힘을 받은 빅터가 다른 방식으로 운용을 하고 있다면 나도 그에 맞출 필요가 있다. 힘의 신의 것이지만 다루는 건 나 자신이다. 나는 균형의 사자이나, 균형의 신이 아니다.

인간 서준경이 가진 힘이 필요하다.

“크하하하!! 그래, 이것을 원했다!!! 초월한 내 힘을 견뎌 줄 상대! 나를 더욱 높은 곳으로 끌어 줄 상대를!!”

부딪치고 엉키고 폭발했다.

팔이 넝마처럼 부서졌다가 재생했다. 빅터의 다리도 돌아갔던 상태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처절하지만 끝이 없는 싸움과 같다.

……어긋나 있다면 그 어긋남을 보자.

균형의 힘은 파괴의 재생의 고리를 잇는 추와 같은 것.

하지만 나는 히어로 메이커 모드 당시 세상의 모든 힘을 보았다. 재생과 파괴. 그 중간에 끼어 혼합되어 있는 수많은 것들. 균형은 사실 양 극단을 잡아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인 중간의 것들을 다스리는 데 의의가 있다.

눈앞의 상대를 극단의 재생이라 보지 말고, 뒤섞인 것이라 판단하자.

인간처럼. 아무리 악독한 인간이라고 해도 나름의 온기가 있고, 착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속에는 악마가 있을 수 있다. 혼탁함. 그게 인간의 본질이다. 파괴가 될 수도 재생이 될 수도 있는 존재.

그렇다면 너는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느낄 수 있느냐!? 인간을 초월한 내 힘을!?”

“……아니. 그건 초월한 게 아니야.”

빅터와 내 손이 맞물렸다.

노도와 같은 힘이 느껴졌다. 끝없이 재생하며 인간을 탈피하게끔 부추기는 힘. 늘어나고 늘어나서 마치 하늘을 덮어버릴 듯 성장하는 암 덩어리와 같다. 하지만 그렇게 몸이 커진다고 인간을 초월했다고 할 수 있나?

아니다.

비대해진 몸은 숙주를 파괴하고 종국에는 파괴를 불러온다. 끝없는 재생은 파괴를 향해 달려가는 모순의 질주일 뾐이다.

“마치 잃어버린 짝을 부르는 노래.”

벨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차원에 격리되어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존재. 파괴와 재생은 하나의 쌍. 그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 격리되었으니, 그 짝을 찾아 노래 부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그것이 차원의 작은 틈을 타고 전해져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무슨 개소리냐!?”

“파괴를 바라는 재생의 모습은 꼬리를 문 뱀과 같다.”

“……너!”

빅터의 힘이 이해가 된다.

극단에 숨겨진 또 다른 극단. 비대해진 몸속에 가려둔 진실한 모습이 눈에 잡혔다. 알고 있다면 충분히 다룰 수 있다.

콰릉……!

빅터를 잡아서 바닥으로 눌렀다.

끝없이 샘솟는 재생의 힘을 누르고, 파괴를 향해 달려가는 의지를 다독였다. 균형의 중심을 찾은 이상 저울은 내 손에 있는 것과 같다.

“이, 이럴 리가 없다!! 나는 인간을 초월했다!”

“애초에 초월이라는 건 없어. 인간 이상의 존재가 무엇이라 보나? 신? 아니, 네 경우는 무신이겠군. 과연 그들이 인간보다 나은가? 결국 균형추가 어디에 놓여 있나의 문제 일 뿐 초월의 대상은 아니야.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 신보다 나을 수도, 하찮은 미물보다 모자랄 수도 있는 존재.”

“개소리 집어치워!! 나는 인간을 초월했다!! 보다 높은 존재가 됐다고!!”

“집착이 눈을 가리고 스스로를 볼 수 없게 만들었군. 그래서 인간인지 모르겠다.”

“나는 인간을 초월했다! 인간이라 부르지 마라!”

발악하며 힘을 사역해 보지만, 이미 내게 제압되어 있다.

뭐, 쉬운 건 아니다. 힘의 총량 자체는 나와 비슷한 수준. 다만 적의 상태를 완벽하게 알게 된 이후에는 상성 문제로 찍어 누를 수 있다.

이래서 공략본이 나온 게임은 쉬운 거다.

“차남혁은 어디에 있지? 어째서 너 혼자만 이곳에 있는 거냐?”

“크아아아!! 시끄러워! 그딴 놈은 알 바 아니다!!”

“발악해도 소용없다. 어디에 있는지부터 말 해!”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을 초월한다!!”

덜컥. 하는 느낌과 함께 잡고 있던 힘의 고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극도의 광기가 힘의 본질을 바꾸고 있었다. 더욱 파괴적인 것으로. 양측으로 나눠서 담았던 물들이 뒤섞이며 혼탁하게 흐려졌다. 이대로는 간신히 잡아 둔 것을 놓치게 될 판이다.

“멈춰!! 더 이상 움직이면…….”

“죽음도 나를 막지 못한다!! 나는 초월자다!!”

“미친……!”

힘을 풀어내며 빅터가 고개를 들었다.

새카맣게 물든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건 유르고의 힘. 몸을 잠식하는 벨의 힘과 뒤섞여서는 혼탁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균형의 추를 잡으며 둘을 분리하여 내는 내 힘을 억지로 밀어냈다.

인간의 힘.

혼탁함을 느끼고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게 인간이듯이, 인간의 혼탁함이 그것을 뒤섞어 더욱 두려운 힘으로 만들 수도 있다. 유르고와 벨의 힘이 뒤섞인 빅터는 자신의 광기로 그것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놓치면 안 된다.

광기가 두 힘을 섞어 더 혼탁한 것을 만들어내기 전에 잘라내야 한다.

재생과 파괴의 고리. 저울에 놓인 두 힘을 고려하며 의식을 하나로 모았다. 세상의 모든 힘들이 느껴지며 그 색색들이 분간되기 시작했다. 섞이고 섞여 색을 분간하기 힘든 빅터의 모습까지.

“나는 인간을 초월한다!!!!”

저 어지러운 색들의 향연에서 정확하게 필요한 것만 분리 할 수 있을까?

1과 100의 중간을 찾는 거라면 쉽다. 하지만 온갖 숫자들이 다 더해져 무한하게 뻗어가는 셈의 고리에서 그 중간을 찾아내는 건? 이건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끝없이 변화하는 물 위에서 중심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할 수밖에 없겠지.

폭주하는 빅터는 그냥 두면 핵재앙 이상의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파괴도 재생도 아닌 혼탁한 이것이 세상을 어찌 흔들지 알 게 뭔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과, 새 인생의 동반자로 점찍은 서율이를 위해서라도 풀려나게 둘 수는 없다.

모여라……

아랑겔로 하는 요령대로 주변의 힘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빅터의 것처럼 혼탁한 수준이다. 파괴와 재생. 두 극단으로 힘을 나누지 않았다. 혼탁한 것을 상대하려면 나도 그 혼탁함에 몸을 담가야 한다.

보이는가. 보이는가.

일그러진 힘. 일그러진 세상. 혼탁함으로 뒤덮인 힘의 세계. 파괴와 재생. 중심을 잡아 둔 균형이 태어난 가장 근원적 모습. 모든 것의 시작. 모든 것의 끝.

나는 그 안에서 하나의 점을 찾을 수 있는가?

“아니, 점 말고…….”

선? 면? 공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런 거. 모서리를 손으로 받쳐서 중심을 잡을 때 감으로 대충 이 쯤이다 느끼는 거. 혼탁함으로 뒤덮인 힘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어떤 흐름. 마치 오뚝이 아래에 박혀있는 무거운 돌 같은 것이다.

아, 그러니까……

“대충 여기?”

빅터를 베어냈다.

* * *

목이 잘린 빅터를 뒤로 한 채 안으로 걸어갔다.

붕괴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지만, 낙반으로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벨이 남긴 물건의 힘. 이를 처리하고 기반 시설을 제거하면 차남혁의 계획을 틀어버릴 수 있다.

의자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포기 할 줄을 모르는군.”

“……!”

그 순간, 목소리가 하나가 귓가로 파고 들어왔다.

아쿤을 앞으로 내밀며 몸을 돌렸다. 아무런 기척 없이 다가올 수 있는 존재. 그리 많은 게 아니었다.

“저쪽 세계의 일도 방해를 하더니, 이곳도 가만 놔두지를 않고. 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벨이었다.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면서 걸어왔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이지? 잘못을 저질러 추방당했다면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고. 기어 나오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하하. 형님이 말은 아주 잘 골랐어. 기세가 등등해.”

하얗게 웃는 벨의 얼굴 뒤로 무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차원 너머에 봉인 된 채, 그 일부만이 이곳으로 투영되고 있음에도 이 정도다. 신이 가진 본래의 힘이라는 건 아득할 정도로 강력하다.

“이곳을 부수고, 계획을 틀어내면 너는 더 이상 간섭 할 수 없다. 그곳에서 얌전히 갇혀 있어라.”

“너는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제 와서 신세한탄이라도 할 셈인가?”

“궁금하지 않나? 내가 어째서 유르고가 저질러 놓은 파괴의 현장을 재생하지 않았는지. 무엇 때문에 내가 추방을 당했는지.”

속임수인가? 아니면 단순히 시간을 끌기 위한 수작?

하지만 그의 말에 호기심이 동하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전해들은 건 3자를 통한 단편적인 이야기 뿐.

“혼돈에서 우리 셋이 태어났을 때 세상은 황무지 그 자체였다. 살아있는 생명도 없고, 모래 먼지와 바위뿐이었지. 그 위로 싹을 뿌리고 생명을 잉태한 것은 내 역할이었다. 억겁의 시간 동안 천천히. 세상을 생기 있게 만들었다.”

“……음.”

“하지만 세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아름다움이 무너지고 혼탁함이 찾아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계가 병들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그때 유르고가 자신의 역할을 깨달았다. 병들어 버린 몸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병원균을 제거해야 하는 법. 그는 내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재생과 파괴. 그 이름에 맞는 모습이다.

“나는 슬펐다.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재생과 파괴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리. 세상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재생을 포기한 거지?”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이 무한히 이루어지는 고리. 어째서 재생과 파괴를 반복해야 하는가. 완벽하게 정제 된 세상을 영원토록 구축 할 수는 없을까. 의문과 회의는 나를 괴롭혔다. 아주 오랫동안.”

신은 그에 걸맞은 의지를 지녀야 한다.

억겁의 시간과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정신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하지만 3거신은. 특히, 벨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거 같다.

“그래서 그만 두었다. 재생을 멈춰버린 세계는 과연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서. 파괴에 지친 유르고가 혹시나 일을 그만두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결과는 달랐군.”

“재생 없는 파괴는 세계의 멸망을 의미했다. 우리가 태어났던 세계는 완전히 붕괴되어 무너졌지. 더 이상 재생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그리고 그때. 그가 움직였다.”

“……균형의 신.”

“우리 둘과는 달리 이름조차 없는 존재. 시작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자리에 서서 무엇도 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저울처럼. 우리 둘의 행동을 추처럼 달아 그 기울어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을 내가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없었던 거구나.

어째서 이름이 없었던 걸까? 이름을 가지면 파괴나 재생처럼 한 쪽으로 기울어질까봐?

“그는 나를 차원 밖으로 추방하고 폭주하는 유르고를 품에 안아 봉인에 들어갔다. 억겁의 시간. 파괴가 가라앉고 재생이 다시 움틀 때 까지. 하지만 우주의 이치는 계획과 다르게 돌아갔다. 다른 차원의 아주 미미한 힘이 멀고도 먼 우리를 부르기 시작한 거지.”

“별의 탑이 너희를 소환했군.”

“그 뒤는 네가 알고 있는 이야기겠지. 추락한 유르고가 깨어나 파괴를 일삼고, 그가 다시 나서서 봉인을 했다. 나뉜 조각은 세상으로 뿌려지고 유물처럼 남아버렸지.”

“딱히 별 다른 내용은 없는데? 정말로 신세한탄이 하고 싶었나?”

“여기부터가 다르다. 너는 내 목적이 무엇이라 보는가?”

뜬금없다.

차원을 벗어나 자유를 찾으려는 것이 목적 아니었나?

“나는 차원 너머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지속적인 파괴와 재생. 세계 위의 생명들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가 선택하고 있었다. 이것에는 신의 간섭이 일절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되었지. 우리는 이 세계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뭐?”

“이미 알아서 잘 돌아가는 세계에 굳이 우리가 필요한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이 세계를 영원히 이어가게 할 제어력. 중심을 잡아 줄 힘이었다.”

“네 행적을 보면 이해가 안 가는데? 너는 유르고를 풀어서 세상을 아작 내고 네 감옥을 부수려고 했어.”

“그래야 했으니까. 끝없이 이어지는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는 것들은 사라져야 했다.”

유르고와 균형의 신을 필요 없는 것이라 말하는 건가?

“생각 해 봐. 어째서 파괴되어야 하는 거지? 이 아름다운 세계가? 그냥 누군가 잘못된 점을 조금씩 바꿔 가면 되지 않나? 파괴와 재생의 고리나 균형을 잡는 신 따위는 의미가 없어. 우리는 그저 무너진 세계의 사생아일 뿐이야.”

“……뭐야. 그러니까 네 말은 세계가 파괴되는 것이 싫어서 움직였다는 거냐?”

“그래. 바로 맞췄다. 네 세계를 생각해 봐라. 인간이 해악하다는 말이 몇 번이나 나오는가?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해충인 인간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유르고가 깨어나고 파괴의 재생의 고리가 다시 살아나면 과연 이곳이 무사할까?”

“…….”

유르고는 파괴의 신.

문명이 극에 달했을 때, 별 자체를 지키기 위해 파괴를 하는 거라면 현생 인류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인류는 지구 전체에서는 해충에 속한다. 박멸이 실행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럴 거라면 유르고의 힘을 왜 이곳으로 가지고 온 거냐?”

“내가 의도한 것이라 보는 건가? 게이트를 연 것도, 유르고의 힘이 넘어오게 한 것도 전부 내 의도가 아니다. 그렇게 된 상황에서 방법을 찾고자 했을 뿐. 유르고의 힘이 커져서 이 세계가 파괴되기 시작하면 결국 다시 고리가 시작 될 뿐이다. 남은 건 그 전에 내가 직접 이 세계로 내려와 난장판을 수습하는 것 뿐.”

“수십억의 인간이 죽는다 해도 말이냐?”

“멸망 보다는 낫다. 유르고의 심장은 이곳에 있다. 시간이 문제일 뿐 결국 다시 부활하게 될 터. 균형추를 잡아 그를 잠시 봉인해 둔다고 해도 아노스와 마찬가지로 다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나는 다시 고리의 일부가 된다.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해야 하는…….”

벨을 몰아낸다고 해도, 유르고의 힘과 균형의 신이 남아있는 한은 고리가 다시 부활한다는 말. 그리고 그 고리의 부활은 세계의 파멸을 의미. 심한 비약이기는 하지만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면 어째서 아노스는 황폐화가 되었던 거냐? 파괴를 막기 위해서 라면서 왜 그 세계가 망가지는 걸 지켜만 본 거지?”

“처음에는 방법이 없었다. 봉인이 약해지면서 유르고가 풀려났을 뿐. 하지만 그 결과가 내 존재를 더욱 강하게 부른다는 사실도 알아냈지. 아노스를 유르고가 파괴 할수록 재생에 대한 욕구도 강해진다. 그건 결국 고리의 완성. 봉인이 약해지고 유르고가 새어나오며 나를 강하게 부르는 이 흐름. 의도를 읽을 수 있겠는가?”

“……고리를 완성하기 위해서 균형의 신이 일부러 봉인을 약하게 했다고?”

“결과를 보아라. 다른 세계로의 통로도 열리고 파괴 할 수 있는 곳은 늘어났다. 그만큼 나를 부르는 힘도 강해지겠지. 부술 곳이 없다면 부술 곳을 만들어 주어, 다시 재생을 촉발하는 것이 균형의 역할 아니던가?”

“……그런.”

개소리라고 외치고 싶지만, 일리가 있다.

균형의 신은 내게 힘을 주며, 파괴와 재생의 균형을 잡는 존재가 되게끔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두 세계를 이으며 파괴와 재생의 고리를 완성하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잠깐. 그럴 거였다면 그냥 네 봉인을 풀면 끝나는 일 아닌가?”

“아니지. 첫 봉인을 할 때는 그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봉인을 위해 힘을 소모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풀어 줄 여력은 없어. 완전한 파괴와 나를 불러오는 그 사이. 균형을 위해서 노력하는 건 본질과 같지 않나?”

파괴를 막기 위해 사자가 필요하지만, 고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다.

나는 그 균형추. 파괴를 막으며 파괴 할 영역을 넓히고 재생의 존재를 불러오게 하는 도구다. 결국 지금의 이 난잡한 일은 셋의 의도가 얽힌 것이다. 파괴는 유르고의 본질이나 이를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균형의 신과 벨. 그 널빤지 위에서 널뛰기를 하다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군. 아노스의 고난이나 우리 세계의 사건들이 모두 너희의 의도 때문이라 이건가.”

“그러니 내게 협조해라. 영속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필수. 유르고의 힘이 심장에서 잘려나갔을 때.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네가 이 세계로 돌아오면 일이 해결 된다?”

“인간이 자행하는 파괴는 나를 불러오는 힘이 될 터. 혼을 집적하여 차원의 벽을 허물게 되면 둘 사이의 간극을 넘어 설 수 있다. 그때, 네 힘과 내 힘을 합쳐서 유르고를 영원히 봉인하면 된다.”

과연 그것으로 끝일까?

벨이 원하는 것에 균형의 신이나 유르고 둘 다 없다. 즉, 영속을 원하는 자신만이 남아서 세상을 조율하겠다는 의미. 힘으로 유르고를 영원히 봉인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뒤는 내 차례다. 균형의 힘을 가지고 있는 나를 그가 그냥 둘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 의도를 무시하고 벨의 계획을 막게 된 이후에는?

유르고의 심장은 남아 있고 결국 이는 부활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 탐욕이 남아있는 이상 그 힘이 사라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다시 고리를 만들기 위해 균형의 힘이 움직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내 것이라 단단히 믿어왔던 힘이 신의 의도에 휘둘릴 수도 있다는 말.

파괴와 재생의 고리.

분명 이치에 합당한 흐름이지만, 그 시작이 내가 사는 세상이라면 거부하고 싶다. 나는 인간이다. 이기적이다. 내가 아는 이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파괴하면서 까지 흐름에 부합하고 싶지는 않다.

꾸욱. 주먹을 세게 쥐었다.

“세계의 영속이라. 좋은 말이야. 나도 내가 사는 곳이 파괴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그럼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가?”

“하지만 그걸 왜 네가 정하는 거지? 이곳은 우리가 사는 세계다. 다른 곳에서 넘어온 신들이 왈가왈부 할 곳이 아니야.”

“……인간의 고집인가? 네가 가진 힘이 정녕 네 것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라 해도 좋다. 아무것도 없어도 좋아. 인간이 사는 세계의 미래라면 인간이 결정을 짓는 게 옳다. 수십억 인구의 죽음을 대의라 포장하는 너 보다는.”

그래, 이것이 옳다.

신들은 이제 그만. 인간의 세계가 인간에게 파괴 된다면 그건 인간의 업보일 뿐이다. 신들이 와서 좌우할 문제가 아니다. 이 결정으로 균형의 신이 나와 반목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인간이다.

“협상은 결렬이군.”

“어차피 협상은 없었어.”

의자를 손으로 잡아 가루로 만들었다.

* * *

의자가 사라지는 순간 방 안이 통째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힘으로 몸을 보호한 채 밖으로 도망 나왔다. 백두산 한 쪽이 무너지는 모습은 조금 씁쓸했다. 병력들이 대피를 하고 그 안의 시설물들이 통째로 매장되었다. 영혼을 집적하기 위한 장비 역시 그 아래로 파묻히고 있을 것이다.

“장비를 이동시켜라!!”

“안을 지켜!! 손상되면 안 된다!”

그리고 플랜 B. 거대한 트레일러 위로 무거워 보이는 장비들이 실리고 있었다.

정확한 정체까지는 모르겠지만, 저것들이 그냥 가면 안 좋다는 것 정도는 안다. 곁으로 내려서 힘을 사역했다. 빛이 지나가고 트레일러가 반으로 쪼개졌다.

“적이다!!”

“병력을 불러와라!!”

무장한 병력과 유르고의 힘을 두른 변이체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힘으로 나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전부 처리하고 장비를 완파했다. 그리고 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백두산 주변을 돌면서 시설을 꼼꼼하게 박살냈다. 아무리 돈과 인력이 많아도 이 정도로 처리해 두었다면 부활하기는 힘들 것이다.

“된 건가.”

하늘에 떠 연기가 피어오르는 백두산을 바라봤다.

벨과의 만남에서 조금 기묘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기본 목적은 달성했다. 남은 건 핵무기를 비롯한 북의 도발 현황을 정리하는 것. 그거야 지도자를 직접 잡아다가 적당히 다루면 그만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

“차남혁.”

그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작금의 상황에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지는 않을 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걸린다. 다른 수가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북의 수뇌부와 있어서 지금 보이지 않는 걸까?

우웅—!

그리고 때마침 위성 전화에 신호가 왔다.

식별 번호는 국내. 고무식에게 전해 두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큰일 났다. 심장이 탈취 당했다.”

“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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