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31화 (231/240)

부딪치고 밀려나고. 터지고 갈라지고. 엉키고 흩어지고.

빛과 어둠이 섞여 한 줄기 바람에 나뉘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태고의 정령과 쿤은 어느 쪽이 우세하다 말 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관문은 통째로 무너지고 일대 지역은 가루가 되었다.

기세가 오른 병사들도, 이단에 타락한 괴물들도 다가오지 못했다. 공간을 좀먹고 시간마저 뜯어 버리는 격렬한 싸움이었다.

“후우……후우……”

거칠어진 호흡.

눈가로 땀방울이 맺혀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지독한 싸움을 해 본 적이 있던가. 가진바 능력을 모두 토해내도 상대는 그것 이상으로 받아쳐 오고 있다. 아도란의 보조가 없었다면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쿤이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금이 간 넝쿨로 몸을 감은 태고의 정령이 기괴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밤하늘에 뜬 별빛과도 같고, 심해에서 빛내는 물고기의 눈빛과도 같다. 심유하지만, 그 안에는 비틀어진 고통이 있다. 형태조차 없는 눈동자 속에서 그것을 느끼는 것이 우습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 힘을 거스르지 마라.

귓가에 스며오는 목소리.

쿤이 고개를 들었다. 장내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아도란도, 마라와 싸우고 있는 뮬라도 아니다. 그렇다고 기회를 살피는 태고의 정령도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저며 오는 목소리. 이건 신의 음성이었다.

— 파괴를 재생으로 맞서나, 그것 역시 네 일부. 받아 들여라. 그리고 균형을 찾아라.

조금 더 길게.

숨을 멈추고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파괴와 재생. 그리고 균형. 눈앞에 둔 태고의 정령을 보며 이를 곱씹었다. 과연 무슨 말일까. 상대가 가진 파괴적인 능력을 재생의 힘으로만 맞서지 말라는 것? 자신이 쓰던 힘이 재생의 것이었나?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취리릭—!

생각으로 잠시 긴장이 늦춰지는 순간 검은 칼날이 솟구쳤다.

아도란이 마법을 구동했다. 돌이 올라와 칼날을 아래에서 후려쳤다. 궤적이 바뀌고, 쿤이 허리를 숙였다. 귓불이 찢어지면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칼날로 바닥을 찍은 태고의 정령이 질주했다.

섬뜩한 기운이 몸을 때렸다. 염동력으로 바닥을 치며 몸을 거꾸로 뺀 뒤 의식의 검으로 전면을 후려쳤다. 불꽃이 튀고 충격에 몸이 밀려났다.

‘이걸 받아들이라고? 어떻게?’

좌우로 연격. 번걸아 휘두르는 검세에 검은 칼날이 충돌했다.

어깨가 빠질 거 같다. 불꽃을 불러와 아래에서 위로 후려치고, 망령제어로 바닥을 들어 그 위로 덮어 버렸다. 아도란이 때 맞춰서 얼음 기둥 하나를 통째로 그 위로 떨어뜨렸다.

카가각—!

단번에 갈라지는 어둠. 그리고 토사.

자잘한 수법으로는 의미가 없었다. 태고의 정령은 검은 칼날을 비틀어 꼰 뒤 몸을 뒤로 숙였다. 마치 튀어나갈 것처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신이 헛된 말을 할 이유는 없다.

그것도 태고의 정령처럼 막강한 적을 앞에 두고. 반드시 무언가 있다. 맹목적인 믿음 같지만, 지금껏 그의 말을 듣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은 반드시 길을 나타내 줄 거라 생각했다.

타앙—!

굉음과 함께 태고의 정령이 튀어나왔다.

아쿤에 의식을 흘려 넣으며 정면에서 맞섰다. 벼락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충격타가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땅이 갈려져서는 하늘 위로 솟구쳤다. 모래 바람이 불고 잔해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크윽!”

힘에서 밀린다.

눈과 귀에서 핏물이 터졌다. 머리에서 윙 소리가 들리고, 전신이 부서질 것처럼 삐거덕 거렸다. 맞닿은 검은 칼날이 조금씩 의식의 검을 침식해 들어오고, 죽음의 공포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πτερυγίου!!!”

아도란이 황급히 마법을 구동해 도움을 줬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도란이 만든 바람 칼날은 가까이 오기도 전에 검은 칼날에 잘려나갔다. 흩어지는 바람 속으로 아도란의 당황스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아아아아……

태고의 정령. 깊은 지저의 목소리 같은 것이 귓가에 울렸다.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의 울음 같기도 하고,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탄식 같기도 하다. 태고의 정령. 그런 존재가 가진 탐욕은 무엇일까? 힘? 권력? 파괴?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그만큼 유르고와 엮인 이 파괴적인 힘을 이해하기 어렵다.

파삭—!

그 순간, 팔에 차고 있던 아랑겔이 부서졌다.

상태창이 사라진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이다. 허공으로 묘한 기운이 맴돌았다. 부서진 무구의 자아. 마치 무덤가를 떠도는 영혼처럼 그 위를 한참이나 맴돌다 사라져 갔다.

“……색.”

강렬한 염원이 색으로 눈에 들어왔다.

히어로 메이커 모드를 사용 할 때 보던 색이다. 힘이 나타나는 색. 세상에 그려진 존재의 흔적. 태고의 정령과 맞선 손에 힘을 주며 감각을 펼쳤다. 다른 건 필요 없다. 오로지 이 색을 보기 위해서만 감각을 사용했다.

‘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유르고의 색은 검정. 세상의 색들이 뒤엉켜 달라붙으면 완성되는 그런 색이다. 주변의 것들을 집어 삼키고 종국에는 자신으로 물들여 버리는. 그것은 다른 것을 두지 않는 파괴. 절대적인 힘과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쿤이 생각했다. 검은 색과 맞붙어 힘을 겨룬다면 과연 자신은 무슨 색일까.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순백의 것? 맞다. 어느 정도는. 몸에서 솟구쳐 의식의 검과 부합하며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은 흰색이 맞다.

하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르고, 부수고, 상대를 읽어 넘어뜨리는 힘들. 그건 유르고와 마찬가지로 검은 색을 띄고 있었다. 파괴의 힘. 유르고의 것과 정확하게 같은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껏 다른 색들을 그렇게 보면서도 자신의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아니, 무의식적으로 거부를 한 건가. 유르고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의 말이 이해가 된다.

파괴를 재생으로 맞서나, 그 역시 자신의 일부. 이 또한 받아들이며 균형을 찾아야 한다. 신은 본디 저울을 들고 선 존재. 파괴와 재생의 균형을 맞추며 그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다.

키이잉……!

맞닿은 유르고의 힘이 손끝을 타고 넘어왔다.

태고의 정령이 당황한 모습으로 이를 끌어 당겼다. 하지만 이미 탄력을 받은 힘은 멈추지 않았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쿤의 힘과 엉켜서 그 위로 색을 덧칠했다. 검게. 조금 더 검게.

‘와라……!’

다른 한 손으로는 신성한 재생의 힘을 끌어 들였다.

쿤. 그리고 서준경을 믿는 자들의 힘. 제단을 통해 모인 신성력. 믿음은 힘이 되고 그 힘은 주인의 부름에 공간을 격하여 달려왔다. 마치 유성우가 내려오듯. 세상에 퍼뜨려 둔 힘들이 손을 통해 몰려왔다.

파괴와 재생이 쿤의 몸 안에서 균형을 맞춰갔다.

저울 위에 올려 둔 추와 같이. 흔들리는 균형 속에서 중심을 잡으며 두 개의 힘을 조율했다. 파괴와 재생은 마치 꼬리를 문 뱀과 같다. 파괴 없는 재생은 없고, 재생 없는 파괴는 의미가 없다.

“이것이……”

색이 변해갔다.

검은 색도 흰 색도 아닌.

본래 가지고 있어야 할, 회색 빛.

“진정한 신의 힘.”

#

신과의 첫 만남부터 알고 있었다.

상징이 저울이고 균형을 나타내는 존재임을. 그리하여 신을 설명 할 때면 균형의 신이라 말을 했었다. 헌데, 그 사도라는 자신은 지금까지 어둠과 맞서는 빛의 전사처럼 스스로를 여기고 있었다.

“어리석었군.”

어둠을 밀어내고 빛을 불러오는 존재가 아니다.

빛과 어둠의 균형을 맞춰주는 존재. 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방향을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키……아아아!”

“물러나라.”

쿤이 손을 휘둘렀다.

회색 물결이 태고의 정령을 휘감아 뒤로 밀어냈다. 검은 칼날이 번개처럼 솟구쳐 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회색 물결이 쿤의 몸 주변을 돌면서 이를 하나하나 걷어냈기 때문이다.

쿤이 그대로 걸어 태고의 정령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마를 손으로 잡았다. 격렬한 반응이 있었다. 수많은 칼날이 솟구쳐서 몸을 난자하려고 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쿤이 부드럽게 다독이며 이를 전부 걷어냈다.

“……아.”

검은 기운. 유르고의 힘이 태고의 정령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내 단단한 돌과 같이 변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형태가 고정되지 않아 계속 물결처럼 흔들렸다.

“그렇군. 그리자는 신의 힘으로 만든 껍질이었어.”

출렁이는 형태 위로 힘을 부여하자 조금씩 표면이 경화되었다. 그리자. 그것은 외계의 신비한 물질도 아니고, 고대의 돌조각도 아니었다. 유르고의 힘을 막기 위해 신이 경계를 만들어 둔 일종의 껍질. 얼마 지나지 않아 출렁이던 유르고는 본래의 조각으로 돌아갔다.

“하아……하아……! 너, 너는 누구야?”

“이제 더 이상 걱정 할 필요는 없다.”

헐떡이는 태고의 정령을 다독였다.

두려움도 이해한다. 자신을 전부 집어삼킴 유르고와, 그것을 떼어낸 존재. 둘 모두 두렵기는 마찬가지 일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공왕을 치료 할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상극의 힘으로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균형을 맞춰 유르고의 힘만을 떼어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싸움을 멈추고 마라가 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네가 원하는 데로, 유르고를 제어한 것이다.”

“저, 정말인가? 유르고를 제어 할 수 있다고? 그럼 그가 온 차원의 정보도 얻을 수 있나?”

“무엇을 원하는 거지?”

“새로운 지식! 우리에게 없는 진리!”

“우습군.”

쿤이 한 걸음을 걸어, 마라의 앞에 내려섰다.

마치 공간을 접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더 없이 벌어졌다.

“가장 기본적인 진리조차 알지 못한 채, 차원 너머의 것을 탐한다고?”

“나는 이 세계의 모든 진리를 깨우쳤다! 이제 남은 건 세상 너머의 것이야!”

“등 아래가 가장 어둡다고 하지. 너는 너를 보는 아버지의 마음조차 알지 못하고 있어. 그런 주제에 진리를 논하다니. 어리석음이 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 것이냐.”

“개소리!! 아버지는 나를 질투할 뿐이야! 내가 더 높은 진리를 추구할까봐서!”

“정말인가? 그렇다면 직접 봐라.”

망령제어. 아마 그보다 높은 수준의 경지.

뭐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이름은 붙이기 어렵다. 그냥 의식을 다루는 힘이라 하는 것이 편하겠다. 뮬라의 의식을 잡아 마라에게 연결했다.

생각. 감정. 기억.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전달되었다.

한 점의 거짓도 없이. 뮬라가 생각하는 마라. 기억하는 마라. 모든 것이 낱낱이 전달되었다.

마라가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이럴 리 없어……내가 이리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막고자 했다. 네 운명이 거칠게 흐는 것은 내 잘못도 있으니, 떠나면 나아질까 하고. 하지만 그건 오히려 잘못 된 선택이었던 것 같구나. 곁에서 너를 도왔어야 하는데.”

“나, 나는……대체 지금까지 뭘 한 거지?”

마라가 눈물을 왈칵 쏟으며 뮬라에게 안겼다.

“결말은 행복한 것이 좋겠지.”

쿤이 손끝을 튕겨 마라의 머리에서 검은 기운을 뽑아냈다.

그녀 자신은 완벽하게 유르고의 힘을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겠지만 그건 잘못 됐다. 마치 종이에 물감이 스며들듯, 오랜 기간 동안 마주한 유르고의 힘은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남은 걸 모두 뽑아냈으니, 뮬라가 곁에 있으면 그녀는 문제가 없겠군.’

상황은 정리되었다.

쿤이 주변을 가볍게 둘러 본 뒤 허공을 밟으며 위로 올라갔다.

저 멀리, 황제가 군을 몰고 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싸움은 그만 하도록 하자.”

회색으로 물든 힘을 천천히 뽑아내기 시작했다.

안개와 같이. 물결과 같이. 힘이 몸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유르고에 타락한 괴물이 이 힘에 닿자 그대로 고꾸라졌다.

힘은 금세 세를 넓혔다.

관문을 뒤덮고 그 너머까지 영역을 늘려갔다. 기습을 감행한 유르고의 종자들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유르고의 힘이 안개에 먹히고 광분하던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은 수도를 전부 뒤덮었다.

이것이 한계. 유르고의 힘에 비해서 아직 신성력이 부족했다.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조금 더 종교의 전파가 필요 할 거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균형을 맞췄을 때, 그제야 필요한 힘을 필요한 곳에 사용 할 수 있을 것이다.

재생과 파괴. 그 순환의 고리 속에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