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이혼과 라라, 루루. 아도란까지 상황실로 불려왔다.
곧이어 전황이 속속들이 전해졌다. 각 문이 돌파당하고 이단에 타락한 괴물들이 병사들과 대치하는 중. 숫자는 수도 방위군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개개인의 능력이 강했다.
“이 가운데에서 마라가 발견되었다는 건가?”
“그렇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녀는 뮬라가 책임지고 가지 않았나? 어째서 적들 사이에?”
“나도 모르겠어. 마라가 깨어나 뮬라를 따돌렸거나, 아니면 군세에 포위되어 탈취 당했을 수도 있지.”
어느 쪽이든 좋은 결과는 아니다.
뮬라가 저쪽에 포로처럼 남아있다는 건 자신의 신분을 아직 이용하겠다는 의지. 혹은 이단의 종자들이 그녀를 인질로 무언가를 획책한다는 뜻이 된다. 둘 다 환영하는 일은 아니다. 황제가 아직 마라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억지로 밀어붙였다가는 무슨 결과가 나올 지 가늠하기 어렵다.
“라라, 루루. 너희 둘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잡병은 의미 없어. 일단은 마라를 확보하고 유르고의 조각을 가지고 튄 괴물을 찾아야지. 머리를 베어내면 나머지는 충분히 처리 할 수 있을 거야.”
“저렇게 많은 무리 속에서요?”
“걱정 할 거 없어.”
쿤이 조용히 눈을 감고 힘을 사역했다.
미궁 속에서 모든 감각이 닫힌 채 싸움을 한 탓일까. 전보다 기운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힘조차.
주머니를 열고, 일찍이 준비해 두었던 백기사들을 꺼내 들었다.
수십 구의 백기사들이 쿤의 뒤로 도열했다.
“다녀오세요. 저희는 이쪽에서 대처할게요.”
“부탁하마. 그리고 황제를 잘 살펴 줘. 그의 상태가 이상하면 맞는 대처를 해야 하니까.”
“알겠어요. 아도란. 아도란은 어떻게 할 거죠?”
“쿤. 쿤. 저기. 위험함. 냄새.”
“돕겠다는 의미겠지?”
“응. 쿤. 내가 지킴.”
“든든하군.”
빙글빙글 도는 아도란의 등을 툭 쳐주고는 쿤이 몸을 돌렸다.
이건 승전보를 위한 움직임. 애달픈 작별은 필요 없었다.
그대로 전장을 향해 뛰어들었다.
#
비명과 울음소리로 가득 찬 시가지를 관통해, 관문으로 통하는 대로로 들어섰다.
건물이 무너져 있고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아직 대피하지 못한 이들이 병사들의 등 뒤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굴렀다.
“후우……”
호흡을 통해서 신성한 힘이 빨려 들어왔다.
쿤이 아쿤을 뽑아 들며 신성력을 주변으로 방출했다. 흰 빛과 강렬한 파동이 순식간에 전장을 잠식했다. 치열한 싸움이 잠시 멎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서 준경 신을 대변하여, 타락한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내가 왔다!”
하얀 날개가 등 뒤로 치솟았다.
동시에 장내에 있던 아군들의 기세가 한 번에 솟구쳤다. 축복이다. 그것도 매우 강력한. 피를 흘리며 밀려나던 병사가 눈에 불을 키며 타락한 자를 방패로 후려쳤다. 겁을 먹고 바지에 오줌을 지리던 아낙이 돌을 집어서 던졌다.
“서 준경 신의 가호가 이곳에 있다! 두려워 할 건 아무것도 없다!”
아도란이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만들어서 적진으로 던졌다.
세이혼이 의식의 검을 뽑아 적을 베어냈다. 찬란하게 빛나는 백기사들이 병사들 옆으로 뛰어 들어 적들을 밀어냈다.
순식간에 전황이 일변했다.
“우오오오오!!! 신의 전사가 우리 편에 있다!!”
“지지 않는다! 저 괴물들을 몰아내자!!”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승기는 하늘을 뚫어버릴 듯 치솟았다.
쿤이 그대로 적진을 관통하기 시작했다. 그의 검은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과 같고, 물 위에 뜬 달빛 과 같았다. 무엇도 그를 잡아서거나, 걸음을 세우지도 못했다. 가을 낙엽이 떨어지듯 괴물들의 사지가 분해되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거치적거린다!”
흰 손이 허공으로 튀어 올라 적을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우레치는 소리와 함께 수백의 괴물들이 납작하게 터졌다. 견디거나 피하는 적은 없었다. 강대한 힘은 상반된 기운의 적을 그대로 압박했다. 괴성으로 병사들을 압박하던 괴물들도 쿤의 등장 앞에서는 꼬리를 말고 덜덜 떨었다.
“길을 열어라!!”
아쿤에서 뻗어나간 섬광이 거대한 기둥이 되어 적을 분쇄했다.
적들이 순식간에 갈리고, 대로가 뚫렸다. 피와 육편으로 점철 된 길. 하지만 그것에 망설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쿤이 손을 들고 달리자, 그 뒤를 기세를 돋우며 쫓았다. 무리는 삽시간에 불어나고 관문을 통과했던 적들을 쓸어갔다.
“이 방향이다!”
“확실한 건가?”
“냄새가 나. 유달리 내 코를 자극하는 썩은 냄새.”
광풍과 같은 기세로 적을 돌파한 쿤은 그대로 관문이 눈에 들어오는 위치까지 도달 할 수 있었다. 대로 주변, 집들 사이사이에서 비집고 나온 괴물들은 무리의 손에 알아서 처리가 되었다. 축복을 받고 기세가 오른 무리는 이제 괴물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끈질기군!”
“그만 두어라!!!”
그때, 쿤의 예민한 청력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마라. 그리고 남은 하나는 뮬라였다.
“찾았다. 세이혼, 이곳을 부탁한다. 아도란, 정신 바짝 챙기고 세이혼을 도와.”
“쿤. 쿤. 위험. 나도 간다.”
“이곳에 더 필요해.”
“아니, 아니. 쿤. 위험. 나도 감.”
고집을 꺾을 시간은 없다.
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허공으로 몸을 튕겼다. 의식의 검을 발판 삼아 관문 위로 올라섰다. 반쯤 무너진 관문 내벽 안으로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마라!”
산발을 한 채 피눈물을 흘리며 뮬라와 싸우고 있었다.
역시 탈출했던 모양이다. 쿤이 곧바로 검을 고쳐 쥐고는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일대 일 싸움을 양해 할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쿤!!”
오싹한 느낌.
옆구리 쪽이 갑자기 시큰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도란의 손끝이 빛나고 녹색 장판이 옆으로 튀어 올라 검은 빛 무리를 갈라냈다. 둔탁한 충격이 몸을 흔들었지만 참을 수 있는 수준. 쿤이 재빠르게 땅을 짚고는 몸을 돌려세웠다.
“누구냐!?”
외침과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넝쿨을 마구 엮어 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역한 이단의 기운. 쿤이 미간을 찡그리며 검을 그 위로 그었다. 흰 궤적과 검은 괴인이 충돌했다.
콰콰쾅—!!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쿤이 뒤로 밀려났다.
의식의 검이 상대를 베어내지 못했다. 같은 의식의 검도 아니거늘, 완벽하게 방어가 되고 말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옆으로 뱉어내고는 상대를 다시 살폈다.
‘……대체 저건 뭐야?’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전체적인 모양은 인간의 것과 닮아 있었지만 피부나 이목구비 등이 없었다. 넝쿨을 꼬아 인간을 형상화 했다면 이렇게 될까. 징그럽고 괴이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쿤, 조심해라. 그건 타락한 정령이니까.”
“타락한 정령?”
설명은 뮬라의 입에서 나왔다.
“유르고의 심장을 봉인하고 있던 태고의 정령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없어지고 정령이 유르고의 조각을 삼켰다. 그 결과는 바로 저렇지. 알다시피, 작은 파편도 아니고 세 갈래의 조각 중 하나를 통째로 먹었다는 건……”
“무지막지하게 강하다는 의미겠지.”
누차 이단과 싸우며 그 수준은 능히 짐작 가능하다.
하카림의 경우도 타락한 일부와 싸우다 죽을 뻔 하지 않았는가. 상대가 태고의 정령이라면 매우 강할 터. 그런 존재가 유르고의 조각을 통째로 먹었다면 그 능력은 가늠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어째서 태고의 정령이 유르고의 조각을 집어 삼킨 거지?’
조각은 마라가 유르고의 제어를 위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카넬은 이단의 종자. 즉, 한 쪽은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다른 한 쪽은 제어를 하기 위해서 힘을 합쳤던 것. 그 상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태고의 정령은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다.
“크륵……크륵.”
하지만 지금 그것을 따져 물을 수 있는 시간은 없다.
태고의 정령이 비틀린 숨을 토하며 조금씩 다가왔다. 앞서 쿤을 보며 도망갔던 모습은 더 이상 없다. 힘을 온전하게 흡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쿤의 목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검은 칼날이 볼을 스쳐갔다.
쿤이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이건 초감각으로 알고 피한 게 아니다. 인지와 동작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에도 상처를 입은 것. 지금껏 상대했던 적들 중 속도로 치자면 단연 발굴이었다.
“Προστατευτικά φράγματα!”
아도란이 마법을 발현했다.
반투명한 기운이 몸 주변을 휘감았다. 상처가 아물고 시야가 조금 더 뚜렷해졌다. 축복과 상관없는 종류의 보조 마법인 거 같았다.
팅. 작은 소리.
쿤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옆구리로 검은 칼날이 스쳐가고 옷이 찢어졌다. 이번에도 완벽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발로 부서진 돌을 차, 태고의 정령에게 날리고 아쿤을 강하게 쥐며 의식의 검을 사용했다.
흰 빛과 검은 물결.
충돌의 결과로 강한 파동이 퍼져 나왔다. 흙먼지가 날리고 돌들이 튀어 머리를 때렸다. 하지만 피할 건 아니다. 그대로 전진하며 의식의 검을 채찍처럼 뻗어 휘둘렀다. 반원의 형태로 흰 빛이 궤적을 그렸다.
‘잘린다!’
예감. 그리고 현실.
즉시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굴렀다. 의식을 검을 뚫고 나온 검은 칼날이 들 뒤로 스쳐갔다. 관문 상층부를 지탱하던 기둥이 무너지고 그대로 벽이 주저앉았다. 흙먼지가 다시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καταιγίδα!”
아도란의 마법이 돌풍을 불러왔다.
바람이 먼지를 휘감고, 검은 칼날의 궤적을 조금 틀어 주었다. 춤추듯 그 사이로 뛰어 들어간 쿤이 접근하여 태고의 정령을 후려쳤다.
‘밀린다.’
바다에 잉크 한 점 떨어뜨린 격이다.
총량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즉시 손을 때고 옆으로 몸을 굴렀다. 칼날이 그 위로 떨어져 바닥을 으깨 좋았다. 파편이 마구 튀어 얼굴을 두드렸다.
손으로 지면을 짚어 몸을 뒤 짚으며 무한의 주머니를 열어 물약을 던졌다.
쩌저적—!
순간적인 냉각.
그리고 폭발. 검은 칼날이 그대로 얼음을 부수며 움직였다. 하지만 그 작은 틈이 본래 노린 수. 의식의 검을 뭉쳐서 방패처럼 한 뒤 칼날을 옆으로 흘렸다. 기괴한 소리와 막대한 압력이 쿤을 찍어 눌렀다.
“Υπερδύναμη!”
아도란이 즉시 마법으로 보조했다.
힘이 돌아오고 검은 칼날을 튕겨 낼 수 있었다. 만들어 두었던 방패를 해체하며, 흐트러지는 의식의 검을 잡아끌어, 그대로 검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큰. 대검의 형태가 머리 위로 솟구쳤다.
으적—!!
대검과 검은 넝쿨의 충돌.
힘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남은 충격이 넝쿨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우 단단한 성질에, 충격을 흡수하는 특성까지 있다. 게다가 의식의 검이 가지는 완벽에 가까운 절삭성까지 반대 속성으로 방어하는 상황.
“후우……”
지금껏 싸웠던 적들 중 가장 까다롭다.
쿤이 길게 호흡을 내쉬었다.
#
태고의 정령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심장이 있어야 할 과거가 심장이 없는 미래와 교차하기 때문일까? 그 때문에 태고의 정령이 심장을 봉인하지 않고, 대신 유르고의 조각을 삼켰다는 건가?
쿤의 타락은 막았지만 다른 것이 나타나고 있어.
시간의 흐름은 연속적이야. 과거의 것이 미래를 바꾸기도 하지만, 고정된 미래가 과거를 뒤틀기도 해.
타락해 버린 태고의 정령.
만약 쿤이 그를 이기지 못하면 현재는 어떻게 될까? 마치 영화처럼 고정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파멸의 전주곡이 되는 걸까? 쿤 대신 태고의 정령이 아노스를 쓸어버리는?
안 돼. 그렇게 된다면 결국 결과는 같아.
파멸된 세계의 신은 또 다시 우리에게 손을 내밀 태고, 열린 문은 닫히지 않아. 혼돈은 퍼져가는 잉크와 같지. 뚜껑을 닫고 잉크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바꾸지 않으면 그 색을 돌리는 건 어려워.
이곳에서 흐름의 싹을 자른다.
그것의 대가가 우리의 목숨이 된다 하더라도.
조금만 더 버티자고, 친구.
※작가의 말
들고 튄 적은 태고의 정령이었습니다.
현실과 아노스의 시간은 본디 유기적인 형태로 흐르지만, 기본적으로 현실은 신의 힘에 의해서 고정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심장이 있고, 현실에도 심장이 있어야 하겠지만 심장을 고정된 현실로 끌어왔기 때문에 과거가 뒤틀린 겁니다. 그탓에 애꿎은 태고의 정령만 타락;;
고렇게 된 겁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