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29화 (229/240)

“……쿤! 정신 차리게!!”

먹먹하게 밀려오는 소리.

쿤은 누군가 자신을 흔들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단단하게 굳은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내고 시야를 확보 할 수 있었다.

“세이혼?”

“그래, 정신이 드는가?”

“또 환각인가?”

“무슨 소린가. 자네를 쫓아 이곳에 와 보니 쓰러져 있던 걸 발견했는데.”

쿤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굴. 하지만 모습은 꽤 달라져 있었다.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웠던 동굴의 내부가 희미한 빛으로 물들어 시야를 확보하게 해 주었다. 특유의 묘한 분위기도 사라지고 평범한 동굴로 돌아가 있었다.

‘미궁의 환각은 모두 풀린 건가?’

찾아온 건 세이혼만이 아니었다.

뒤쪽으로 루루와 뮬라. 그리고 밧줄에 묶인 마라의 모습도 보였다. 거칠게 싸움을 한 건지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건가? 그 괴물은? 잡았나?”

“음……모르겠어. 이 동굴의 환각과 한참을 싸우고 났더니 이 모양이군. 나보다 먼저 갔던 괴물은 영향을 안 받은 걸까?”

“환각?”

“고대의 미궁이군.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아주 오래전 악마와의 싸움이 있었을 때, 악마를 가두기 위해서 고안한 곳이라 알려져 있다. 정신체인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기억을 헤집어 정신 공격을 가하게끔 설계가 되어 있다지.”

“확실히.”

일단 이들은 환각이 아닌 거 같다.

쿤이 멍멍한 머리를 툭툭 쳐 정신을 차리고는 마라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용케 잡았군.”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가겠네. 이토록 집착이 심한 성격으로 자라게 된 건 내 탓이 크니까. 아니, 탑이 가진 폐쇄성이 원인인지도 모르겠지. 얼마 남지 않은 식구들을 챙겨서 다시 재건을 해 봐야겠네.”

“황제가 가만히 있을 거 같은가?”

“어차피 우리는 권력과 인연이 없어. 깊은 곳에 숨어서 제국의 눈을 피해봐야지.”

어차피 마라는 처리하기 곤란한 대상이었다.

목을 따기에는 황제가 걸리고, 그냥 두기에는 그 집착이 걸린다. 뮬라가 대신 처리를 해 준다고 하니 차라리 그편이 낫다.

쿤이 상황을 정리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힘이 사라진 미궁은 평범한 동굴에 불과했다.

복잡한 미로도, 특별한 함정도 없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서 움직이니, 얼마 안 가 밀실에 들어 설 수 있었다.

“멈춰라! 황실 반역죄로 네놈들을 체포하겠다!”

그곳에서 일행을 반긴 것은 중무장한 병력들.

앞선 에서는 화려한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이 칼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가슴 팍에 달린 문장을 쿤이 알아봤다.

‘공작가 중 하나로군.’

역시 황제에 반하는 공작가 중 하나도 연루되어 있던 것이다.

이런 밀실에,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는 없다. 쿤이 슬쩍 들어온 병력의 숫자를 셈 한 뒤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모종의 음모를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반역이라니. 말 도 안 되는 일입니다.”

“시끄럽다. 네놈들이 이런 곳에서 작당을 하고 있음을……음? 네놈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나온 것이냐!?”

“설명하자면 조금 길군요. 그보다 반역이라니. 대체 무엇을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알 필요 없다! 당장 저놈들을 잡아 들여라!”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가진 게 없군?”

“……!”

“일단 잡고 나서 증거든 뭐든 때려 박고자 하는 모양이네. 아마 이곳을 알게 된 건 흰 눈의 남자가 알려줘서겠지. 일종의 안전장치라 이건가.”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그렇다면 그쪽은 우리 말이 되어 줘야겠어.”

쿤이 호흡을 정리하며 한 번에 의식의 검을 펼쳤다.

섬광이 공간을 잠식하고, 순식간에 병력을 쓸어갔다. 달려들던 중무장 기사들은 쿤의 공격을 받아 넘기지 못했다.

절그럭 소리와 함께 남은 건 쿤을 다그치던 콧수염 남자. 하나뿐이었다.

“뭐, 뭐야 이건……”

“세이혼. 흔적을 좀 조작해 줘. 우리가 주장하는 이야기는 지금과 같아. 내게 마라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너는 만약을 대비해서 주변을 탐문하고 있었어. 그러다 무언가 불손한 움직임을 감지한 거지. 하지만 나는 재판 중. 독단으로 뒤를 쫓아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어.”

“무슨 소리를……”

“그리고 이 밀실로 들어가는 마라와 뒤따라 진입하는 공작가의 병력을 발견한 거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너는 즉시 밀실에 잠입. 공작가가 마라를 납치하려는 걸 보게 됐어. 공작가는 본래 황제를 견제하고 싶어 했던 바. 연인 관계에 놓인 그녀를 납치해서 이득을 취하려 한 거지.”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뒤집어 써 줄 말이 필요하다.

마침 공작가가 움직여 줬으니, 그 역할을 맡겨주면 된다.

“네가 분투를 하여 병력을 처리했으나, 마라가 납치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 그녀는 종적이 묘연. 흔적은 뭐……대충 북으로 가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해 두지. 뮬라,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통과 할 때 관문 경비의 눈을 속여 줄 수 있나?”

“인식을 흐트러뜨리는 것 정도면 충분히.”

“그 정도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면 되니까.”

후두둑.

쓰러졌던 공작가의 병력들이 한꺼번에 몸을 일으켰다.

콧수염의 남자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쿤만 바라봤다.

“죽기 싫다면 네가 해 줘야 하는 일이 있다.”

노예 계약이라고 들어 봤는가?

쿤이 사악하게 웃었다.

#

장내를 정리하고, 뮬라가 마라를 데리고 사라졌다.

쿤은 공작가의 병력들을 모두 망령제어로 움직였다. 거대한 마차와 화려한 말들을 끌고 온 터라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공자가 문양을 보고 문이 벌컥벌컥 열리니, 무리는 얼마 안지나 북문을 통과하여 황도 너머로 사라질 수 있었다.

그 사이 쿤은 세이혼과 루루를 데리고 밀실을 벗어났다.

둘은 숙소로, 쿤은 아도란과 교체 할 필요가 있었다.

삼업한 경비와 단단한 철문이 있지만, 쿤에게 그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수고했다.”

“쿤. 쿤. 쿤. 쿤. 쿤.”

“으, 응?”

“답답했다.”

아도란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렇게 하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을까 싶다. 쿤이 잘 했다는 의미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흔들흔들 몇 번을 더 흔들고 나서야 아도란이 진정했다.

“그럼 숙소로 돌아가 있어.”

“쿤. 미궁. 미궁 가.”

“괜찮아. 그쪽은 다 정리가 돼서 빠져나오는 건 일도 아니야. 라라한테도 나는 괜찮다고 전해 주고. 아, 아니다. 내가 직접 하면 되는구나.”

경황이 없으니 머리가 막히나 보다.

아도란을 돌려보낸 뒤 쿤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뮬라의 요령으로 라라에게 연결을 했다.

— 오빠!! 무사했어요? 괜찮아요?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잖아요!

— 괜찮아. 다 끝나고 아도란과 교체를 했어. 이제 걱정 할 건 없다.

— 후아. 진짜죠? 난, 그 사람이 와서 자꾸 뭐라고 한 탓에 무슨 일이 난건지 알았죠.

— 그 사람?

— 흰 눈을 가진 남자요. 오빠한테 일이 났다고, 미궁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아닌 거 같으면서도 말에 힘이 있어서 그래야 하나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죠.

쿤이 깜짝 놀랐다.

라라가 미궁으로.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선택이 자칫 큰 낭패로 다가 올 수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된다.’라는 뮬라의 예언까지 들어맞게 되는 것.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 등골이 서늘해 마른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 근데 갑자기 방안이 환하게 빛나더니 그 남자의 모습이 밀리는 거 있죠. 미궁으로 가야 하는 생각도 쏙 사라지고.

— 흰 빛이? 신성력인가?

—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하여튼 그 덕분에 미궁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쏙 사라졌어요. 실수 한 건 아니죠?

— 아니야. 아주 잘했어. 미궁으로 왔다면 큰일 날 뻔 했지.

쿤이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흰 빛으로 남자를 쫓아냈다면 가능한 건 신밖에 없다. 출발 전 경고도 그렇고, 평소보다 강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자신을 돕고 있다. 그만큼 상황이 위험했다는 것.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 일단 위험한 건 다 넘어갔으니, 숙소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어. 미궁행이 진행되면 후딱 탈출하고 우리 일 보면 되니까.

— 알았어요. 오빠도 몸조심 하고요. 다치면 안 돼요.

뻔한 염려의 말이지만, 그것이 달콤하다.

쿤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연결을 끊었다. 방 안은 딱딱하고 눅눅하지만, 더 이상 불쾌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

—쾅!!!

단 꿈에 취해있던 쿤은 거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깜빡깜빡. 천장은 전날의 그것과 같았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 경비가 있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방의 문이 열리는 것이 먼저였다.

“쿤 님. 일어나셨습니까?”

“……누구?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급히 찾고 계십니다.”

‘마라의 일인가.’ 쿤이 속으로 생각했다.

죄가 확정된 인간을 급히 불러올 일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쿤이 경비의 뒤를 쫓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헌데, 방을 벗어나 황궁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본 광경은 그런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을 불러왔다. 황궁 아래쪽 수도의 일부가 불에 타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수도를 방어하는 각 방위의 문들이 파괴되고, 연기가 솟구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의 침공.

“파악 중에 있습니다. 새벽부터 갑자기 시작되어 급히 기사단을 출정시키는 중입니다.”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보고된 바로는 괴물……그 말 밖에는 없었습니다.”

괴물이라는 말에 전날 상대한 이단의 괴물이 떠올랐다.

단순히 경비용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를 수도 준비해 두었던 걸까? 하지만 마라가 잡히고 카넬이 죽은 뒤 과연 누가 있어서 그런 걸 지휘 할 수 있을까.

‘설마, 도망간 괴물이?’

밀실에서는 유르고의 조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도망친 괴물의 흔적 역시 발견하지 못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도망친 괴물이 준비 되어 있던 병력으로 수도를 공격했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의문은 남는다. 대체 무엇이 유르고의 조각을 통째로 삼키고도 너끈히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대상이 타락을 스스로 종용한다 해도 말이다.

“이곳입니다.”

황궁 알현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검과 방패가 새겨져 있는 것이 전쟁 시 지휘권을 발휘하기 위한 장소로 보였다. 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쪽으로 와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새벽. 유르고에 타락한 자들이 공격을 시도했다. 은밀하게 수도로 접근을 하여 요새를 동시에 함락했지. 방위군 병력으로 다급히 수복을 시도했지만, 수가 많고 전력이 부족하다. 당장 외곽지역의 기사단을 호출하기는 했으나 그 동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다네.”

촤악 펼쳐진 지도 위로 붉은 말들이 잔뜩 놓여 있다.

흰 말은 제국의 병력. 숫자로 보건데, 항시 대기 중인 숫자만 10만에 달한다. 다만, 그 숫자가 전부 수도에 있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 몇 구역으로 나뉘어 수도 외곽의 방위라인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라인이 붕괴되고 적이 안으로 침투한 것이다.

실제 전력이 밖으로 나가 있으니 이를 불러오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할 터. 그 사이 황궁이 함락되고 타락한 자들이 공격해 들어오면 사태가 복잡해진다.

“쿤 그대가 공화국에서 이들에 맞서서 싸웠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대에게 씌워져 있는 모든 죄를 사해 줄 테니, 우리를 도와 저들을 몰아내는데 힘을 보태 주게.”

“면책의 대가로 힘을 원하는군요.”

“그렇다. 정병과 기사는 충분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싸울 적절한 수단이 없다. 네 경험과 힘. 도움이 되어 주겠지. 그리고……”

황제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쿤이 바짝 다가갔다.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수준의 목소리. 절박함이 담긴 목소리로 황제가 속삭였다.

“마라를 구해주게.”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작가의 말

이제 이 파트도 곧 끝나겠군요.

마지막까지 페이스가 흐트러지지 않게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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